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서광제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서광제는 일제강점기, 광복 이후, 월북 이후 시기를 거쳐 활동한 영화인이다. 남대문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영화예술협회 연구생을 거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서 영화계 활동을 시작했다.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까지 경향파 영화에 참여하고 영화 평론 활동을 했으며,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 1938년 친일 영화 《군용 열차》를 연출하며 친일 영화인으로 활동했고, 조선영화인협회 이사, 영화인기능심사위원회에 참여했다. 광복 후 조선영화동맹에서 좌익 계열로 활동하다가, 1948년경 월북하여 북한에서 시나리오 위원회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화 각본가 - 김태진 (극작가)
    김태진은 함경남도 원산 출신의 극작가로, 배우와 영화 감독으로 활동하며 좌파 문화 운동에 참여했으나 일제강점기 말기에 친일 연극을 제작했고, 광복 후 월북하여 역사극을 집필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화 배우 - 문예봉
    문예봉은 일제강점기와 북한에서 활동한 배우로, 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로 데뷔하여 《춘향전》에서 춘향 역을 맡아 스타덤에 올랐으며, 월북 후 북한에서 공훈배우로 활동하다 사망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화 배우 - 주인규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활동한 배우이자 영화인인 주인규는 1926년 영화 《아리랑》에서 악역으로 인기를 얻었으며, 해방 후 북한 영화계에서 활동하다 남로당계로 숙청당해 사망했다.
서광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서광제
본명서광제
출생일1901년
출생지한성부
직업영화 감독
각본가
평론가
기타
활동 기간알 수 없음
배우자알 수 없음
자녀알 수 없음
종교알 수 없음
웹사이트알 수 없음
수상알 수 없음

2. 초기 활동 (1920년대 ~ 1930년대 초)

한성부 출신으로 남대문상업학교를 졸업했다.[4] 이후 조선영화예술협회 연구생을 거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에 참가해 영화계에서 활동했다. 1929년 김유영과 함께 신흥예술가동맹을 설립했으나, 카프의 강경파인 임화와는 대립하면서 카프에서 탈퇴했다.

2. 1. 경향파 영화 참여

1928년 김유영이 연출한 경향파 영화 《유랑》에 출연했다. 《유랑》은 식민지의 비참한 현실을 묘사한 작품으로, 임화도 배우로 출연했다. 강호가 연출한 《지지마라 순이야》에도 출연했다.[4] 조선영화예술협회가 서울 키노로 이름을 바꾸고 제작한 영화 《화륜》에서는 각본과 편집을 맡았다. 영화 평론가로서는 조선 영화 비평과 경향파 영화 이론을 소개하는 데 집중했고,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 이론을 소개하기도 했다.

2. 2. 영화 평론 활동

1928년 김유영이 연출한 경향파 영화 《유랑》에 출연했다. 《유랑》은 식민지의 비참한 현실을 묘사한 작품으로, 임화도 배우로 출연했다. 강호가 연출한 《지지마라 순이야》에도 출연했다. 한편, 조선영화예술협회가 서울 키노로 개칭하고 제작한 영화 《화륜》에서는 각본과 편집을 맡았다.

영화 평론가로서는 조선 영화 비평과 경향파 영화 이론을 소개하였고,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 이론을 소개하기도 했다. 1929년 김유영과 함께 신흥예술가동맹을 설립한 뒤 카프의 강경파인 임화와는 대립하면서 카프를 탈퇴하였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는 경향파 영화 이론에, 1930년대 중반부터는 할리우드의 고전적 리얼리즘 영화 미학에 입각한 평론 활동을 벌였다.

2. 3. 일본 유학

1932년 김유영과 함께 도쿄로 건너가 영화 공부를 했다. 1933년 10월 5일 윤백남의 주례로 연극 배우 김선초와 결혼했다.[5]

3. 친일 행적 (1930년대 후반 ~ 1945년)

1938년 서광제는 데뷔작으로 《군용 열차》를 연출했는데, 이는 군수품을 나르는 군용 열차의 조선인 직원들과 이들을 매수하려는 중국인 스파이가 등장하는 내선일체 홍보 영화였다. 《군용 열차》는 태평양 전쟁 종전 때까지 제작된 친일 영화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영화에는 당시 인기 배우였던 문예봉이 여주인공으로 출연했다.[4]

이후 서광제는 친일 영화인 모임인 조선영화인협회 이사를 맡았고, 영화인기능심사위원회에도 참가했다. 1940년 발표한 〈신체제와 영화〉는 조선 영화령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6]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3. 1. 친일 영화 연출

1938년 서광제는 데뷔작으로 《군용 열차》를 연출했다. 이 영화는 군수품을 나르는 군용 열차의 조선인 직원들과 이들을 매수하려는 중국인 스파이가 등장하는 내선일체 홍보 영화였다. 《군용 열차》는 태평양 전쟁 종전 때까지 친일 영화가 다수 제작되는 시점에서 선구적인 친일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영화에는 당시 인기 배우였던 문예봉이 여주인공으로 출연했다.[4]

이후 서광제는 친일 영화인 모임인 조선영화인협회의 이사를 맡았고, 영화인기능심사위원회에도 참가했다. 1940년에는 〈신체제와 영화〉라는 글을 발표하여 조선 영화령의 정당성을 옹호하기도 했다.[6] 그의 전향 이후 작품인 《군용 열차》는 할리우드 스릴러 영화의 문법을 차용했다.

