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거우차오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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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거우차오 사건은 1937년 7월 7일 밤, 중화민국과 일본 제국 간의 무력 충돌로 시작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며, 일본의 만주 침략 이후 고조된 양국 간의 긴장 속에서 발생했다. 일본군은 중국 내 병력을 증강하고 훈련을 강화했고, 루거우차오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7월 7일 밤, 일본군 병사 실종 사건을 계기로 양측 간의 무력 충돌이 시작되었고, 이는 베이핑-톈진 전투로 이어져 중일 전쟁의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사건 이후 중국 내 반일 감정이 격화되었고, 국민당과 공산당은 내전을 종식하고 대일 항전에 나섰다. 루거우차오 사건은 한국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의 계획적 도발 여부와 중국 공산당의 개입에 대한 논란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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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거우차오 사건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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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
명칭 | 루거우차오 사건 |
로마자 표기 | Lugouchao Sabeon |
한자 표기 | 盧溝橋事件 |
다른 명칭 | 칠칠사변 |
로마자 표기 | Chilchilsabeon |
개요 | |
일부 | 중일 전쟁의 초기 전투 |
관련 장소 | 베이징 근교 루거우차오 |
전투 정보 | |
날짜 | 1937년 7월 7일 ~ 1937년 7월 9일 |
장소 | 베이징 근교, 중화민국 |
결과 | "결과" 섹션 참고 |
교전 세력 | 중화민국 일본 제국 동쪽 허베이 |
지휘관 | 쑹저위안 친더췬 |
일본군 지휘관 | 다시로 간이치로 |
병력 (중국) | 교량에 100명, 증원군 900명 |
병력 (일본) | 5,600명 |
사상자 (중국) | 96명 사망 |
사상자 (일본) | 660명 사망 |
관련 부대 (중국) | 29군 |
관련 부대 (일본) | 지나주둔군 |
위치 정보 | |
이미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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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명칭
이 사건은 여러 국가에서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 서방측 명칭
- * 마르코 폴로 다리 사건/The Marco Polo Bridge Incident영어
- * 루거우 다리 전투/Battle of Lugou Bridge영어
- 일본 측 명칭
- * Rokōkyō Jiken/로코쿄 지켄/盧溝橋事件일본어: 로코쿄 사건
3. 배경
1931년 일본은 중국 북동부지역인 만주를 점령하고 괴뢰 정권인 만주국을 세웠고 다음해에는 열하성(熱河省)을 점령하였다. 이처럼 일본의 침략이 동북지방에 가속화되자 중국 내에서 점차 항일 운동이 확산되었으나 장제스는 먼저 중국 공산당을 분쇄하여 통일을 이루고 난뒤에 일본에 대항하자고 주장하며 대공산군 토벌작전에만 몰두하였다. 그러나 중국내, 특히 동북지방에서 반일운동이 거세게 전개되고 1936년 동북군 사령관 장쉐량이 시안 사건을 일으키자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은 내전의 중단에 합의하고 일본의 침략에 공동으로 대응하려는 두번째 국공합작을 구축했다.
루거우차오는 마르코 폴로 다리라고도 부르는데 이 다리는 전략적으로 베이징과 연결되는 중요한 거점으로 사건발발 당시 일본군은 서쪽을, 국민당군은 동쪽을 관할하고 있었다.
일본 제국과 중화민국 사이의 긴장은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폐위된 청나라 황제인 푸이를 국가 원수로 하는 괴뢰 국가 만주국의 수립 이후 고조되었다.[13] 침략 이후 일본군은 원자재와 산업 능력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 북부로 통제 범위를 확대했다. 국제 연맹의 조사 위원회는 일본을 비판하는 리턴 보고서를 발표했고, 이로 인해 일본은 국제 연맹을 탈퇴했다.[14]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만주국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1933년 일본과 탕구 휴전에 동의했다. 그 후, 제한적인 성격의 다양한 "사건", 즉 무력 충돌이 있었고, 이어서 불안한 평화가 찾아왔다. 루거우차오 사건의 중요성은 이 사건 이후 긴장이 다시 완화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신 양측 모두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하고 중국의 다른 지역으로 전투가 확산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따라서 사후에 이 작은 사건은 주요 분쟁의 시작으로 간주될 수 있다.[15]
1901년 9월 7일의 의화단 의정서 조항에 따라, 중국은 베이징에 공관을 둔 국가에 베이징과 톈진을 연결하는 철도 12개 지점에 경비병을 주둔시킬 권리를 부여했다. 이는 수도와 항구 간의 원활한 통신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1902년 7월 15일의 부속 협정에 따라, 이 병력은 중국 내 다른 국가의 당국에 알리지 않고 기동 훈련을 할 수 있었다.[16]
1937년 7월까지 일본은 중국 내 병력을 철도 주변을 중심으로 추산 7,000명에서 15,000명으로 확장했다. 이 병력의 수와 상당한 양의 군수품은 유럽 열강이 배치한 병력 규모의 몇 배였으며, 의화단 의정서에 의해 설정된 제한을 크게 초과했다.[16] 이 시점까지 일본 제국군은 이미 베이징과 톈진을 포위한 상태였다.
3. 1. 1930년대 동아시아 정세
1931년 일본의 만주 침략(만주사변)과 1932년 괴뢰 국가 만주국 수립으로 일본 제국과 중화민국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다.[13] 일본은 만주를 발판 삼아 중국 북부로 세력을 확장하려 했고, 이는 국민당 정부와 갈등을 일으켰다. 국제 연맹은 일본을 비판하는 리턴 보고서를 발표했고, 일본은 국제 연맹을 탈퇴했다.[14]국민당 정부는 만주국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1933년 일본과 탕구 휴전에 동의했다. 그 후에도 여러 무력 충돌이 있었고, 불안한 평화가 이어졌다.[15] 장제스는 먼저 중국 공산당을 분쇄하여 통일을 이루고 난 뒤에 일본에 대항하자고 주장하며 대공산군 토벌작전에만 몰두하였다. 그러나 중국내, 특히 동북지방에서 반일운동이 거세게 전개되고 1936년 동북군 사령관 장쉐량이 시안 사건을 일으키자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은 내전의 중단에 합의하고 일본의 침략에 공동으로 대응하려는 두번째 국공합작을 구축했다.
