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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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모한은 발해 출신으로, 발해 멸망 후 고려로 망명하여 고려 태조의 사위가 되었으나 죄를 짓고 거란으로 도망쳤다. 거란에서 야율아보기의 눈에 띄어 등용되었으며, 후당, 후진과의 전쟁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특히 936년 후당과의 전투, 946년 두중위의 30만 대군 격파 등에서 큰 공을 세워 상장군, 시중, 태부 등의 벼슬을 거쳤다. 이후 개부의동삼사, 중태성 우상, 좌상을 역임하다 959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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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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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고모한 |
원어명 | 高模翰 |
다른 이름 | 고송(高松) |
국적 | 발해 → 고려 → 요나라 |
출생지 | 발해 |
사망일 | 959년 |
직업 | 군인, 관료 |
관직 정보 | |
직책 | 요나라의 통군부사 |
군주 | 요 태종 |
임기 | 938년 |
직책 | 요나라의 시중 |
군주 | 요 태종 |
임기 | 938년 ~ ? |
군사 경력 | |
근무 | 요나라군 |
2. 생애
고모한은 발해(渤海 (国)|발해국)에서 태어났다. 괴력에 뛰어나고, 기마와 궁술에 능했으며, 병법에 대해 잘 논했다. 926년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발해를 멸망시키자, 고모한은 고려로 도망쳐 고려 태조의 딸을 아내로 삼았다. 후에 고려에서 죄를 지어 거란으로 망명했다. 술을 둘러싼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옥에 갇혔지만, 야율아보기는 그의 재능을 알고 죄를 사면했다.
936년 7월, 후당이 장경달과 양광원에게 50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태원부를 공격하게 했다. 석경당이 거란에 구원을 요청하자, 태종은 석경당을 구원하기로 결정했다. 9월, 고모한은 거란의 장군으로 장경달의 군대와 싸워 이를 격파했고, 태원의 포위는 풀렸다. 석경당은 밤에 성을 나와 태종과 만나 의리의 부자 관계를 맺었다. 태종이 고모한 등에게 술을 하사하고, 군사들에게 직접 술을 나누어주자 거란 군의 사기가 높아졌다. 다음 날, 다시 후당의 군대와 싸워 또한 이를 격파했다. 장경달이 진안채로 도망치자, 고모한은 태종에게 포로를 바쳤다. 석경당이 후진의 황제로 즉위하자, 양광원은 장경달을 베고 항복했고, 화북의 여러 주들이 잇따라 항복했다. 태종은 고모한의 공적을 으뜸으로 여겨 상장군에 임명했다.
938년, 백관과 여러 나라의 사신을 모아 책례를 거행했을 때, 태종은 고모한을 가리키며 "그는 나라의 용맹한 장수이다. 짐이 천하를 통일한 것도 이 사람의 힘이다"라고 칭찬했다고 전해진다.
943년, 후진이 거란과의 동맹을 깨뜨리자, 944년 1월에 태종은 남벌의 군대를 일으켰다. 고모한은 통군부사가 되어 승갈과 함께 선봉을 맡아 적성을 함락시키고, 덕주와 패주의 여러 진을 격파했다. 이 겨울, 총좌우철예자군을 겸임하여 관남의 성읍 수십 개를 함락시켰다. 945년 3월, 양담이 건녕군으로 가서 창주 절도사 전무명에게 포위되자, 고모한은 조연수와 함께 구원하러 가서 이를 격파했다. 공적으로 시중을 더했다. 염산현을 함락시키고, 요안을 격파하자 후진의 군대는 두려워하여 고모한의 군대와 교전하려 하지 않았다. 태부의 지위를 더했다.
946년, 후진의 위부 절도사 두중위가 30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거란군을 맞이하자, 고모한은 휘하의 300명을 이끌고 싸워 후진군의 선봉인 양한장을 남양무에서 죽이고, 남은 군대를 패주하게 했다. 이때 태종의 조서로 칭찬받았고, 한의 이릉에 비유되었다. 곧 두중위 등이 호타하에 이르자, 태종은 고모한에게 계책을 물었다. 태종은 고모한의 계책을 좋게 여겨, 고모한에게 중도교를 지키게 했다. 거란의 군대는 다시 후진의 군대와 싸워 격파했고, 두중위 등은 항복했다. 947년, 태종이 개봉부에 들어가자, 고모한은 특진검교태사의 지위를 더하고, 철군개국공에 봉해졌다. 변주 순검사가 되어, 사수 여러 산의 반란군을 평정하고, 중경대정부에 주둔했다.
