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용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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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구용은 고려 공민왕 때의 문신으로, 진사시에 급제하고 학관을 역임하며 유교를 장려했다. 우왕 때 북원 사신을 반대하다가 유배되었고, 이후 행례사로 명나라에 파견되었으나 요동에서 체포되어 유배 도중 사망했다. 그의 문집으로 《척약재집》이 있으며, 외할아버지 민사평의 시집을 편찬하기도 했다.
김구용은 고려 공민왕 16년(1367년)에 안보가 주관한 진사시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다. 신돈이 성균관을 중수할 때 정몽주 등과 함께 학관을 겸임하여 후학 양성에 힘썼다. 우왕 즉위 후 북원과의 외교 문제로 이인임 등과 대립하다 죽주, 여흥으로 유배되기도 했다. 복귀 후 1381년 좌사의대부에 오르고 왕에게 국정을 간언하기도 했으나, 1384년 명나라와의 외교 문제에 연루되어 대리위로 유배가던 중 노주 영녕현에서 병사했다. 그의 죽음은 고려 조정의 외교적 판단 착오에서 비롯된 사건이었다.[7]
김구용은 문집으로 《척약재집(惕若齋集)》을 남겼다. 《동문선》에는 그의 한시 8수가 실려 있다.
[1]
서적
고려사
2. 생애
2. 1. 관직 생활과 유배
공민왕 16세 때 안보가 주관한 진사시에 이보림, 우현보, 이집과 함께 급제하였다. 왕이 모란을 시제로 내렸는데, 김구용이 수석을 차지하여 왕이 기이하게 여겨 산원직을 하사하였다고 한다.[4] 등과 후 덕녕부주부(德寧府注簿)를 제수하였다.[1]
공민왕 16년 5월, 신돈의 주도로 성균관을 중수할 때 정몽주, 박상충, 박의중, 이숭인 등과 함께 학관을 겸하였다.[5] 민부의랑 겸 성균직강으로서 후학을 가르쳤는데, 휴가 때도 질문하는 생도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우왕 즉위 후 삼사좌윤에 제배되었다. 북원이 사신을 보내 고려 국왕 시해의 죄를 묻지 않겠다고 전해오자, 이인임과 지윤이 북원의 사신을 맞이하려 하였다. 이에 김구용은 이숭인, 정도전, 권근 등과 함께 도당에 글을 올려 북원의 사신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경복흥과 이인임이 그 글을 물리치고 받지 않았고, 간관 이첨과 전백영 등이 소를 올려 이인임의 죄를 논하며 주살할 것을 청하였다가 장형에 처해져 유배되었다. 김구용도 이숭인 등과 함께 재상을 음해하려 했다는 이유로 죽주로 유배되었다가 여흥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산천을 유람하며 시를 짓거나 술을 마시며 유유자적하였고, 거주하는 곳에 육우당이라는 편액을 걸었다.[1][6]
우왕 7년, 소환되어 좌사의대부가 되었다. 김구용은 상소를 올려 왜구 침략으로 백성이 고통받는 상황에서 왕이 대궐을 짓고 술에 취해 말타기를 즐기는 것은 부당하다고 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 이듬해 성균대사성으로 옮겼다가 판전교시사가 되었다.[1]
우왕 10년 정월, 행례사로 임명되어 백금 100냥, 가는 모시와 삼베 각 50필을 가지고 육로로 명나라로 향했다. 그러나 요동에서 총병 반경, 섭왕, 도지휘 매의 등이 "신하는 사적인 교류를 할 수 없다"며 김구용을 경사로 압송했고, 황제는 대리위로 유배를 명하였다. 가던 중 노주 영녕현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47세였다. 김구용의 파견은 의주천호 조계룡이 요동 도지휘 매의의 말을 믿고 고려 조정에 전한 것이 발단이었다.[7] 김구용은 영녕현에서 죽기 전에 "좋은 말 오천 필이 언제나 도착하려나/도화관 밖에는 풀만 무성하구나"라는 시를 읊었고, 사람들이 이를 듣고 가엾어하였다고 한다.[8] 조계룡은 훗날 이 일로 유배되었다.[1]
2. 2. 외교 활동과 죽음
