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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촌-태릉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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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내촌-태릉 전투는 1950년 6월 26일부터 28일까지 한국 전쟁 초기에 벌어진 전투로, 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하기 위해 육군사관학교 생도들과 제9연대 1대대, 제5연대가 참여했다. 내촌면 전투에서 생도대대는 북한군과 교전 후 철수했고, 태릉 전투에서는 육사 방어를 위해 진지를 구축했으나, 육군 본대의 철수 명령으로 인해 부대가 분산되었다. 일부 생도들은 불암산에서 유격 활동을 벌였으나, 결국 1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며 실패로 끝났다. 이 전투는 참전 용사들의 희생과 헌신을 보여주는 사례로, 민족주의와 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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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촌-태릉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정보
분쟁6.25 전쟁
전체6.25 전쟁
날짜1950년 6월 26일 ~ 6월 28일
장소경기도 내촌면, 태릉
결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
교전 세력
지휘관 및 지도자
지휘관 1이준식 육군사관학교장 준장
조암 육군사관학교 대대장 중령
유환박 제9연대 1대대장 소령
지휘관 2불명
병력 규모
병력 1알 수 없음
병력 2알 수 없음
사상자 및 피해
사상자 1알 수 없음
사상자 2알 수 없음

2. 전투 배경

3. 내촌면 전투 (1950년 6월 26일)

3. 1. 생도대대의 편성 및 출동

내촌면 내리 부근은 포천과 기산리에서 퇴계원에 이르는 391번 도로상의 분기지점으로, 이곳이 북한군 수중에 넘어가면 서울 동북쪽 방어에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의정부의 방어가 어려워 질수 있기에 방어가 시급했다.

채병덕 소장은 6월 25일 의정부 전황을 확인하고 수도 경비가 위급하다고 판단, 재경 군사학교 병력을 통합하여 수도방어특별연대를 편성하려 했다. 그러나 상황이 급변하여 보병학교와 사관학교 교도대는 1사단에 배속되어 문산으로, 생도대대는 7사단의 동측방을 방어하게 되었다.

이준식 교장은 조암 중령을 대대장으로 임명하여 생도대대를 편성했다. 생도대대는 16:00에 출동하여 391번 도로와 326번 도로가 만나는 'Y'자형 교차로 남쪽고지(372고지)에 진지를 구축했다. 이곳은 서파와 송우리로 통하는 요지이며 7사단 작전지역의 동측 후방이었다.

3. 2. 내리 지역 전황

06:00에 경찰대대가 현지에 도착하자 조암 중령이 이를 통합지휘하여 372고지 동북쪽의 330고지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양 대대는 함께 진지를 보강하면서 일부병력으로 정세를 탐색하였는데, 특히 제 1중대장 송인률 대위는 소대병력을 자신이 직접 지휘하여 내리 서쪽의 325번 도로상에 대 전차용 호를 파고, 대인 지뢰를 매설하는 등 방어작업을 실시하였으나 15:00이 지나도록 이 지역에는 아무런 적 움직임이 없었다.

이윽고 16:00를 기하여 진목리의 경찰분소에서 대규모의 북한군이 국사봉(547고지) 남쪽으로 움직인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들은 북한군 제3사단 9연대 소속으로 대좌 김만익이 지휘하여 사단의 동 측방에 침공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때에 생도대대는 동북쪽의 전황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330고지를 점령한 적이 그 여세를 몰아 대대 정면으로 공격해왔다. 이리하여 그 주력이 82mm 박격포와 45mm 반전차포 및 기관총 등의 엄호하에 내리 서남쪽의 개활지를 횡단하려 하자 대대의 전 화력이 동시집중사격을 가하였는데 특히 진지 앞 300m 거리를 두고 최후 저지사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쉽사리 물러서지 않고 내리 서쪽의 312고지 부근에서 분산병력을 취합하면서 포격을 증강하여 122mm 유탄포를 비롯한 120mm 박격포와 82mm 박격포 등으로 대대를 공격해왔다. 그런데 이때 틈을 타서 북한군은 새로운 부대를 투입하여 대대의 좌우 양 측방으로 공격해왔다.