948년, 개부의동삼사의 지위를 더했다. 951년, 중태성 우상이 되어, 동경요양부로 소환되었다. 959년 1월, 좌상으로 전임했고, 곧 사망했다.
2. 1. 발해 유민과 고려 망명
고모한은 발해가 멸망할 즈음에 고려로 망명하여 고려 태조의 딸과 혼인했으나, 죄를 짓고 요나라로 망명했다. 요나라에서 술을 마시고 살인을 저질러 감옥에 갇혔으나, 그의 재능을 알아본 요 태조가 그를 풀어주었다.936년, 후당(後唐)이 50만 군사로 태원(太原)을 공격하자, 성주인 석경당(石敬塘)이 요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요 태종은 고모한을 보내 후당군을 상대로 승리하게 했다. 938년, 석경당의 후진(後晉)이 요나라를 배신하고 공격하자, 고모한은 통군부사(統軍副使)로서 이들을 진압하여 시중(侍中)과 태부(太傅)직에 올랐다.
이후에도 위부절도사(魏府節度使) 두중위(杜重威)가 이끄는 30만 군을 진압하여 특진검교태사(特進檢校太師)직을 받고 철군의 개국공(開國公)이 되었다. 변주(汴州)의 순검사(巡檢使)를 지내면서 범수(氾水)의 여러 산적들을 정벌했다. 948년에는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직에 오른 뒤 중대성(中臺省)의 우상(右相)직을 지냈고, 959년 1월 좌상(左相)으로 옮겼다가 생을 마감했다.
2. 2. 요나라에서의 활약
고모한은 발해가 멸망할 즈음 고려로 망명하여 고려 태조의 딸과 혼인했으나, 죄를 짓고 요나라로 망명했다. 요나라에서 술을 마시고 사람을 죽여 감옥에 갇혔으나,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본 요 태조가 풀어주었다.936년, 후당(後唐)의 50만 군대가 태원(太原)을 공격하자 성주 석경당(石敬塘)이 요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요 태종은 고모한을 보내 후당군을 상대로 승리하게 했다. 938년, 석경당의 후진(後晉)이 요나라를 배신하고 공격하자, 고모한은 통군부사(統軍副使)로서 이들을 진압하여 시중(侍中)과 태부(太傅) 직에 올랐다. 요 태종은 고모한을 가리켜 "나라의 용맹한 장수"라 칭찬하며, "짐이 천하를 통일한 것도 이 사람의 힘"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위부절도사(魏府節度使) 두중위(杜重威)가 이끄는 30만 군을 진압하여 특진검교태사(特進檢校太師) 직을 받고 철군의 개국공(開國公)이 되었다. 946년에는 두중위가 호타하에 이르자, 요 태종은 고모한에게 계책을 물었고, 그의 계책을 좋게 여겨 중도교를 지키게 했다. 변주(汴州) 순검사(巡檢使)를 지내면서 범수(氾水)의 여러 산적들을 정벌했고, 948년에는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직에 오른 뒤 중대성(中臺省) 우상(右相) 직을 지냈다. 959년 1월 좌상(左相)으로 옮겼다가 생을 마감했다.
2. 3. 말년
고모한은 발해가 멸망할 즈음 고려로 망명하여 고려 태조의 딸과 혼인했으나, 죄를 짓고 요나라로 다시 망명했다. 요나라에서 술을 마시고 살인을 저질러 감옥에 갇혔으나, 그의 재능을 알아본 요 태조가 그를 풀어주었다.936년, 후당(後唐)의 50만 군대가 태원(太原)을 공격하자 성주(城主) 석경당(石敬塘)이 요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요 태종은 고모한을 보내 후당군을 상대로 승리하게 했다. 938년, 석경당의 후진(後晉)이 요나라를 배신하고 공격하자, 고모한은 통군부사(統軍副使)로서 이들을 진압하여 시중(侍中)과 태부(太傅) 직위에 올랐다.
이후 위부절도사(魏府節度使) 두중위(杜重威)가 이끄는 30만 군을 진압하여 특진검교태사(特進檢校太師) 직위를 받고 철군의 개국공(開國公)이 되었다. 변주(汴州) 순검사(巡檢使)를 지내면서 범수(氾水)의 여러 산적들을 정벌했다. 948년에는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직위에 오른 뒤 중대성(中臺省) 우상(右相) 직을 지냈고, 959년 1월 좌상(左相)으로 옮겼다가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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