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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산 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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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닛산 쟁의는 1953년 5월, 닛산 자동차 노조가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시작된 노사 분쟁이다. 회사 측의 강경 대응과 노조 분열, 록아웃 등의 갈등 끝에 노조가 회사 측의 요구를 전면 수용하며 9월에 종결되었다. 쟁의 이후 노조는 쇠퇴하고, 분회는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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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산 쟁의
닛산 쟁의
1953년 닛산 쟁의 당시 노동자들의 모습
1953년 닛산 쟁의 당시 노동자들의 모습
명칭닛산 쟁의
별칭닛산 100일 투쟁
닛산 53년 쟁의
날짜1953년 5월 ~ 1953년 9월 21일
지역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니시구 고지마
원인닛산 자동차의 1949년 인력 감축 및 1952년 임금 동결
종류시위, 농성
결과닛산 분회의 패배
교섭 단체
시위대 (노동자 측)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
상대 (회사 측)닛산 자동차
주요 인물
노동자 측마스다 테츠오
회사 측아사하라 겐시치
결과
결과전일본자동차산업노동조합 및 닛산 분회 해체

2. 배경

전자일 닛산 분회는 1949년 인원 정리 투쟁에서 패배한 이후, 직장 투쟁을 강화하고 잔업 시간 등을 엄격하게 규제하여 직장에서 노조의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1952년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내세워 임금 인상 투쟁의 질적 전환을 꾀한다는 방침을 발표했고, 1953년 가을 임금 인상 투쟁에서 기본급 개정 등 큰 성과를 거두었지만, "미완성 투쟁의 싹을 키워라"라며 새로운 공세를 취하려 했다.

이러한 노조의 움직임에 대해 회사 측은 경영에 큰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하고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아사하라 겐시치 사장은 1953년 신년사에서 노조에 대한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이후 제2노조를 결성하여 노조 분열의 중심이 되는 미야케 마사루 등 학사 출신 그룹은 집행부 비판을 본격화했다. 같은 해 2월 집행부 개선에서 이들은 전자의 위원장 직을 사임하고 분회로 복귀한 마스다 테츠오를 낙선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2. 1. 경영진의 강경 대응

전자닛산분회는 1949년 인력 정리 투쟁 패배 이후 직장 투쟁 강화를 꾀하고 잔업 시간 등을 강력히 규제해 직장 노조의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또 전자는 1952년 여름 동일노동 동일임금 등을 골자로 하는 임금 원칙을 내세워 임금 인상 투쟁의 질적 전환을 도모한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1953년 가을의 임상 투쟁에서 기본급 개정 등 닛산 분회는 큰 성과를 거두고 있었지만, 닛산 분회 측은 1953년에도 "미완성 투쟁의 싹을 길러라"라고 하며, 새로운 공세를 취하려 하고 있었다.

이러한 노조의 움직임을 회사 측은 경영에 있어 커다란 장애라고 인식하고, 강경한 태도로 임하게 된다. 아사하라 겐시치 사장은 1953년 신년사에서 "작년은 노동 쟁의에 시달렸지만, 이래서는 안 된다. 요구를 받아들여야 할 것은 받아들이고, 거부해야 할 것은 거부하는 방침이지만, 더욱 진지해져야 하는 상황이다"라고 말하며, 노조에 대한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또한, 후에 제2노조를 결성하여 노조 분열의 중심이 되는 미야케 마사루 등의 학사 출신 그룹도 집행부 비판을 본격화한다. 같은 해 2월의 집행부 개선에서는 전자의 위원장 직을 사임하고 분회로 복귀한 마스다 테츠오를 낙선시키려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2. 2. 학졸 그룹의 집행부 비판

전자닛산분회는 1949년 인원 정리 투쟁 패배 이후, 직장 투쟁 강화를 꾀하고 잔업 시간 등을 강력히 규제해 직장 노조의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또한, 전자는 1952년 여름 동일 노동 동일 임금 등을 골자로 하는 임금 원칙을 내세워 임금 인상 투쟁의 질적 전환을 도모한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1953년 가을 임금 인상 투쟁에서 기본급 개정 등 닛산 분회는 큰 성과를 거두었지만, 닛산 분회 측은 1953년에도 "미완성 투쟁의 싹을 길러라"라고 하며, 새로운 공세를 취하려 하고 있었다.

