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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소 (일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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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소(일본사)는 일본 바둑 기사에게 봉록을 지급하고 지위를 부여하는 제도이다. 158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바둑 기사에게 봉록을 지급하면서 시작되었고, 1612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바둑과 장기 강자에게 봉록을 지급하면서 기틀이 마련되었다. 기소 명칭은 1662년경부터 사용되었으며, 야스이 산치가 초대 기소로 여겨진다. 기소는 바둑계의 권위를 높이고 기사들의 지위를 보장하는 역할을 했으며, 혼인보, 야스이, 이노우에, 린 4가문에 가록이 지급되었다. 명인 기소는 공식 대국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지만, 기소 취임자들의 관례는 통일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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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소 (일본사)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종류에도 막부의 바둑, 쇼기, 렌가의 장관직
관할바둑, 쇼기, 렌가
위치일본
존속 기간에도 시대
다른 이름산가쿠쇼(算学所)
역사
기원오다 노부나가 시대
제도화에도 막부
폐지메이지 유신
주요 역할
바둑기사 임명, 단 결정, 공식 경기 주관
쇼기기사 임명, 단 결정, 공식 경기 주관
렌가렌가사 임명, 렌가 회합 주관
조직
구성고도코로 (장관)
메이진 (명인)
고도코로 아래의 기사 (바둑, 쇼기)
렌가사
관련 인물
초대 고도코로혼인보 산사 (바둑)
마지막 고도코로이토 쇼호 (쇼기)
사회적 영향
권위바둑계와 쇼기계에 큰 영향력 행사
경제적 지원막부로부터 녹미 지급
지위사회적 지위 보장
참고 사항
산가쿠쇼에도 시대의 수학 장려 기관 (고도코로와 유사한 역할)

2. 기원

덴쇼 16년(158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혼인보 산사에게 20석 20인 부를 지급하면서 바둑 기사들의 전업화가 시작되었다. 이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게이초 17년(1612년)에 바둑과 장기 기사 8명에게 봉록을 지급했는데, 그 으뜸은 혼인보 산사로 50석 5인 부였다.[3]

메이지 37년(1904년) 간행된 안도 뇨이의 "좌은담총"에서는 이 시기를 기소의 설치로 보았다. 그러나 이 책은 정확한 역사서라고 할 수 없다. 마스카와 코이치는 저서 『바둑』에서 덴쇼설과 게이초설을 모두 부정하며, 게이초 17년 단계에서는 개인의 기예에 대한 평가로서의 부였으며, 세습 개념도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4]

이후 나카무라 도세키가 바둑 기사들의 수령격이 되었으나, 마스카와 코이치에 따르면 이 시기에는 "명인", "기소", "장기소" 명칭이 존재하지 않았고, 바둑가와 장기가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창작한 것이라고 한다.

마스카와 코이치는 『장기Ⅱ』에서 가문에 가록이 발생한 것이 1635년(간에이 12년), 장기 기사가 사찰 봉행의 관할 하에 들어간(=장기소의 발생) 것이 1662년(간분 2년)이라고 보았으며, 『바둑』에서는 기소가 발생한 것도 같은 시기로 추정했다. 아키타 쇼이치는 『도쿠가와 시대의 바둑계를 알다 「혼인보 가전」과 「기소 구기」를 읽다』(2019)에서 초대 기소는 1668년에 명인 기소가 된 야스이 산치라고 주장한다.

간에이 7년(1630년) 도세키 사망 후, 혼인보 산에쓰와 야스이 산치가 쟁기를 벌였으나 결착이 나지 않았다 ('''기소선기'''). 산에쓰는 만지 원년(1658년)에 사망하고, 산치는 명인에 올라 기소가 되었다. 이때부터 기소라는 명칭이 공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혼인보 도사쿠에게의 어증서에도 기소 명칭이 사용되었다. 이 시기부터 혼인보가, 야스이가, 나카무라 도세키를 이은 이노우에가의 세 가문에 가록이 지급되었고, 후에 린가도 더해져 가문 4가문이 되었다.

3. 권한 및 역할

덴쇼 16년(158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혼인보 산사에게 20석 20인 부를 지급하면서 바둑 기사들의 전업화가 시작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게이초 17년(1612년)에 바둑과 장기 기사 8명에게 봉록을 지급했는데, 그 으뜸은 혼인보 산사로 50석 5인 부였다.

메이지 37년(1904년) 간행된 안도 뇨이의 "좌은담총"에서는 이 시기를 기소 설치로 보았으나, 정확한 역사서는 아니다. 마스카와 코이치는 기소 발상의 덴쇼설, 게이초설을 모두 부정하며, 게이초 17년 단계에서는 개인 기예에 대한 평가로서의 부였으며 세습 개념도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혼인보 산사와 나카무라 도세키가 바둑 기사들의 수령격이 되었다. 그러나 마스카와 코이치에 따르면, 이 시기에는 "명인", "기소", "장기소" 명칭이 존재하지 않았고, 바둑가, 장기가들의 전언을 바탕으로 한 창작이라고 한다.

마스카와 코이치는 가문에 가록이 발생한 것이 1635년(간에이 12년), 장기 기사가 사찰 봉행의 관할 하에 들어간 것이 1662년(간분 2년)이며[3], 기소가 발생한 것도 같은 해로 여겨진다[4]고 한다. 아키타 쇼이치는 초대 기소가 1668년에 명인 기소가 된 야스이 산치라고 한다.