1937년 2월에 개최된 중국 국민당의 3중전회의 결정에 따라 난징 정부는 국내 통일의 완성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38] 산시성의 옌시산에게 민중을 선동하여 반 옌시산 운동을 일으키고[39], 리쭝런과 바이충시를 중앙에 굴복시켰으며[40], 쓰촨성 정부 주석 류샹은 중앙에 대한 복종을 선언했다.[41] 쑹저위안의 지차 정부에는 제29군의 국군화 요구와 금융 문제로 압력을 가했다.[42]
한편, 난징 정부는 1936년 봄부터 각 중요 지점에 대일 방비의 군사 시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43] 상하이 휴전 협정으로 금지된 구역 내에도 군사 시설을 건설하고, 보안대의 인원도 소정의 인원을 넘어 군대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항의했지만 중국 측에서는 성실한 답변이 나오지 않았다.[44] 산둥성 정부 주석 한푸쥐에게 호소하여 대일 군사 시설을 준비하게 하고, 일본의 시설이 많은 산둥 지역에 5개 사단을 집중시켰다.[45][46] 메즈-허잉친 협정에 의해 국민 정부의 중앙군과 당부가 허베이에서 퇴거한 후, 국민 정부는 다수의 중견 장교를 국민혁명군 제29군에 침투시켜 항일의 기운을 철저히 하기도 했다.[47]
대장정으로 알려진 중공군의 장시 근거지로부터의 대서천으로 인해 1935년 가을 산시성으로 이동한 중공군은 주력 부대의 집결을 기다리지 않고 2만여 명의 전 병력을 동원하여 1936년 2월 17일 돌연 산시성 내로 진출했다.[75] 중공군은 산시군의 3분의 1을 점령했다.[75]
쑹저위안은 공산군의 허베이성 및 차하얼성 침입을 막기 위해 1936년 3월 29일, 다다 주둔군 사령관과 비밀 협정을 체결했다.[77][78]
일본은 1936년 4월 17일, 히로타 내각 각의를 통해 지나 주둔군의 증강을 결정했다.[78] 증강된 지나 주둔군의 일부를 퉁저우에 주둔시켜 지둥 방위의 태세를 확립하려는 안이었지만, 퉁저우 대신 베이징 서남 4킬로미터의 펑타이에 주둔군의 일부(1개 대대)를 배치하게 되었다.[82] 펑타이 주병은 중국 외교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으며, 중국군 병영과도 가까워 루거우차오 사건의 원인으로 지적되어 왔다.[84]
1901년 9월 7일의 의화단 의정서 조항에 따라, 중국은 베이징에 공관을 둔 국가에 베이징과 톈진을 연결하는 철도 12개 지점에 경비병을 주둔시킬 권리를 부여했다. 1902년 7월 15일의 부속 협정에 따라, 이 병력은 중국 내 다른 국가의 당국에 알리지 않고 기동 훈련을 할 수 있었다.[16] 1937년 7월까지 일본은 중국 내 병력을 철도 주변을 중심으로 추산 7,000명에서 15,000명으로 확장했다. 의화단 의정서에 의해 설정된 제한을 크게 초과했다.[16]
3. 2. 국공 합작과 항일 여론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고 괴뢰 정권인 만주국을 세운 이후, 동북지방을 중심으로 중국 내 항일 운동이 확산되었다.[13][14] 그러나 장제스는 '선(先) 국내 안정, 후(後) 대외 항전' 정책을 내세워 공산당 토벌에 집중했다.1935년 7월 25일부터 개최된 제7차 코민테른 대회에서는 서양에서는 독일, 동양에서는 일본을 목표로 하고[32][33], 세계적으로 인민 전선을 결성한다는 결의를 하였다.[34] 특히 중국에서는 항일 전선이 중요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34] (코민테른 지령 1937년도 참조). 코민테른 지부인 중국 공산당은 이 방침에 따라 8월에는 "항일 구국을 위해 전국 동포에게 고하는 글(팔·일 선언)"을 발표하고, 1936년 6월경까지 광범위한 계층을 포함하는 항일 인민 전선을 완성했다.[34] 1935년 11월에 일어난 중산 수병 사살 사건, 1936년 8월 24일에 청두 사건, 9월 3일에 베이하이 사건, 9월 19일에 한커우 일본인 순사 피살 사건, 9월 23일에는 상하이 일본인 수병 저격 사건 등 항일 운동이 잇따라 발생했다.[35]
1936년 장쉐량이 일으킨 시안 사건을 계기로,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은 내전을 중단하고 일본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한 제2차 국공 합작을 구축했다.[36] 시안 사건 다음 달인 1937년 1월 6일, 중화민국 난징 정부는 국부령으로 공산군 토벌을 담당했던 서북 초비 사령부의 폐지를 발표했다.[37]
3. 3. 전략적 요충지, 루거우차오
루거우차오는 마르코 폴로 다리라고도 불리며, 베이징과 연결되는 중요한 거점으로 전략적 요충지였다.[13] 사건 발생 당시 일본군은 루거우차오 서쪽을, 국민당군은 동쪽을 관할하고 있었다.[13]1931년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고 괴뢰 정권인 만주국을 세우면서, 일본과 중화민국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다.[13] 이후 일본은 중국 북부로 통제 범위를 확대했고, 국제 연맹은 리턴 보고서를 통해 일본을 비판했지만 일본은 국제 연맹을 탈퇴했다.[14] 중국 국민당 정부는 만주국을 인정하지 않고 1933년 일본과 탕구 휴전에 동의했지만, 이후에도 무력 충돌이 계속되었다.[15]
1901년 의화단 의정서에 따라, 중국은 베이징에 공관을 둔 국가에 베이징과 톈진을 연결하는 철도 12개 지점에 경비병을 주둔시킬 권리를 부여했고, 이 병력은 중국 내 다른 국가에 알리지 않고 훈련을 할 수 있었다.[16] 1937년 7월까지 일본은 중국 내 병력을 7,000명에서 15,000명으로 확장했는데, 이는 의화단 의정서에 의해 설정된 제한을 크게 초과한 것이었다.[16]
국민혁명군 제29군은 1925년 이래로 펑위샹 휘하에서 북벌에 참가했으며, 1933년 창청 항전에서 일본군에게 패했다.[48] 1935년 중앙군 철수를 계기로 허베이성에 진출하여 베이징과 톈진을 점령하고 10만 명 이상의 병력을 확보했다.[48] 그러나 제29군은 일본과의 잦은 마찰을 일으켰고, 장베이 사건, 펑타이 사건 등 여러 불법 사건을 일으켰다.[48]
일본군 북지나주둔군은 중국 측 전력을 경계하여 톈진과 베이핑에 병력을 배치하고 훈련을 계속했다.[69] 이 병력은 북청사변 최종 의정서(베이징 의정서)에 근거한 것이었지만,[70] 펑타이에는 법적 근거가 없었다.[73] 일본군은 임시 조치를 구실로 펑타이 주둔을 기정사실화했고, 이는 중국군의 반발을 샀다.[74]
