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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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 태종(耶律德光, 902년 ~ 947년)은 요나라의 제2대 황제이다. 926년 요 태조 야율아보기 사후, 어머니 술률평의 섭정 아래 즉위했다. 그는 후당 멸망 후 석경당의 후진 건국을 지원하며 연운십육주를 획득했으나, 후진과의 관계 악화로 직접 공격에 나섰다. 947년 국호를 요로 변경했으나, 중원에서의 반격으로 개봉을 포기하고 돌아가던 중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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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태종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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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요 태종 (묘호) 야율 요골 (거란 이름) 耶律德光 (한화 이름) |
전체 이름 | 가족 이름: Yēlǜ (耶律) 거란 이름: 야오구 (Yáogǔ, 堯骨) 한화 이름: 덕광 (Déguāng, 德光) |
존호 | 예문신무법천계운명덕장신지도광경소효사성황제 |
시호 | 효무혜문황제 |
묘호 | 태종 |
출생일 | 902년 11월 25일 |
사망일 | 947년 5월 18일 |
매장지 | 화이링 능 (懷陵, 현재의 바린 우기, 내몽골) |
아버지 | 요 태조 |
어머니 | 순친 술율 황후 |
배우자 | 소문 |
자녀 | 요 목종 야율 연체거, 진정 친왕 (황제의 숙부) |
재위 기간 | 927년 12월 11일 – 947년 5월 18일 |
즉위 | 천현 2년 11월 15일 (927년 12월 11일) |
이전 황제 | 요 태조 |
다음 황제 | 요 세종 |
출생 이름 | 야오구 (거란 이름), 예뤼 더광 (한화 이름) |
연호 | 천현 (天顯): 927년–938년 회동 (會同): 938년–947년 대동 (大同): 947년 |
재위 시호 | 사성 황제 (嗣聖皇帝) |
가문 | 야율 |
왕조 | 요나라 |
개인 정보 | |
자 (字) | 덕근 (德謹) |
거란 이름 | 야율 요골 (Yelü Yaogu) |
한화 이름 | 야율 덕광 (Yelü Deguang) |
통치 정보 | |
즉위 | 천현(天顯) 2년 음력 11월 15일 |
연호 | 천현(天顯) : 927년 - 938년 회동(會同) : 938년 - 947년 대동 (大同) : 947년 |
기타 정보 | |
능묘 | 봉릉 |
2. 생애
야율아보기와 술률평 황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부터 군사 활동에 참여하며 능력을 보였고, 926년 아버지 야율아보기가 사망하자 어머니 술률평의 강력한 지지 아래 형 야율배를 제치고 927년 요나라의 제2대 황제로 즉위하였다.[2][4]
재위 기간 동안 그는 남쪽의 중국 왕조들과의 관계에 주력했다. 후당의 혼란기에 석경당의 후진 건국을 지원하고 그 대가로 전략적 요충지인 연운십육주를 할양받아 중국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7] 그러나 석경당 사후 즉위한 석중귀가 요나라에 대한 복속 관계를 거부하자, 태종은 이를 명분으로 946년 대규모 군사를 일으켜 후진을 침공, 수도 개봉을 함락시키고 후진을 멸망시켰다.[12]
947년 태종은 개봉에서 국호를 '대요(大遼)'로 선포하고 스스로 중국 황제임을 천명하며 중원 지배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다.[13] 하지만 요나라 군대의 약탈 행위와 강압적인 통치는 한족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각지에서 반란이 잇따랐다. 결국 태종은 중원 통치를 포기하고 북쪽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947년 귀환 도중 병으로 사망하였다.[13]
