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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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제안은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1364년 좌정언으로 시작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원나라와의 외교에서 활약했지만, 신돈과의 갈등으로 인해 1368년 신돈 암살 모의에 연루되어 유배된 후 살해되었다. 김제안은 코케 테무르에게 유금을 연주하고 옥촉을 선물하며 외교적 관계를 돈독히 하려 했다.
1364년 좌정언이 되었다.[1] 당시 왕의 총애를 받던 내수 한휘와 이구수가 덕흥군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첨의평리로 제수되었는데 간관들이 이 고신에 서명하지 않자, 이들은 김제안이 딴 마음을 품고 장사들을 이간질시키려 한다고 참소하였다.[1] 시중 경천흥, 첨서밀직 원송수, 밀직부사 김달상 등이 김제안의 책임을 묻는것은 부당하다고 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다음날 김제안은 병을 칭하고 공민왕의 명을 사절하였는데, 왕은 중사를 보내 김제안을 강제로 나오게 하여 한휘 등의 고신에 서명하게 한 다음 그를 파직시켜버렸다.[1]
김제안은 코케 테무르를 만나면서 등불을 밝히는 도구인 옥촉(玉燭)을 선물하고 "연기가 끼면 어두워지고 닦으면 다시 밝아지는데, 덕을 닦기를 이처럼 하소서”라고 조언하였다. 또한 김제안은 평소 유금(儒琴)을 잘 연주하였기에 코케 테무르 앞에서 유금을 연주하여 그의 환심을 샀다고 한다.
김방경을 고조할아버지로 두었다.[5] 증조할아버지는 부지밀직사사를 지낸 김선, 할아버지는 중서평장사를 지내고 양간공의 시호를 받은 김승택이다.[5] 아버지 김묘는 상락군에 봉해졌으며, 어머니 여흥군부인 민씨는 민사평의 딸이다.[5]
[1]
서적
고려사 권40 세가 권제40 공민왕 13년(1364년) 3월 22일 병술
2. 생애
1366년, 군부좌랑으로서 전록생을 따라 원의 하남왕 코케 테무르를 방문하기 위해 연경으로 갔으나, 황태자 아유시리다르는 고려가 코케 테무르와 내통할 것을 꺼려서 고려 사신단에게 본국으로 귀국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 김제안은 병을 핑계로 연경에 머물렀고[2] 형 제민에게는 편지로 "연경이 비록 예전만 못하나 장부가 지낼 만한 곳입니다."라고 안심시켰다. 얼마 뒤 김제안은 단기로 연경을 떠나 하남까지 가서 코케 테무르에게 고려 사신이 귀국하여야 했던 사정과 함께 공민왕의 국서를 전달해 코케 테무르를 지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코케 테무르는 크게 기뻐하며 원의 황제에게 아뢰어 김제안에게 중의대부 중서병부낭중 첨서하남강북등처행추밀원사를 제수하게 하였으며, 휘하의 막객 곽영석을 김제안과 함께 고려로 보내어 보빙하게 하였다.[3]
김제안이 귀국한 뒤 공민왕은 그를 대언에 제배하려 하였으나, 신돈의 반대로 내서사인을 제수하였다가 얼마 뒤 전교부령으로 좌천시켰다. 신돈은 김제안이 자신을 먼저 찾아뵙지 않은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었는데, 김제안 역시도 자신의 관직 제수를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가 1368년 10월 전임 밀직부사 김정 등과 더불어 신돈 암살을 모의하였던 것이 누설되어 순군에 결박되고 장형에 처해져서 외지로 유배되었는데, 신돈이 사람을 보내 김제안의 뒤를 쫓게 해서 그의 목을 졸라 죽였다.[4]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1364년 좌정언이 되었다.[1] 당시 왕의 총애를 받던 한휘와 이구수가 덕흥군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첨의평리로 초월 제수되었는데 간관들이 이 고신에 서명하지 않자, 한휘와 이구수는 왕에게 김제안이 딴 마음을 품어 장사들을 이간질시키려는 것이라고 참소하였다.[1] 경천흥, 원송수, 김달상 등이 김제안을 변호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고 김제안을 파직시켰다.[1]
1366년, 군부좌랑으로서 전록생을 따라 코케 테무르를 방문하기 위해 연경으로 갔으나, 고려가 코케 테무르와 내통할 것을 꺼린 황태자 아유시리다르는 고려 사신단에게 귀국을 명하였다.[2] 김제안은 병을 핑계로 연경에 머물렀고, 단기로 연경을 떠나 하남까지 가서 코케 테무르에게 공민왕의 국서를 전달하고 지지 의사를 밝혔다.[3] 코케 테무르는 기뻐하며 김제안에게 중의대부 중서병부낭중 첨서하남강북등처행추밀원사를 제수하고, 곽영석을 김제안과 함께 고려로 보냈다.[3]
귀국 후, 신돈의 반대로 내서사인이 되었다가 전교부령으로 좌천되었다.[4] 1368년 10월, 김정 등과 신돈 암살을 모의하다 발각되어 외지로 유배되었고, 신돈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되었다.[4]
2. 2. 원나라와의 외교 활동
김제안은 코케 테무르를 만나면서 등불을 밝히는 도구인 옥촉(玉燭)을 선물하고 "연기가 끼면 어두워지고 닦으면 다시 밝아지는데, 덕을 닦기를 이처럼 하소서”라고 조언하였다. 김제안은 평소 유금(儒琴)을 잘 연주하였기에 코케 테무르 앞에서 유금을 연주하여 그의 환심을 샀다고 한다.
