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국민정신총동원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국민정신총동원은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일본 제1차 고노에 내각에 의해 1937년 8월 24일 시작된 국민 동원 운동이다. '거국일치', '진충보국', '견인불굴'의 슬로건 아래, 국민들의 전의를 고취하고 전쟁 수행에 협력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슬로건과 표어를 통해 사치 금지, 절약을 강조하고 국민 생활을 통제했으며, 1940년 대정익찬회에 흡수되어 소멸될 때까지 선전 활동을 지속했다. 이 운동은 한국에도 강제 동원, 민족 문화 말살, 내핍 생활 강요 등의 형태로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 내무성 - 국가신토
    국가신토는 일본 제국 시기 국가주의 이념을 지지하기 위해 신토를 활용한 관행으로, 황실신도와 신사신도를 결합한 형태이며,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 숭배를 강조하고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에 신사 참배를 강요하며 민족 정체성을 말살하려 했으나, 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해체되었다.
  • 쇼와 시대의 정치 (일본 제국) - 마쓰에 소요 사건
    마쓰에 소요 사건은 1945년 일본 항복 직후 마쓰에시에서 극우 단체 황국의용군이 일으킨 봉기로, 현청 방화 등 주요 시설 공격으로 민간인 사망과 시설 피해를 야기하며 종전 직후 사회 혼란과 극단적 민족주의 잔재를 드러낸 사건이다.
  • 쇼와 시대의 정치 (일본 제국) - 입헌정우회
    입헌정우회는 1900년 이토 히로부미가 창당한 일본 정당으로, 게이엔 시대를 거치며 원내 제1당 지위를 유지하고 하라 다카시 시대에는 정당 내각을 구성하는 등 전성기를 맞았으나, 이후 분열과 군부 영향력 확대로 1940년 해산되었다.
  • 1937년 일본 - USS 파나이 사건
    1937년 중일전쟁 중 일본군이 미국 해군 파나이호를 폭격하여 침몰시키고 미국인 사상자를 발생시킨 USS 파나이 사건은 외교적 긴장을 고조시켰으며, 일본의 사과와 배상에도 불구하고 공격의 고의성 논쟁이 남아있다.
  • 1937년 일본 - 하야시 내각
    하야시 내각은 하야시 센주로 육군 대장이 총리대신을 맡아 군부의 영향력 하에 출범한 내각으로, 국방력 강화를 명분으로 군사 예산 증액을 추진했으나 정당과의 불화와 정치적 혼란 속에 단명하여 "역사상 가장 무의미한 내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국민정신총동원
개요
국민 정신 총동원 운동 포스터
국민 정신 총동원 운동 포스터
유형사회 운동
국가일본 제국
시작1937년
종료1945년
목표전쟁 수행을 위한 국민 정신의 동원 및 결집
배경 및 목적
배경중일 전쟁 발발
목적전시 체제 강화
국민 정신의 함양 및 전쟁 협력 유도
생산력 확충 및 소비 절약
조직 및 활동
주체정부 (내각 정보부) 주도, 관변 단체 협력
주요 활동애국 교육 및 선전 활동 강화
근로 동원 및 생산 증강 운동 전개
생활 개선 운동 (절약, 저축 장려)
국방 사상 보급 및 군사 훈련 강화
황민화 정책 추진 (창씨개명 등)
구체적인 슬로건'사치는 적이다'
'저축으로 애국'
'결전 생활'
조직중앙: 국민정신총동원 중앙연맹
지방: 각 도도부현 및 시정촌에 지부 설치
영향 및 결과
긍정적 영향 (주장)전시 생산력 증대 기여
국민 통합 및 애국심 고취
부정적 영향 (비판)개인의 자유와 권리 억압
전체주의적 사회 분위기 조성
전쟁 동원 수단으로 이용
관련 법령
주요 법령국가총동원법
같이 보기
관련 항목대정익찬회
국민의례
애국반
황국신민서사
미나미 지로
야마모토 유조
아사히 신문
매일신문
요미우리 신문
관련 단체
관련 단체애국부인회
대일본부인회
국방부인회
기타
관련 서적새로운 애국 운동 실천 요령