2. 1. 초기 생애 및 즉위 과정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와 술률평(述律平) 황후의 둘째 아들로 902년에 태어났다. 젊은 시절, 『요사(遼史)』 기록에 따르면 진중한 외모와 온화한 성품을 지녔으며, 부모의 국가 통치에 자주 참여했다고 한다.[1]922년 아버지 야율아보기가 황제로 즉위하자, 야율덕광은 천하병마대원수(天下兵馬大元帥) 칭호를 받고 남쪽의 후당(後唐)의 전신인 전진(前晉) 영토 침략을 지휘했다. 923년 그의 지휘 아래 요군은 후당의 평주(平州, 현재 허베이성 친황다오시)를 함락시키고, 서쪽의 해족(奚) 후순부(胡遜)를 격파했다. 이후 태조를 따라 거란 궐리부(厥里) 정벌, 오르도스 고원 지역 당항족 복속, 하서회랑 지역 수비대 정복, 감숙 위구르 왕국 수도 함락, 발해 정복, 달루골(達盧骨) 부족 멸망 등에 참여했다고 전해진다.[1]
926년 태조의 발해 정벌 당시에는 주요 도시인 부여(夫餘, 현재 지린성 쓰핑시)를 함락시키는 데 기여했다.[2] 태조는 옛 발해 영토에 부여를 수도로 하는 동단국(東丹國)을 세웠다. 황태자였던 맏아들 야율배(耶律倍)는 생모 술률평에게 미움을 받아 황태자 자리에서 폐위되고 동단국의 왕(인황왕, 人皇王)이 되었다.[2] 동시에 야율덕광에게는 "황태자 대원수" 칭호를 내리고, 기존에 야율배가 담당하던 수도 임황(臨潢)의 관리를 맡겼다.[2]
926년 발해 정복 직후 야율아보기가 사망하자, 어머니 술률평이 섭정을 하며 실권을 장악했다.[2] 술률평은 잠재적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여러 장수와 그 부인들을 모아 살해하고, 권력을 남용하는 이들도 선황에게 안부를 전하라며 백여 명을 죽이는 등 권력 기반을 다졌다. 926년 9월, 술률평은 여러 추장들을 불러 맏아들 야율배와 둘째 아들 야율덕광을 각각 말에 태워 세운 뒤, 황제로 지지하는 사람의 말고삐를 잡으라고 했다. 추장들은 술률평의 의중이 야율덕광에게 있음을 알아채고 그의 말고삐를 잡았다.[2][4] 이에 야율덕광이 요나라의 제2대 황제 태종(太宗)으로 즉위하게 되었고(공식 즉위는 927년), 술률평은 황태후가 되어 광덕지인소열숭간응천황태후(廣德至仁昭烈崇簡應天皇太后)라는 존호를 받았다.
이 결정에 불만을 품은 형 야율배는 수백 명의 병사를 이끌고 후당으로 망명하려 했으나 국경 수비대에 저지되었다. 술률평은 그를 처벌하지 않고 동단국으로 돌려보냈다.[2][4]
태종은 즉위 후 어머니 술률평을 황태후로 존숭하고, 황태후의 조카이자 자신의 부인인 소온(蕭溫)을 황후로 책봉했다.[1][2] 그는 어머니에게 지극한 효성을 보였다고 전해지는데, 황태후가 병으로 식사를 못하면 자신도 먹지 않았고, 어머니가 노하면 기분이 풀릴 때까지 감히 만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2]
930년에는 동생 야율이호(耶律李胡)를 황태제(皇太弟)로 책봉했다.[1] 같은 해, 거듭된 계승 배제에 불만을 품은 형 야율배는 결국 동단국을 떠나 남쪽의 후당으로 망명했다.[5] 935년 소온 황후가 둘째 아들 야율엄살갈(耶律罨撒葛)을 낳은 후 병으로 사망했다.[1] 태종은 남은 재위 기간 동안 다른 황후를 두지 않았다.[6]
2. 2. 후진(後晉)과의 관계 및 중원 진출
후당(後唐) 명종(明宗) 사후 내부 혼란이 가중되었다. 명종의 3남 이종후(李從厚)가 민제(閔帝)로 즉위했으나 곧 양자 이종가(李從珂)에게 찬탈당했다. 이종가는 권력 안정을 위해 명종의 사위이자 실력자였던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 석경당(石敬瑭)을 제거하려 했다. 936년, 이종가는 석경당을 하동(현 산시성 태원)에서 천평(天平, 현 산둥성 태안)으로 이동시키려 했고, 이에 위협을 느낀 석경당은 반란을 일으켰다.[7]스스로의 힘만으로는 후당 중앙군에 맞서기 어렵다고 판단한 석경당은 북쪽의 거란(요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태종 야율덕광에게 자신을 황제로 세워준다면 아버지처럼 섬기고,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를 할양하겠다고 약속했다. 태종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5만 기병(스스로는 30만이라 칭함)을 이끌고 남하했다.[7] 거란군은 태원을 포위하고 있던 장경달(張敬達)이 이끄는 후당군을 격파하고 포위를 풀었다. 패퇴한 후당군은 인근 진안채(晉安寨)에 주둔했으나 거란-하동 연합군에게 다시 포위되었다.[7]
