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대평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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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주-대평리 전투는 1950년 7월 한국 전쟁 중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키기 위해 미군 제24보병사단이 금강 방어선을 구축하면서 벌어진 전투이다. 미군은 공주 일대에서 제34연대, 대평리 일대에서 제19연대를 투입하여 북한군 제3, 4사단의 공격을 막으려 했으나, 14일 공주가 함락되고 16일 대평리마저 점령당했다. 국군 기병중대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금강 방어선 붕괴 이후 대전 전투로 후퇴했으며, 이 과정에서 군종신부와 부상병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이 전투는 북한군의 대전 공격 발판을 마련하고, 초기 지연전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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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대평리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전투 정보 | |
| 분쟁 | 전의 전투 |
| 전체 | 한국 전쟁 |
| 날짜 | 1950년 7월 13일 ~ 7월 16일 |
| 장소 | 세종특별자치시 대평동 |
| 결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 |
| 교전 세력 | |
| 교전국 1 | '' '' |
| 교전국 2 | '' |
| 지휘관 | |
| 군사력 | |
| 군대 1 | 미군 제24보병사단 19연대 미군 제24보병사단 34연대 국군 독립기갑연대 기병중대 |
| 군대 2 | 조선인민군 제3사단 조선인민군 제4사단 조선인민군 제105전차사단 |
| 사상자 | |
| 사상자 1 | 전사: 354 실종 및 포로: 185 |
| 전역 정보 | |
| 전역 상자 | '' |
2. 배경
한국 전쟁 발발 이후 북한군의 빠른 남진으로 인해 미군과 한국군은 낙동강 방어선 구축을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지연전을 펼치고 있었다. 금강 방어선은 이러한 지연전의 핵심 거점 중 하나였으며, 미 제24보병사단이 방어를 맡았다.
7월 12일부터 14일까지 공주에서, 7월 15일부터 16일까지 대평리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7월 12일에 금강을 건너 그 남안으로 철수하게 된 제24보병사단의 제34연대가 공주 일대, 제19연대가 대평리 일대에서 북한군 제3, 제4 양 사단의 도강 공격을 받았다.
3. 전투 경과
제24보병사단 제34연대는 7월 12일 금강을 건너 공주 일대에서 방어선을 구축했지만, 북한군 제3사단과 제4사단의 공격을 받았다. 육군 독립기갑연대 예하 기병중대가 미군 포병대를 지원하며 분전했지만, 수적 열세와 장비 부족으로 7월 14일 공주 방어선이 무너졌다.
제24보병사단 제19연대는 대평리에서 북한군 제3, 제4사단의 공격을 받았다. 7월 15일 저녁부터 북한군의 도하 공격이 시작되었고, 7월 16일 새벽 3시부터 시작된 2차 도하 공격으로 미군의 방어선이 뚫렸다. 특히, 조명 지원을 전담하던 제11포병대대의 실수로 20여 분간 조명 지원이 중단되면서 북한군이 도하에 성공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제19연대는 퇴로가 차단된 상황에서 큰 피해를 보며 철수해야 했다. 연대장 가이 S. 멜로이 주니어 대령은 부상을 입었고, 제1대대장 오토 T. 윈스테드 중령은 전사했다.
이후 미 제34연대가 금강 방어선을 재탈환하려 시도했으나, 북한군 제3사단과 제4사단의 협공으로 실패했고, 7월 20일에 방어선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3. 1. 공주 전투 (7월 12일 ~ 14일)
제24보병사단 제34연대는 7월 12일 금강을 건너 남쪽으로 철수하여 공주 일대에서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러나 북한군 제3사단과 제4사단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육군 독립기갑연대 예하 기병중대가 미군 포병대를 지원하며 분전했지만, 수적 열세와 장비 부족으로 인해 7월 14일, 공주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공주가 북한군에게 함락되었다.
3. 1. 1. 국군 기병중대의 활약
장철부 소령이 지휘하고 조철돈 소위가 현장 지휘를 맡은 육군 독립기갑연대 예하 기병중대는 삼교리에서 북한군에게 포위된 미 제63포병대대 B포대를 구출하고 퇴로를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이들의 활약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와 미 육군 군사(戰史) 연구소(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의 공식 전사(戰史) 기록 및 T. R. 페렌바크의 저서 "This kind of War"에도 기록되어 있다.
