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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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경석은 1831년 한성부에서 태어난 조선 후기의 역관이자 개화사상가이다. 그는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연마했으며, 청나라를 오가며 서양 문물을 접하고 개화 사상을 받아들였다. 1846년 역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선 후, 청나라 사행을 통해 서양의 발전된 문물을 접하고 조선의 개혁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는 유대치, 박규수 등과 교류하며 개화파 청년들을 양성하고, 개항론을 주장하며 흥선대원군과 대립하기도 했다. 오경석은 한국 최초의 개화사상가로 평가받으며, 그의 저서와 수집품은 개화기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879년 콜레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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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석학자 - 강위
강위는 조선 후기 문신이자 개화 사상가로, 실학에서 개화파로 사상적 전환을 보였으며, 쇄국 정책을 비판하고 개항론을 주장하며 근대적 개혁을 모색하다 1884년 사망했다. - 금석학자 - 김정희
김정희는 조선 후기의 문신, 서예가, 화가, 금석학자이며, 추사체를 완성하고 북학파의 영향을 받아 실사구시를 중시하며 금석학 연구와 서예, 문인화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 통상 개화론자 - 최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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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륙은 함경도 출신의 통역관으로, 고종의 신임을 얻었으나 권력 남용과 고종 독살 미수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처형되었다. - 조선의 역관 - 이응준 (조선)
이응준은 조선 후기의 역관으로, 1850년 역과에 급제하여 외교 문서를 처리하고 태극기를 제작했으며, 강화도 조약 및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에 참여했다.
오경석 | |
---|---|
기본 정보 | |
![]() | |
호 | 벽오(碧吾) |
본관 | 해주 오씨 |
출생 | 1831년 |
사망 | 1879년 |
직업 | 역관, 개화 사상가 |
생애 | |
주요 활동 | 청나라 문물 수용 개화 사상 전파 박규수, 유홍기, 김옥균 등에게 영향 |
저서 | |
주요 저서 | 역어고(譯語考) |
참고 자료 | |
관련 서적 | 김은신의 "이것이 한국 최초" |
2. 생애
오경석은 1831년 한성부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1846년 역과에 합격,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여러 차례 청나라를 방문하며 서구 열강에 의해 쇠퇴하는 청나라의 모습을 보고 조선의 개혁 필요성을 절감했다. 1860년에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의 베이징 점령을 목격하고 개항을 주장했다.
1866년 병인양요 직전에는 프랑스 함대의 조선 침략 정보를 입수, 청나라에서 대응 정보를 얻어왔고, 귀국 후 프랑스군의 약점을 파악하여 조선 정부에 보고했다.[1] 사역원 한학교수, 영건도감 별간역, 오위장,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며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1874년 흥선대원군 실각 후에도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개화의 시급함을 주장했고,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과정에 참여했다. 1877년에는 개항 논쟁에서 박규수, 유대치 등과 함께 개항론을 주장했다.
유대치, 박규수 등과 함께 개화파 청년 육성에 힘썼다. 김윤식, 유길준, 김홍집 등에게 개화 사상을 교육하고, 김옥균 등은 박규수의 집에서 북학파 학문과 해외 사정을 배우며 오경석과 교류했다.
1876년 과로로 쓰러진 후 중풍으로 고생하다 1879년 콜레라로 사망한 후처를 안장하고 돌아오던 길에 병이 악화되어 49세로 사망했다.[1]
2. 1. 생애 초반
오경석은 1831년 (순조 31년) 3월 5일 (음력 1월 21일) 한성부에서 한어 역관인 오응현(吳膺賢)과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오응현은 한어 역관으로 출사하여 관직이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할아버지 오계순(吳繼淳)과 증조부 오도원(吳道源)은 역관이었고, 고조할아버지 오필검(吳弼儉)은 혜민서 참봉이었다.그는 8대째 역관을 하던 집안 출신이었다. 오인유의 후손으로, 오인유는 고려 때 검교군기감을 역임하였으며, 이후 대대로 문과 합격자를 배출하였다. 이후 15대 오인량(吳仁亮)이 역과에 합격해서 역관이 되었고 사역원 판관을 역임했다. 오인량의 동생 오제량(吳悌亮)은 무과에 응시하여 훈련원 첨정을 지냈으나 그의 아들 오정화(吳鼎和)는 의과에 응시하여 의관으로 활인서 별제를 역임했다. 17대 오지항(吳志恒)은 역과에 응시하여 다시 역관이 되었다.