태종은 진안채를 포위한 상태에서 석경당을 황제로 즉위시키고 국호를 후진(後晉)으로 정하게 했다. 석경당은 약속대로 연운십육주를 거란에 넘겨주고 매년 비단 30만 필을 포함한 막대한 양의 공물을 바치기로 했다.[7] 후당의 조덕준(趙德鈞)이 황제가 되기 위해 태종에게 접근했으나, 석경당 측근 상위한(桑維翰)의 설득으로 태종은 석경당 지원을 유지했다.[7] 결국 진안채의 후당군은 식량 부족으로 양광원(楊光遠)이 장경달을 살해하고 항복했다. 후당 황제 이종가는 낙양에서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자 태종의 형 야율배(耶律倍)를 처형하고 자결했다. 석경당은 낙양에 입성하여 후진을 건국했고, 야율배의 관을 정중히 거란으로 보냈다.[7] 태종은 새로 얻은 연운십육주를 통치하기 위해 유주(幽州, 현 베이징)를 남경(南京)으로 삼았다.[1][8] 937년 태종은 국호를 거란에서 '''요(遼)'''로 변경하고 중국식 관제를 도입했다.[8]
후진 고조(高祖) 석경당은 재위 기간 내내 요나라에 극히 순종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그는 스스로를 '신하(臣)', '아들(兒)'이라 칭하고 태종을 '아버지 황제(父皇帝)'라 불렀으며, 요나라의 칙서를 받을 때는 황궁 정전이 아닌 곁채에서 받는 등 예를 다했다. 또한 요나라 황제와 술률평 황태후의 생일 등 주요 행사 때마다 막대한 선물을 보냈다.[8] 이 덕분에 석경당 재위 기간 동안 요나라와 후진 사이에는 큰 충돌이 없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안충용(安忠榮)처럼 요에 적대적인 세력도 존재했으며, 그는 요나라 사신을 살해하는 등 도발을 감행하기도 했으나 석경당에 의해 제지되었다.[9] 941년 안충용은 안종진(安從進)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다.[10]
942년 석경당이 병사하고 그의 조카 석중귀(石重貴)가 후진 출제(出帝)로 즉위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석중귀는 석경당과 달리 요나라에 대해 신하로 칭하기를 거부하고 대등한 관계를 주장했다. 이는 요 태종을 자극했고, 양국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945년 태종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남하했으나 후진군에게 패배하기도 했다. 술률평 태후는 화친을 권했지만 태종은 듣지 않았다.
946년 요나라 장수 조연수(趙延壽)가 후진에 투항하려 한다는 거짓 정보에 속은 후진은 대규모 북벌군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는 요나라의 함정이었고, 두중위(杜重威)와 이수진(李守貞)이 이끄는 후진 주력군은 중도교(中度橋, 현 허베이성 보정)에서 태종이 이끄는 요나라 대군에게 포위되어 항복했다.[12] 주력군을 잃은 후진의 수도 개봉(開封)은 무방비 상태가 되었고, 석중귀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후진은 건국 10년 만에 멸망했다.[12]
947년 정월, 태종은 개봉에 입성하여 국호를 '''대요(大遼)'''로 선포하고 연호를 대동(大同)으로 바꾸며 스스로 중국 황제임을 선언했다.[13] 그는 석중귀를 '의를 저버린 후작'이라는 뜻의 복의후(負義侯)로 봉하고 요나라 북방으로 유배 보냈다.[13] 그러나 태종의 중원 통치는 순탄치 않았다. 그는 요나라 군대의 약탈 행위, 이른바 '타초곡(打草穀)'을 용인하여 점령지의 민심을 크게 잃었다. 이로 인해 한족(漢族) 백성들의 생활은 파탄 지경에 이르렀고, 요나라에 대한 저항이 거세게 일어났다.[13] 특히 하동절도사였던 유지원(劉知遠)은 태원에 근거하여 황제를 칭하고 후한(後漢)을 건국하며 요나라에 맞섰다. 각지에서 반란이 잇따르자 태종은 "중국 백성이 이렇게 다스리기 어려운 줄 몰랐다"고 한탄하며 중원 통치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13]
같은 해 늦봄, 태종은 개봉을 떠나 북쪽으로 돌아가던 중 하북성의 난성(欒城)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46세였다.[13] 그의 어머니 술률평 태후는 아들의 시신을 보고 화친 제의를 무시하고 무리한 남정을 강행한 것을 책망했다고 전해진다.
