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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 아스토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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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라 아스토르가는 니카라과의 혁명가이자 외교관으로, 레이날도 페레스 베가 장군 암살 사건으로 유명해졌다. 마나과의 종교적이고 중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대학생 시절부터 산디니스타 혁명가들과 연을 맺고, 무장 투쟁에 참여했다. 산디니스타 정권 수립 후 법무부 차관을 역임했으며, 이후 유엔 부대표와 유엔 주재 니카라과 대사를 지냈다. 그녀는 1988년 자궁경부암으로 사망했으며, 사후 "조국과 혁명의 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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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 아스토르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노라 아스토르가 (1982)
본명노라 호세피나 아스토르가 가데아 데 헹킨스
출생일1948년 12월 10일
출생지마나과, 니카라과
사망일1988년 2월 14일 (39세)
사망지마나과, 니카라과
국적니카라과
배우자정보 없음
자녀정보 없음
친척정보 없음
정당FSLN
직업정치인, 변호사, 판사
모교정보 없음
경력
직위니카라과 유엔 대사
임기 시작1986년
임기 종료1988년
대통령다니엘 오르테가

2. 초기 생애와 교육

아스토르가는 마나과에서 종교적이며 중상류층에 속하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목재 수출업자이자 목장주인 세군도 아스토르가였고, 그는 당시 니카라과를 통치하던 강력한 소모사 가문과 연관이 있었다. 어머니는 미에렐 가데아였으며, 아스토르가는 이들 부부의 첫째 아이였다.[1][2] 어린 시절 그녀는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고, 마나과의 가난한 지역에서 자선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1967년, 아스토르가는 대통령 선거에서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일레 대신 페르난도 아궤로를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는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가족들은 그녀의 안전을 염려하고, 또한 그녀의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그녀는 1967년부터 1969년까지 미국에 머물며 의학을 공부하려 했으나, 동물 해부에 어려움을 느껴 학업을 중단했다. 그녀는 워싱턴 D.C.에서 보낸 시간에 대해 "미국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사회적 대조였고, 무엇보다 인종차별이었다. 니카라과에서는 그런 인종차별을 본 적이 없었다... [나의] 정치 의식은 그때 생겨났다"고 회고했다.[3]

아스토르가는 22세에 호르헤 젠킨스와 결혼했다. 그녀는 총 네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두 명은 남편 젠킨스와의 사이에서, 다른 두 명은 산디니스타 동료였던 호세 마리아 알바라도와의 사이에서 낳았다.[2]

3. 혁명가로서의 삶

노라 아스토르가는 니카라과로 돌아와 마나과의 중앙 아메리카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대학 시절부터 산디니스타 혁명가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4] 초기에는 혁명 지도자 오스카 투르시오스를 위해 안전 가옥을 마련하고 이동을 돕는 등의 역할을 수행했다.

결혼 후 이탈리아에서 은행법과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공부하고 돌아온 뒤에는,[2] 니카라과의 대형 건설 회사에서 기업 변호사로 일하며 두 아이를 키우는 동시에 은밀한 작전을 통해 산디니스타를 지원하는 이중생활을 했다.

1978년, 야당 신문 편집자 페드로 호아킨 차모로 카르데날의 암살 사건은 그녀가 소모사 독재 정권에 맞서 본격적인 무장 투쟁에 나서기로 결심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당시 "무장 투쟁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3]

이후 아스토르가는 소모사 정권의 핵심 인물인 니카라과 국가 방위군 부사령관 레이날도 페레스 베가 장군(별명 "엘 페로")의 납치 및 살해 사건에 연루되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졌다.[5][6] 이 사건은 그녀가 소모사 정권의 억압에 맞서는 상징적인 인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7][3]

사건 이후 전국적인 수배 대상이 된 아스토르가는 정글로 피신하여 산디니스타 혁명군에 합류했으며, 그곳에서 세 번째 아이를 임신했다. 그녀의 모습은 군복 차림에 AK-47 소총을 들고 야당 신문 ''라 프렌사'' 지면에 실리기도 했다.

3. 1.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 가담

아스토르가는 니카라과로 돌아와 마나과의 중앙 아메리카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며 대학 시절부터 산디니스타 혁명가들과 관계를 맺었다.[4] 1969년부터 1973년까지 혁명 지도자 오스카 투르시오스를 위해 안전 가옥을 제공하고 이동을 돕는 역할을 수행했다.

22세에는 학생 운동가 호르헤 젠킨스와 결혼하여 이듬해 이탈리아에서 함께 생활했다. 남편은 인류학을, 아스토르가는 은행법과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공부했다.[2] 두 사람은 두 자녀를 두었으나 결혼 5년 만에 헤어졌다. 이 시기 아스토르가는 니카라과의 대형 건설 회사에서 기업 변호사로 일하는 동시에,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 은밀한 작전을 통해 산디니스타를 지원하는 이중생활을 했다.