이 같은 조합의 움직임을 사측은 경영에 큰 걸림돌로 인식하고 강한 태도로 임하게 된다. 아사하라 겐시치 사장은 1953년 연초 인사말에서 "작년에는 노동쟁의를 일삼았지만 이래서는 안 된다. 요구할 것은 수용하고 거부할 것은 거절해나갈 방침이지만 더 진지해져야 할 상황이다"라며 의연한 태도로 노조에 임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후에 제2노조를 결성해 조합 분열의 중심이 되는 미야케 마사루 등의 학졸 그룹도 집행부 비판을 본격화시킨다. 1953년 2월 전자의 집행부 개편에서 학졸 그룹은 전자의 위원장직을 사임하고 분회에 복귀한 마스다 테츠오를 낙선시키려고 움직였지만 이는 실패로 끝났다.

3. 쟁의 전개

1953년 5월, 전일본자동차산업노동조합(전자)은 통일 투쟁의 일환으로 닛산 자동차, 도요타, 이스즈 3사 분회가 공동 투쟁 체제를 구축하고 일제히 임금 인상을 요구했다. 마스다 테츠오를 조합장으로 하는 닛산 분회는 8개 항목의 요구를 제출했으나, 회사 측은 강경하게 대응했다.

이후 노사 간 갈등이 심화되어 단체 교섭은 결렬되고, 회사 측은 노워크 노페이 원칙을 적용하며 조합 활동을 탄압했다. 닛산 분회는 파업으로 맞섰지만, 회사 측은 공장 폐쇄를 시사하며 강경하게 대응했다. 미야케 마스루, 시오지 이치로 등이 닛산 분회에서 분열하여 회사 측 어용 조합인 닛산 자동차 노동 조합(닛산 노조)을 결성했다. 결국 닛산 분회는 회사 측 요구를 전면 수용하며 쟁의를 종결했다.

3. 1. 단체 교섭 결렬과 노사 갈등 심화

1953년 5월, 전자(全自)는 통일 투쟁의 일환으로 닛산 자동차, 도요타, 이스즈 각 분회가 3사 공동 투쟁 체제를 구축하고 일제히 임금 인상을 각 회사에 요구했다. 마스다 테츠오를 조합장으로 하는 닛산 분회에서는 8개 항목에 달하는 요구를 제출했다. 회사 측은 닛산 분회의 요구에 강경한 태도를 보이며 요구를 전면 거부했다. 6월 4일에 개최된 제1차 단체 교섭에서는 오히려 노워크 노페이(근무 시간 중의 조합 활동에 대해서는 임금을 지불하지 않음) 원칙 승인과 과장의 비조합원화를 회사 측이 닛산 분회에 요구하며 분규가 발생했다. 이후에도 단속적으로 단교가 개최되었지만 쌍방은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6월 11일, 회사 측은 6월 8일 이후 노워크 노페이 실시를 통고하고 6월 임금에서 시간 내 조합 활동 시간만큼 삭감을 강행했고, 각 직장에서는 격렬한 부과장 추궁이 이루어졌다. 7월 3일부터 9일까지 1시간 파업이 실시되었고, 회사 측도 공장 폐쇄를 시사했다.

7월 16일 닛산 분회는 대폭적인 타협을 제안하여 해결을 모색했지만, 회사 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단체 교섭을 거부했다. 이후 분회 측은 직장 투쟁이나 파업을 강화했고, 회사 측은 분회 측 노동자에게 급여를 지급하지 않고, 임시 휴업, 록아웃 등으로 맞서는 등 노사 쌍방의 공방이 계속되었다. 도요타와 이스즈가 8월 초순에 타결을 보았지만, 닛산에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수렁에 빠져들었다. 아사하라 겐시치 사장의 지휘 아래 회사가 강경한 태도를 보인 배경에는 일본 경제 단체 연합회의 지원이 있었다는 말도 있다. 8월 중순에는 분회 간부의 체포 및 징계 해고가 이루어졌고, 회사 측이 거대한 바리케이드를 구축하고 분회와의 단체 교섭을 거부하는 자세를 강력하게 보이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분회는 중앙 노동 위원회에 제소하는 등 회사를 협상의 장으로 나오게 하려 했지만, 회사 측은 제안에 답변하지 않고, 협상에 응하지 않았다.