2. 3. 중원 통치와 죽음
후당의 석경당은 태종의 지원을 받아 936년 후진을 건국하고, 그 대가로 연운십육주를 할양하며 매년 비단 30만 필을 조공으로 바치기로 약속했다.[7] 이로써 후진은 사실상 요나라의 위성국가가 되었으며, 석경당은 재위 기간 내내 태종에게 신하이자 아들을 자처하며 극진히 섬겼다.[8] 태종은 새로 얻은 16주를 통치하기 위해 유주(幽州, 현재의 베이징)를 남쪽 수도(南京)로 삼았다.[1]942년 석경당이 죽고 그의 조카 석중귀가 후진의 2대 황제(출제)로 즉위하자 상황이 변했다. 석중귀는 석경당과 달리 요나라에 대한 신하로서의 관계를 거부하며 독립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에 945년 태종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남하했으나 후진군에게 패배했다. 어머니 술률평은 화친을 권했지만 태종은 듣지 않았다.
946년 후진의 장수 두충위와 이수정이 북벌군을 이끌고 요나라를 공격했으나, 태종이 이끄는 요나라 대군에게 중도교(中度橋)에서 포위되었다. 태종은 항복하면 두충위를 황제로 세워주겠다고 약속했고, 두충위와 이수정은 군대를 이끌고 항복했다.[12] 후진의 주력군이 와해되자 수도 개봉(開封)은 무방비 상태가 되었고, 석중귀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후진은 멸망했다.[12]
947년 1월 25일(음력 1월 1일) 태종은 개봉에 입성하여 국호를 '대요(大遼)'로 바꾸고 연호를 대동(大同)으로 정했으며, 스스로 중국 황제임을 선포했다.[13] 그는 후진의 황제 석중귀에게 '복의후'(伏義侯, 의를 저버린 후작)라는 모욕적인 칭호를 내리고 요나라의 황량한 땅으로 유배보냈다.[13] 태종은 개봉에 머물며 조연수, 소한 등 요나라 장수와 관리들을 통해 통치하려 했으나, 점차 가혹한 통치로 민심을 잃었다. 특히 요나라 군대가 보급품을 현지에서 약탈하는 '타초곡'(打草穀, 풀 베기) 정책은 한족 백성들의 큰 반발을 샀으며, 이로 인해 많은 백성이 죽거나 피난해야 했다.[13] 또한 백성들의 재산을 강제로 징수하여 요나라로 가져가려 하면서 한족의 반감은 더욱 커졌다.[13]
이러한 혼란 속에서 하동절도사였던 유지원은 947년 태원에서 황제를 칭하고 후한을 건국했으며, 요나라에 저항하는 세력의 구심점이 되었다.[13] 허베이성, 산둥성, 허난성 등지에서 요나라의 통치에 저항하는 농민 봉기와 지방 세력의 반란이 잇따랐다.[13]
점증하는 저항에 부딪힌 태종은 "중국 백성이 이렇게 다스리기 어려운 줄 몰랐다"고 한탄하며[13] 947년 늦봄, 개봉을 포기하고 북쪽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는 소한에게 개봉 방어를 맡겼다.[13] 철수 도중 태종은 자신의 통치 방식에 대해 "나는 세 가지 잘못을 저질렀다. 그래서 나라가 나에게 반기를 드는 것이 당연하다! 첫째, 나는 각 도(道)에서 돈을 징수했다. 둘째, 나는 큰 제국의 군사들에게 곡식을 밟게 했다. 셋째, 나는 군사 총독들을 더 빨리 그들의 도로 돌아가게 하지 않았다."라고 후회하기도 했다.[13] 그러나 허베이성 란성(欒城, 현재의 스자좡시 란청구) 부근에서 병세가 악화되어 고열에 시달리다 947년 5월 사망하였다. 향년 46세였다.[13] 거란군은 그의 시신이 부패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배를 갈라 내장을 제거하고 소금에 절여 운구했는데, 이 때문에 한족들은 그를 '말린 황제'(帝羓)라고 조롱했다.[13] 태종 사후, 그의 조카인 야율완이 혼란 속에서 요나라의 3대 황제(세종)로 즉위했다.[13][14] 요나라는 결국 후진으로부터 빼앗았던 중원 영토 대부분을 유지하지 못하고 후한에게 넘겨주게 되었다.[14]
3. 연운십육주 획득과 그 영향
936년, 후당에서는 황제 이종가([7] 원문에는 이존욱으로 표기됨)가 매부이자 하동절도사(산서성 태원 소재)인 석경당의 반란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 일부 신하들은 석경당이 거란의 지원을 받을 것을 우려하여 거란과의 동맹을 건의했으나, 다른 신하 설문우(薛文遇)가 태종이 혼인 동맹을 요구할 것이라며 반대하자 이종가는 동맹 제의를 철회했다.[7]