1978년, 야당 신문 편집자 페드로 호아킨 차모로 카르데날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아스토르가는 소모사 정권에 맞서 무기를 들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결국 무장 투쟁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총에는 꽃으로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거리로 나섰지만 그 힘이 조직되지 않으면 큰 성과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을요. 저에게 그것은 확신의 순간이었습니다. 무기를 들고 모든 것을 걸거나, 아무것도 바꾸지 않거나."라고 당시 심정을 밝혔다.[3]

아스토르가는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정권 하 니카라과 국가 방위군의 부사령관이었던 레이날도 페레스 베가 장군(별명 "엘 페로", 즉 "개")의 납치 및 살해 사건에 연루되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5] 1978년 3월 8일, 아스토르가는 평소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던 페레스 베가 장군을 마나과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로 유인했다.[6] 장군이 도착하자, 미리 침실 옷장에 숨어 있던 산디니스타 민족 해방 전선(FSLN) 대원 세 명(힐라리오 산체스, 라울 베네리오 그라네라, 월터 페레티)이 뛰쳐나와 그를 제압했다. 원래 계획은 장군을 몸값으로 삼아 수감된 산디니스타 동료들과 교환하는 것이었으나, 페레스 베가가 저항하는 과정에서 살해되었다. 이후 그의 시신은 목이 잘린 채 산디니스타 깃발에 싸여 발견되었다. 아스토르가는 이 사건에 대해 "살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너무 끔찍한 괴물이었죠."라고 언급했다.[7]

사망 직전 인터뷰에서 그녀는 페레스 베가 살해에 대한 자신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어떤 사람들은 저에게 '개'(페레스 베가)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이유를 묻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그렇게 끔찍한 일을 할 수 있었는지 알고 싶어합니다. 저는 세 가지 이유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우리는 그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납치해야 했습니다. 둘째, 저는 그가 죽는 순간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셋째, 그는 억압을 대표했습니다. 그는 실질적으로 소모사의 부관이었고, 북부에서 모든 살인 작전을 수행했으며, 마사야에서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그는 정말 괴물이었어요. 저는 그의 죽음을 해방 투쟁의 일부로 이해했습니다..."[3]

이 사건으로 전국적인 수배 대상이 된 아스토르가는 니카라과 야당 신문 ''라 프렌사'' 지면에 군복을 입고 AK-47 소총을 든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이후 그녀는 정글로 도피하여 산디니스타 혁명군에 합류했으며, 그곳에서 산디니스타 지도자 호세 마리아 알바라도와의 사이에서 세 번째 아이를 임신했다.

3. 2. 레이날도 페레스 베가 장군 암살 사건

1978년 신문 편집자 페드로 호아킨 차모로 카르데날의 암살은 아스토르가가 소모사 정권에 맞서 무기를 들기로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당시 심경을 "결국 무장 투쟁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총에는 꽃으로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을... 저에게 그것은 확신의 순간이었습니다. 무기를 들고 모든 것을 걸거나, 아무것도 바꾸지 않거나."라고 밝혔다.[3]

아스토르가는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정권 하 니카라과 국가 방위군의 부사령관이었던 레이날도 페레스 베가 장군(별명 "엘 페로", 즉 "개")의 납치 및 살해 사건에 연루되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5] 페레스 베가는 잔혹 행위로 악명이 높았던 인물이다. 1978년 3월 8일, 아스토르가는 마나과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로 페레스 베가 장군을 유인했는데, 이는 장군이 오랫동안 바라던 성적인 만남을 제안하는 것처럼 보였다.[6] 장군이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산디니스타 민족 해방 전선(FSLN) 소속 대원 세 명, 즉 힐라리오 산체스(1953-1983), 라울 "엘 소로" 베네리오 그라네라(1945-2019), 월터 페레티(1956-1988)가 미리 숨어있던 침실 옷장에서 나와 장군을 제압했다. 본래 계획은 장군을 납치하여 몸값으로 삼아 수감된 산디니스타 동료들과 교환하려는 것이었으나, 페레스 베가 장군이 거세게 저항하자 결국 살해되었다. 이후 그의 시신은 목이 잘린 채 산디니스타 깃발에 싸여 발견되었다. 아스토르가는 이 사건에 대해 "그것은 살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끔찍한 괴물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7]

사건 이후 아스토르가는 페레스 베가 살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했다. 그녀는 사망 직전 인터뷰에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밝히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째, 우리는 그를 죽이려 한 것이 아니라 납치하려 했습니다. 둘째, 저는 그가 살해당하는 순간 현장에 없었습니다. 셋째, 그는 억압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는 사실상 소모사의 오른팔이었고, 북부 지역의 모든 살해 작전을 지휘했으며, 마사야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그는 정말 괴물이었습니다. 저는 그의 죽음을 해방 투쟁의 일부로 받아들였습니다."[3]

이 사건으로 아스토르가는 전국적인 수배 명단에 올랐으며, 니카라과의 야당 신문인 ''라 프렌사'' 지면에는 정글 군복 차림에 AK-47 소총을 든 그녀의 사진이 실리기도 했다. 이후 아스토르가는 정글로 몸을 숨겨 산디니스타 혁명군에 정식으로 합류했으며, 그곳에서 산디니스타 지도자 호세 마리아 알바라도와의 사이에서 세 번째 아이를 갖게 되었다.