8월 30일, 미야케 마스루, 시오지 이치로 등이 닛산 분회에서 분열하여 회사 측 어용 조합인 닛산 자동차 노동 조합(약칭 닛산 노조)을 결성하고, 시오지가 선두에 서서 형사 사건으로 발전할 정도의 분회 측 노동자 빼내기·와해 작전을 펼쳤다. 장기화되는 분쟁은 사회 문제화되었고, 9월에는 중참 양원의 노동 위원회에서 참고인 질의가 실시되었다. 이때 경영 측은 출석을 거부했지만, 닛산 분회 조합장 마스다 테츠오는 참고인으로 국회에서 답변했다.

9월 11일에 단체 교섭 재개의 예비 교섭이 진행되었고, 9월 14일에 단체 교섭이 재개되었다. 이후 단체 교섭이 단속적으로 이루어졌지만, 결국 9월 21일, 분회는 회사 측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수용하여 쟁의를 종결하게 되었다. 닛산 분회 측의 전면적인 패배였다.

3. 2. 닛산 자동차 노동조합(닛산 노조) 설립과 분열

1953년 5월, 전일본자동차산업노동조합(전자)는 통일 투쟁의 일환으로 닛산 자동차, 도요타, 이스즈 각 분회가 3사 공동 투쟁 체제를 구축하고 일제히 임금 인상을 각 회사에 요구했다. 마스다 테츠오를 조합장으로 하는 닛산 분회는 8개 항목의 요구를 제출했으나, 회사 측은 강경한 태도로 이를 전면 거부했다. 6월 4일 열린 첫 단체 교섭에서 회사 측은 오히려 노워크 노페이(근무 시간 중 조합 활동에 대해서는 임금을 지불하지 않음) 원칙 승인과 과장의 비조합원화를 요구하며 분규가 발생했다. 이후 간헐적으로 단체 교섭이 열렸지만, 양측은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회사 측은 6월 11일, 6월 8일 이후 노워크 노페이 실시를 통보하고 6월 임금에서 시간 내 조합 활동 시간만큼 삭감을 강행했으며, 각 직장에서는 부서장, 과장급 직원들의 강력한 압박이 있었다. 7월 3일부터 9일까지 닛산 분회는 1시간 파업을 실시했고, 회사 측은 공장 폐쇄를 시사하며 맞섰다.

7월 16일, 닛산 분회는 대폭적인 타협안을 제시하며 해결을 모색했지만, 회사 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단체 교섭을 거부했다. 분회 측은 직장 투쟁과 파업을 강화했고, 회사 측은 급여 미지급, 임시 휴업, 록아웃 등으로 맞서며 노사 양측의 공방이 이어졌다. 도요타이스즈가 8월 초순에 타결을 보았지만, 닛산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수렁에 빠졌다. 아사하라 겐시치 사장의 지휘 아래 회사가 강경한 태도를 보인 배경에는 일본 경제 단체 연합회의 지원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8월 중순에는 분회 간부의 체포 및 징계 해고가 이루어졌고, 회사 측이 거대한 바리케이드를 구축하고 분회와의 단체 교섭을 거부하는 자세를 강력하게 보이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분회는 중앙 노동 위원회에 제소하는 등 회사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려 했지만, 회사 측은 제안에 답변하지 않고, 협상에 응하지 않았다.

8월 30일, 미야케 마스루, 시오지 이치로 등이 닛산 분회에서 분열하여 회사 측 어용 조합인 닛산 자동차 노동 조합(약칭 닛산 노조)을 결성했다. 시오지 이치로는 선두에 서서 형사 사건으로 발전할 정도의 분회 측 노동자 빼내기 및 와해 작전을 펼쳤다. 장기화되는 분쟁은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고, 9월에는 중의원, 참의원 양원 노동위원회에서 참고인 질의가 실시되었다. 이때 닛산 자동차 경영진은 출석을 거부했지만, 닛산 분회 조합장 마스다 테츠오는 참고인 자격으로 국회에서 답변했다.

