고구려 평양성 석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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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 평양성 석편은 고구려 평양성을 축조할 때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는 석각이다. 1829년 대홍수로 평양성 성벽이 무너졌을 때 발견되었으며,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총 7행 27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유년 5월 21일 이곳으로부터 아래쪽 동쪽을 향하여 12리 구간을 물성소형 배 ■백두(物省小兄 俳 ■百頭)가 구축한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 석편은 평원왕 31년(589년)에 축성되었음을 보여주며, 평양성의 위치를 비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또한 고구려의 서예 자료로서도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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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평양성 석편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문화재 정보 | |
이름 | 고구려 평양성 석편 |
로마자 표기 | Goguryeo Pyeongyangseong Seokpyeon |
국가 | 대한민국 |
유형 | 보물 |
지정 번호 | 642 |
지정일 | 1978년 12월 7일 |
해지 여부 | 해당 없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이화여대길 52,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대현동) |
시대 | 고구려 589년 |
소유자 |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
참고 사항 | 해당 없음 |
수량 | 일괄 |
문화재청 ID | 12,0642000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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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발견
고구려 평양성 석편은 고구려가 평양성을 쌓을 때 비교적 평평한 자연석 위에 글자를 새긴 것이다. 현재까지 글자가 새겨진 성석(城石) 4개가 발견되었는데,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성석편은 그 가운데 두 번째로 발견된 것이다. 성석에 새겨진 글자는 모두 7행 27자이다.
이 성석편은 현재 두 번째 행이 깨어져 나간 부분과 함께 전체 9조각으로 균열되어 석고로 고정되어 있다. '평양성벽석각(平壤城壁石刻)' 또는 '평양고성각자(平壤古城刻字)'라고도 불린다.
오늘날 평양시 일원에 남아있는 성벽은 고구려 시대의 도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곳이 장수왕 15년(427년)에 국내성에서 옮겨온 '평양(平壤)'인지, 아니면 양원왕 8년(552년)에 쌓아 평원왕 28년(586년)에 옮긴 '장안(長安)'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그러나 평양시 동북쪽의 대성산 기슭에 위치한 안학궁이 장수왕 때의 '평양'으로 밝혀짐에 따라, 지금의 평양성 자리는 양원왕∼평원왕 때의 '장안'으로 여겨진다.
성석편의 내용은 "기유년 5월 21일 여기로부터 아래로 동쪽을 향해 12리를 물구 소형과 배수 백두가 담당하였다"는 것이다. 명문 중의 간지인 기유(己酉)는 장수왕 57년(469년) 또는 평원왕 31년(589년)에 해당되며, 그 가운데 평원왕 31년이 유력하다.
명문은 소형이라는 하급 관원이 책임을 지고 축성했다는 사무 기록으로, 고구려 시대 도성 축조 사실을 명시해 주는 귀중한 석문이다. 소형은 고구려의 14관등 가운데 제11위에 해당한다. 청나라 학자 캉유웨이가 이 글씨의 서품을 높이 평가했듯이 꾸밈없는 자연스러운 필치가 돋보이는 서예 자료로도 주목된다.
2. 1. 최초 발견
순조 29년(1829년) 대홍수로 평양성 성벽이 무너졌을 때 외성 오탄 아래에서 나왔다고 전해진다. 철종 6년(1855년) 역관이자 서화 수집가, 금석학자였던 오경석이 소장하게 되었고, 이후 그의 아들 오세창이 보관하였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같은 박물관에는 두 번째 줄이 결실되기 이전의 옛 탁본도 소장되어 있다.2. 2. 소장 경위
조선 철종 6년(1855년) 역관이자 서화 수집가·금석학자였던 오경석이 입수하였고, 이후 그의 아들 오세창이 보관하였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석편의 두 번째 줄이 결실되기 이전의 옛 탁본도 함께 소장되어 있다.3. 내용 및 해독
모두 27자를 7줄에 걸쳐 새겼는데, 현재의 성석편은 두 번째 줄이 결실되고 전체가 여러 조각으로 쪼개져 있어 석고로 고착시켜 놓았다. 일명 '평양성벽석각(平壤城壁石刻)' 또는 '평양고성각자(平壤古城刻字)'라고도 부른다.
고구려시대 평양성 성벽에 글자를 새긴 성돌이 여럿 발견되었다. 이 성석편은 그 가운데 두 번째 발견된 것으로, 조선 순조 29년 기축년(1829년) 대홍수로 평양성 성벽이 무너졌을 때 외성 오탄 아래에서 나왔다고 전한다. 처음 발견된 이후 철종 6년(1855년) 역관이자 서화수집가, 금석학자였던 오경석의 손에 들어갔고, 이어 그의 아들 오세창이 보관했으며,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같은 박물관에는 두 번째 줄이 결실되기 이전의 옛 탁본도 소장되어 있다.