오경석은 박제가의 북학과 김정희의 금석학을 공부했으며, 16세에 역과에 합격했다.[1] 이상적에게서 학문, 한어(漢語, 중국어), 서화 등을 배웠다.
아버지 오응현은 이상적을 초빙하여 자제들에게 글을 가르쳤는데, 이상적은 김정희의 문인이자 박지원과 박제가의 학통을 계승한 인물이었다. 오응현은 박제가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여 그의 저술을 자손들에게 읽혔고, 오경석 또한 박제가를 존경하여 그의 글씨와 그림을 서재에 걸어두고 책을 읽었다. 이후 박제가와 연암 박지원의 학문을 사숙하였다. 1846년에 역과 식년시에 합격하였다.
2. 1. 1. 출생과 가계
吳慶錫|오경석중국어은 1831년 (순조 31년) 3월 5일(음력 1월 21일) 한성부에서 한어 역관인 오응현(吳膺賢)과 지중추부사 이의무(李義懋)의 딸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오응현은 한어 역관으로 출사하여 관직이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할아버지 오계순(吳繼淳)과 증조부 오도원(吳道源)은 역관이었고, 고조할아버지 오필검(吳弼儉)은 혜민서 참봉이었다. 역관이었던 할아버지 오계순은 생전에 황해도와 충청남도 일대에 잠입해서 개신교를 전도하던 선교사 귀츨라프를 발견하여 그를 조사, 심문하였다. 할아버지 오계순에게 내려진 증 호조판서 벼슬은 아버지 오응현의 출세로 사후 증직된 것이었다.그는 대대로 8대나 역관을 하던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다. 오인유(吳仁裕)의 후손으로, 오인유는 고려 때 검교군기감을 역임하였으며, 이후 대대로 문과 합격자를 배출하였다. 이후 15대 오인량(吳仁亮)이 역과에 응시했다가 합격해서 역관이 되었고 사역원 판관을 역임했다. 오인량의 동생 오제량(吳悌亮)은 무과에 응시하여 훈련원 첨정을 지냈으나 그의 아들 오정화(吳鼎和)는 의과에 응시하여 의관으로 활인서 별제를 역임했다. 17대 오지항(吳志恒)은 역과에 응시하여 다시 역관이 되었으며 그 이후에 대대로 역관을 지냈다.
2. 1. 2. 유소년기
오경석은 박제가의 북학과 김정희의 금석학을 공부했으며, 16세에 역과에 합격했다.[1] 이상적에게서 학문, 한어(漢語, 중국어), 서화 등을 배웠다.아버지 오응현은 이상적을 초빙하여 자제들에게 글을 가르쳤는데, 이상적은 김정희의 문인이자 박지원과 박제가의 학통을 계승한 인물이었다. 오응현은 박제가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여 그의 저술을 자손들에게 읽혔고, 오경석 또한 박제가를 존경하여 그의 글씨와 그림을 서재에 걸어두고 책을 읽었다. 이후 박제가와 연암 박지원의 학문을 사숙하였다. 1846년에 역과 식년시에 합격하였다.