이리하여 동측의 제 3중대와 서측의 1중대가 무너지게 되었고, 가까운 거리에서 수류탄 투하가 오고가며 약 30분 동안 격전이 거듭되는 사이 백병전이 전개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때 연락장교 김홍규 대위가 학교장 명령을 가져왔는데 이는 즉시 철수하여 학교본부로 집결하라는 명령이었다. 이 철수이유는 같은 시간 의정부 방어선이 무너진 것 때문이었다.

3. 3. 북한군의 반격과 생도대대의 철수

16:00를 기하여 진목리의 경찰분소에서 대규모의 북한군이 국사봉(547고지) 남쪽으로 움직인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들은 북한군 제3사단 9연대 소속으로 대좌 김만익이 지휘하여 사단의 동 측방에 침공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때에 생도대대는 동북쪽의 전황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330고지를 점령한 적이 그 여세를 몰아 대대 정면으로 공격해왔다. 이리하여 그 주력이 82mm 박격포와 45mm 반전차포 및 기관총 등의 엄호하에 내리 서남쪽의 개활지를 횡단하려 하자 대대의 전 화력이 동시집중사격을 가하였는데 특히 진지 앞 300m 거리를 두고 최후 저지사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쉽사리 물러서지 않고 내리 서쪽의 312고지 부근에서 분산병력을 취합하면서 포격을 증강하여 122mm 유탄포를 비롯한 120mm 박격포와 82mm 박격포 등으로 대대를 공격해왔다. 그런데 이때 틈을 타서 북한군은 새로운 부대를 투입하여 대대의 좌우 양 측방으로 공격해왔다.

이리하여 동측의 제 3중대와 서측의 1중대가 무너지게 되었고, 가까운 거리에서 수류탄 투하가 오고가며 약 30분 동안 격전이 거듭되는 사이 백병전이 전개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때 연락장교 김홍규 대위가 학교장 명령을 가져왔는데 이는 즉시 철수하여 학교본부로 집결하라는 명령이었다. 이 철수이유는 같은 시간 의정부 방어선이 무너진 것 때문이었다.

4. 태릉 전투 (1950년 6월 27일 ~ 28일)

6월 25일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교도대대가 문산 방면으로 전진한 가운데,[1] 이준식 육군사관학교장은 전황이 불리함을 직감하고 6월 26일 19:00를 기하여 내리(포천 남쪽 13km)에 있던 선도대대와 만세교리(포천 북쪽 8km)에서 철수한 제9연대 제1대대를 불암산 남동쪽 강릉(태릉 북쪽 1km) 일대에 전개시켜 퇴계원 방면에서 침입하는 적에 대비해 사관학교 방어를 위한 진지를 편성하였다.[1]

조암 중령이 이끄는 생도대대는 6월 26일 내리에서 북한군 보병을 격퇴시키고 철수 명령에 따라 학교본부로 후퇴하였다. 늦게 복귀한 생도들로 전력을 보강한 뒤 6월 27일 08:00에 A고지(92고지)-F고지 간에 부대를 전개하고 전투태세를 갖추었다.[1] 척후 임무 등으로 늦게 복귀한 생도들도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제1기생들은 솔선수범하여 제2기생들의 철수를 엄호하였다.[1] 당시 생도대대는 대대장 조암 중령, 부대장 손관도 소령, 제1중대장 송인률 대위, 제2중대장 박응규 소령, 제3중대장 이원엽 대위, 중화기 중대장 박정서 대위, 정보/작전주임 이승우 대위, 군수주임 최영규 소령, 인사주임 최재명 대위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생도들은 일부 소대장을 제외하고 전원 병 신분으로 참전하였다.[1]

6월 26일 16:00 육군사관학교로 철수한 제9연대 1대대는 만세교리 전투에서 40명의 손실을 입고 600명이 집결하였다. 대대장 유환박 소령은 이준식 준장에게 철수 경위를 보고하고 휴식을 취한 뒤, 23:00 교장명령에 따라 강릉 210고지를 점령하고 진지를 편성하였다.[1] 연대장 윤춘근 중령은 6월 27일 02:00 육군사관학교로 철수하여 08:00 의정부지구 전투사령부 작전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창동 지역 방어 명령이 하달되었으나, 제9연대는 육사교장 이준식 준장의 작전 지휘하에 태릉 지역 방어를 맡게 되었다.[1]

