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남만한인청년총동맹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남만한인청년총동맹은 1929년 2월 만주 지역에서 민족 운동의 통합을 위해 정의부가 기존 청년 단체들을 통합하여 결성한 단체이다. 김일성도 이 단체에 가입했다. 그러나 내부의 이념 갈등으로 인해, 공산주의 세력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좌경화된 간부들이 숙청되는 왕청문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조선혁명당에 의해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으로 개편되었으며, 김일성은 이 과정에서 동맹의 간부로 활동했다.

2. 결성 배경

정의부는 1929년 2월, 반석현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공산주의 엠엘(ML)파 청년 조직인 재중국한인청년동맹 및 재만농민동맹에 대항하기 위해 남만한인청년총동맹을 결성했다. 정의부는 기존의 청년단체인 남만청년연맹을 총동맹으로 개편하고, 6개의 다른 청년단체를 통합하여 조직을 확대하였다.[2] 이 단체에는 김일성도 가입해 있었다.[1]

국민부 산하 단체 남만한인청년총동맹이 1930년 3월 1일 3.1운동 11주년을 맞이하여 낸 성명.

2. 1. 정의부의 청년 조직 통합 노력

정의부는 1920년대 만주 지역 한인 사회에서 민족 운동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조직 강화와 청년층 포섭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반석현에 근거지를 둔 공산주의 엠엘(ML)파 청년 조직인 재중국한인청년동맹 및 재만농민동맹에 대항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정의부 계통의 청년단체인 남만청년연맹을 총동맹으로 개편하고, 6개 청년단체를 합류시켜 1929년 2월 남만한인청년총동맹을 조직했다.[2] 김일성도 이 단체에 가입했었다.[1]

그러나 남만한인청년총동맹의 간부였던 최봉, 고원 등은 비밀리에 재중국한인청년동맹 간부 엠엘(ML)파와 연대하여 정의부를 파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국민부는 1929년 10월 중순, 좌경화된 간부 6명을 체포하고 총살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이를 왕청문 사건(旺淸門 事件) 또는 남만참변(南滿慘變)이라고 한다.[2][3][4]

이 사건 이후에도 이종락 등 일부 회원들은 좌경화된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국민부 내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1929년 11월 2일 열린 남만한인청년총동맹 수습대회에서는 이종락이 중앙간부로 선출되기도 했다.[5] 북한에서 간행된 김일성 전기에는 김일성도 이 수습대회에 참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6]

1929년 11월 18일, 남만한인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회는 결의안을 통해 행방불명된 중앙집행위원 김성파를 해임하고 최창걸을 보선했다. 또한, 상무집행위원으로 고이허, 차광수, 계영춘, 현균, 박성일, 김수산, 김근혁 등이 선출되었다.[13] 이들 중 최창걸, 차광수, 김근혁 등은 김일성보다 연장자였고 선배였지만, 김일성 회고록에는 이들이 자신에게 충성했던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1930년 3월 14일, 조선혁명당은 남만한인청년총동맹, 남만농민동맹, 남만여자교육회 등 3개 단체를 통합하여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을 조직했다. 이후 조선혁명당과 국민부는 총동맹 내 좌경화된 간부들을 모두 배제하고, 이종락이 이끄는 무장대까지 해산시키려 했다. 김일성은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의 무송·안도 지방 지부동맹조직위원으로 선출되었다.[14][15][16]

김일성은 왕청문 사건 당시 국민부 편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회고록인 세기와 더불어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국민부를 비판하고 있다.[17] 또한, 김일성은 1929년 가을부터 1930년 5월까지 길림에서 감옥살이를 했다고 주장하지만,[18] 감옥에 있었다는 3월 14일에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의 간부로 선출된 점[14]을 볼 때, 회고록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이는 당시 공산주의자들과 대립하던 민족 진영의 국민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이후 김일성은 1930년 8월 19일 이종락을 따라 국민부를 탈퇴하고, 국민부에 대항하는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에 가담한다.