사건 발생 전, 루거우차오 부근의 제29군은 병력을 증강하고 방어 공사를 강화하는 등 불안한 움직임을 보였다.[88] 반면 일본 주둔군은 행동을 신중히 하며 사건의 단초를 만들지 않도록 노력하면서도 훈련에 힘썼다.[88] 제29군은 1935년 12월경부터 일본군을 가상 적군으로 삼아 작전 계획을 작성했고, 1937년 4월부터 5월에 걸쳐 대일 항전의 구체적인 작전 계획을 연구, 작성했다.[87]
4. 사건의 전개
1937년 7월 7일 밤, 야간 훈련 중이던 일본군 중대에서 총성이 울리고 일본군 병사 1명이 행방불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17][69] 당시 이 부근에는 국민혁명군 쑹저위안(宋哲元)의 29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일본군은 다시로 간이치로(田代皖一郎)가 지휘하는 중국주둔군이었다.[94][95] 행방불명되었던 일본군 병사는 20분 뒤에 부대로 복귀했으나,[17] 일본군은 이를 이유로 중국군에게 완핑성(宛平城) 진입 및 실종 병사 수색을 요청했다.[69]
중국 측은 일본군의 수색 요청을 거절했다.[17] 중국 연대 지휘관 지싱원(제29군 37사단 219연대)은 일본군으로부터 완핑에 들어가 실종된 병사를 수색할 수 있도록 허가를 요청하는 메시지를 받았으나, 이를 거부했다.[17] 진전중/金振中중국어 제3영장은 최초 사건 보고를 받았을 때 '암야의 실탄 사격'보다 '병사 1명 행방불명'을 더 중시하여 부대 출동을 결의했으나, 2시쯤에는 행방불명된 병사 발견 보고를 받았기 때문에, 사후의 중국 측과의 교섭에서도 당시에는 이것을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 측에서는 고의로 병사 1명 행방불명 및 그 수색을 루거우차오 사건 및 확장의 원인으로 삼고 불법 사격 건은 묻어두었다.[117]
7월 8일 오전 2시, 중국 제29로군 행정관이자 사령관 대행인 친더춘은 완핑 시장 왕렝자이를 일본군 진영으로 보내 협상을 벌였으나 성과가 없었다.[87][88] 일본군은 사건의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마을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용해 줄 것을 요구했다. 오전 4시경, 양측의 증원군이 도착하기 시작했고, 중국군은 추가 사단 병력을 해당 지역으로 급파했다. 4시 45분에 왕렝자이는 완핑으로 돌아왔고, 돌아오는 길에 일본군이 마을 주변에 집결하는 것을 목격했다. 왕렝자이가 돌아온 지 5분 만에 총성이 들렸고, 양측은 사격을 시작했다.
일본군의 야간훈련과 총격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69]
- 제8중대는 오후 7시 30분에 훈련을 시작했다. 융딩강 제방 위에서는 200명 이상의 중국군이 작업하고 있었다.
- 오후 10시 30분경, 훈련 종료 후 가상 적에게 경기관총 공포탄을 발사하자, 중국군이 제8중대의 배후에서 수 발의 실탄을 산발적으로 발사했다. 가상 적은 공포탄 사격을 계속했고, 중국군은 철도교에 가까운 제방 방향에서 십여 발을 발포했다. 이 발포 전후에 완핑 현성과 융딩강 제방 위에 손전등으로 보이는 것이 깜빡였다.
- 인원 점검 결과, 시무라 기쿠지로 이등병의 행방불명 사실이 밝혀졌다. 중대장은 시무라 이등병을 수색하는 동시에 상황을 이치키 기요나오 대대장에게 보고했다.
- 용변을 마친 시무라 이등병은 약 20분 후에 발견되었으나, 이 사실은 대대장에게 보고되지 않았다.
- 7월 8일 오전 0시경 급보를 받은 이치키 대대장은, 무타구치 렌야 연대장에게 전화했다. 무타구치 연대장은 펑타이 부대의 이치몬지산 출동, 그리고 새벽 이후 완핑 현성의 김진중 제3영장과의 교섭을 명했다.
한편, 중국 측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 병사 1명이 실종되었다는 것을 구실로, 일본군 무관 마쓰이가 부대를 이끌고 완핑 성내로 진입하여 수색할 것을 요구했다"고 되어 있다.[103][104] 당시 중국군 루거우차오 주둔 부대는 이를 거절했고, 일본군은 곧바로 루거우차오를 포위했다. 그 후, 쌍방은 대표를 현지에 파견하여 조사하기로 합의했으나, 일본 측은 여전히 일본군의 입성, 수색을 요구했다. 중국 측이 승낙하지 않자, 일본군은 동서 양문 밖에서 포격을 시작했다.
일본군은 1937년 7월 8일 새벽 중국군 진지에 포격을 시작하고 공격하여 루거우차오를 점령했다. 양측의 공방이 계속되는 가운데, 11일 새벽 현지에서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7월 8일 오전 2시, 친더춘 중국 제29로군 행정관 겸 사령관 대행은 완핑 시장 왕렝자이를 일본군 진영으로 보내 협상을 시도했지만 성과가 없었다.[17] 오전 4시경 양측 증원군이 도착했고, 4시 45분 왕렝자이가 완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일본군이 집결하는 것을 목격했다.[17] 5분 뒤 총성이 울리며 양측이 사격을 시작, 베이핑-톈진 전투가 시작되었고, 이는 중일 전쟁의 전면전으로 이어졌다.[17]
지싱원 대령이 이끄는 약 100명의 중국군은 다리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증원군의 도움으로 다리를 지켰지만 큰 손실을 입었다.[17]
일본 주둔 보병 제1연대 전투상보에 따르면, 오전 4시 20분 일본군 제3대대장은 중국군의 발포를 적대 행위로 간주하고 전투 개시를 명령했다. 제3대대장은 이치몬지산으로 향하던 중 제29군 고문 사쿠라이 소좌와 회견하여 펑즈안이 루거우차오 불법 사격에 대해 "펑의 부하는 절대로 루거우차오 성 밖에 배치하지 않았다. 중국군이 아닐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성 밖에 배치된 병력에 대한 공격은 자유이며, 펑즈안은 "성 밖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도적일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오전 5시경, 일본군 대대장은 융딩강 제방 진지에 다수의 중국군이 있는 것을 보고 보병포 포격을 명령했지만, 연대장의 전투 허가를 알지 못한 모리타 중좌의 명령으로 포격은 중지되었다.[106] 약 2시간 후, 현지에서의 격전은 일단 수습되었고, 이후 정전을 위한 교섭이 이루어졌다.[107]
새벽 2시경, "일본군은 영정하 동쪽 강둑으로, 중국군은 서쪽 강둑으로"라는 일본 측의 "병력 격리" 제안을 중국 측이 수용하여 정전 협의가 성립되었다.[108] 그러나 중국 측 내부 연락 문제로 철수가 늦어졌고, 오전 5시에 중국 측으로부터 포격이 있었다.[108]
하시모토 군 참모장은 중국 측에 "사죄", "책임자의 처벌", "루거우차오 부근에서의 철수", "항일단체의 단속"을 요구했다. 이후 이 내용을 중심으로 교섭이 계속되었다. 일본군 장교 정찰대에 박격포가 발사되었다.