4. 1. 태릉 저지선 형성

6월 25일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교도대대가 문산 방면으로 전진한 가운데,[1] 이준식 육군사관학교장은 전황이 불리함을 직감하고 6월 26일 19:00를 기하여 내리(포천 남쪽 13km)에 있던 선도대대와 만세교리(포천 북쪽 8km)에서 철수한 제9연대 제1대대를 불암산 남동쪽 강릉(태릉 북쪽 1km) 일대에 전개시켜 퇴계원 방면에서 침입하는 적에 대비해 사관학교 방어를 위한 진지를 편성하였다.[1]

조암 중령이 이끄는 생도대대는 6월 26일 내리에서 북한군 보병을 격퇴시키고 철수 명령에 따라 학교본부로 후퇴하였다. 늦게 복귀한 생도들로 전력을 보강한 뒤 6월 27일 08:00에 A고지(92고지)-F고지 간에 부대를 전개하고 전투태세를 갖추었다.[1] 척후 임무 등으로 늦게 복귀한 생도들도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제1기생들은 솔선수범하여 제2기생들의 철수를 엄호하였다.[1] 당시 생도대대는 대대장 조암 중령, 부대장 손관도 소령, 제1중대장 송인률 대위, 제2중대장 박응규 소령, 제3중대장 이원엽 대위, 중화기 중대장 박정서 대위, 정보/작전주임 이승우 대위, 군수주임 최영규 소령, 인사주임 최재명 대위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생도들은 일부 소대장을 제외하고 전원 병 신분으로 참전하였다.[1]

6월 26일 16:00 육군사관학교로 철수한 제9연대 1대대는 만세교리 전투에서 40명의 손실을 입고 600명이 집결하였다. 대대장 유환박 소령은 이준식 준장에게 철수 경위를 보고하고 휴식을 취한 뒤, 23:00 교장명령에 따라 강릉 210고지를 점령하고 진지를 편성하였다.[1] 연대장 윤춘근 중령은 6월 27일 02:00 육군사관학교로 철수하여 08:00 의정부지구 전투사령부 작전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창동 지역 방어 명령이 하달되었으나, 제9연대는 육사교장 이준식 준장의 작전 지휘하에 태릉 지역 방어를 맡게 되었다.[1]

4. 2. 태릉 저지선 붕괴

6월 27일 12:00부터 육군본대와 통신이 두절되고, 학교본부는 총참모장의 명령에 따라 다른 재경부대와 같이 시흥보병학교로 철수하였다. 이 때문에 전투부대만이 남아 있었으며 병력운송용 차량은 전혀 없었다.[2]

생도대대는 A고지-F고지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철수명령을 수령한 것은 6월 28일 10:00였다. 그러나 최전방인 F고지에 배치된 제2중대에는 12:00에 전달되었으며, 각개 생도들에게까지는 14:00가 지나서였다.

먼저 전달을 받은 중대와 늦게 받은 중대 사이에는 철수 개시에 많은 시간 차이가 발생했다. 생도대대가 철수할 무렵부터 북한군의 포격이 거세어져 부대 행동을 취할 겨를도 없었으며, 철수 경로나 집결지도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 교정으로 각개 약진하였다.

이때 학교본부의 강당과 기타 건물들은 이미 파괴되고, 연병장 일대에도 적탄이 무수히 집중하고 있었으므로 시간을 지체할 상황이 되지 못하였다. 일차적으로 집결한 150명은 부대대장 손관도 소령 지휘 하에 광장동으로 철수하여 먼저 철수한 교장과 본부요원을 만나게 되었다.

손관도 소령이 병력을 지휘하여 망우리 고개로 올라갈 때, 뒤따랐던 대대장 조암 중령과 이승우 대위, 최영규 소령, 최재명 대위 등 3명의 참모요원이 동승한 지프차가 앞질러 고개로 올라갔다. 손 소령이 지휘한 주력은 용마봉의 능선을 따라 광장동으로 철수하였는데, 대대장이 탄 지프차는 고개의 중턱에서 숲속에 숨어있던 북한군 정찰병의 사격을 받게 되었다.