2. 배경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중일 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은 장기전에 대비하고 국민들의 지지와 협력을 얻기 위해 국민정신총동원 운동을 시작했다. 제1차 고노에 내각은 "국민 정신 총동원 실시 요강"을 각의 결정하고, '거국 일치', '진충 보국', '견인 지구'[1]의 세 가지 슬로건을 내걸었다.

초기에는 정신 운동의 성격이 강했지만, 점차 국민복과 몸빼 차림을 장려하고 내핍 생활을 강요하는 등 구체적인 국책 협력을 중심으로 변화하였다. 1938년에는 은행과 회사의 상당수가 반돈을 반납하여 노동 강화를 진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의 하달형 운동은 한계에 부딪혀, 일반 사회에는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4]

1939년 "국민 정신 총동원 위원회"가 설치되면서 운동은 관민 양립으로 진행되었다.[1] 위원회는 유흥 영업 시간 단축, 네온사인 전폐, 중원·세모의 증여 폐지, 학생의 장발 및 파마 금지 등의 "생활 쇄신안"을 결정했다. 9월 1일부터는 매월 1일에 히노마루 도시락을 장려하는 흥아 봉공일이 설치되었다.[1][5]

1940년 운동 조직이 내각총리대신을 회장으로 하는 "국민 정신 총동원 본부"로 통합되면서, 상류 계급을 겨냥하는 전술로 바뀌어 일정한 효과를 거두었다.[1] 그 후, 국민 정신 총동원 본부는 대정익찬회에 흡수되었지만, 전의 앙양을 위한 선전은 계속되었다.

국민 정신 총동원 운동은 대내적으로 국제 수지 균형 확보를 위한 외화 획득 정책이 되었고, 대외적으로는 일본의 목적이 "팔굉일우", 즉 "동양의 왕도"에 기초하여 공산주의를 없애는 데 있음을 명확히 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2. 1. 중일 전쟁 발발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중일 전쟁이 본격화되었다.[1] 제1차 고노에 내각은 전쟁에 국민을 협력시키기 위해 그해 8월 24일 "거국 일치", "진충 보국", "견인 지구"[1]라는 세 가지 슬로건을 내걸고 "국민 정신 총동원 실시 요강"을 각의 결정했다.

2. 2. 국민정신총동원 실시 요강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 이후 중일 전쟁을 계기로 제1차 고노에 내각은 국민 전체의 전의를 앙양시키고 전쟁 수행에 협력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그해 8월 24일, "거국일치", "진충보국", "견인불굴"[1]의 세 가지 슬로건을 내걸고 "국민정신총동원 실시 요강"을 각의 결정하였다.

3. 전개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을 계기로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제1차 고노에 내각은 국민들의 사기를 높이고 전쟁 수행에 협력하게 만들기 위해 그해 8월 24일 '거국일치', '진충보국', '견인지구'[1]라는 세 가지 슬로건을 내걸고 '국민정신총동원 실시 요강'을 결정했다. 같은 해 9월 9일에는 내각 훈령을 발표했다.

초기에는 정신 운동의 성격이 강했지만, 점차 국민복 및 몸빼 차림을 남녀 제복으로 권장하는 등 구체적인 국책 협력을 중심으로 변화하며 국민들에게 절제하는 생활을 강요하게 되었다.