참모본부 제3과와 제2부는 "중국 주둔군의 자위", "거류민 보호"를 이유로 파병을 제안했다. 참모본부 내 이견에도 불구, 이시하라 소장도 동의하여 안건은 육군성으로 송부되었다. "국민당 중앙군의 북상", "현지 정세의 긴박" 보도가 과장되어 파병 결정에 큰 영향을 주었다.
현지에서 정전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 본국의 제1차 고노에 내각은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 침략을 가속화하기로 결정했다.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을 '중국 측의 계획적인 무력 사용'이라고 단정하고 중국에 전면적인 파병을 발표했다.
원래 사건은 현지에서 정전 협정의 성립으로 종식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와 중국 정부는 정전 협정과 병행하여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다. 이로 인해 주전파와 강경파가 세력을 얻게 되었고, 이후 사건 확대의 주요 요인이 되었다.[109] 7월 11일, 정전 협정의 세부 사항은 현지 군이 타협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고노에 후미마로의 파병 발표로 현지 해결을 어렵게 만들었다.[121]
7월 17일, 도쿄에서는 육상 스기야마 겐이 중국 측과의 협상 기한을 7월 19일로 하고 싶다고 5상 회의에서 제안했다. 히로타 고키 외상은 베이징 또는 톈진에서의 "현지 협상"에 기한을 두는 것은 좋지만, 난징에서의 국민 정부에 대한 외교 협상에 기한을 두는 것은 좋지 않다고 반대했다. 해상 요나이 미쓰마사, 장상 가야 고센도 외무성에 동조하고, 스기야마 육상도 동의했다.[121]
7월 19일, 장제스는 "최후의 관두" 연설을 공표하여 항전의 각오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같은 날, 완핑 현성 내에서 일본군에 대한 포격이 가해졌다. 이후, 7월 20일 완핑 현성 내에서 일본군에 대한 재포격과 일본군의 보복 포격이 있었다.


결국 일본군과 협상은 결렬되고, 일본군은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하여 중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7월 25일의 랑팡 사건, 26일의 광안문 사건을 거쳐, 28일에는 화북에서의 중일 양군 간의 전면적인 충돌이 시작되었다.
4. 1. 7월 7일 밤: 발포와 수색 요청
1937년 7월 7일 밤, 야간 훈련 중이던 일본군 중대에서 총성이 울리고 일본군 병사 1명이 행방불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17][69] 당시 이 부근에는 국민혁명군 쑹저위안(宋哲元)의 29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일본군은 다시로 간이치로(田代皖一郎)가 지휘하는 중국주둔군이었다.[94][95] 행방불명되었던 일본군 병사는 20분 뒤에 부대로 복귀했으나,[17] 일본군은 이를 이유로 중국군에게 완핑성(宛平城) 진입 및 실종 병사 수색을 요청했다.[69]중국 측은 일본군의 수색 요청을 거절했다.[17] 중국 연대 지휘관 지싱원(제29군 37사단 219연대)은 일본군으로부터 완핑에 들어가 실종된 병사를 수색할 수 있도록 허가를 요청하는 메시지를 받았으나, 이를 거부했다.[17] 진전중/金振中중국어 제3영장은 최초 사건 보고를 받았을 때 '암야의 실탄 사격'보다 '병사 1명 행방불명'을 더 중시하여 부대 출동을 결의했으나, 2시쯤에는 행방불명된 병사 발견 보고를 받았기 때문에, 사후의 중국 측과의 교섭에서도 당시에는 이것을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 측에서는 고의로 병사 1명 행방불명 및 그 수색을 루거우차오 사건 및 확장의 원인으로 삼고 불법 사격 건은 묻어두었다.[117]
7월 8일 오전 2시, 중국 제29로군 행정관이자 사령관 대행인 친더춘은 완핑 시장 왕렝자이를 일본군 진영으로 보내 협상을 벌였으나 성과가 없었다.[87][88] 일본군은 사건의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마을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용해 줄 것을 요구했다. 오전 4시경, 양측의 증원군이 도착하기 시작했고, 중국군은 추가 사단 병력을 해당 지역으로 급파했다. 4시 45분에 왕렝자이는 완핑으로 돌아왔고, 돌아오는 길에 일본군이 마을 주변에 집결하는 것을 목격했다. 왕렝자이가 돌아온 지 5분 만에 총성이 들렸고, 양측은 사격을 시작했다.
일본군의 야간훈련과 총격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69]
- 제8중대는 오후 7시 30분에 훈련을 시작했다. 융딩강 제방 위에서는 200명 이상의 중국군이 작업하고 있었다.
- 오후 10시 30분경, 훈련 종료 후 가상 적에게 경기관총 공포탄을 발사하자, 중국군이 제8중대의 배후에서 수 발의 실탄을 산발적으로 발사했다. 가상 적은 공포탄 사격을 계속했고, 중국군은 철도교에 가까운 제방 방향에서 십여 발을 발포했다. 이 발포 전후에 완핑 현성과 융딩강 제방 위에 손전등으로 보이는 것이 깜빡였다.
- 인원 점검 결과, 시무라 기쿠지로 이등병의 행방불명 사실이 밝혀졌다. 중대장은 시무라 이등병을 수색하는 동시에 상황을 이치키 기요나오 대대장에게 보고했다.
- 용변을 마친 시무라 이등병은 약 20분 후에 발견되었으나, 이 사실은 대대장에게 보고되지 않았다.