이에 당황한 대대장 조암 중령은 반사적으로 차에서 뛰어내리고, 차에 탔던 참모요원은 차를 급히 몰아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나, 조암 중령의 그 뒤 행방은 묘연하였다.

먼저 철수한 생도들은 광장동에서 이날 17:00까지 한강을 도강할 수 있었으나, 늦게 철수한 생도들은 교문에서 적을 만나 사격을 받았고, 봉화산(학교 서남쪽 1km)에서는 기관총 사격으로 위협하였던 까닭에 다시 분산되어 서울로 또는 광장동으로 철수하여 본대에 합세하기도 하였다.

대대는 여기에서 100명의 손실을 보았는데, 제1기생 한정석 생도 등 11명의 사망을 확인하였을 뿐, 제2기생은 입교한 지 불과 3주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누가, 언제, 어디서 전사 또는 실종하였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철수명령을 받지 못한 생도들도 상당수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중 생도 및 병[2] 20명은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불암산으로 잠입하여 석천암, 불암사 등을 근거지로 한 유격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불암사 주지 윤용문과 불암동의 주민 박태흥, 임용문 등은 이들에게 은신처와 식사, 정보 등을 제공하여 적극 지원하고, 이 부대를 「호랑이 부대」라고 호칭하였다.

이 「호랑이 부대」는 주지와 주민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아, 그들의 퇴계원 보급소-창동수송대-육군사관학교에 설치한 간이훈련소등을 습격하여 적의 후방기능을 마비시키고 주민을 보호하면서 국군의 북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퇴각길에 있었던 북한군은 9월 25일 육군사관학교 기물과 생도들이 사용하였던 매트리스 등을 주민 100명 동원하여 우마차에 싣고 북으로 옮겨갔다는 사실을 주민의 제보로 알게 되었다.

이때 남은 대원은 9명이였는데, 기물을 빼앗기는 한이 있어도 주민만은 북으로 보낼 수 없다는 결의로써 경기도 양주시 진접면 내각리 산속에 매복하여 접근하는 그들에게 일제사격을 가하여 주민들을 도주시키는데 성공하였으나, 이 「불암산 호랑이」는 햇빛을 보지 못하고 초야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곳 주민들 사이에는 신화와 같이 구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유일하게 생환한 김원기 생도에 의해서 밝혀진 유격대원의 명단이 밝혀진 바 있다.

4. 2. 1. 생도대대의 철수

6월 27일 12:00부터 육군본대와 통신이 두절되고, 학교본부는 총참모장의 명령에 따라 다른 재경부대와 같이 시흥보병학교로 철수하였다. 이 때문에 전투부대만이 남아 있었으며 병력운송용 차량은 전혀 없었다.[2]

생도대대는 A고지-F고지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철수명령을 수령한 것은 6월 28일 10:00였다. 그러나 최전방인 F고지에 배치된 제2중대에는 12:00에 전달되었으며, 각개 생도들에게까지는 14:00가 지나서였다.

먼저 전달을 받은 중대와 늦게 받은 중대 사이에는 철수 개시에 많은 시간 차이가 발생했다. 생도대대가 철수할 무렵부터 북한군의 포격이 거세어져 부대 행동을 취할 겨를도 없었으며, 철수 경로나 집결지도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 교정으로 각개 약진하였다.

이때 학교본부의 강당과 기타 건물들은 이미 파괴되고, 연병장 일대에도 적탄이 무수히 집중하고 있었으므로 시간을 지체할 상황이 되지 못하였다. 일차적으로 집결한 150명은 부대대장 손관도 소령 지휘 하에 광장동으로 철수하여 먼저 철수한 교장과 본부요원을 만나게 되었다.

손관도 소령이 병력을 지휘하여 망우리 고개로 올라갈 때, 뒤따랐던 대대장 조암 중령과 이승우 대위, 최영규 소령, 최재명 대위 등 3명의 참모요원이 동승한 지프차가 앞질러 고개로 올라갔다. 손 소령이 지휘한 주력은 용마봉의 능선을 따라 광장동으로 철수하였는데, 대대장이 탄 지프차는 고개의 중턱에서 숲속에 숨어있던 북한군 정찰병의 사격을 받게 되었다.