2. 2. 공산주의 세력과의 갈등

국민부의 전신 정의부는 반석현에 근거지를 둔 공산주의 엠엘(ML)파 청년 조직인 재중국한인청년동맹 및 재만농민동맹에 대항하려고 청년단체들을 통합하여 1929년 2월 남만한인청년총동맹을 조직하였다.[2] 북한 김일성도 여기에 가입해 있었다.[1]

총동맹의 간부 최봉(崔峰)·고원(高元) 등은 재중국한인청년동맹 간부 엠엘(ML)파와 비밀리에 연대하여 정의부 파괴를 꾀하였다. 국민부로 바뀐 후에도 이들을 감시하다가 1929년 10월 중순, 좌경화한 간부 최봉·이태희(李泰熙)·지운산(池雲山)·이광선(李光先)·한의철(韓義哲)·이몽렬(李夢烈) 6명을 체포하고 이들을 총살하였다.[2][3] 이를 왕청문 사건(旺淸門 事件) 또는 남만참변(南滿慘變)이라고 한다.[4]

이 사건 당시 총동맹회원이었던 이종락(李鍾洛) 등은 국민부 지도부를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남아 활동하였고, 1929년 11월 2일 열린 남만한인청년총동맹 수습대회에서 중앙간부로 선출되었다.[5]

1929년 11월 18일 발표된 남만한인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회 결의안에는 행방불명인 중앙집행위원 김성파(金星波)를 해임하고, 최창걸(崔昌傑, ? ~ 1931.11)[7][8]로 보선(補選)하며, 상무집행위원으로 고이허(高而虛, 1902~1937)[9][10], [http://people.aks.ac.kr/front/dirSer/ppl/pplView.aks?pplId=PPL_7HIL_A1905_1_0026116&curSetPos=0&curSPos=0&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P 차광수(車光洙, 1905 ~ 1932)][11], 계영춘(桂永春), 현균(玄均), 박성일(朴成一), 김수산(金壽山), 김근혁(金根赫, 김혁)[12]이 선출되었다고 하였다.[13] 최창걸, 차광수, 김근혁 등은 북한 김일성보다 연장자이고 선배였지만, 김일성 회고록에는 이들이 자신에게 충직했던 인물인 것처럼 조작해 놓았다.

1930년 3월 14일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은 산하의 남만한인청년총동맹, 남만농민동맹, 남만여자교육회 등 3개 단체를 통합하여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을 조직한다. 이후 조선혁명당과 국민부는 총동맹 내에 있던 좌경화한 간부 최창걸, 김근혁, 차광수, 현균, 이종락을 모두 배제하였다. 심지어 이종락이 이끄는 무장대까지 해산시키려 하였다. 이 동맹의 무송(撫松)·안도(安圖) 지방 담당 지부동맹조직위원으로 북한 김일성(金成柱)이 선출되었다.[14][15][16]

김성주(김일성)는 왕청문 사건 당시에는 상관 이종락 등과 같이 오히려 국민부 편에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 회고록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국민부를 비판하고 있다.[17]

김일성 회고록에는 그가 1929년 가을부터 1930년 5월까지 길림에서 감옥살이를 했다고 주장하지만,[18] 감옥에 있었다는 3월 14일에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의 간부로 선출되고 있으므로[14], 회고록의 주장은 거짓이다.

이후 김일성은 1930년 8월 19일 상관 이종락을 따라 국민부를 탈퇴하고, 국민부에 대항하는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에 가담한다.

3. 조직 및 활동

정의부는 반석현에 근거지를 둔 공산주의 엠엘(ML)파 청년 조직인 재중국한인청년동맹 및 재만농민동맹에 대항하려고, 정의부 계통의 청년단체인 남만청년연맹을 총동맹으로 개편하며 6개 청년단체를 합류시켜 조직을 확대 통합하여 1929년 2월에 조직하였다.[2] 김일성도 여기에 가입해 있었다.[1] 총동맹의 간부 최봉(崔峰), 고원(高元) 등은 재중국한인청년동맹 간부 엠엘(ML)파와 비밀리에 연대하여 정의부의 파괴를 꾀하였다.[2]