- 7월 8일 오전 0시경 급보를 받은 이치키 대대장은, 무타구치 렌야 연대장에게 전화했다. 무타구치 연대장은 펑타이 부대의 이치몬지산 출동, 그리고 새벽 이후 완핑 현성의 김진중 제3영장과의 교섭을 명했다.
한편, 중국 측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 병사 1명이 실종되었다는 것을 구실로, 일본군 무관 마쓰이가 부대를 이끌고 완핑 성내로 진입하여 수색할 것을 요구했다"고 되어 있다.[103][104] 당시 중국군 루거우차오 주둔 부대는 이를 거절했고, 일본군은 곧바로 루거우차오를 포위했다. 그 후, 쌍방은 대표를 현지에 파견하여 조사하기로 합의했으나, 일본 측은 여전히 일본군의 입성, 수색을 요구했다. 중국 측이 승낙하지 않자, 일본군은 동서 양문 밖에서 포격을 시작했다.
4. 2. 7월 8일 새벽: 무력 충돌
일본군은 1937년 7월 8일 새벽 중국군 진지에 포격을 시작하고 공격하여 루거우차오를 점령했다. 양측의 공방이 계속되는 가운데, 11일 새벽 현지에서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다.7월 8일 오전 2시, 친더춘 중국 제29로군 행정관 겸 사령관 대행은 완핑 시장 왕렝자이를 일본군 진영으로 보내 협상을 시도했지만 성과가 없었다.[17] 오전 4시경 양측 증원군이 도착했고, 4시 45분 왕렝자이가 완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일본군이 집결하는 것을 목격했다.[17] 5분 뒤 총성이 울리며 양측이 사격을 시작, 베이핑-톈진 전투가 시작되었고, 이는 중일 전쟁의 전면전으로 이어졌다.[17]
지싱원 대령이 이끄는 약 100명의 중국군은 다리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증원군의 도움으로 다리를 지켰지만 큰 손실을 입었다.[17]
일본 주둔 보병 제1연대 전투상보에 따르면, 오전 4시 20분 일본군 제3대대장은 중국군의 발포를 적대 행위로 간주하고 전투 개시를 명령했다. 제3대대장은 이치몬지산으로 향하던 중 제29군 고문 사쿠라이 소좌와 회견하여 펑즈안이 루거우차오 불법 사격에 대해 "펑의 부하는 절대로 루거우차오 성 밖에 배치하지 않았다. 중국군이 아닐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성 밖에 배치된 병력에 대한 공격은 자유이며, 펑즈안은 "성 밖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도적일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오전 5시경, 일본군 대대장은 융딩강 제방 진지에 다수의 중국군이 있는 것을 보고 보병포 포격을 명령했지만, 연대장의 전투 허가를 알지 못한 모리타 중좌의 명령으로 포격은 중지되었다.[106] 약 2시간 후, 현지에서의 격전은 일단 수습되었고, 이후 정전을 위한 교섭이 이루어졌다.[107]
새벽 2시경, "일본군은 영정하 동쪽 강둑으로, 중국군은 서쪽 강둑으로"라는 일본 측의 "병력 격리" 제안을 중국 측이 수용하여 정전 협의가 성립되었다.[108] 그러나 중국 측 내부 연락 문제로 철수가 늦어졌고, 오전 5시에 중국 측으로부터 포격이 있었다.[108]
4. 3. 일본의 세 가지 조건
하시모토 군 참모장은 중국 측에 "사죄", "책임자의 처벌", "루거우차오 부근에서의 철수", "항일단체의 단속"을 요구했다. 이후 이 내용을 중심으로 교섭이 계속되었다. 일본군 장교 정찰대에 박격포가 발사되었다.참모본부 제3과와 제2부는 "중국 주둔군의 자위", "거류민 보호"를 이유로 파병을 제안했다. 참모본부 내 이견에도 불구, 이시하라 소장도 동의하여 안건은 육군성으로 송부되었다. "국민당 중앙군의 북상", "현지 정세의 긴박" 보도가 과장되어 파병 결정에 큰 영향을 주었다.
4. 4. 협상 결렬과 전면전
현지에서 정전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 본국의 제1차 고노에 내각은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 침략을 가속화하기로 결정했다.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을 '중국 측의 계획적인 무력 사용'이라고 단정하고 중국에 전면적인 파병을 발표했다.원래 사건은 현지에서 정전 협정의 성립으로 종식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와 중국 정부는 정전 협정과 병행하여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다. 이로 인해 주전파와 강경파가 세력을 얻게 되었고, 이후 사건 확대의 주요 요인이 되었다.[109] 7월 11일, 정전 협정의 세부 사항은 현지 군이 타협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고노에 후미마로의 파병 발표로 현지 해결을 어렵게 만들었다.[121]
7월 17일, 도쿄에서는 육상 스기야마 겐이 중국 측과의 협상 기한을 7월 19일로 하고 싶다고 5상 회의에서 제안했다. 히로타 고키 외상은 베이징 또는 톈진에서의 "현지 협상"에 기한을 두는 것은 좋지만, 난징에서의 국민 정부에 대한 외교 협상에 기한을 두는 것은 좋지 않다고 반대했다. 해상 요나이 미쓰마사, 장상 가야 고센도 외무성에 동조하고, 스기야마 육상도 동의했다.[121]
7월 19일, 장제스는 "최후의 관두" 연설을 공표하여 항전의 각오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같은 날, 완핑 현성 내에서 일본군에 대한 포격이 가해졌다. 이후, 7월 20일 완핑 현성 내에서 일본군에 대한 재포격과 일본군의 보복 포격이 있었다.
결국 일본군과 협상은 결렬되고, 일본군은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하여 중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7월 25일의 랑팡 사건, 26일의 광안문 사건을 거쳐, 28일에는 화북에서의 중일 양군 간의 전면적인 충돌이 시작되었다.
5. 결과
중국군은 기계화 병력인 일본군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1937년 8월 29일에 베이징이, 다음날은 톈진이 함락되었다.[19] 이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중화민국과 일본의 전쟁이 전면전으로 확대되었고 중국내 반일감정은 더욱 거세졌다. 국민당은 공산군과의 내전을 종식하고 함께 대(對)일본 항전에 들어갔다.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고조된 긴장은 일본 제국과 중화민국 간의 전면전으로 이어졌으며, 7월 말에는 베이핑-톈진 전투, 8월에는 상하이 전투가 벌어졌다.