9월 11일, 단체 교섭 재개를 위한 예비 교섭이 진행되었고, 9월 14일 단체 교섭이 재개되었다. 이후 간헐적으로 단체 교섭이 이루어졌지만, 결국 9월 21일, 닛산 분회는 회사 측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수용하여 쟁의를 종결했다. 이는 닛산 분회 측의 전면적인 패배였다.

3. 3. 사회 문제화 및 국회 참고인 질의

분쟁이 장기화되면서 쟁의는 사회 문제로 떠올랐고, 9월에는 국회 중의원·참의원 양원 노동위원회에서 참고인 질의가 실시되었다. 이때 닛산 자동차 사측은 출석을 거부했으나, 닛산분회 조합장 마스다 테츠오는 참고인 자격으로 국회에서 답변에 응했다.

3. 4. 쟁의 종결

1953년 9월 11일, 단체교섭 재개를 위한 예비 협상이 열렸고, 9월 14일에 단체교섭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후 간헐적으로 단체교섭이 진행되었지만, 결국 9월 21일 닛산 분회는 회사 측의 요구를 전면 수용하여 쟁의를 종결했다. 닛산 분회 측의 완전한 패배였다.

4. 쟁의 이후

닛산 쟁의 종료 후, 닛산 분회는 직장 투쟁으로 실지를 회복하려 했으나, 회사 측의 강화된 관리에 막혔다. 닛산 노조는 닛산 분회를 와해시키려 했고, 그 결과 10월에 과반수 조합이 되었다. 닛산 분회가 다시 일어서는 듯했으나, 12월 5일 회사는 분회원 중심 141명에게 권고사직 등의 처분을 내려 분회는 큰 타격을 입었다. 쟁의 중 분회가 조합원들에게 빌려준 생활자금 상환 문제가 닛산 노조와의 사이에서 불거졌고, 1954년 12월 전자는 해산했다.

전자 해산 후에도 닛산 분회는 활동을 이어갔지만, 분회 집행부를 겨냥한 대기 명령이나 가나가와 지방노동위원회에서의 신청 기각 등을 겪으며 1956년 9월 해산했다.

4. 1. 전자 해산과 닛산 분회 해산

닛산 쟁의 종료 후, 닛산 분회는 직장 투쟁으로 잃었던 것을 회복하려 했으나, 회사 측의 직제를 통해 강화된 관리에 의해 가로막혔다. 또한 닛산 노조가 닛산 분회를 와해하려는 시도 결과, 10월에는 닛산 노조가 과반수 노조가 되었다. 닛산 분회가 다시 일어서는 국면도 있었지만, 12월 5일에 회사가 분회원을 중심으로 한 141명에게 권고사직 등의 처분을 내리면서 분회는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닛산 쟁의 중에 분회가 조합원에게 빌려준 생활 자금의 반환을 둘러싼 문제가 닛산 노조와의 사이에서 제기되었고, 그 여파로 1954년 12월에 전일본자동차산업노동조합(전자)은 해산하게 되었다.

전자 해산 후에도 닛산 분회는 활동을 계속했지만, 분회 집행부를 겨냥한 대기 명령(해고)이나 가나가와현 지방노동위원회에서의 신청 기각(패소) 등을 겪으며 1956년 9월에 해산했다.

5. 영향 및 평가

닛산 쟁의 종료 후, 닛산 분회는 직장 투쟁을 통해 실지 회복을 꾀했으나, 사측이 직제를 통해 강화한 관리에 막혔다. 그해 10월 닛산 노조가 과반수 조합이 된 것도 닛산 노조가 닛산 분회를 붕괴시킨 결과였다. 닛산 분회가 되살아나는 국면도 있었지만, 12월 5일 회사가 분회원을 중심으로 141명에게 유지 퇴직 등의 처분을 하여 분회는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닛산 쟁의 중 분회가 조합원들에게 빌려준 생활자금 상환을 둘러싼 문제가 닛산 노조와의 사이에서 불거졌고, 그 여파로 1954년 12월 전자는 해산했다.

전자 해산 후에도 닛산 분회는 활동을 계속했지만, 분회 집행부를 겨냥한 명령 대기 또는 가나가와 지방노동위원회에서의 신청 기각 등을 받고 1956년 9월 해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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