2. 2. 관료 생활
1846년(헌종 12년) 역과(譯科)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갔으며 사역원한학습독관이 되었다. 이후 사역원첨정을 지낸 이정(李挺)의 딸 금산이씨(金山李氏)와 결혼했으나 곧 전염병으로 사별하고 이듬해 중인 가문의 딸 김해김씨와 재혼하였다. 1853년 23살 때 처음으로 북경으로 가는 사신단에 참여하였다. 그때 서양 세력에게 침탈되는 청나라 모습에 충격을 받았으며, 그것이 장래에 조선에도 닥치게 될 위기임을 절감한다.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서양 문물과 사상이 담긴 서적을 사들였고, 조선에서는 그 책들을 신서(新書)라고 불렀다. 신서는 한문으로 번역된 세계 각국의 정치, 경제, 사회에 관한 책들이었으며, 양수기 제조법이나 세계 지도 등도 수록되어 있었다.[1]청나라 사행길을 여러번 수행하고 돌아온 오경석은 1840년대의 아편전쟁, 1851년의 태평천국 운동, 그밖에 서구 열강의 개항 요구 등으로 청나라가 망해가는 모습을 베이징 현장에서 보고, 사회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는 자기만 개화사상을 지닐 것이 아니라 국내 지도층이 함께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청나라에서 간행된 '해국도지', '영환지략', '박물신편(博物新編)', '양수기제조법', '중서견문록(中西見聞錄)'등의 서적을 구입하여 귀국했다. 또한 일본을 자주 방문하던 개화승려 이동인 등과도 만나 세계정세를 논하였다.[1]
1860년(철종 11년) 10월 청나라에 파견되는 진하사 겸 사은사 신석우의 수행 역관으로 베이징을 방문했다가 1861년 3월에 귀국했는데, 이때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의 베이징 점령을 목격하고 돌아와 개항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역관으로 재직하면서 스승 이상적을 가르친 추사 김정희를 찾아가 사사하였으나 얼마 뒤 사망하였다. 1866년(고종 3년) 5월 병인양요 발생 직전, 프랑스 동양함대의 조선 침공이 준비되자, 이 정보를 입수하여 조선정부가 사태를 해명하고 정세를 탐지하기 위해 청나라로 파견하는 주청사(奏請使) 일행의 역관으로 베이징을 방문하였다. 이때 서양의 침략에 경험이 있던 청나라의 양무파 정객, 외교가들을 방문하여, 이들을 설득하여 프랑스 함대의 동태와 그들의 조선침략 대책수립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대응책에 대한 정보를 얻어왔다. 귀국 후 그는 청나라는 프랑스의 조선 침공에 관련되어 있지 않으며, 프랑스군은 군량(軍糧)이 부족하므로 지형을 이용하여 굳게 지키고 가능한 한 싸움을 피하면서 시간을 오래 끌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을 조선 정부에 보고했다.[1]
사역원의 한학교수(敎授)를 거쳐 1868년 3월 18일 동지중추부사 김정구(金鼎九)와 함께 영건도감 별간역에 임명되고, 사역원 당하 역관을 거쳐 1869년 7월 20일 당상관으로 승진, 절충장군이 되었다. 1869년 8월 22일 오위장,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9월 2일 신병을 이유로 오위장직에서 체직을 청하고 사퇴하였다.[1]
1872년(고종 9년) 12월 25일 상호도감 도제조의 청으로 상호도감 별간역에 임명되었다. 그해 겨울 청나라에 파견되는 진하사의 수행 수역관으로 가서 청나라 황제의 조서를 받아온 공로로, 1873년 1월 20일 홍순목의 청으로 절충장군에서 가선대부로 승진하였다. 이어 다시 상호도감 별간역이 되었다가 7월 30일 당상역관으로 청나라 사행길에 참여하였다. 1874년 1월 7일 오위장이 되었으나 1월 19일 신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그러나 같은 날 동지중추부사로 임명된다. 그해 8월 청나라에 동지사가 파견될 때 정원 외로, 한학 당상역관 자격으로 사행길에 참여하였다. 그해 10월 동지사 수역(首譯)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1]
2. 2. 1. 관료 생활 초반