공민왕이 시해되고 우왕이 즉위한 뒤 삼사좌윤(三司左尹)에 임명되었다. 당시 북원(北元)이 사신을 보내 "바얀테무르 왕(伯顔帖木兒王, 공민왕)이 원을 배반하고 명에 귀부하였으므로 고려에 국왕 시해의 죄를 묻지 않겠다"고 전해왔는데, 이인임(李仁任)과 지윤(池奫)이 원의 사신을 맞이하려 하자 김구용은 이숭인(李崇仁) · 정도전(鄭道傳) · 권근(權近) 등과 함께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북원의 사신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6] 경복흥(慶復興)과 이인임이 그 글을 물리치고 받지 않았고, 간관(諫官) 이첨(李詹)과 전백영(全伯英) 등이 소를 올려 이인임의 죄를 논하며 그를 주살할 것을 청하였다가 장형에 처해져 유배되었으며, 김구용도 이숭인 등과 함께 재상을 음해하려 했다는 이유로 죽주(竹州)로 유배되었다.[1]
우왕 7년(1381년)에 소환되어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가 되었다. 이에 김구용은 상소로 왜구의 침략으로 소란스럽고 사방으로 적이 들어와 전쟁이 그치지 않아 백성이 생업을 잃고 기근으로 떠돌며 세금도 군사도 거둘 데가 없는 상황인데도 왕이 자신이 거처할 대궐을 짓는데 절제가 없고 술에 취해 거리에서 말이나 달리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다고 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
우왕 10년(1384년) 정월, 김구용은 행례사(行禮使)로 서한과 백금(白金) 100냥, 가는 모시와 삼베 각 50필을 가지고 육로로 명(明)으로 가던 중, 요동(遼東)에서 총병(摠兵) 반경(潘敬)과 섭왕(葉旺), 도지휘(都指揮) 매의(梅義) 등에게 "신하는 의리상 사적인 교류란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붙잡혀 명의 경사(京師)로 보내졌고, 황제는 대리위(大理衛)로 유배할 것을 명하였다. 김구용은 가던 중 노주(瀘州) 영녕현(永寧縣)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47세였다.[7] 김구용은 영녕현에서 죽기 전에 "좋은 말 오천 필이 언제나 도착하려나/도화관 밖에는 풀만 무성하구나"(良馬五千何日到/桃花關外草芊芊)라는 시를 읊었고, 국인이 이를 듣고 가엾어하였다고 한다.[8]
3. 문학 활동
김구용은 외할아버지 민사평의 글을 모아 1362년(공민왕 11년) 《급암시집(及菴詩集)을 편찬하였다. 이제현, 백문보, 이색 등이 이 문집의 서문을 썼고, 1370년(공민왕 19년)에는 이색과 함께 이인복도 발문을 썼다.
4. 가족 관계
관계 이름 비고 고조할아버지 김방경 증조할아버지 김선(金愃)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할아버지 김승택(金承澤)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 양간공(良簡公) 아버지 김묘(金昴) 상락군(上洛君) 어머니 민사평의 딸 여흥군부인 민씨(驪興郡夫人閔氏)[9] 형제 김제안 형제 김구덕(金九德) 아들 김명선(金明善) 아들 김명리(金明理) 아들 김명윤(金明允)
목은 이색이 쓴 여흥군부인 민씨의 묘지명에 따르면, 김제안에게는 아홉 명의 자매가 있었는데, 묘지명이 작성될 당시 아홉 명의 자매 가운데 일곱 명은 각기 밀직부사(密直副使) 김사안, 전 개성윤(開城尹) 이창로, 전 종부령(宗簿令) 최유경, 전 낭장(郞將) 허호, 전 부령(副令) 허의, 겸박사(兼博士) 이존사, 문하주서(門下注書) 김첨에게 출가하였고, 두 명은 출가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참조
[2]
서적
급암시집서
[3]
서적
야은일고
[4]
서적
고려사
[5]
서적
고려사절요
[6]
서적
삼봉집
[7]
서적
고려사절요
[8]
서적
동사강목
[9]
서적
목은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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