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
1. 개요
국내성은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로, 현재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 있는 통구성으로 비정된다. 유리왕 때 수도로 정해져 광개토대왕 시기 고구려 영토 확장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장수왕 때 평양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고구려의 주요 도시였다.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이 신라-당나라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함락되었고, 고구려는 멸망했다. 성벽의 전체 길이는 2,686m이며, 위나암성과 함께 평지성과 산성을 이루었다.
-
퉁화시의 건축물 -
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릉비는 414년에 고구려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고구려 역사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록하여 고구려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
퉁화시의 건축물 -
장군총
장군총은 5세기 고구려 전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 지안시의 돌무지 계단식 적석총으로, 정교하게 가공된 화강암 방형 단을 쌓아 올린 형태이며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었고 한국 학계에서는 장수왕 또는 광개토대왕의 능으로 추정한다. -
유리명왕 -
황조가
《황조가》는 고구려 유리왕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시로, 꾀꼬리의 의지하는 모습과 대비되는 화자의 고독한 심정을 노래하며, 작자에 대한 다양한 설이 존재하지만 고대 권력자의 고독과 고뇌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
유리명왕 -
도절
도절은 고구려 유리명왕의 아들이자 첫 번째 태자였으며, 부여의 공격을 받았으나 폭설로 인해 물러났고, 기원전 1년에 사망하였다. -
한국의 옛 수도 -
한성부
한성부는 조선의 수도를 관할하며 행정, 사법, 재정 등의 업무를 담당했고, 정2품인 한성판윤이 최고 책임자였으며, 1895년 지방 행정 구역으로 개편되었다가 1910년 경성부로 개칭되었다. -
한국의 옛 수도 -
부여군
3. 역사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던 국내성은 유리왕 대인 서기 3년에 수도로 정해진 이후 약 425년간 고구려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 광개토대왕 시기 고구려가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으며, 장수왕이 427년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에도 여전히 중요한 도시로 기능했다. 그러나 고구려 말기인 666년, 연남생이 신라-당 연합군에게 항복하면서 함락되었고, 이는 고구려 멸망(668년)으로 이어지는 과정의 일부였다.
3.1. 건립과 천도
고구려의 4대 국왕인 유리왕은 서기 3년 10월에 국내성을 수도로 정했다. 국내성은 19대 국왕인 광개토대왕이 고구려의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동북아시아의 강력한 세력으로 만들기 전까지 여러 차례 외적의 공격을 받았다. 413년 광개토대왕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장수왕이 왕위를 계승했으며, 427년에는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다. 수도가 이전된 이후에도 국내성은 고구려에서 중요한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계속 수행했다.
고구려 말기, 연개소문의 아들인 연남생 장군은 666년에 국내성을 신라-당 연합군에게 넘겨주며 항복했고, 이로 인해 국내성은 함락되었다. 고구려는 668년 당나라 군대가 평양을 점령하고 마지막 왕인 보장왕과 연남건을 사로잡으면서 멸망했다.
3.2. 광개토대왕과 전성기
고구려의 4대 국왕인 유리왕은 서기 3년 10월에 국내성을 수도로 정했다. 그러나 국내성은 19대 국왕인 광개토대왕이 고구려의 영토를 크게 넓히고 동북아시아의 강력한 국가로 발돋움시키기 전까지 여러 차례 외침에 시달렸다. 광개토대왕의 시대에 고구려는 전성기를 맞이하며 강력한 힘을 떨쳤다.
광개토대왕이 413년에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인 장수왕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장수왕은 427년에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지만, 국내성은 수도 이전 이후에도 고구려에서 여전히 중요한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유지했다.
고구려 멸망 직전인 666년, 연개소문의 아들인 연남생 장군이 국내성을 신라-당 연합군에게 넘겨주면서 성은 함락되었다. 결국 고구려는 668년 당나라 군대가 평양을 점령하고 마지막 왕인 보장왕과 연남건 등을 사로잡으면서 멸망하게 되었다.
3.3. 장수왕과 평양 천도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동북아시아의 강력한 세력으로 만들었다. 광개토대왕이 413년에 사망한 후, 그의 아들인 장수왕이 왕위를 계승했다. 장수왕은 427년에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다.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이후에도 국내성은 고구려에서 여전히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고구려 멸망 직전인 666년, 연개소문의 아들인 연남생 장군이 국내성을 신라-당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국내성은 함락되었다. 이후 고구려는 668년에 당나라 군대가 평양을 점령하고 보장왕과 연남건을 포로로 잡으면서 멸망했다.
3.4. 고구려 멸망과 국내성 함락
고구려 멸망 직전인 666년, 연개소문의 아들인 연남생 장군은 국내성을 신라-당 연합군에 넘기며 항복하였고, 이로 인해 국내성은 함락되었다. 이후 고구려는 668년 당나라 군대가 수도 평양을 점령하고 보장왕과 연남건을 사로잡으면서 최종적으로 멸망하였다.
4. 특징
국내성 성벽의 전체 길이는 2686m이며, 동서 방향이 남북 방향에 비해 약간 더 길다. 현재 성벽은 상당 부분 훼손된 상태이다. 지안 서북쪽 2.5km 지점에 위치한 해발 676m의 환도산에는 산성인 위나암성(尉那巖城)이 있다. 고구려는 이 시기부터 평지성과 산성을 한 조로 조성하는 방식을 사용했는데, 평지에 있는 국내성이 외적의 공격을 받을 경우 산성인 위나암성으로 피난하여 방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5. 갤러리
--
--
--
6. 관련 항목
* 고구려 후기 고분군
* 집안 시의 문화와 관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