당시 상황에 대해 기병중대의 소대장이었던 조철돈 소위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 우리 중대가 유구전투(평택―조치원 부근의 전투 참조)를 치르고 공주로 복귀하던 중 12일 밤이 되었는데, 그때 이미 공주의 금강교는 끊어진 뒤였다. 그래서 금강 서안을 따라 밤새도록 말을 달려 이튿날 13일 아침에 부여대안에 도착, 그곳에서 배를 구해 부여로 도하하였다. 부여에서 공주로 가다가 지석리(부여 동북쪽 7.5km) 부근에서 하안정찰을 나왔다가 길을 잃은 미군 6명을 만나 함께 삼교리로 갔다. 그곳에는 포진지가 있었고, 서쪽 강변에는 미군수색중대와 공주경찰병력이 배치되어 있다고 하였다. 중대는 우금치(삼교리 동북쪽 1.8km) 남쪽에 중대본부를 두고, 우금치 서쪽 고지에 경계병력을 배치하였다.
> 14일, 중대본부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데, 고개 서쪽 고지에서 사격이 가해져서 급히 달려가 보니 적이었다. 그 고지의 적을 무찔렀는데 그동안에 삼교리의 포병진지가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포대를 구출하려고 달려갔으나, 이미 포대가 수라장이 된 뒤여서 적의 등을 찔러 포대와 합세를 하였을 뿐 적을 격퇴하지는 못하였다. 결국 포대와 함께 그곳에서 철수하게 되었는데, 105mm 곡사포 5문은 모두 공이를 뽑아 파괴하였다. 중대의 말(馬)에 미군 부상병을 싣고, 우리 병사들은 걸어서 동쪽의 논산도로로 빠졌는데, 도로에 나오니 미군 차량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그들을 후송해 갔다. 중대는 논산으로 집결하여 그날 밤을 보낸 뒤, 그곳에서부터 미 제34연대의 지휘를 벗어나 15일 여산―전주로 내려가 서남지구 전투사령부의 장악하에 들게 되었다.
미 육군 군사 연구소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한국군 기병대가 포병대 옆을 지나 서쪽으로 적을 공격했지만, 혼란이 너무 커서 포병 진지에 있던 누구도 이 개입의 결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페렌바크의 "This kind of War"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 다음은 B 포대의 차례였다. 400명의 적 보병이 포병 지역을 포위했고, 몇 분 동안 커스터의 마지막 저항과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그 후, 어디선가 나타나 적을 공격하기 위해 말을 타고 온 한국군 기병대가 서쪽에서 북한군을 공격하는 동안, 포병들은 행군 명령을 내렸다.
3. 2. 대평리 전투 (7월 15일 ~ 16일)
제24보병사단 제19연대는 대평리 일대에서 북한군 제3, 제4사단의 공격을 받았다. 7월 15일 저녁부터 북한군의 도하 공격이 시작되었고, 7월 16일 새벽 3시부터 시작된 2차 도하 공격으로 미군의 방어선이 뚫리기 시작했다.
당시 제11포병대대의 155mm 곡사포 1문이 조명 지원을 전담했는데, 조명 지역 수정 과정에서 20여 분간 조명 지원이 중단되는 실수가 발생했다. 이 틈을 타 북한군이 도하에 성공하여 강 남쪽에 발을 딛게 되었다.
이후, 제19연대는 퇴로가 차단된 상황에서 큰 피해를 보며 철수해야 했다. 연대장 가이 S. 멜로이 주니어 대령은 부상을 입었고, 제1대대장 오토 T. 윈스테드 중령은 전사했다.
3. 2. 1. 북한군의 금강 도하
7월 15일 저녁부터 북한군의 도하 공격이 시작되었고, 7월 16일 새벽 3시부터 제2차 도하 공격이 시작되면서 방어선이 뚫리기 시작했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1979년 발간한 한국전쟁 공식 전사(戰史)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7월 16일: 방어 제4일째인 이날, 드디어 금강선의 붕괴를 보게 되었다."
"1) 제1대대의 전선상황"
"적의 제2차 도하공격 : 이날 03:00, 고요에 잠긴 금강 상공에 적의 YAK기 1대가 나타나 조명탄 1발을 투하하였다. 이것이 그들의 공격개시 신호인 듯 적의 포병이 공격준비 사격을 실시하였다."