오늘날 평양시 일원에 남아있는 성벽은 고구려 시대의 도성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곳이 장수왕 15년(427년)에 국내성에서 옮겨온 '평양(平壤)'인지, 아니면 양원왕 8년(552)에 쌓아 평원왕 28년(586년)에 옮긴 '장안(長安)'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그러나 평양시 동북쪽 대성산 기슭에 위치한 안학궁이 장수왕 때의 '평양'으로 밝혀짐에 따라, 지금의 평양성 자리는 양원왕∼평원왕 때의 '장안'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3. 1. 새겨진 내용
"기유년(己酉年) 5월 21일 이곳으로부터 아래쪽 동쪽을 향하여 12리 구간을 물성소형(物省小兄) 배■백두(俳■百頭)가 구축한다"라고 풀이된다. 여기서 '물성소형'과 '배■백두'는 각각 고구려의 하급 관직인 '소형(小兄)'과 사람 이름으로 추정된다. 소형은 고구려 14관등 가운데 제11위에 해당한다. '기유(己酉)'는 장수왕 57년(469년) 또는 평원왕 31년(589년)에 해당되며, 그 가운데 평원왕 31년이 유력하다는 견해가 있다.이 명문은 단순한 사무 기록이지만, 고구려 시대 도성 축조 사실을 명확히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청나라 학자 캉유웨이(康有爲)가 자신의 저서 《광예주쌍집》(廣藝舟雙楫)에서 이 글씨의 서품(書品)을 고품(高品) 하(下)에 넣어 높이 평가했을 정도로, 꾸밈없고 자연스러운 필치가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는다.
3. 2. 해독 및 해석
성석편의 내용은 "기유년(己酉年) 5월 21일 이곳으로부터 아래로 동쪽을 향해 12리를 물성소형과 배■백두가 담당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유(己酉)는 《해동금석원》이나 《조선금석총람》에서 '기축(己丑)'으로 잘못 읽어 장수왕 37년(449년) 또는 평원왕 11년(569년)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원석이나 옛 탁본을 보면 '기유'가 분명하므로 장수왕 57년(469년) 또는 평원왕 31년(589년)에 해당되며, 그 가운데 평원왕 31년(589년)이 유력하다.명문에 나오는 소형은 고구려의 14관등 가운데 제11위에 해당하는 하급 관직으로, 이들은 축성 공사의 책임을 맡았다.
4. 역사적 의의
고구려 평양성 석편은 '평양성벽석각(平壤城壁石刻)' 또는 '평양고성각자(平壤古城刻字)'라고도 불린다. 순조 29년(1829년) 대홍수로 평양성 성벽이 무너졌을 때 외성 오탄 아래에서 발견되었으며, 오경석을 거쳐 오세창이 보관하다가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명문은 소형이라는 하급 관원이 책임을 지고 축성했다는 사무 기록으로, 고구려 시대 도성 축조 사실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청나라 학자 캉유웨이(康有爲)는 《광예주쌍집(廣藝舟雙楫)》에서 이 글씨를 고품(高品) 하(下)로 평가하며, 꾸밈없는 자연스러운 필치를 칭찬했다.
4. 1. 평양성 위치 비정
오늘날 평양시 일원에 남아있는 성벽은 고구려의 도성에서 시작되었는데, 이곳이 장수왕 15년(427년)에 국내성에서 옮겨온 '평양'인지, 아니면 양원왕 8년(552년)에 쌓아 평원왕 28년(586년)에 옮긴 '장안'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평양시 동북쪽의 대성산 기슭에 위치한 안학궁이 장수왕 때의 '평양'으로 밝혀짐에 따라, 지금의 평양성 자리는 양원왕~평원왕 때의 '장안'으로 여기게 되었다.성석편의 내용은 "기유년 5월 21일 여기로부터 아래로 동쪽을 향해 12리를 물구 소형과 배수 백두가 담당하였다"는 것이다. 명문 중의 간지인 기유(己酉)를 《해동금석원》이나 《조선금석총람》에서 '기축(己丑)'으로 잘못 판독하여, 첫 번째 발견되었던 기축년명성석과 함께 장수왕 37년(449년) 또는 평원왕 11년(569년)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원석이나 옛 탁본을 보면 '기유'가 분명하므로 장수왕 57년(469년) 또는 평원왕 31년(589년)에 해당되며, 그 가운데 평원왕 31년이 유력하다.
4. 2. 고구려 연구 자료
고구려 평양성 석편은 고구려 시대 도성 축조 사실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석편에 새겨진 글자를 통해 당시 축성 방식, 행정 제도, 관직 체계 등을 연구할 수 있다. 특히, 하급 관직인 '소형'이 축성 공사에 참여했다는 기록은 고구려의 지방 통치 및 인력 동원 방식을 짐작하게 한다. 소형은 고구려의 14관등 가운데 제11위에 해당한다.석편의 내용은 "기유년 5월 21일 여기로부터 아래로 동쪽을 향해 12리를 물구 소형과 배수 백두가 담당하였다"는 것으로, 고구려의 도성 축조 사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5. 서예적 가치
청나라 학자 캉유웨이(康有爲)는 자신의 저서 《광예주쌍집(廣藝舟雙楫)》에서 이 글씨의 서품(書品)을 고품(高品) 아래 등급으로 높이 평가했다. 꾸밈이 없는 자연스러운 필치가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는다. 소형(小兄)은 고구려의 14관등 가운데 제11위에 속하는데, 명문은 소형이란 하급 관원이 책임을 지고 축성했다는 사무 기록이지만, 고구려 시대 도성의 축조 사실을 명시해주는 귀중한 석문(石文)이다. 또한 고구려의 서예 자료로서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6. 보존 상태
현재 석편은 두 번째 행이 깨어져 나갔고, 전체 9조각으로 균열되어 석고로 고정된 상태이다.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은 석편의 원형 보존과 함께 추가적인 훼손을 막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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