1939년 3월 28일, 관측 조직으로 "국민 정신 총동원 위원회"가 설치되었고[1], 운동은 관민 양립으로 진행되었다. 6월 16일, 국민 정신 총동원 위원회는 유흥 영업 시간 단축, 네온 전폐, 중원 및 세모의 증여 폐지, 학생의 장발 금지, 파마 폐지 등의 "생활 쇄신안"을 결정했다.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은 대내적으로 국제수지 균형 확보를 위한 외화 획득 정책이 되었고, 대외적으로는 일본의 목적이 서양의 패도가 아닌 "팔굉일우의 대 이상", 즉 "동양의 왕도"에 기초하여 "인류 공동의 적"인 공산주의의 절멸에 있음을 명확히 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후자의 역할이 다해졌다고는 보기 어렵다.

3. 1. 중앙 연맹 결성

1937년 10월 12일, 고참 군인 및 관료를 간부로 하는 국민정신총동원 중앙 연맹(아리마 료키치 회장)이 설립되었다.[1]

3. 2. 미디어를 활용한 선전

정부는 중일 전쟁태평양 전쟁과 같이 장기전과 물자 부족이 우려되던 시기에 "사치는 적이다!"와 같은 표어를 길거리, 신문 등에 게재하고, 팜플렛, 교육 영화, 라디오 등의 미디어를 활용하여 선전에 힘썼다.[3]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총후 지원, 군사 원호, 국민 저축 장려 등을 소재로 한 국책 가미시바이가 제작되어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상연되었다.

3. 3. 흥아봉공일

1939년 9월 1일부터 매월 1일을 '흥아봉공일'로 지정하였다.[1][5] 이날에는 히노마루 도시락을 장려하는 등 국민들의 희생을 요구하였다.

3. 4. 대정익찬회로 흡수

1940년 4월[1]에 운동 조직이 내각총리대신을 회장으로 하는 "국민정신총동원본부"로 일원화된 것을 계기로, 상류 계급을 겨냥하는 전술로 고쳐져, 일정한 효과를 거두었다. 국민정신총동원본부는 같은 해 10월[1], 낳은 아버지였던 고노에 후미마로를 중심으로 하는 신체제 운동의 움직임에 맞춰 대정익찬회에 흡수되어 소멸되었지만, 전의 고양을 위한 선전 자체는 사실상 계속되었다.

4. 주요 내용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 이후 중일 전쟁을 계기로 제1차 고노에 내각은 국민 전체의 전의를 고양하고 전쟁에 협력하게 할 목적으로, 그해 8월 24일 "거국 일치", "진충 보국", "견인 지구"[1] 세 가지 슬로건을 내걸고 "국민 정신 총동원 실시 요강"을 각의 결정하고, 9월 9일 내각 훈령을 발표했다. 10월 12일 아리마 료키치 회장을 중심으로 "국민 정신 총동원 중앙 연맹"이 설립되었고,[1] 10월 13일 제1회 국민 정신 총동원 강조 주간이 시작되었다.[2]

1938년 은행과 회사의 상당수가 반돈을 반납하며 노동 강화가 진행되었다.[4] 그러나 상의 하달식 운동의 한계로, 얼마 지나지 않아 일반 사회에는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1939년 3월 28일, 관측 조직으로 "국민 정신 총동원 위원회"가 설치되고(칙령 "국민 정신 총동원 위원회 관제" 공포),[1] 운동은 관민 양립으로 진행되었다. 9월 1일부터는 매월 1일 흥아 봉공일을 설치하여 히노마루 도시락을 장려하였다.[1][5]

1940년 4월[1] 운동 조직이 내각총리대신을 회장으로 하는 "국민 정신 총동원 본부"로 통합되면서, 상류 계급을 겨냥하는 전술로 전환하여 일정한 효과를 거두었다. 같은 해 10월,[1] 고노에 후미마로를 중심으로 하는 신체제 운동에 따라 대정익찬회에 흡수되어 소멸되었지만, 전의 고양을 위한 선전은 사실상 계속되었다.