3. 2. 친일 단체 활동

1938년 데뷔작으로 《군용 열차》를 연출했는데, 군수품을 나르는 군용 열차의 조선인 직원들과 이들을 매수하려는 중국인 스파이가 등장하는 내선일체 홍보 영화이다. 《군용 열차》는 태평양 전쟁 종전 때까지 제작된 친일 영화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당시 인기 배우 문예봉이 여주인공을 맡았다.[4]

이후 친일 영화인 모임인 조선영화인협회 이사를 맡았고, 영화인기능심사위원회에도 참가했다. 1940년 발표한 〈신체제와 영화〉는 조선 영화령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6] 전향 이후 작품인 《군용 열차》는 할리우드 스릴러 영화의 문법을 차용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4. 광복 이후 활동 (1945년 ~ 1948년)

1945년 광복 후, 서광제는 카프 경력을 바탕으로 좌익 계열에서 활동했다. 조선영화동맹 활동과 방북 및 월북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을 참고하라.

4. 1. 조선영화동맹 활동

1945년 조선영화동맹 중앙집행위원을 맡았고[7], 좌익 강경파를 대표하는 추민과 맞서 현실론을 주창하여 간접 논쟁을 벌였다. 추민과 서광제는 해방 공간에서의 영화 운동을 이끌어가는 양대 축이었다.[8] 추민이 영화 동맹의 정치적 역할을 강조한 반면, 서광제는 《신천지》에 발표한 〈조선 영화론〉(1946)을 통해 좌익소아병과 정치소아병을 비판하고 영화 예술과 정치의 분리를 통한 영화 동맹의 개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4. 2. 방북 및 월북

미군정 시기에 소군정 지역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 정현웅이 장정을 맡은 《북조선 기행》(1948)이라는 책을 남겼으며, 이 무렵인 1948년경에 월북한 것으로 전해진다.[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시나리오 위원회에 소속되어 《위대한 역사》 등의 시나리오를 썼다.[9] 한국 전쟁 이후 남로당 계열이 숙청당하던 1950년대 후반에 이색분자로 비난받은 기록이 있다.[10]

5. 월북 이후 (1948년 ~ ?)

미군정 시기에 소군정 지역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 정현웅이 장정을 맡은 《북조선 기행》(1948)을 펴냈으며, 1948년경에 월북한 것으로 전해진다. [9] 이후의 자세한 행적은 하위 문단을 참고하라.[10]

5. 1. 북한에서의 활동

미군정 시기에 소군정 지역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 정현웅이 장정을 맡은 《북조선 기행》(1948)을 펴냈으며, 1948년경에 월북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시나리오 위원회에 소속되어 《위대한 역사》 등의 시나리오를 썼다.[9] 한국 전쟁 이후 남로당 계열이 숙청당하던 1950년대 후반에 이색분자로 비난받은 기록이 있다.[10]

5. 2. 숙청 가능성

한국 전쟁 이후 남로당 계열이 숙청당하던 1950년대 후반에 이색분자중국어로 비난받은 기록이 있다.[10]

6. 사후 평가

1938년 데뷔작으로 《군용 열차》를 연출했는데, 이는 내선일체를 홍보하는 친일 영화였다. 이 영화는 군수품을 나르는 군용 열차의 조선인 직원들과 이들을 매수하려는 중국인 스파이가 등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태평양 전쟁 종전 때까지 다수 제작된 친일 영화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6] 당시 인기 배우였던 문예봉이 여주인공을 맡았다.

이후 친일 영화인 모임인 조선영화인협회 이사를 맡았고, 영화인기능심사위원회에도 참가했다.[6] 1940년 발표한 〈신체제와 영화〉는 조선 영화령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6]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참조

[1] 간행물 제1기 영화인 등록자, 영화인 58명 등록 1941
[2] 서적 재일본 및 재만주 친일 문학의 논리 역락 2003-06-20
[3] 서적 식민지 시대 대중 예술인 사전 소도 2006-12-15
[4] 서적 식민지 시대 대중 예술인 사전 소도 2006-12-15
[5] 뉴스 演藝界 消息, 徐光霽 金仙草 兩氏 結婚 동아일보 1933-10-05
[6] 서적 한국영화사연구 새미 2003-02-03
[7] 서적 한국 현대 예술사대계 1 (해방과 분단 고착 시기) 시공사 1999-12-22
[8] 서적 한국 영화사 연구 새미 2003-02-03
[9] 간행물 씨나리오 위원회 상반기 사업 1949
[10] 뉴스 라운규와 아리랑 문학신문 1957-07-2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