얼마 후, 이종가는 설문우의 제안에 따라 석경당을 하동절도사에서 천평절도사(산둥성 태안 소재)로 이동시키라는 조서를 내렸다. 이는 사실상 석경당을 제거하려는 의도였기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석경당은 936년 여름 반란을 일으켰다. 후당의 장경달이 이끄는 토벌군이 하동을 공격하자, 석경당은 거란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그는 태종이 자신을 중국 황제로 세워준다면 아버지처럼 섬기고, 탁록(베이징 소재)과 연문관 북쪽의 하동 지역, 즉 연운십육주를 할양하겠다고 약속했다. 태종은 이 제안을 크게 기뻐하며 술율평 황태후에게 하늘의 뜻이라 말하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석경당을 돕겠다고 답했다.[7]
장경달의 후당군은 하동의 수도 태원을 포위했지만, 태원은 굳건히 버텼다. 936년 가을, 태종은 직접 5만 명의 기병(대외적으로는 30만 명이라 선전)을 이끌고 남하하여 태원에 도착했다. 그는 신중론을 펴는 석경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즉시 장경달의 군대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태원의 포위를 풀었다. 패퇴한 후당군은 태원 근처 진안채(晉安寨)에 진을 쳤으나, 곧 거란과 석경당 연합군에게 포위되었다. 태종은 진안채를 포위한 상태에서 석경당을 황제로 즉위시키니, 이것이 바로 후진이다. 석경당은 즉위 선언에서 16주를 거란에 할양하고 매년 막대한 양의 비단을 조공으로 바치겠다고 공표했다.[7]
한편, 후당의 이종가는 탁록절도사 조덕균에게 군대를 주어 진안채의 장경달을 구원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조덕균은 스스로 황제가 될 야심을 품고 태종에게 비밀리에 접근하여, 자신이 황제가 되면 거란과 형제 관계를 맺고 석경당에게는 하동 지역만 다스리게 하겠다고 제안했다.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조덕균의 제안에 태종은 잠시 흔들렸으나, 석경당의 측근 상유한이 찾아와 연합군의 승리를 확신하며 석경당을 저버리지 말 것을 간청하자, 태종은 상유한의 주장을 받아들여 조덕균의 제안을 거절했다.[7]
진안채는 3개월간 포위되어 식량이 고갈되었고, 결국 장경달의 부하 양광원이 장경달을 살해하고 남은 군대를 이끌고 항복했다. 태종은 항복한 후당군을 석경당에게 넘겨주었고, 이들은 후당의 수도 낙양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양광원의 항복 소식에 조덕균의 군대는 사기가 꺾여 와해되었고, 조덕균 역시 항복했다. 북쪽에서 구원군을 이끌고 왔던 이종가는 낙양으로 돌아갔으나, 이미 대세가 기울고 많은 장수들이 배반했음을 깨달았다. 태종은 석경당을 로주(산서성 장치 소재)까지 호위한 뒤, 거란군이 직접 낙양에 입성하면 한족들이 동요할 것을 우려하여 로주에 머물고 석경당만 낙양으로 보냈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이종가는 결국 가족들과 함께 자살했으며, 자살 직전 망명해 있던 태종의 형 야율배를 처형했다. 석경당은 낙양에 입성하여 후진의 통치를 확립하고, 야율배의 관을 정중히 거란으로 보냈다.[7] 태종은 자신이 사로잡았던 후당의 장수 여럿을 데리고 거란 본토로 돌아갔다.[1] 그는 새로 획득한 16주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유주(베이징)를 남경(南京)으로 삼았다. 또한 사로잡힌 후당 관리 장려를 중용하여 그의 조언을 경청했다.[8]
937년, 후진의 남동쪽 이웃 나라인 오의 실권자 서지고(훗날 남당 건국자 이변)가 거란에 사신을 보내 우호 관계 수립을 시도했고, 태종 역시 오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같은 해 말, 태종은 국호를 거란에서 '''요(遼)'''로 변경하고, 중국식 관료제를 도입하여 조연수(조덕균의 아들)를 추밀사이자 재상으로 삼는 등 체제를 정비했다. 이후 서지고가 오나라 황위를 찬탈하고 남당을 세운 뒤에도 요나라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 했으나, 요나라 사신이 후진 영토를 통과할 때 암살하여 후진에게 책임을 떠넘김으로써 요와 후진의 관계를 악화시키려 시도하기도 했다.[8]