3. 1. 초기 조직 구성

정의부는 반석현에 근거지를 둔 공산주의 엠엘(ML)파 청년 조직인 재중국한인청년동맹 및 재만농민동맹에 대항하려고, 정의부 계통의 청년단체인 남만청년연맹을 총동맹으로 개편하며 6개 청년단체를 합류시켜 조직을 확대 통합하여 1929년 2월에 조직하였다.[2] 북한 김일성도 여기에 가입해 있었다.[1]

총동맹의 간부 최봉(崔峰), 고원(高元) 등은 재중국한인청년동맹 간부 엠엘(ML)파와 비밀리에 연대하여 정의부의 파괴를 꾀하였다.[2]

3. 2. 왕청문 사건 (남만참변)

정의부가 반석현에 근거지를 둔 공산주의 엠엘(ML)파 청년 조직인 재중국한인청년동맹 및 재만농민동맹에 대항하려고 남만청년연맹을 총동맹으로 개편하며 6개 청년단체를 합류시켜 1929년 2월 조직한 남만한인청년총동맹은, 국민부로 바뀐 후에도 좌경화된 간부들을 감시하였다.[2] 총동맹의 간부 최봉(崔峰)·고원(高元) 등이 재중국한인청년동맹 간부 엠엘(ML)파와 비밀리에 연대하여 정의부 파괴를 꾀했기 때문이다. 1929년 10월 중순, 국민부 간부 김문거(金文擧)·김보안(金輔安)은 부하 군인을 지휘하여 좌경화된 간부 최봉(崔峰)·이태희(李泰熙)·지운산(池雲山)·이광선(李光先)·한의철(韓義哲)·이몽렬(李夢烈) 6명을 체포, 동월 16일 신빈현 북왕청(北旺淸) 부근 산골짜기에서 이들을 모두 총살하였다.[2][3] 이를 왕청문 사건(旺淸門 事件) 또는 남만참변(南滿慘變)이라고 한다.[4]

이 사건 당시 총동맹 회원이던 이종락(李鍾洛) 등은 좌경화되어 국민부 지도부를 비판했음에도 그 안에 남아 활동하였고, 1929년 11월 2일 열린 남만한인청년총동맹 수습대회(收拾大會)에서 중앙간부로 선출되었다.[5]

김성주(김일성)는 왕청문 사건 당시 상관 이종락 등과 함께 국민부 편에 섰음에도, 김일성 회고록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국민부를 비판하고 있다.[17]

3. 3. 수습대회와 조직 재편

1929년 11월 2일 열린 남만한인청년총동맹 수습대회에서 이종락 등이 중앙간부로 선출되었다.[5] 북한에서 간행된 김일성 전기 중에는 김일성이 이 수습대회에 참여했다고 주장하는 내용이 있다.[6]

1929년 11월 18일 발표된 남만한인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회 결의안에 따르면, 행방불명인 중앙집행위원 김성파가 해임되고 최창걸(崔昌傑, ? ~ 1931.11)[7][8]이 보선되었으며, 상무집행위원으로 고이허(高而虛, 1902~1937)[9][10], [http://people.aks.ac.kr/front/dirSer/ppl/pplView.aks?pplId=PPL_7HIL_A1905_1_0026116&curSetPos=0&curSPos=0&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P 차광수(車光洙, 1905 ~ 1932)][11], 계영춘(桂永春), 현균(玄均), 박성일(朴成一), 김수산(金壽山), 김근혁(金根赫, 김혁)[12]이 선출되었다.[13]

최창걸, 차광수, 김근혁 등은 북한 김일성보다 7~8년 이상 연장자이자 선배였지만, 김일성 회고록에는 이들이 자신에게 충직했던 인물인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이는 당시 김일성이 이들과 함께 공산주의자들 입장에서 반동단체로 여겨지던 국민부 산하에서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4. 조선혁명당과의 통합

1930년 3월 14일 조선혁명당은 산하의 남만한인청년총동맹, 남만농민동맹, 남만여자교육회 등 3개 단체를 통합하여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을 조직한다.[14][15][16]

4. 1.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으로의 개편

1930년 3월 14일 조선혁명당은 산하의 남만한인청년총동맹, 남만농민동맹, 남만여자교육회 등 3개 단체를 통합하여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을 조직한다.[14][15][16] 이후 조선혁명당과 국민부는 총동맹 내에 있던 좌경화된 간부 최창걸, 김근혁, 차광수, 현균, 이종락을 모두 배제하였다. 심지어 이종락이 이끄는 무장대까지 해산시키려 하였다.