1937년, 이슬람교도인 마부팡 장군은 마벌 군벌에게 일본군과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는 전보 메시지를 정부에 보냈다.[21] 루거우차오 사건 직후, 마부팡은 이슬람교도인 마표 장군 휘하의 기병 사단을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동쪽으로 파견했다. 튀르크계 살라르족은 마부팡이 파견한 첫 번째 기병 사단의 다수를 차지했다.[21]
1987년, 다리는 보수되었고 중일 전쟁 발발 기념을 위해 다리 근처에 중국 인민 항일 전쟁 기념관이 건설되었다.[22]
이 사건과 비슷한 자작극에는 다음과 같은 사건이 있다.
- 글라이비츠 방송국 공격 사건 : 독일 대 폴란드
- 마이닐라 발포 사건 : 소련 대 핀란드
5. 1. 전면전으로 확대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중화민국과 일본 제국 간의 전쟁이 전면전으로 확대되었고 중국 내 반일 감정은 더욱 거세졌다.[19] 국민당은 공산군과의 내전을 종식하고 함께 일본에 대항하였다. 중국군은 기계화 병력인 일본군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1937년 8월 29일에는 베이징이, 다음날은 톈진이 함락되었다.[19]7월 11일, 일본 제국 육군 참모 본부는 일본 조선군의 보병 사단 1개, 관동군의 혼성 여단 2개, 그리고 18개 비행대대로 구성된 항공 연대를 화북에 증원할 것을 승인했다. 7월 20일까지 베이핑-톈진 지역의 일본군 총 병력은 18만 명을 넘어섰다.[19] 일본군은 쑹저위안(宋哲元)과 그의 군대에게 "자유 통행"을 허용했으며, 베이징과 톈진 주변 지역의 저항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24일간의 전투 끝에 중화민국 제29군이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7월 29일 베이핑을, 7월 30일 톈진의 다구 포대를 각각 점령했다.[19] 그러나 일본군은 융딩강 이상으로 진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내각의 외무 대신은 장제스의 난징 국민정부와 협상을 시작하여 "일본은 중국의 땅이 아닌 중국의 협력을 원한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협상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1937년 8월 9일, 일본 해군 장교가 상하이에서 총에 맞아 사망하면서 소규모 교전과 전투는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19]
제29군의 저항(및 열악한 장비)은 1937년 "대도행진곡"에 영감을 주었고, 개사된 가사와 함께 중화민국 국민혁명군의 표준 행진곡이 되었으며, 일본 침략군을 묘사하는 인종 비칭인 ''귀자''를 대중화시켰다.[20]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고조된 긴장은 일본 제국과 중화민국 간의 전면전으로 이어졌으며, 7월 말에는 베이핑-톈진 전투, 8월에는 상하이 전투가 벌어졌다.
1937년, 마부팡 장군은 마벌 군벌에게 일본군과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는 전보 메시지를 정부에 보냈다.[21] 루거우차오 사건 직후, 마부팡은 마표 장군 휘하의 기병 사단을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동쪽으로 파견했다. 튀르크계 살라르족은 마부팡이 파견한 첫 번째 기병 사단의 다수를 차지했다.[21]
1987년, 다리는 보수되었고 중일 전쟁 발발 기념을 위해 다리 근처에 중국 인민 항일 전쟁 기념관이 건설되었다.[22]
7월 13일, 베이핑의 다훙먼에서 일본군 트럭이 제38사단에 의해 폭파되어 일본군 4명이 살해된다([다훙먼 사건]]). 7월 14일, 일본군 기병이 참살당한다. 7월 18일, 일본군 정찰기에 대한 사격이 행해진다. 7월 19일, 장제스는 "최후의 관두" 연설을 공표하여 항전의 각오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같은 날, 완핑 현성 내에서 일본군에 대한 포격이 가해진다. 이후, 7월 20일 완핑 현성 내에서 일본군에 대한 재포격과 일본군의 보복 포격이 있었다. 7월 25일의 랑팡 사건, 26일의 광안문 사건을 거쳐, 28일에는 화북에서의 중일 양군 간의 전면적인 충돌이 시작되었다.
5. 2. 중국 내 항일 감정 격화
이 사건으로 중화민국과 일본 간의 전면전이 확대되었고, 중국 내 반일 감정은 더욱 거세졌다. 국민당은 공산군과의 내전을 종식하고 함께 대(對)일본 항전에 들어갔다. 7월 말에는 베이핑-톈진 전투가, 8월에는 상하이 전투가 벌어졌다.1937년 베이핑-톈진 전투 중, 이슬람교도인 마부팡 장군은 마벌 군벌에게 일본군과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는 전보 메시지를 정부에 보냈다.[21] 그는 루거우차오 사건 직후, 이슬람교도인 마표 장군 휘하의 기병 사단을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동쪽으로 파견했다.[21] 튀르크계 살라르족은 마부팡이 파견한 첫 번째 기병 사단의 다수를 차지했다.[21]
장제스(蔣介石)는 7월 9일 중앙군에게 쉬저우(徐州) 부근에 주둔하고 있던 중앙군 4개 사단에게 허난(河南省) 성 경계로 진격 준비를 명령했다. 또한 쑹저위안(宋哲元)에게 전보로 평화 담판을 하더라도 전쟁에 대비하는 것을 잊지 말라고 명령했다. 제26군 쑨롄중(孫連仲)에게는 2개 사단을 바오딩(保定) · 스자좡(石家莊)으로 철도로 수송하여 쑹저위안의 지휘에 맡기도록 지시했다. 7월 10일, 200명 이상의 중국 병사가 박격포로 공격을 재개했고, 7월 16일에는 중국 북부 지역으로 이동한 중국군 병력이 평시 병력을 포함하여 약 30개 사단에 달했으며, 19일까지 30개 사단을 북지(北支)에 집결시켰다.
5. 3. 한국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발발한 중일 전쟁은 한국 독립운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내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5. 4. 일본의 계획적 도발?