2. 3. 신돈과의 갈등과 죽음
1364년 좌정언이 되었다. 당시 왕의 총애를 받던 내수 한휘와 이구수가 덕흥군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첨의평리로 제수되었는데 간관들이 이 고신에 서명하지 않자, 이들은 김제안이 딴 마음을 품고 장사들을 이간질시키려 한다고 참소하였다.[1] 시중 경천흥, 첨서밀직 원송수, 밀직부사 김달상 등이 김제안의 책임을 묻는것은 부당하다고 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다음날 김제안은 병을 칭하고 공민왕의 명을 사절하였는데, 왕은 중사를 보내 김제안을 강제로 나오게 하여 한휘 등의 고신에 서명하게 한 다음 그를 파직시켜버렸다.[1]
1366년, 군부좌랑으로서 전록생을 따라 원의 하남왕 코케 테무르를 방문하기 위해 연경으로 갔으나, 황태자 아유시리다르는 고려가 코케 테무르와 내통할 것을 꺼려서 고려 사신단에게 본국으로 귀국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 김제안은 병을 핑계로 연경에 머물렀고[2] 형 제민에게는 편지로 안심시켰다. 얼마 뒤 김제안은 단기로 연경을 떠나 하남까지 가서 코케 테무르에게 고려 사신이 귀국하여야 했던 사정과 함께 공민왕의 국서를 전달해 코케 테무르를 지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코케 테무르는 크게 기뻐하며 원의 황제에게 아뢰어 김제안에게 중의대부 중서병부낭중 첨서하남강북등처행추밀원사를 제수하게 하였으며, 휘하의 막객 곽영석을 김제안과 함께 고려로 보내어 보빙하게 하였다.[3]
김제안이 귀국한 뒤 공민왕은 그를 대언에 제배하려 하였으나, 신돈의 반대로 내서사인을 제수하였다가 얼마 뒤 전교부령으로 좌천시켰다. 신돈은 김제안이 자신을 먼저 찾아뵙지 않은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었는데, 김제안 역시도 자신의 관직 제수를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가 1368년 10월 전임 밀직부사 김정 등과 더불어 신돈 암살을 모의하였던 것이 누설되어 순군에 결박되고 장형에 처해져서 외지로 유배되었는데, 신돈이 사람을 보내 김제안의 뒤를 쫓게 해서 그의 목을 졸라 죽였다.[4]
3. 일화
4. 가족 관계
형제로는 초명이 제민인 김구용과 김구덕이 있었다.[5]
이색이 쓴 여흥군부인 민씨의 묘지명에 따르면, 김제안에게는 아홉 명의 자매가 있었다.[5] 이 중 일곱 명은 각각 김사안, 이창로, 최유경, 허호, 허의, 이존사, 김첨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 두 명은 출가하지 않았다.[5]
참조
[2]
서적
고려사 권제41 세가 권제41 공민왕 15년(1366년) 6월 임술
[3]
서적
고려사 권제41 세가 권제41 공민왕 15년 11월 23일 병술
[4]
서적
고려사 권제132 열전 권제45 반역(叛逆) 신돈
[5]
서적
목은문고 제19권 비명(碑銘) 「여흥군부인민씨묘지명병서」(驪興郡夫人閔氏墓誌銘幷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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