1930년 3월 14일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의 무송(撫松)·안도(安圖) 지방 담당 지부동맹조직위원으로 김성주(김일성)가 선임되었다는 내용이 담긴, 길림(吉林) 주재 일본 총영사(總領事)가 1930년 6월 25일자로 외무대신에게 올린 보고서(p.4).


같은 날, 김일성은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의 무송(撫松)·안도(安圖) 지방을 담당할 지부동맹조직위원(支部同盟組織委員)으로 선출되었다.[14][15][16] 김일성회고록에서 1929년 가을부터 1930년 5월까지 길림에서 감옥살이를 했다고 주장하지만,[18] 1930년 3월 14일에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의 간부로 선출된 사실[14]과 모순된다. 이는 김일성이 공산주의자들과 대립하던 민족 진영의 국민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술수로 보인다.

4. 2. 김일성의 노선 변화

김일성은 왕청문 사건 당시에는 상관 이종락 등과 같이 오히려 국민부 편에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 회고록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국민부를 비판하고 있다.[17]

김일성 회고록에는 김일성이 1929년 가을부터 1930년 5월까지 길림에서 감옥살이를 했다고 주장하지만,[18] 1930년 3월 14일에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의 간부로 선출되고 있으므로[14] 회고록의 주장은 거짓이다. 이는 김일성이 이 시기에 공산주의자들과 대립하던 민족 진영의 국민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술수로 보인다.

이후 김성주(김일성)는 1930년 8월 19일 상관 이종락을 따라 국민부를 탈퇴하고, 국민부에 대항하는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에 가담한다.

5. 역사적 평가와 논란

남만한인청년총동맹은 만주 지역에서 한인 청년 단체들의 통합을 시도했으나, 내부 이념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정의부 주도로 1929년 2월 여러 청년 단체가 통합되었지만, 민족주의 계열과 공산주의 계열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2]

1929년 10월, 공산주의 계열 간부들이 국민부에 의해 처형된 왕청문 사건(남만참변)은 만주 지역 한인 사회의 분열과 민족주의, 공산주의 간 이념 대립을 극명하게 보여준다.[2][3][4]

이후 남만한인청년총동맹은 조직 재정비를 시도했으나, 조선혁명당 산하 단체들과 통합되어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으로 개편되면서 좌경화된 간부들이 배제되었다.[14][15][16] 이는 만주 지역 한인 청년 운동이 이념적으로 분열되고, 항일 무장 투쟁 준비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음을 시사한다.

5. 1. 김일성의 역할에 대한 상반된 주장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실제 기록과 차이를 보인다. 회고록은 김일성이 1929년 가을부터 1930년 5월까지 길림에서 수감되었다고 주장하나,[18] 1930년 3월 14일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 간부로 선출된 기록이 있어[14] 이는 사실이 아니다. 김일성은 당시 공산주의자들과 대립하던 국민부와 관련이 있었고, 이를 감추기 위해 회고록을 조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왕청문 사건 당시 김일성(김성주)은 상관 이종락과 함께 국민부 편에 섰지만,[17] 세기와 더불어에서는 국민부를 비판한다.

