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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 (19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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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한은 일제강점기 및 광복 이후 활동한 배우이다. 한성부 출신으로, 학생 운동 참여로 퇴학 후 1927년경 영화계에 입문하여 미술부에서 일했다. 1928년 일본 유학 후 1931년 귀국하여 영화 미술 감독 및 배우로 활동했으며, 극예술연구회와 춘추극장을 거쳐 영화 배우로 활동했다. 1937년 성봉영화원을 설립하고, 1939년 영화 《처녀도》에 출연했다. 일제 말기에는 친일 행위를 했으며, 광복 후 좌익 계열 영화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한국 전쟁 전에 월북했다.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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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 (1909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원어명金漢
본명김인규 (金寅圭)
출생일1909년 4월 25일
출생지한성부
국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 생애

한성부 출신 김한은 중학교 재학 중 학생 운동으로 퇴학당한 뒤, 1927년이경손을 통해 영화계에 입문하여 《숙영낭자전》 미술부에 채용되었다.[1] 그러나 집안 반대로 1928년 일본 도쿄 미술학교 도안과로 유학을 떠났다. 1931년 경 방학을 이용해 귀국, 《방아타령》의 미술감독 및 배우로 활동하다 경향극 참여로 경찰 탄압을 받고 도쿄로 돌아갔다.[1]

1933년 귀국하여 홍해성극예술연구회에 참여, 김인규라는 이름으로 《검찰관》 무대장치를 맡았으나,[1] 해외문학파와 경향파의 충돌로 탈퇴하고 서월영, 박제행, 심영 등과 춘추극장을 설립했다.[1]

이후 영화 미술, 연극 무대장치, 간판 가게, 다방 운영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으나, 영화 출연이 주요 직업이었다. 1937년 서광제, 이규환, 문예봉 등과 성봉영화원을 설립하고 《군용열차》에 출연했다. 1939년 신경균 연출 《처녀도》에서는 남자 주인공 역을 맡았다.[1]

일제 말기 영화계 전시체제 개편 시 조선영화인협회 평의원, 영화인기능심사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적극 협력했고, 《군용열차》, 《승리의 뜰》(1940), 《병정님》(1944) 등 군국주의 옹호 영화에 출연했다.[1]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다.[1]

고학력자이자 적극적인 성격으로 영화계 여러 활동에 참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 악역을 많이 맡았으나, 능란한 화술과 맑은 음성으로 발성 영화 시대 주연 배우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1]

광복 후 조선영화건설본부조선영화동맹 중앙집행위원을 맡았고,[1] 한국 전쟁 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갔다. 전쟁 중 서울에서 이필우가 김한을 만났다는 증언이 있으나,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2. 1. 학창 시절과 영화계 입문 (1927년 이전)

한성부 출신으로, 중학교 재학 중 학생 운동에 참가했다가 퇴학당했다. 1927년 전후 이경손을 통해 영화계에 입문, 《숙영낭자전》 미술부에 채용되었다.[1]

2. 2. 일본 유학과 영화계 복귀 (1928년 ~ 1931년)

집안의 반대로 1928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 미술학교 도안과에서 수학했다. 1931년 무렵 방학을 이용해 귀국, 《방아타령》의 미술감독을 맡고 출연까지 겸하면서 배우가 되었다. 이때 경향극에 참여했다가 경찰의 탄압을 받고 다시 도쿄로 돌아갔다.[1]

2. 3. 극예술연구회와 춘추극장 활동 (1933년)

1933년 귀국하여 홍해성이 주도한 극예술연구회에 참여했다. 김한은 김인규라는 이름으로 《검찰관》 공연에서 무대장치를 맡았으나,[1] 해외문학파와 경향파가 충돌하면서 극연을 탈퇴하고 서월영, 박제행, 심영 등과 함께 중간극을 표방하는 춘추극장을 설립했다.[1]

2. 4. 영화 배우로서의 활동 (1937년 ~ 1945년)

1937년 서광제, 이규환, 문예봉 등과 성봉영화원을 세우고 《군용열차》에 출연했다. 1939년 신경균이 연출한 영화 《처녀도》에서는 목장에 휴양차 내려왔다가 목장 주인의 딸과 사랑에 빠지는 남자 주인공 역을 맡았다.[1]

일제 말기 영화계가 전시체제로 개편되었을 때 김한은 조선영화인협회 평의원, 영화인기능심사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군용열차》, 《승리의 뜰》(1940), 《병정님》(1944) 등 군국주의 옹호 영화에 출연했다.[1] 이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다.[1]

당시 영화 배우 중에 김한과 같은 고학력자는 드물었고, 성격도 매사에 적극적이라 공사를 막론하고 영화계의 여러 활동에 열의를 갖고 뛰어들었다는 평가가 있다.[1] 입이 두껍고 눈매가 매서운 외모로 악역을 많이 맡았으나, 화술이 능란하고 음성이 맑아 발성 영화 시대에 주연 배우를 맡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1]

2. 5. 광복 후 활동과 월북 (1945년 이후)

광복 후 좌익 계열 영화인들이 만든 조선영화건설본부조선영화동맹에 참여했고, 조선영화동맹에서는 중앙집행위원을 맡았다.[1] 한국 전쟁 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갔다. 한국 전쟁 중 서울이 조선인민군에게 점령되었을 때 이필우는 서울에서 김한을 만났다고 증언했으나,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3. 평가

김한은 고학력 배우로서 영화계의 여러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 입이 두껍고 눈매가 매서운 외모로 악역을 많이 맡았으나, 능란한 화술과 맑은 음성으로 발성 영화 시대에 주연 배우로 활약했다.[1]

일제 강점기 말 영화계가 전시 체제로 개편되었을 때, 김한은 여기에 비교적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조선영화인협회 평의원과 영화인기능심사위원으로 활동했고, 《군용열차》, 《승리의 뜰》(1940), 《병정님》(1944) 등 군국주의 옹호 영화에 출연했다. 이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어 비판받기도 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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