석경당은 후진 황제로 있는 동안 요나라에 극도로 복종적인 태도를 보였다. 938년에는 태종과 술율평 황태후에게 존호를 올리기 위해 고위 관리인 풍도와 유구를 요나라 조정에 파견했다. 그는 스스로를 '신하'이자 '아들'로 칭하며 태종을 '아버지 황제'(皇父)라 불렀고, 태종의 조서를 받을 때는 정전이 아닌 곁채에서 받는 등 극진한 예를 갖추었다. 또한 요나라 황제와 황태후의 생일, 요나라 고위 관리들의 사망 시에는 술율평 황태후, 야율리호(耶律李胡), 야율안단(耶律安端) 등 황족과 조연수, 한연휘(韓延徽) 등 핵심 한인 관료들에게도 막대한 선물을 보냈다. 태종이 거만한 내용의 조서를 보내도 석경당은 순종적으로 응대하여,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요와 후진 사이에는 큰 분쟁이 없었다.[8]
그러나 후진 내부에서는 이러한 굴종 외교에 대한 불만이 존재했다. 938년, 석경당은 통제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천웅군절도사(허난성 한단 소재) 양광원을 하양군절도사(허난성 낙양 소재)로 이동시켰는데, 이 이동으로 인해 양광원은 후진 조정에 불만을 품고 비밀리에 요나라와 내통하기 시작했다.[8] 939년에는 성덕군절도사(허베이성 석가장 소재) 안중영의 반란 가능성을 우려하여 인접 지역 절도사를 이동시키는 과정에서, 태종이 의무군절도사(허베이성 보정 소재) 자리에 자신의 측근인 왕위(王威)를 임명하려 개입했으나 석경당이 거부하자 크게 분노하기도 했다. 석경당은 결국 많은 공물을 바치고 왕도의 종손인 왕정윤(王廷胤)을 임명하는 선에서 태종을 달랬다.[9]
안중영은 요나라에 대해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며, 성덕군을 지나는 요나라 사신들을 모욕하거나 살해하기도 했다. 940년에는 요나라 사신을 억류하고 석경당에게 요나라에 대한 복종을 중단하고 항전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상유한은 요나라와의 전쟁이 무익함을 지적하며 태종을 "다른 이들보다 뛰어나게 총명하고 용맹하다"고 평가했고, 석경당은 상유한의 조언에 따라 안중영을 달래는 한편, 요나라에는 안중영의 행동이 후진의 전반적인 복종 기조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해명하는 사신을 보냈다.[9]
941년 겨울, 안중영의 동맹인 산남동도절도사(후베이성 양양 소재) 안종진이 후진에 반기를 들자 안중영도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석경당의 매부 두중위가 이끄는 후진군에게 신속하게 진압되었고, 안중영은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석경당은 안중영의 목을 요나라에 보냈다.[10]
안중영의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태종은 요나라에 할양한 영토의 토욕혼 부족민들이 후진으로 망명하는 문제를 계속 제기하며 석경당을 압박했다. 이로 인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석경당은 병을 얻어 942년 여름 사망했다. 후진 조정에서는 풍도와 근위대 장군 경연광 등이 논의 끝에 석경당의 어린 아들 석중예(石重睿) 대신 성인이었던 양자이자 조카 석중귀를 황제로 추대했다.[10]