루거우차오 사건이 만주 사변의 구실이 되었던 만주 침공과 마찬가지로 일본에 의해 계획되었는지에 대한 논쟁이 존재한다.[23] 짐 허프만에 따르면, 일본이 소련의 위협에 더 신경 썼을 것이기 때문에 이 주장은 역사학자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거부"되었다.[23]논란이 많은 일본 보수 역사학자 하타 이쿠히코는 이 사건이 중국 공산당에 의해 유발되었을 수 있으며, 이는 일본군과 중국 국민당 사이의 소모전으로 이어지기를 바랐다고 주장했지만, "우발적인 발포" 가설보다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한다. 진 이쿠히코에 따르면, 일본 측 연구자들은 대체로 "중국 측 제29군 우발적 사격"으로 견해가 일치한다.[112]}}. 야스이 미요시는 "일본에서는 진 이쿠히코 '현장 대대장이 밝힌 귀중한 증언'(『중앙공론』 1987년 2월)이나 에구치 케이이치 『루거우차오 사건』(이와나미 북렛)과 같이 '첫 발'의 발포자를 중국 국민혁명군 제29군 병사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며, '일본 측 발포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라고 언급했다.[112]}}。
사카모토 나츠오는 제29군이 루거우차오 사건 수개월 전부터 대일 항전을 준비했고, 루거우차오 부근의 중국군이 7월 6일 전투 준비를 마치고 7일 밤부터 8일 아침에 걸쳐 일본군에게 3번 발포했으며, 중국 공산당은 7월 8일 전국에 대일 항전 통전을 발신했으므로, 중국 측이 계획한 것이라고 주장한다.[87]
현장 대대장이었던 진진중은 1986년에 출판된 『77사변』에서 부하 제11중대를 영정하 둑에 배치했음을 인정하고, 일본군이 중국군 진지 100미터 이내로 진입하면 사격하라고 지시한 사실을 밝혔다.[113]
중공군 장교 경력을 가진 가사이 준이치는 중공군의 "전사 정치 교본"에 사건이 "류 샤오치의 지휘를 받은 한 부대가 중국 공산당 중앙의 지령에 따라 실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하지만, 진 이쿠히코는 가사이가 현물을 제시하지 않았으므로 확정할 수 없다고 반박한다.[114] 서치나 (2009년 5월 15일자)에 따르면, 광둥성의 지방지 양청완바오에 게재된 논설에서 "중국 공산당 음모설"은 "황당무계한 설"이라고 하면서도, 공산당 지배 구역에서 배포된 "전사 정치 독본"에 "류 샤오치가 루거우차오 사건을 일으켰다"는 기술이 있다고 전하고 있다. 다만, 이는 프로파간다를 위한 거짓 전공이며, 이러한 거짓이 오히려 자신들의 주장의 신빙성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116]
당시 베이핑 대사관 부무관 보좌관이었던 이마이 타케오 소좌는 최초의 사격이 우발적인지, 계획적인지, 아니면 일본군이나 중공의 모략인지 판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조사 결과 일본군이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항일 의식에 불탄 중국 병사가 발포했을 가능성과 음모설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중공군 정치부 발행 초급 혁명 교과서에 "루거우차오 사건은 중공 북방국의 공작이다"라고 기술한 자료가 있어 중공에 의한 모략 의심도 크다.[117]
"베이핑 특무 기관 일지"의 7월 16일 기사에는 "북지 사변의 발단에 대하여" 람의사 제4총대가 일본군과 제29군을 충돌시키려 계획했다는 정보가 기술되어 있다.[117]
제8 중대장은 불법 사격과 병사 1명 행방불명 보고 후, 약 20분 뒤 병사를 발견했다. 중국 측은 병사 1명 행방불명 및 수색을 사건 확장의 원인으로 삼고 불법 사격 건은 묻어두었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의 진덕순의 진술, 장개석의 전기, '항전 간사'에도 비슷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중국 중앙 방송국의 9일 19시 방송에 따르면 "일본군은 최근 루거우차오를 목표로 훈련을 하고 있었다. 8일 아침, 우연히 일본군이 전진해 오는 것을, 우리 측은 루거우차오(완핑 현성)를 탈취당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것에 의한 충돌이 사건의 발단이다"라고 한다.[117]
5. 5. 중국 공산당의 개입?
일부에서는 루거우차오 사건이 중국 공산당에 의해 유발되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23] 중국 공산당이 일본군과 중국 국민당 사이의 소모전을 유도하기 위해 사건을 일으켰다는 것이다.[23]7월 8일, 중국 공산당은 전국에 통전을 보내 국지적 해결 반대를 호소하고, 7월 9일에는 선전 공작을 적극적으로 하여 각종 항일 단체를 조직하고, 필요하다면 항일 의용군을 조직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직접 일본과 충돌할 것을 각급 당부에 지령했다[110]。 7월 11일, 저우언라이는 루산 국방 회의에 초청되었고, 15일에는 공산당의 합법적 지위가 인정되었다. 7월 13일 마오쩌둥·주더의 이름으로 국민 정부에 즉시 개전을 촉구했다.[110] 7월 15일 주더는 "대일 항전을 실행하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여, 일본의 전력은 두려워할 것이 없으며, 항전은 지구전이 되겠지만, 최종 승리는 중국 측에 있음을 설파했다.[110]
난징 국민 정부와 지차 정무 위원회가 일본 측과 타협하려 하자, 공산당 중앙은 7월 23일 "제2차 선언"을 발표하여 전면 항전·철저 항전의 실행을 강조했다.[110]
전 일본군 정보부원인 히라오 오사무는 1939년경, 중국 공산당이 루거우차오 사건을 일으켰다고 읽을 수 있는 전문을 여러 번 도청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옌안의 중국 공산군 사령부 통신소로 긴급 무선으로 "성공했다"는 내용이 세 번 연속으로 반복 전송되는 것을 도청했다고 주장했다.[118]
그러나 야스이 미요시는, 이 전보는 히라오와 아키토미 자신이 수신한 것도 없고, 이러한 이야기가 당시 군 관계자의 회상, 문서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점 등을 들어 이러한 이야기가 사실이었는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119]
한편, 중국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는 중국 공산당이 항일 전보를 각지에 발신하여, 전국 인민에게 단결하여 민족 통일 전선의 견고한 만리장성을 구축하고, 일본 침략자를 중국에서 몰아내라고 호소했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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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없음)
[33]
서적
(제목 없음)
外務省
[34]
서적
(제목 없음)
外務省
[35]
서적
(제목 없음)
外務省
[36]
간행물
外務省
1937
[37]
뉴스
東京朝日新聞
東京朝日新聞
1937-01-08
[38]
뉴스
読売新聞
読売新聞
1937-07-09
[39]
뉴스
東京朝日新聞
東京朝日新聞
1937-05-28
[40]
뉴스
東京朝日新聞
東京朝日新聞
1937-06-27
[41]
뉴스
東京朝日新聞
東京朝日新聞
1937-05-30
[42]
뉴스
東京朝日新聞
東京朝日新聞
1937-07-03
[43]
간행물
支那事変実記 第1輯
1941
[44]
뉴스
東京朝日新聞
東京朝日新聞
1937-06-26
[45]
뉴스
東京朝日新聞
東京朝日新聞
1937-05-24
[46]
뉴스
東京朝日新聞
東京朝日新聞
1937-06-12
[47]
뉴스
国際写真新聞
同盟通信社
1937-08-05
[48]
간행물
支那事変実記 第1輯
1941
[49]
뉴스
ロンドン・タイムズ紙
ロンドン・タイムズ紙
1933-02-20
[50]
뉴스
東京朝日新聞
東京朝日新聞
1933-03-17
[51]
뉴스
ロンドン・タイムズ紙
ロンドン・タイムズ紙
1933-05-08
[52]
뉴스
東京朝日新聞
東京朝日新聞
1933-04-09
[53]
뉴스
東京朝日新聞
東京朝日新聞
1935-06-19
[54]
뉴스
東京朝日新聞
東京朝日新聞
1935-10-26
[55]
뉴스
東京朝日新聞
東京朝日新聞
1935-11-29
[56]
뉴스
東京朝日新聞
東京朝日新聞
1935-12-01
[57]
뉴스
東京朝日新聞
東京朝日新聞
1935-12-05
[58]
뉴스
東京朝日新聞
東京朝日新聞
1935-12-06
[59]
뉴스
東京朝日新聞
東京朝日新聞
1935-12-19
[60]
간행물
冀察・冀東問題
日支問題研究会
1937-08-20
[61]
뉴스
東京朝日新聞
東京朝日新聞
1935-12-19
[62]
뉴스
東京朝日新聞
東京朝日新聞
1936-02-05
[63]
간행물
満鉄の華北への進出
現代社会文化研究
2001-08
[64]
뉴스
国民新聞
国民新聞
1937-07-09
[65]
간행물
外務省
1937
[66]
간행물
外務省
1937
[67]
논문
1993
[68]
논문
盧溝橋事件勃発の際における牟田口廉也連隊長の戦闘開始の決意と命令
https://dl.ndl.go.jp[...]