1846년(헌종 12년) 역과(譯科)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갔으며 사역원한학습독관이 되었다. 이후 사역원첨정을 지낸 이정(李挺)의 딸 금산이씨(金山李氏)와 결혼했으나 곧 전염병으로 사별하고 이듬해 중인 가문의 딸 김해김씨와 재혼하였다. 1853년 23살 때 처음으로 북경으로 가는 사신단에 참여하였다. 그때 서양 세력에게 침탈되는 청나라 모습에 충격을 받았으며, 그것이 장래에 조선에도 닥치게 될 위기임을 절감한다.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서양 문물과 사상이 담긴 서적을 사들였고, 조선에서는 그 책들을 신서(新書)라고 불렀다. 신서는 한문으로 번역된 세계 각국의 정치, 경제, 사회에 관한 책들이었으며, 양수기 제조법이나 세계 지도 등도 수록되어 있었다.[1]청나라 사행길을 여러번 수행하고 돌아온 오경석은 1840년대의 아편전쟁, 1851년의 태평천국 운동, 그밖에 서구 열강의 개항 요구 등으로 청나라가 망해가는 모습을 베이징 현장에서 보고, 사회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는 자기만 개화사상을 지닐 것이 아니라 국내 지도층이 함께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청나라에서 간행된 '해국도지', '영환지략', '박물신편(博物新編)', '양수기제조법', '중서견문록(中西見聞錄)'등의 서적을 구입하여 귀국했다. 또한 일본을 자주 방문하던 개화승려 이동인 등과도 만나 세계정세를 논하였다.[1]
훗날 아들 오세창의 증언에 의하면, 유대치가 오경석에게 어떻게 해야 조선사회의 개혁을 성취할 수 있느냐고 묻자, 오경석은 김옥균 등의 개혁적 성향의 북촌 양반들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그는 “북촌의 양반 자제 가운데 동지를 구하여 혁신의 기운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오경석이 베이징에서 구입해 온 세계 각국의 지리와 역사, 과학과 정치 서적들은 이동인이 구해온 박물, 서양어 서적, 태엽기계, 거울, 망원경, 돋보기 등과 함께 유대치, 강위, 박규수 등에게도 전달되었고, 이들을 통해 김윤식, 김홍집, 유길준,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북촌 청년들에게 전해지며 개화파라는 정치 세력이 형성되었다.[1]
1860년(철종 11년) 10월 청나라에 파견되는 진하사 겸 사은사 신석우의 수행 역관으로 베이징을 방문했다가 1861년 3월에 귀국했는데, 이때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의 베이징 점령을 목격하고 돌아와 개항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역관으로 재직하면서 스승 이상적을 가르친 추사 김정희를 찾아가 사사하였으나 얼마 뒤 사망하였다. 1866년(고종 3년) 5월 병인양요 발생 직전, 프랑스 동양함대의 조선 침공이 준비되자, 이 정보를 입수하여 조선정부가 사태를 해명하고 정세를 탐지하기 위해 청나라로 파견하는 주청사(奏請使) 일행의 역관으로 베이징을 방문하였다. 이때 서양의 침략에 경험이 있던 청나라의 양무파 정객, 외교가들을 방문하여, 이들을 설득하여 프랑스 함대의 동태와 그들의 조선침략 대책수립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대응책에 대한 정보를 얻어왔다. 귀국 후 그는 청나라는 프랑스의 조선 침공에 관련되어 있지 않으며, 프랑스군은 군량(軍糧)이 부족하므로 지형을 이용하여 굳게 지키고 가능한 한 싸움을 피하면서 시간을 오래 끌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을 조선 정부에 보고했다.[1]
사역원의 한학교수(敎授)를 거쳐 1868년 3월 18일 동지중추부사 김정구(金鼎九)와 함께 영건도감 별간역에 임명되고, 사역원 당하 역관을 거쳐 1869년 7월 20일 당상관으로 승진, 절충장군이 되었다. 1869년 8월 22일 오위장,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9월 2일 신병을 이유로 오위장직에서 체직을 청하고 사퇴하였다.[1]