"이때 연대지휘소와 제1선진지일대에 쏟아진 적화의 치성함이란 연대장 Meloy 대령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Europe전선에서도 경험한 바 없는 것이었다고 술회할 정도였다."
"이어, 이렇듯 강력한 포화의 엄호아래, 작은 배와 뗏목을 저어 도하를 시작한 적은 예의 도섭과 수영의 모습도 보였다."
"이에 연대는 모든 화력을 집중하여 그들의 도하를 막았는데, 하늘 높이 포물선을 그리며 남북으로 엇갈리는 포탄과 비산하는 신호탄의 화편이 야공을 수놓은 장관을 이루었다. 연대는 조명탄을 쏘아 올려 수면을 대낮같이 밝히는 가운데 제13, 제52, 제11의 3개 포병 대대 30여 문의 곡사포와 중박격포 중대의 8문의 4.2”박격포를 비롯한 각종 중화기와 소화기로써 빈틈없는 화강을 구성하여 도강하는 적을 닥치는대로 격멸함으로써 강 남쪽으로의 적의 접안을 허락지 않았다."
"그런데, 이와 같이 하여 적이 쉽사리 강을 건너지 못하던 중, 결정적인 사태를 야기케 하는 뜻하지 않은 춘사가 돌발하였으니, 적의 움직임을 낱낱이 밝혀주던 조명탄이 꺼지고만 것이다."
"이는 당시 제11포병대대의 155mm곡사포 1문이 제1대대장의 지휘하에 조명지원만을 전담하였는데, 대대가 이 포의 조명지역에 약간의 수정을 요구한 바, 보통 1~2분이면 족할 이 요구를 과대하게 잘못 이해한 결과 포의 가신을 이동하면서 방위각을 수정하게 된 탓으로 20여 분 동안이나 조명지원이 중단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명지원이 끊겨 강산에 칠흑의 어둠이 덮히게 됨으로써 그 호기를 틈탄 적병이 속속 강 남안에 올라붙게 되었다. 이 정황이야말로 극히 불충분한 장비로써 강행도하에 성공한 일례가 될 것이고 초현대식 포병이 그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 실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적의 측방침투: 04:00에 대대 우제1선인 C중대(장,Henry T.McGill 중위) 진지에서 먼저 쟁탈전이 벌어졌다."
"괴화산 정상에 중대본부를 두고 북쪽 강변을 향하여 3개 소대를 배치한 중대는 강북의 미호천이 합류하는 동면 합강리(괴화산 동북쪽 3.5km) 부근에서 강을 건너 동쪽의 F중대와의 지극을 타고 우회한 적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대의 우측 제1소대(장,Thomas A.Maher 중위)가 동쪽으로부터 달려든 적의 습파를 네 차례나 물리쳤으나, 소대장 Maher 중위가 두부에 경기관총탄을 맞아 전사하는 등 사상자가 속출하여 진지가 무너지고 말았다. 이에 소대선임하사관이 12명의 소대원을 수습하여 중대본부로 철수하였는데, 중대장은 이들을 수용하여 고지정상의 진지를 강화하였다."
"그러자 적은 더 이상 중대를 공격치 않고, 고지의 동남쪽으로 돌아 장재리의 중박격포진지로 그 설봉을 돌리는 것이었다."
3. 2. 2. 퇴로 차단 및 연대의 철수
7월 16일 새벽,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의 기록에 따르면, 금강선의 붕괴가 시작되었다. 제1대대 전선에서는 북한군의 2차 도하 공격이 시작되었고, 연대장 멜로이(Meloy) 대령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선에서도 경험 못한 수준의 적 화력을 경험했다고 술회할 정도로 치열한 포격이 이어졌다.
연대는 모든 화력을 집중하여 북한군의 도하를 막으려 했으나, 조명탄 지원이 20여 분간 중단되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이 틈을 타 북한군이 강 남쪽으로 침투했고, C 중대에서 첫 교전이 벌어졌다. C 중대는 괴화산 동북쪽 3.5km 지점 합강리 부근에서 도하한 북한군의 공격을 받았고, 우측 제1소대장 토마스 A. 메이어(Thomas A. Maher) 중위가 전사하는 등 피해를 입고 진지가 무너졌다.
후방으로 침투한 북한군에 의해 퇴로가 차단되면서 제19연대는 혼란에 빠졌다. 13시 30분, 연대장 대리 윈스테드(Winstead) 중령의 철수 명령이 내려졌지만, 도로가 열리지 않아 병력은 흩어지기 시작했다.