석중귀는 석경당과 달리 요나라에 대해 강경한 자세를 취하며 신하로서의 예를 갖추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태종은 944년부터 후진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947년 초에는 후진의 수도 개봉(개봉)을 함락시키고 석중귀를 사로잡았다. 태종은 조연수와 두중위에게 했던 약속을 저버리고 스스로 중국 황제를 선포했다. 그는 석중귀에게 '의를 저버린 후작'이라는 뜻의 복의후(伏義侯) 작위를 내리고 요나라의 황량한 지역으로 유배 보냈다. 대부분의 후진 관료와 절도사들이 태종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일부 서쪽 변방 지역에서는 요나라의 통치를 거부했다. 태종은 후진 황실 군대를 학살하려 했으나, 조연수가 이는 후촉이나 남당의 침입을 유발할 뿐이라고 만류하자 생각을 접었다. 그는 항복한 절도사들을 수도에 억류하고 요나라 장수들을 각지에 파견하여 통치를 공고히 하려 했다. 그는 "우리는 중국을 잘 알지만, 너희는 우리 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며 자신감을 드러냈고, 술율평 황태후가 축하 연회를 위해 보내온 포도주를 마실 때는 황태후에 대한 예를 갖추어 일어서서 마셨다고 전해진다.[13]
그러나 태종의 중국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요나라 군대의 보급을 위해 세금을 걷는 대신, 군인들에게 약탈을 허용하는 이른바 '타초곡(打草穀)' 정책을 시행했다. 이로 인해 수많은 한족 백성들이 죽거나 재산을 빼앗겼고, 살아남은 이들은 참호에 숨어 지내야 했다. 수도 개봉과 낙양을 비롯하여 정주(정주), 화주(안양), 조주(허쩌), 복주(복주) 등 주요 도시들이 황폐화되었고, 민심은 급격히 이반하여 요나라 군대를 몰아내려는 움직임이 거세졌다.[13]
이러한 혼란 속에서 하동절도사 유지원은 태종에게 즉시 항복하지 않고 상황을 관망하다가, 947년 태원에서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여 후한을 건국했다. 경남의 통치자 고종회와 남당의 황제 이경 등 주변국의 군주들도 유지원을 지지하거나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요나라에 대항하는 반란이 각지에서 일어나자 태종은 "중국 백성이 이렇게 다스리기 어려운 줄 몰랐다"고 한탄하며 통치의 어려움을 토로했다.[13]
결국 947년 늦봄, 계속되는 반란에 지친 태종은 북방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관리들을 모아놓고 여름이 다가와 머물기 어려우니 요나라 본토로 돌아가 황태후께 조공을 드리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후진의 고위 관리들만 데리고 가고, 매부인 소한을 선무군절도사로 임명하여 개봉의 수비를 맡긴 채 북쪽으로 철수했다.[13] 연운십육주 획득은 요나라가 중국 북부를 장악하고 중원 왕조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지만, 태종의 직접적인 중국 통치 시도는 한족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실패로 돌아갔다.
4. 가계
요 태종의 가계는 요나라 황실의 구성과 권력 계승 구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직계 가족으로는 아버지 야율아보기와 순흠황후 술율평, 형 예루 베이, 동생 예리리후 등이 있으며, 배우자와 여러 자녀를 두었다. 태종은 어머니 술율평에게 지극한 효성을 보였다고 전해지며, 황태후가 병들어 식사를 못하면 그도 함께 먹지 않았고, 어머니가 노하시면 어머니의 기분이 풀릴 때까지 감히 뵙지 못했다고 한다.[2] 930년에는 동생 예리리후를 황태자로 책봉하기도 했다.[1] 자세한 가족 구성원에 대한 정보는 아래 관련 하위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4. 1. 부모
- '''조부''': 덕조(德祖) 선간황제(宣簡皇帝) 야율살랄적(耶律撒喇的)
- '''조모''': 선간황후(宣簡皇后) 소암모근(蕭巖母斤)
- '''부친''': 태조(太祖) 대성황제(大聖皇帝) 야율아보기(耶律阿保机)
- '''모친''': 순흠황후 술율평(述律平)
야율덕광(耶律德光)은 요(遼) 건국 이전인 902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훗날 요 태조가 되는 야율아보기이며, 어머니는 순흠황후 술율평이다. 그는 야율아보기와 술율평 사이의 둘째 아들이었다. 『요사(遼史)』에 따르면 젊은 시절 그는 진중한 외모와 온화한 성품을 지녔으며, 부모의 국가 통치에 자주 참여했다고 한다.[1]