1872년(고종 9년) 12월 25일 상호도감 도제조의 청으로 상호도감 별간역에 임명되었다. 그해 겨울 청나라에 파견되는 진하사의 수행 수역관으로 가서 청나라 황제의 조서를 받아온 공로로, 1873년 1월 20일 홍순목의 청으로 절충장군에서 가선대부로 승진하였다. 이어 다시 상호도감 별간역이 되었다가 7월 30일 당상역관으로 청나라 사행길에 참여하였다. 1874년 1월 7일 오위장이 되었으나 1월 19일 신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그러나 같은 날 동지중추부사로 임명된다. 그해 8월 청나라에 동지사가 파견될 때 정원 외로, 한학 당상역관 자격으로 사행길에 참여하였다. 그해 10월 동지사 수역(首譯)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1]
2. 2. 2. 외교 활동
오경석은 1846년(헌종 12년) 역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했고, 사역원한학습독관을 거쳐 사역원 첨정을 지냈다. 1853년 23세 때 처음으로 북경에 가는 사신단에 참여하면서 서양 세력에 침탈되는 청나라의 모습에 충격을 받고, 조선의 미래를 걱정하여 서양 문물과 사상이 담긴 서적을 구입했다.청나라를 여러 번 방문하면서 아편전쟁(1840년대), 태평천국 운동(1851년) 등 서구 열강의 개항 요구로 청나라가 쇠퇴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 사회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는 '해국도지', '영환지략', '박물신편' 등의 서적을 구입하여 귀국했고, 개화 승려 이동인과도 교류하며 세계 정세를 논했다.
1860년(철종 11년) 10월 청나라에 파견되는 진하사 겸 사은사 신석우의 수행 역관으로 베이징을 방문했다가 1861년 3월에 귀국했는데, 이때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의 베이징 점령을 목격하고 돌아와 개항의 필요성을 주장했다.[1] 그는 김정희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으나 얼마 뒤 김정희는 사망하였다. 1866년(고종 3년) 5월 병인양요 직전에는 프랑스 동양함대의 조선 침공 정보를 입수, 조선 정부가 파견하는 주청사 일행의 역관으로 베이징을 방문하여 청나라 양무파 정객, 외교가들을 설득하여 프랑스 함대의 동태와 조선 침략 대책에 대한 정보를 얻어왔다. 귀국 후 그는 청나라가 프랑스의 조선 침공에 관련되어 있지 않으며, 프랑스군은 군량이 부족하므로 지형을 이용하여 굳게 지키고 싸움을 피하면서 시간을 끌면 이길 수 있다는 정보를 조선 정부에 보고했다.[1]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뒤에도 정치색을 드러내지 않고 사역원의 한어 당상역관으로 계속 근무하면서, 청나라에서 미국, 유럽 열강의 신문물을 접하고 개화의 시급함을 주장했다.[1]
2. 3. 생애 후반
오경석은 13차례나 청나라를 오가면서 서양 문물과 제도를 알 수 있는 세계지도, 자명종, 망원경 등을 조선에 들여왔다. 흥선대원군이 애용하던 회중시계도 그가 청나라에서 사 와서 선물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한국 최초로 초상 사진을 찍은 사람으로, 1853년 주청 프랑스 공사 필립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하여 청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돌아왔다.1876년 1월 13일 강화도 조약 직전 일본 선박이 인천항에 나타나 항의 시위를 하자, 강화 유수 조병식의 지시를 받고 훈도 현석운(玄昔運)과 함께 항산도에 정박 중이던 일본 측 군함의 통역 모리야마 시게루를 접견하였다. 그해 2월 5일 왜국 군함이 물러나는데 기여한 공로로 흥인군 이최응의 건의로 자헌대부로 승진하였다.
1876년 3월 진하사 겸 사은사가 파견될 때 한어 수역관으로 사행길에 포함되었으나 갑자기 병으로 가지 못하고 한문규로 대체되었다. 1877년 개항 논쟁이 벌어졌을 때 박규수, 유대치, 강위 등과 함께 개국(開國, 개항)론을 주장하여 흥선대원군 일파와 맞섰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이들이 개국론을 주장한 것은 청나라 리훙장의 권고 때문이었다고 한다. 1877년 6월 16일 사역원 도제조의 건의로 오랫동안 승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1자급 특진되어 정헌대부가 되었다.