국민 정신 총동원 운동은 대내적으로 국제 수지 균형 확보를 위한 외화 획득 정책이 되었고, 대외적으로는 일본의 목적이 "동양의 왕도"에 기초하여 "인류 공동의 적"인 공산주의를 없애는 데 있음을 명확히 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후자의 역할이 제대로 수행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4. 1. 슬로건 및 표어


  • 사치는 적이다![6]
  • 일본인이라면 사치를 할 수 없을 것이다![6]
  • 갖고 싶지 않다, 이길 때까지[6]
  • 석유|가솔린일본어 한 방울, 피 한 방울[6]
  • 도조 수상의 산술 "2+2=80"[6]
  • 파마는 그만둡시다[6]
  • 국민정신총동원[6]
  • 전진하라 1억 명, 불덩이로[6]
  • 성전을 완수하고, 동아를 일으키자[6]
  • 성전이다, 자신을 죽여 나라를 살리자[6]


이러한 표어에 대해, 일반 국민들 중에는 "사치는 적이다!"에 "멋" 자를 써서 "사치는 '''멋지다'''!"라고 조롱하는 등, 당시의 국책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을 시도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다만, 이러한 행위는 모두 익명으로 이루어졌으며, 누가 처음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6]

비슷한 캠페인은 1942년 이후 국민 결의의 표어로 이어졌다.[6]

4. 2. 국민 생활 통제

1937년 중일 전쟁을 계기로 제1차 고노에 내각은 국민 전체의 전의를 고양시키고 전쟁 수행에 협력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국민 정신 총동원 실시 요강"을 각의에서 결정하였다.[1]

장기전과 물자 부족이 우려되었던 중일 전쟁 및 이후 태평양 전쟁에 즈음하여 "사치는 적이다!" 등의 표어신문 등에 게재하는 것 외에, 팜플렛, 교육 영화, 라디오 등 미디어를 사용한 선전에 힘썼다. 당초에는 정신 운동의 성격이 강했지만, 이윽고 국민복 및 몸빼 차림을 남녀의 제복으로 권장하는 교화 운동 등, 구체적인 국책 협력을 중심으로 하게 되어 국민에게 내핍 생활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1939년 6월 16일, 국민 정신 총동원 위원회는 유흥 영업 시간 단축, 네온 전폐, 중원中元일본어과 세모歳暮일본어 증여 폐지, 학생 장발 금지, 파마 폐지 등의 "생활 쇄신안"을 결정했다.[1]

5. 비판 및 저항

국민정신총동원은 상의 하달식 운동의 한계와 강압적인 정책으로 인해 일반 사회에 불만이 쌓였다는 비판을 받았다.[1] "사치는 적이다!"라는 표어에 "멋" 자를 써서 "사치는 '''멋지다'''!"라고 조롱하는 등, 당시 국책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이 있었으나, 이러한 행위는 모두 익명으로 이루어졌으며 누가 처음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6]

5. 1. 국민들의 불만

상의 하달식 운동의 한계와 강압적인 정책으로 인해, 얼마 지나지 않아 일반 사회에는 불만이 쌓여갔다.[1]

5. 2. 익명의 저항

"사치는 적이다!"라는 표어에 "멋" 자를 써서 "사치는 '''멋지다'''!"라고 조롱하는 등, 당시의 국책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을 시도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다만, 이러한 행위는 모두 익명으로 이루어졌으며, 누가 처음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6]

6. 한국에 미친 영향

(이전 출력이 없으므로,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원본 소스와 함께 이전 출력을 제공해주시면 수정 작업을 진행하겠습니다.)

참조

[1] 웹사이트 # or other appropriate type based on what Kotobank is 国民精神総動員運動
[2] 서적 # or 간행물 安浦町史 通史編 安浦町史編さん委員会 2004-03-31
[3] 뉴스 全県に紙芝居網、国民精神総動員運動を推進 福岡日日新聞 1939-03-19
[4] 뉴스 大蔵省が率先して廃止決める 東京朝日新聞 1938-05-09
[5] 서적 # or 논문 1959
[6] 문서 # or 기타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