4. 산디니스타 정권에서의 활동

1979년 7월 산디니스타가 정권을 장악한 후, 노라 아스토르가는 새 정부에서 법무부 차관과 유엔 주재 대사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법무부 차관 시절에는 이전 소모사 정권의 국가 방위군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을 감독했으며,[8] 이후 외교관으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1984년에는 미국 대사로 임명될 예정이었으나, 과거 CIA 요원으로 알려진 레이날도 페레스 베가 장군 살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레이건 행정부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9] 같은 해 유엔 부대표를 거쳐 1986년 3월 유엔 주재 니카라과 대사로 정식 임명되어 1988년 사망할 때까지 활동했다.[10] 유엔 대사로서 그녀는 국제사법재판소(ICJ)가 니카라과 대 미국 사건에서 미국의 콘트라 반군 지원이 불법이라고 판결한 내용을 유엔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4. 1. 법무부 차관 임명

1979년 7월 산디니스타가 정권을 장악한 후, 아스토르가는 법무부 차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자리에서 그녀는 이전 소모사 정권의 국가 방위군 소속이었던 약 7,500명에 대한 재판 과정을 감독했다.[8]

1984년, 니카라과 정부는 아스토르가를 미국 대사로 임명하려 했으나, 당시 레이건 행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이는 아스토르가가 과거 CIA 요원으로 알려진 레이날도 페레스 베가 장군의 살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점을 문제 삼았기 때문이다.[9]

같은 해 아스토르가는 유엔 주재 니카라과 부대표가 되었으며, 1986년 3월에는 정식 대사로 임명되어 1988년 사망할 때까지 활동했다.[10] 그녀는 국제사법재판소가 ''니카라과 대 미국'' 사건에서 미국 정부의 콘트라 지원이 국제법 위반이라고 판결한 내용을 유엔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4. 2. 유엔 주재 니카라과 대사

1984년, 미국 레이건 행정부는 노라 아스토르가를 주미 니카라과 대사로 임명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는 그녀가 과거 CIA 요원으로 알려진 레이날도 페레스 베가 장군 살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9]

같은 해, 아스토르가는 유엔 주재 니카라과 부대표로 임명되었고, 1986년 3월에는 정식 대사로 승격되어 1988년 사망할 때까지 그 직책을 수행했다.[10] 유엔 대사로 재임하는 동안 그녀는 국제사법재판소(ICJ)가 니카라과 대 미국 사건에서 미국이 콘트라 반군을 지원하는 것이 국제법상 불법이라고 판결한 내용을 유엔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5. 죽음과 유산

1988년 2월 14일, '라 노리타'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노라 아스토르가는 마나과에서 자궁경부암으로 39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사망하기 전 해인 1987년 7월에는 당시 니카라과의 최고 훈장이었던 카를로스 폰세카 훈장을 받았으며[3], 사후에는 "조국과 혁명의 영웅"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

그녀를 기리기 위해 마나과에 있는 카사 아베 마리아의 방문 벽화에는 열두 사도 중 한 명으로 그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또한 마나과의 한 바리오(동네)는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미국의 록 밴드 KBC 밴드가 1986년에 발표한 노래 "Mariel"은 노라 아스토르가에게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곡이다.[11] KBC 밴드의 멤버였던 잭 캐시디와 폴 켄터는 그녀의 추도식에 참석하여 이 노래를 직접 연주하기도 했다.

참조

[1] 문서 Nicaragua, Civil Registration, 1809-2011
[2] 뉴스 Nora Astorga, a Sandinista Hero and Delegate to U.N., Dies at 39 https://query.nytime[...] New York Times 2007-10-15
[3] 뉴스 Nora Astorga In Her Own Words http://www.envio.org[...] Central American University (UCA) 2007-10-15
[4] 서적 The Houghton Mifflin Dictionary of Biography Houghton Mifflin
[5] 뉴스 Nora and the Dog https://web.archive.[...] TIME 2007-10-15
[6] 서적 Terrorism in perspective https://archive.org/[...] Sage Publications
[7] 뉴스 Nicaragua's U.N. Voice. New York Times 1986-09-28
[8] 서적 Todas estamos despiertas: Testimonios de la mujer Nicaragüense de hoy Siglo XXI
[9] 뉴스 800 Attend Mass for Nicaraguan https://query.nytime[...] New York Times 2007-10-16
[10] 뉴스 Nora Astorga https://archive.toda[...] MADRE.org 2007-10-16
[11] 웹사이트 Jefferson Starships https://web.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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