강화도 조약 체결 과정에 참여하여 활동하던 중 과로하여 1876년 4월 쓰러졌으며, 이후 중풍으로 병석에 누웠다.[1] 1877년 8월 외교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주변의 반대 없이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진하여 돈녕부판사가 되었다. 8월 14일 중추부지사로 임명되었으나 9월 10일 신병을 이유로 체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면직되었다.[1] 11월 11일 사역원에서 《통문관지속편(通文館誌續編)》을 영인할 때 감인(監印)에 참여한 공로로 1자급 특진하였다.[1] 12월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진, 중추부지사에 임명되었다.[1]
만년에는 풍증으로 고생하였다.[1] 지중추부사 숭록대부에 이르렀으며, 1879년 콜레라에 전염되어 죽은 후처를 안장하고 돌아오던 길에 과로와 풍증, 콜레라 감염이 겹쳐 병석에 누웠다가 4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1]
2. 3. 1. 개화 청년 양성
그는 유대치, 박규수, 강위 등과 개항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개화파 청년들의 육성을 고민하였다. 조선의 정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장차 정치의 전면에 나설 젊은 양반 자제들과 접촉하여 개화 사상을 교육하고 발전시켜서 근본적인 개혁 정치를 실시하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1860년대부터 김윤식, 유길준, 김홍집 등이 박규수와 유대치, 강위의 문하와 그의 문하에 출입하였다.1874년 박규수가 의정부우의정에서 사직한 뒤 김옥균 등의 청년 지식인들이 박규수의 집을 드나들면서 북학파의 학문과 해외 사정에 대해 지도를 받았으며, 이때 오경석과도 본격적으로 접촉하였다. 이들 청년들은 1877년 박규수가 죽자 이후 오경석과 유홍기, 강위 등의 문하에 출입하다가, 오경석 자신이 사망하는 1879년 이후에는 유홍기, 강위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개화 사상을 수립하였다.
2. 3. 2. 개항론과 개혁 운동
오경석은 13차례나 청나라를 오가면서 서양 문물과 제도를 알 수 있는 물품, 곧 세계 지도를 비롯하여 자명종, 망원경 등을 조선에 들여왔다. 흥선대원군이 애용하던 회중시계도 오경석이 청나라에서 사 와서 선물했으리라 여겨진다. 또한 한국 최초로 초상 사진을 찍은 사람이며, 1853년 주청 프랑스 공사 필립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하여 청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돌아왔다.1876년(고종 13년) 1월 13일 강화도 조약 직전 일본의 선박이 인천항에 나타나 항의 시위를 하자, 강화 유수 조병식의 지시를 받고 훈도 현석운(玄昔運)과 함께 항산도에 정박 중이던 일본 측 군함의 통역 모리야마 시게루를 접견하였다. 그해 2월 5일 왜국 군함이 물러나는데 기여한 공로로 흥인군 이최응의 건의로 자헌대부로 승진하였다.
1876년 3월 진하사 겸 사은사가 파견될 때 오경석은 한어 수역관으로 사행길에 포함되었으나 갑자기 병으로 가지 못하고 한문규로 대체되었다. 1877년 개항을 놓고 논쟁이 발생했을 때 그는 박규수, 유대치, 강위 등과 함께 개국(開國, 개항)론을 주장하여 흥선대원군 일파와 맞섰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오경석과 박규수 등이 개국론을 주장한 것은 청나라 리훙장의 권고 때문이었다 한다. 1877년(고종 14년) 6월 16일 사역원 도제조의 건의로 오랫동안 승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1자급 특진되어 정헌대부가 되었다.