18시, 연대 참모들은 부상당한 연대장 가이 S. 멜로이 주니어 대령을 구출하기 위해 경전차를 이용한 탈출을 결정했다. M-24 경전차 1대에 연대장을 태우고, J. N. 루시(J. N. Roush) 중위의 지휘 아래 북한군의 화력 차단선을 돌파했다. 경전차는 기관 고장으로 멈췄지만, 다행히 북한군의 화망을 벗어난 지점이었다. 연대장은 전차에서 내려 루시 중위에게 전차 파괴를 명령하고, 유성으로 철수 중이던 G 중대와 합류하여 수용 진지를 편성하도록 지시한 후 다른 부상병들과 함께 후송되었다. 잔여 병력은 S-3 보좌관 에드거 R. 펜스터마허(Edgar R. Fenstermacher) 대위가 통합 지휘하여 도보로 철수했다.
3. 2. 3. 군종신부와 부상병 학살 사건
연대장 일행이 적의 차단선을 강행돌파하여 탈출에 성공한 이후, 잔여 병력들이 각기 탈출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군종신부 허먼 G. 펠호엘터(Herman G. Felhoelter)와 30명의 부상병이 두만리 인근 야산에서 북한군에게 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1979년 발간한 한국전쟁 공식 전사(戰史) - [https://new.mnd.go.kr/user/imhc/upload/pblictn2/history_of_war_in_korea02/index.html '한국전쟁사 제2권 지연작전기' (pp. 491)] 에는 이 학살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원문에는 군목으로 오기하여 군종신부로 임의 수정하였음)
"잔여병력의 야간철수: 한편, 연대장 일행의 차량종대가 적의 차단선을 돌파한 뒤, 그 북쪽의 혼성병력에 대한 지휘를 맡게 된 펜스터마허(Fenstermacher) 대위는 어두워진 다음인 20:30을 전후하여 철수준비를 시작하였다. 그곳에는 500여명의 병력과 100여대의 차량이 집결중이었는데, 차량은 모두 파기키로 하고, 병력은 경부본도의 동쪽을 연한 고지의 능선을 따라 유성을 목표로 철수키로 하되, 보행이 어려운 중상자들은 들것으로 나르기로 하였다."
"그런데, 차량에 휘발유를 뿌려 소각 조치하고 그 화광이 충천하는 가운데 철수 제대를 편성하던 중 펜스터마허 대위가 적탄을 목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또 한 번 지휘자를 잃는 가운데 21:00에 남은 병력은 각기 제대별로 철수로를 찾아나서게 되었는데, 야간에 지형조차 생소한 산길을 택하여야만 되었던 그들의 참담한 정황에 대하여, 동년 7월 19일자 New York Herald Tribune 지가 보도한 바에 의하면 그 한 단면이 다음과 같았다."
"『……100여 명으로 추산되는 보병, 포병, 공병 및 의무대의 혼성병력이 도로 동쪽의 산으로 기어 올라갔다. 그들 중 30여 명은 부상자였으며, 들것에 누운 중상자도 여러 명 있었다. 그 중상자는 부상을 입지 않은 병사 40여 명이 들것으로 운반하였는데, 산을 오르는 동안에 들것을 운반할 병사들이 대오를 이탈하고 말았다. 산정에 이르러 남은 병사들은 더 이상 중상자들을 운반해 갈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중상자들을 그곳에 두고 떠나기로 결정되었다. 이에 허먼 G. 펠호엘터 군종신부가 자신도 그들과 함께 그곳에 남겠다고 하여 군종신부와 중상자만이 그곳에 남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적병이 고지 위로 뒤쫓아 왔다. 그러자 군종신부가 중상을 입은 군의관 린턴 J. 버트레이(Linton J. Buttrey) 대위에게 그곳을 빠져나가도록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버트레이 대위가 간신히 몸을 움직여 그곳을 빠져 나오자, 뒤이어 들이닥친 적병이 부상병을 위하여 기도를 올리고 있는 군종신부를 살해하였다. 본부중대의 제임스 W. R. 해스킨스(James W. R. Haskins) 상사가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으나, 그를 구할 수는 없었다.……』 이런 가운데 이들 철수 병력은 밤을 도와 남하하여 유성과 대전에 집결하게 되었는데, 그 이튿날인 17일에 대전에서 집결 재편된 병력은 당초 대평리 정면에 투입된 제19연대원 900여 명 중 434명뿐이었다."