4. 2. 형제
요 태종에게는 형 예루 베이(耶律倍)가 있었다. 926년, 아버지 요 태조가 발해를 정복한 후 옛 발해 영토에 동단국을 세우고, 수도를 부여(夫餘, 현재 길림성 사평시)로 정했다.[2] 태조는 장남인 예루 베이를 동단국의 왕으로 임명하고 인황왕(人皇王)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동시에 차남인 예루 더광(훗날의 태종)에게는 황태자 대원수(皇太子大元帥) 칭호를 주고, 기존에 예루 베이가 담당하던 요나라 수도 임황(臨潢)의 관리를 맡겼다.[2]그러나 같은 해 태조가 갑자기 사망하자 상황이 급변했다. 어머니 술루 평(述律平) 황후는 실권을 장악하고 예루 더광을 더 총애하여 그를 황제로 세우려 했다. 그녀는 추장 회의를 소집하여 형식적으로 후계자를 결정하는 절차를 밟았는데, 추장들은 황후의 의중을 파악하고 예루 더광의 고삐를 잡아 그를 지지했다. 결국 술루 평 황후는 예루 더광을 황제(요 태종)로 선포했다.[2][4]
이 결정에 불만을 품은 예루 베이는 수백 명의 병사를 이끌고 남쪽의 후당으로 망명하려 했으나, 국경 수비대에 의해 저지되었다. 술루 평 황후는 그를 처벌하는 대신 동단국으로 돌려보냈다.[2][4]
4. 3. 배우자
봉호 | 시호 | 이름(성씨) | 별칭 | 재위년도 | 생몰년도 | 국구(장인/장모) | 능묘 | 비고 |
---|---|---|---|---|---|---|---|---|
황후(皇后) | 정안황후(靖安皇后) | 소온(蕭溫) | [16] | 927년 ~ 935년 | ? ~ 935년 | 소실로(蕭室魯) 야율 질고(耶律 質古) | 봉릉(奉陵) | 태종의 외사촌 |
궁인(宮人) | 소씨(蕭氏) |
태종은 즉위 후, 어머니 술뤼 황태후(述律)의 조카인 소온(蕭溫)을 황후로 책봉하였다.[1][2] 소온은 사후 정안황후(靖安皇后)로 추존되었다. 935년, 정안황후는 둘째 아들 야율엄살갈(耶律罨撒葛)을 낳은 후 병으로 사망하였다.[1] 태종은 정안황후 사후 다른 황후를 맞이하지 않았다.[6]
4. 4. 자녀
wikitext순서 | 봉호/작호 | 이름 | 생몰년도 | 생모 | 비고 |
---|---|---|---|---|---|
아들 | |||||
1 | 수안왕(壽安王) | 야율 경(耶律 璟) (야율 술률(耶律 述律)) | 931년 ~ 969년 | 정안황후 소온 | 제4대 황제 목종(穆宗). |
2 | 황태숙(皇太叔) | 야율 엄철갈(耶律 罨撒渴) | 935년 ~ 972년 | 정안황후 소온 | 시호는 흠정(欽靖).[17] |
3 | 야율 천덕(耶律 天德) | ? ~ 948년 | 궁인 소씨 | [18] | |
4 | 기왕(冀王) | 야율 적렬(耶律 敵烈) | ? ~ 979년 | 궁인 소씨 | 다른 이름은 파속금(派速堇). |
5 | 월왕(越王) | 야율 필섭(耶律 必攝) | ? ~ 973년 | 궁인 소씨 | 다른 이름은 잠금(箴堇). |
딸 | |||||
1 | 연국공주(燕國公主) | 야율 려불고(耶律 呂不古) | ? ~ ? | 출처 불명 | 소사온(蕭思溫)과 혼인하여 딸 셋을 낳았으며, 그중 하나가 소의황후이다. |
2 | 야율 조규(耶律 嘲瑰) | ? ~ ? | 출처 불명 |
참조
[1]
서적
History of Liao
[2]
서적
Zizhi Tongjian
[3]
서적
Bo Yang Edition of the Zizhi Tongjian
[4]
서적
History of Liao
[5]
서적
Zizhi Tongjian
[6]
서적
History of Liao
[7]
서적
Zizhi Tongjian
[8]
서적
Zizhi Tongjian
[9]
서적
Zizhi Tongjian
[10]
서적
Zizhi Tongjian
[11]
서적
Zizhi Tongjian
[12]
서적
Zizhi Tongjian
[13]
서적
Zizhi Tongjian
[14]
서적
Zizhi Tongjian
[15]
서적
遼史
[16]
문서
창덕황후(彰德皇后)
[17]
문서
태평왕(太平王)/제왕(齊王)
[18]
문서
반란으로 폐서인이 됨.
[19]
문서
국장공주(國長公主)
[20]
문서
요 경종의 황후 예지황후의 모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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