이에 당황한 대대장 조암 중령은 반사적으로 차에서 뛰어내리고, 차에 탔던 참모요원은 차를 급히 몰아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나, 조암 중령의 그 뒤 행방은 묘연하였다.

먼저 철수한 생도들은 광장동에서 이날 17:00까지 한강을 도강할 수 있었으나, 늦게 철수한 생도들은 교문에서 적을 만나 사격을 받았고, 봉화산(학교 서남쪽 1km)에서는 기관총 사격으로 위협하였던 까닭에 다시 분산되어 서울로 또는 광장동으로 철수하여 본대에 합세하기도 하였다.

대대는 여기에서 100명의 손실을 보았는데, 제1기생 한정석 생도 등 11명의 사망을 확인하였을 뿐, 제2기생은 입교한 지 불과 3주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누가, 언제, 어디서 전사 또는 실종하였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철수명령을 받지 못한 생도들도 상당수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중 생도 및 병[2] 20명은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불암산으로 잠입하여 석천암, 불암사 등을 근거지로 한 유격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불암사 주지 윤용문과 불암동의 주민 박태흥, 임용문 등은 이들에게 은신처와 식사, 정보 등을 제공하여 적극 지원하고, 이 부대를 「호랑이 부대」라고 호칭하였다.

이 「호랑이 부대」는 주지와 주민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아, 그들의 퇴계원 보급소-창동수송대-육군사관학교에 설치한 간이훈련소등을 습격하여 적의 후방기능을 마비시키고 주민을 보호하면서 국군의 북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퇴각길에 있었던 북한군은 9월 25일 육군사관학교 기물과 생도들이 사용하였던 매트리스 등을 주민 100명 동원하여 우마차에 싣고 북으로 옮겨갔다는 사실을 주민의 제보로 알게 되었다.

이때 남은 대원은 9명이였는데, 기물을 빼앗기는 한이 있어도 주민만은 북으로 보낼 수 없다는 결의로써 경기도 양주시 진접면 내각리 산속에 매복하여 접근하는 그들에게 일제사격을 가하여 주민들을 도주시키는데 성공하였으나, 이 「불암산 호랑이」는 햇빛을 보지 못하고 초야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곳 주민들 사이에는 신화와 같이 구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유일하게 생환한 김원기 생도에 의해서 밝혀진 유격대원의 명단이 밝혀진 바 있다.

4. 2. 2. 제9연대 1대대의 철수

9연대 1대대는 축차적인 철수작전을 전개하여 주력은 56번 도로를 따라 퇴계원∼갈매리선으로, 일부 병력은 56번 도로 서쪽의 불암산 남쪽 기슭으로 철수하였다. 이 과정에서 1번, 2번, 3번 중대가 번갈아 가면서 엄호임무를 수행하였다. 56번 도로상의 주력은 갈매리 부근에서 적의 공격을 저지하고 구리시를 거쳐 한강 도하를 시도하였으나, 이미 적이 미아리∼청량리 선까지 진출한 상황이라 도하가 불가능하였다.

4. 2. 3. 제5연대의 철수

5연대는 경보병대대로 개편된 이후, 1950년 6월 27일 16시경 미아리 방어선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철수 중 연대장 박기병 중령은 사단 지휘부가 이미 철수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의정부 남쪽 축석령에서 집결하려던 계획을 변경하여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박 중령은 트럭으로 부대를 이동시키면서 태릉에서 한강 인도교까지 이동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연대 작전주임 김황목 소령이 잔류 부대 수습을 위해 의정부로 복귀하던 중, 이미 사단 주력이 철수했다는 소식을 듣고 태릉으로 돌아와 박 중령에게 보고했다.

이에 박 중령은 태릉에서 철수하여 한강을 건너기로 결정하고, 28일 새벽 2시경 한강 인도교를 도보로 건너 시흥으로 이동했다.

5.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

5. 1. 유격대의 활동과 주민 지원

5. 2. 내각리 전투와 유격대의 최후

6. 전투의 결과 및 영향

7. 전투의 의의

7. 1. 참전 용사들의 희생과 헌신

7. 2. 민족주의와 애국심 고취

8. 기타

8. 1. 관련 인물

8. 2. 관련 부대

8. 3. 관련 지역

참조

[1] 문서 대한민국 국군
[2] 문서 대한민국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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