간에이 7년(1630년) 도세키 사망 후, 혼인보 산에쓰와 야스이 산치가 쟁기를 벌였으나 결착이 나지 않았다('''기소선기'''). 산에쓰는 만지 원년(1658년)에 사망하고, 산치는 명인 수합에 진출하여 기소가 되었다. 이때부터 기소라는 명칭이 공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후의 혼인보 도사쿠에게의 어증서에도 기소 명칭이 사용되었다. 혼인보가, 야스이가, 이노우에가의 세 가문에 가록이 지급되었고, 후에 린가도 더해져 가문 4가문이 되었다.

명인 기소가 부재할 시에는, 혼인보가가 바둑가, 장기가의 중재 역할을 맡았다.

혼인보 조와가 명인 기소가 되었을 때, 명인 기소가 된 기사는 "그만두기"로서 이후 공식 대국을 행하지 않는다고 묘사되었지만, 실제로는 조와 이전의 기소 취임자에 대해 통일되지 않았다.


  • 혼인보 도사쿠는 명인 기소가 된 후에도 어성기를 두었다. 다만, 1698년(겐로쿠 11년) 어성기에 대해, 도사쿠는 기소로서 대국 조합을 만들었지만, 자신의 대국 예정은 없앴고, 야스이 치테쓰가 자신과 도사쿠의 대국을 원했지만, 도사쿠가 거절했다[5]。마스카와 코이치는 "도사쿠가 대국을 피한 것은, 졌을 경우 권위에 관계되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6]
  • 이노우에 도세쓰 인세키와 혼인보 도치는 명인 기소가 된 후에는 어성기를 두지 않았다.
  • 혼인보 사쓰겐은 명인 기소가 된 후에도 어성기를 두었다.

4. 역대 기소

이름재임 기간
야스이 산치1668년 ~ 1676년
혼인보 도우사쿠1677년 ~ 1702년
이노우에 도우세쓰인세키1710년 ~ 1719년
혼인보 도우치1721년 ~ 1727년
혼인보 사쓰겐1770년 ~ 1788년
혼인보 죠우와1831년 ~ 1839년


5. 기소 제도의 의의 및 영향

기소 제도는 덴쇼 16년(158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혼인보 산사에게 20석 20인 부를 지급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는 바둑 기사들의 전업화의 시초였다.[3]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게이초 17년(1612년) 바둑과 장기 고수 8명에게 봉록을 지급했고, 그 으뜸은 혼인보 산사로 50석 5인 부였다.[3]

메이지 37년(1904년) 간행된 안도 뇨이의 "좌은담총"에서는 이 시기를 기소 설치 시기로 보았으나, 정확한 역사서는 아니다. 마스카와 코이치는 저서 『바둑』에서 덴쇼, 게이초 기소 발상설을 모두 부정하며, 게이초 17년은 개인 기예에 대한 평가였고 세습 개념은 없었다고 주장한다.[3]

이후 나카무라 도세키가 바둑 기사들의 수령 격이 되었으나, 마스카와 코이치는 이 시기 "명인", "기소", "장기소" 명칭은 없었고, 바둑가, 장기가들의 권위 조작이라고 주장한다.[3]

마스카와 코이치는 『장기Ⅱ』에서 가문에 가록이 발생한 것은 1635년(간에이 12년), 장기 기사가 사찰 봉행 관할에 들어간(=장기소 발생) 것은 1662년(간분 2년)이라고 보았다.[3] 『바둑』에서는 기소 발생도 같은 1662년경으로 추정한다.[4] 아키타 쇼이치는 『도쿠가와 시대의 바둑계를 알다 「혼인보 가전」과 「기소 구기」를 읽다』에서 초대 기소는 1668년 명인 기소가 된 야스이 산치라고 주장한다.

간에이 7년(1630년) 도세키 사망 후 혼인보 산에쓰와 야스이 산치가 쟁기를 벌였으나 결착되지 않았다 ('''기소선기''').[3] 산에쓰는 만지 원년(1658년) 사망하고, 산치는 명인 수합에 진출, 기소가 되었다. 이때부터 기소 명칭이 공적으로 사용되었고, 혼인보 도사쿠 어증서에도 사용되었다. 혼인보가, 야스이가, 이노우에가 3가문에 가록이 지급되었고, 후에 린가도 더해져 4가문이 되었다.

명인 기소 부재 시에는 혼인보가가 바둑가, 장기가 중재 역할을 맡았다.

혼인보 조와가 명인 기소가 되었을 때 이후 공식 대국을 하지 않는다는 묘사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통일되지 않았다.


  • 혼인보 도사쿠는 명인 기소 후에도 어성기를 두었다. 1698년(겐로쿠 11년) 어성기 조합은 짰으나, 자신의 대국 예정은 없앴고, 야스이 치테쓰와의 대국을 거절했다.[5] 마스카와 코이치는 도사쿠가 패배 시 권위 문제를 우려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6]
  • 이노우에 도세쓰 인세키와 혼인보 도치는 명인 기소 후 어성기를 두지 않았다.
  • 혼인보 사쓰겐은 명인 기소 후에도 어성기를 두었다.

참조

[1] 문서 将棋所
[2] 웹사이트 林元美とその周辺(二)~『坐隠談叢』中の「翠翁公」について https://ameblo.jp/ig[...]
[3] 서적 동서
[4] 서적 동서
[5] 서적 碁 법정대학출판국
[6] 서적 碁 법정대학출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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