2. 3. 3. 최후
강화도 조약 체결 과정에 참여하여 활동하던 중 과로하여 일본의 군함이 되돌아간 직후인 1876년 4월 쓰러졌으며, 이후 중풍으로 병석에 누웠다.[1]1877년 8월 외교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주변의 반대 없이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진하여 돈녕부판사가 되었다. 8월 14일 중추부지사로 임명되었으나 9월 10일 신병을 이유로 체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면직되었다.[1] 11월 11일 사역원에서 《통문관지속편(通文館誌續編)》을 영인할 때 감인(監印)에 참여한 공로로 1자급 특진하였다.[1] 12월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진, 중추부지사에 임명되었다.[1]
만년에는 풍증으로 고생하였다.[1] 지중추부사 숭록대부에 이르렀으며, 1879년 콜레라에 전염되어 죽은 후처를 안장하고 돌아오던 길에 과로와 풍증, 콜레라 감염이 겹쳐 병석에 누웠다가 4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1]
3. 저서
- 삼한금석록
- 삼한방비록
- 천죽재차록
- 양요기록
4. 천죽재차록과 골동품
골동품 수집가였던 오경석은 자신이 수집한 골동품의 소장 및 입수 과정을 적은 천죽재차록(天竹齋箚錄)을 간행했다. 천죽재차록에는 범유경(范維卿)같은 골동품상과 주고받은 편지를 비롯한 각종 서한, 정보 교류 내용이 수록되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유실되었다.
아들 오세창이 지은 《근역서화징 (槿域書畵徵)》에는 천죽재차록에 나온 일부 골동품에 대한 내용이 인용되었다. 오경석은 골동서화를 구입해 감상만 한 것이 아니라, 훌륭한 글씨나 그림을 보고 연습하여 작품을 남겨 서화가로도 명성을 얻었다.
강건이 만들고 오경석이 소장했던 옥제 해시계가 발견되었는데, 시계에는 강건이 제작하고 오경석이 소장했다는 글이 씌여 있다. 강건의 집안은 시계를 제작해 온 명문가 후손으로, 강건은 한성판윤(현 서울시장)을 지냈고 오세창과 가깝게 교류했다. 강건의 증조부는 조선 후기 강세황이며, 아버지 강이오와 큰아버지 강이중은 혼천시계를 제작한 것으로 유명하다.[2]
5. 평가 및 영향
어려서부터 글씨와 그림을 즐겼으며 북경에 왕래하면서 세계 정세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많이 흡수하여 조선의 국제무대 등장을 주장했다. 그가 중국으로부터 가져온 《해국도지(海國圖誌)》와 같은 책은 세계 정세를 국내에 소개하는 자료가 되기도 했다.[1]
오경석이 가지고 온 신서는 그의 친구인 유대치에게 영향을 끼쳤다. 유대치는 오경석과 동갑으로 불심이 깊고, 다방면에 유능한 한의사였으며,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이 유대치를 따랐다. 결국 오경석의 영향을 받아 초기 개화사상이 일어난 셈이다. 이런 까닭에 한국 최초의 개화사상가 또는 한국 개화사상의 비조라는 평가를 받는다.[1]
6. 가족
관계 | 이름 |
---|---|
고조부 | 오필검(吳弼儉) |
증조부 | 오도원(吳道源) |
할아버지 | 오계순(吳繼淳) |
아버지 | 오응현(吳膺賢) |
어머니 | 전주 이씨 |
외조부 | 이의무(李義懋) |
동생 | 오경윤(吳慶潤, 1833년 ~ ?) |
동생 | 오경림(吳慶林, 1834년 ~ ?) |
동생 | 오경연(吳慶然, 1841년 ~ ?) |
계모 | 이름 미상 |
이복 동생 | 오경학(吳慶鶴, 1843년 ~ ?) |
아들 | 오세창 |
손자 | 오일룡(吳一龍, 1917년 ~ ?, 종로구청 공무원) |
손자 | 오일육(吳一六, 장면 비서관, 경무대·이기붕 비서관 역임) |
7. 오경석을 연기한 배우들
참조
[1]
서적
이것이 한국 최초
삼문
1995-11-01
[2]
뉴스
개화파 오경석이 지녔던 휴대용 해시계 발견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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