3. 3. 미 제34연대의 재방어 시도와 실패 (7월 20일)
미 제24보병사단 제34연대는 금강 방어선을 재탈환하려 했으나, 북한군 제3사단과 제4사단의 협공을 받아 실패했고, 20일에 방어선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4. 결과 및 영향
제24보병사단 제34연대가 공주 일대, 제19연대가 대평리 일대에서 북한군 제3, 제4 양 사단의 도하 공격을 받아 7월 12일에 금강을 건너 그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7월 14일에 공주 정면의 제34연대 진지가 먼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공주가 북한군 수중에 들어갔고, 7월 16일에는 제19연대가 방어하던 대평리가 각각 북한군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제34연대가 다시 한번 적을 방어하려고 했지만 북한군 제3, 제4사단의 협공을 받아 7월 20일에 방어선이 무너졌다.
북한군은 금강 도하 시 정면의 아군을 화력으로 억류하면서 측방으로 우회하여 후방을 차단하는 수법을 써서 제19, 제34 양 연대의 전선을 돌파하고 금강 남쪽에 올라섰다. 전차 등 중장비가 공주 정면으로 도하하는 동안, 북한군 제4사단은 7월 16일에 논산을 점령하고 그 일부로 서쪽의 강경을 장악하여 후방을 제거한 다음 대전을 목표로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듯하였다. 북한군 제3사단은 대평리 부근에서 밤을 세워 유성으로 바로 공격할 태세를 갖추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결국 미군은 금강 방어선을 상실하고, 대전 방어에 집중하게 되면서 대전 전투로 이어지게 되었다.
5. 참가 부대 및 주요 지휘관
The Battle of Taejon영어에 참가한 주요 부대 및 지휘관은 다음과 같다.
하위 섹션의 내용과 중복되므로, 간략하게 요약된 형태의 표를 출력한다.
| 구분 | 주요 부대 | 주요 지휘관 |
|---|---|---|
| 미군 | 제24사단, 제19연대, 제34연대, 포병대대, 전차대대, 공병대대 등 | 윌리엄 F. 딘 소장, 가이 S. 멜로이 주니어 대령, 로버트 L. 워들링턴 중령, 밀러 O. 페리 중령 등 |
| 대한민국 국군 | 육군 독립기갑연대 기병중대 | |
| 조선인민군 | 제1군단, 제3사단, 제4사단, 제105전차사단 | 김웅 중장, 이영호 소장, 이권무 소장, 유경수 소장 |
5. 1. 미군
| 직책 | 이름 | 비고 |
|---|---|---|
| 제24사단장 | 윌리엄 F. 딘 | 소장 |
| 제19연대장 | 가이 S. 멜로이 주니어 | 대령, 7월 16일 부상 |
| 제19연대 제1대대장 | Otho T. Winstead | 중령, 7월 16일 전사 |
| 제19연대 제2대대장 | Thomas M. McGrajj | 중령 |
| 제34연대장 | Robert L. Wadlington | 중령 |
| 제34연대 제1대대장 | Harold B. Ayres | 중령 |
| 제34연대 제3대대장 | Newton W. Lantron | 소령 |
| 제13포병대대장 | Charles W. Stratton | 중령 |
| 제52포병대대장 | 밀러 O. 페리 | 중령 |
| 제63포병대대장 | William E. Dressler | 소령, 7월 13일부터 직무 수행 |
| 제11포병대대 | 155mm 곡사포 | |
| 제26대공포대대 A포대 | 일부 | |
| 제78전차대대 A중대 | 일부 | |
| 제3전투공병대대 | ||
| 사단수색중대 |
5. 2. 대한민국 국군
육군 독립기갑연대 기병중대 (미 제24사단 34연대 배속)5. 3. 북한군
북한군 제1군단장 김웅 중장의 지휘 아래 제3사단장 이영호 소장, 제4사단장 이권무 소장, 제105전차사단장 유경수 소장이 전투에 참여하였다.| 부대 | 지휘관 |
|---|---|
| 제1군단 | 김웅 중장 |
| 제3사단 | 이영호 소장 |
| 제4사단 | 이권무 소장 |
| 제105전차사단 | 유경수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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