1929년 11월 18일 남만한인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회 결의안에 따르면,[13] 최창걸(崔昌傑, ? ~ 1931.11)[7][8], [http://people.aks.ac.kr/front/dirSer/ppl/pplView.aks?pplId=PPL_7HIL_A1905_1_0026116&curSetPos=0&curSPos=0&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P 차광수(車光洙, 1905 ~ 1932)][11], 김근혁(金根赫, 김혁)[12] 등은 김일성보다 연장자이자 선배였으나, 회고록에는 이들이 김일성에게 충성한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5. 2. 남만한인청년총동맹의 역사적 의의

남만한인청년총동맹은 만주 지역에서 한인 청년 단체들의 통합을 이루려 했으나, 내부 이념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정의부가 주도하여 여러 청년 단체를 통합, 1929년 2월에 결성되었지만, 민족주의 계열과 공산주의 계열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2]

1929년 10월에는 공산주의 계열 간부들이 국민부에 의해 처형되는 왕청문 사건(남만참변)이 발생하면서 조직이 크게 흔들렸다.[2][3][4] 이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이념 대립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사례로, 만주 지역 한인 사회의 분열을 보여준다.

이후 남만한인청년총동맹은 조직을 재정비하려 노력했지만, 조선혁명당 산하의 다른 단체들과 통합되어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으로 개편되면서 좌경화된 간부들이 배제되기도 하였다.[14][15][16]

이러한 과정은 만주 지역 한인 청년 운동이 이념적으로 분열되고, 항일 무장 투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음을 보여준다. 김일성도 초기에는 남만한인청년총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나,[1] 왕청문 사건 당시에는 국민부 편에 섰고,[17] 이후 공산주의 계열 단체로 옮겨가는 등 복잡한 행보를 보였다.

6. 관련 기록

1929년 11월 18일 남만한인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회 결의안: 1930-01-21 일자로 길림 주재 일본 총영사가 외무대신에게 올린 보고서

  • 1929년 11월 2일 남만한인청년총동맹 수습대회 결의록[5]
  • 1929년 11월 18일 남만한인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회 결의안[13]
  • 1929년 12월 20일 남만 흥경현(南滿 興京縣)에서 국민부가 살해한 최봉(崔鳳) 외 6명 추도회 관련 기록[4]
  • 1930년 3월 14일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 조직 관련 기록[14][15][16]

참조

[1] 신문기사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 (二) https://www.nl.go.kr[...] 만선일보(滿鮮日報) 1940-04-18
[2] 서적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1920~45) http://e-gonghun.mpv[...] 아세아문화사 1999
[3] 웹사이트 남만한인청년총동맹(南滿韓人靑年總同盟) http://encykorea.aks[...]
[4] 서적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1920~45) 아세아문화사 1999
[5] 파일 남만한인청년총동맹 수습대회 결의록 (南滿韓人靑年總同盟 收拾大會 決議錄)
[6] 서적 김일성 평전(金日成 評傳) - 허구와 실상 북한연구소 1987
[7] 웹사이트 최창걸(崔昌傑, ? ~ 1931.11) https://web.archive.[...]
[8] 뉴스 北, 김일성 친구이자 공산주의자 '최창걸' 조명…"충성 독려·내부 결속" http://news1.kr/arti[...] 뉴스1 2019-12-26
[9] 위키백과 고이허(高而虛, 1902~1937) https://ko.wikipedia[...]
[10] 간행물 2002년 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고이허 http://www.cnkccf.or[...] 충청남도 문화원 연합회 서북구문화원 2002-09-02
[11] 뉴스 北 신문, 김일성 혁명동지 차광수 조명…주민들에 '충성' 독려 http://news1.kr/arti[...] 뉴스1 2019-12-19
[12] 라디오 김일성 내세웠다는 김혁·차광수의 진실 https://www.rfa.org/[...] RFA 2017-03-24
[13] 파일 南滿韓人靑年總同盟中央執行委員會決議案ノ入手ニ関スル件 https://www.jacar.ar[...]
[14] 서적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1920~45) 아세아문화사 1999
[15] 서적 독립운동사 제5권 : 독립군전투사(상) 제3편 3부의 활동과 만주사변 전후의 독립전선/ 제6장 만주정세/ 제4절 전선의 변천/ 2. 남만의 독립전선 http://e-gonghun.mpv[...] 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16] 서적 김일성 평전(金日成 評傳) - 허구와 실상 북한연구소 1987
[17] 서적 세기와 더불어
[18] 서적 세기와 더불어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