東京 : 藝林会
1993-02
[69]
간행물
支那事変実記 第1輯
1941
[70]
문서
支那駐屯軍の駐兵に関する法的根拠は北京議定書と1902年7月の天津還付に関する列国との交換公文である
1996
[71]
서적
(제목 없음)
[72]
서적
(제목 없음)
[73]
아시아역사자료센터
군병력 및 배치에 관한 참고자료 건(지주)
[74]
논문
지나주둔군 증강과 풍대사건
https://doi.org/10.1[...]
동지사대학 글로벌·커뮤니케이션 학회
[75]
서적
전사총서 「지나사변 육군작전.1」
[76]
뉴스
(제목 없음)
오사카 아사히 신문
1936-03-13
[77]
뉴스
(제목 없음)
오사카 아사히 신문
1936-03-30
[78]
서적
전사총서 「지나사변 육군작전.1」
[79]
뉴스
(제목 없음)
오사카 아사히 신문
1936-04-11
[80]
뉴스
(제목 없음)
오사카 아사히 신문
1936-04-03
[81]
서적
전사총서 「지나사변 육군작전.1」
[82]
서적
(제목 없음)
[83]
문서
영국군의 풍대 수비의 경위와 일본군을 배치하려고 하는지 여부 조사
[84]
서적
(제목 없음)
[85]
서적
지나사변의 회상
미스즈 서방
[86]
서적
전사총서 「지나사변 육군작전.1」
[87]
서적
[88]
논문
재고·노구교 사건에 있어서의 일중 양군 충돌시의 일검증
https://www.kogakkan[...]
황학관대학 인문학회
2000-08
[89]
논문
노구교 사건
https://doi.org/10.1[...]
아시아 정경학회
1957
[90]
웹사이트
시부사와 사사 데이터베이스
https://shashi.shibu[...]
[91]
웹사이트
이시자카 타이조
http://www6.plala.or[...]
[92]
서적
전사총서 「지나사변 육군작전.1」
[93]
서적
국공내전사
삼주서방
[94]
문서
사장은 풍치안
[95]
서적
지나사변실기 제1집
[96]
뉴스
(제목 없음)
도쿄 아사히 신문
1937-07-09
[97]
뉴스
(제목 없음)
도쿄 일일 신문
1937-07-09
[98]
뉴스
(제목 없음)
요미우리 신문
1937-07-09
[99]
뉴스
(제목 없음)
요미우리 신문
1937-07-09
[100]
서적
지나사변실기 제1집
[101]
웹사이트
노구교 사건 처리에 관한 각의 결정
https://ndlsearch.nd[...]
[102]
뉴스
뉴욕 타임즈
1937-07-08
[103]
서적
사해 (1989년판)
상해 사전 출판사
[104]
뉴스
29군과 교 공존망 백성 황남하
명보
2015-08-02
[105]
논문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 있어서의 노구교 사건
https://dl.ndl.go.jp[...]
도쿄 : 예림회
1998-08
[106]
서적
盧溝橋事件
[107]
논문
1993
[108]
웹사이트
日中戦争の展開塘沽停戦協定からトラウトマン工作まで
https://www.dpj.or.j[...]
防衛研究所
[109]
논문
1996
[110]
서적
中国共産党史
[111]
논문
支那事変陸軍作戦.1
[112]
논문
1993
[113]
서적
昭和史の謎を追う
[114]
서적
昭和史の謎を追う
2009
[115]
서적
大東亜戦争の敗因と日本の将来
1969
[116]
웹사이트
【中国対日観】“いい加減”だから日本にやられる(1)
https://web.archive.[...]
サーチナ
2009-05-15
[117]
논문
支那事変陸軍作戦.1
[118]
뉴스
産経新聞
1994-09-08
[119]
논문
2003
[120]
서적
入門 中国の歴史「中国中学校歴史教科書」
明石書店
2001
[121]
서적
廣田弘毅
廣田弘毅伝記刊行会
1966
[122]
웹사이트
外務省外交史料館 特別展示 I 盧溝橋事件の発生
https://www.mofa.go.[...]
[123]
웹사이트
石射猪太郎『外交官の一生』
https://web.archive.[...]
[124]
서적
大本営陸軍部(1)
[125]
웹사이트
外務省外交史料館 特別展示II 全面戦争への拡大
https://www.mofa.go.[...]
[126]
서적
ピース・フィーラー支那事変和平工作の群像
[127]
서적
外交官の一生
[128]
서적
盧溝橋事件・上海事変・南京攻略:日中戦争の序章
[129]
문서
ハルノートと真珠湾攻撃に関する記述
[130]
서적
昭和史への一証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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