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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라노 노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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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이라노 노리코는 헤이안 시대 말기부터 가마쿠라 시대 초기에 걸쳐 활동한 여성이다. 처음에는 하리마노나이시로 불렸으며, 후지와라노 노리스에의 정실이 되어 고토바 천황을 양육했다. 고토바 천황의 즉위 후에는 뇨보로 궁중에 들어가 츄나곤노텐지로 불렸으며, 종3위까지 올랐다. 조큐의 난 당시 아들이 처형되고 고토바 상황과 준토쿠 상황이 유배되는 등 정치적 격변을 겪었다. 1226년 7월까지 생존한 기록이 있으며, 이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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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라노 노리코
기본 정보
헤이케 가문의 문장
헤이케 가문의 문장
이름다이라노 노리코 (平 教子)
다이라 (平)
이름노리코 (教子)
다른 이름고시라카와 천황의 후궁 (後白河天皇後宮)
계급종3위 (従三位)
아버지다이라노 시게모리 (平 重盛)
어머니丹後内侍 (탄고노나이시) 또는 藤原成子 (후지와라노 나리코)
남편고시라카와 천황 (後白河天皇)
자녀뇨고 (二条院按察使典侍)
생애
출생연도 미상
사망주에이 3년 (寿永3年, 1184년)

2. 생애

헤이케 일족 출신이지만, 고토바 천황의 유모가 되어 헤이케 몰락 이후에도 황실과 깊은 관계를 유지했다. 처음에는 '''播磨内侍|하리마노나이시일본어'''로 불렸으며, 후지와라노 노리스에와 혼인하여 어린 고토바 천황을 양육했다. 헤이케가 단노우라 전투에서 멸망하는 과정에서 아버지 노리모리와 형제들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 딸 쥬시(또는 시게코)가 고토바 천황의 총애를 받아 준토쿠 천황을 낳으면서 천황의 외할머니가 되었고, 자신도 뇨보로서 다이리에 들어가 '''츄나곤노텐지'''(中納言典侍)라 불리며 종3위까지 올랐다. 그러나 조큐의 난으로 인해 아들 노리모치(또는 노리시게)가 처형되고, 고토바 상황과 손자 준토쿠 상황이 유배되는 등 말년에는 다시 시련을 겪었다. 헤이케 출신으로서 준토쿠 천황의 반가마쿠라 막부 의식에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도 있다. 정확한 사망 시점은 불분명하나 가로쿠 2년(1226년) 이후로 추정된다.

2. 1. 초기 생애

처음에는 '''播磨内侍|하리마노나이시일본어'''로 불렸으며, 종5위하의 관위를 받고 준후 타이라노 모리코를 섬겼다. 이 무렵 후지와라노 노리스에의 정실이 된 것으로 보인다. 지쇼 4년(1180년)에 태어난 타카쿠라 천황의 넷째 아들 타카히라 친왕(훗날의 고토바 천황)이 노리스에의 저택에 맡겨지자, 남편과 함께 친왕을 양육하였다. 주에이 원년(1182년)에는 딸 쥬시(시게코)를 낳았다.

2. 2. 고토바 천황 즉위와 헤이케 멸망

주에이 2년(1183년) 7월, 헤이케 일족은 어린 안토쿠 천황을 모시고 수도 교토를 떠나 서쪽으로 향했다. 이때 노리코의 아버지 노리모리 역시 헤이케 일족과 함께 낙향길에 올랐다. 수도에서는 안토쿠 천황의 뒤를 이을 새로운 천황을 세워야 했고, 고시라카와 법황의 결정에 따라 당시 노리스에와 노리코 부부가 양육하고 있던 네 살의 타카히라 친왕(고토바 천황)이 새로운 천황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헤이케가 세력을 잃고 밀려나는 과정에서 노리코의 형제들인 미치모리, 노리츠네 등 다수가 이치노타니 전투와 같은 격전에서 목숨을 잃었다. 결국 주에이 4년(1185년) 3월,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케는 결정적으로 패배하였다. 아버지 노리모리는 안토쿠 천황 및 다른 헤이케 일족 사람들과 함께 바다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하며 헤이케 정권은 완전히 몰락하였다.

2. 3. 뇨보 생활과 조큐의 난

딸 시게코는 뇨보로서 다이리에 들어가 고토바 천황의 총애를 받았다. 겐큐 8년(1197년)에는 모리나리 친왕(훗날의 준토쿠 천황)을 낳았다. 고토바 천황의 총애가 미나모토노 아리코에게서 시게코에게 옮겨가면서, 모리나리 친왕은 쇼지 2년(1199년) 4월 황태제로 책봉되었다. 노리코 자신도 겐큐 말년 경 다이리 뇨보가 되었고, 텐지로 임명되어 '''츄나곤노텐지'''(中納言典侍)라 불렸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종3위에 올랐다. 1205년 5월, 남편 노리스에가 사망하였다.

조큐 3년(1221년), 가마쿠라 막부와의 대립 끝에 고토바 상황이 막부 타도를 위한 군사를 일으키면서 조큐의 난이 발발했다. 노리코의 손자인 준토쿠 상황 역시 고토바 상황을 따랐다. 노리코의 아들 노리시게는 막부 타도 세력의 중심 인물로 활동했으나, 상황 측이 난에서 패배하면서 막부군에게 처형되었다. 고토바 상황과 준토쿠 상황은 각각 유배되었다.

준토쿠 천황가마쿠라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졌던 배경에는, 헤이케 출신인 할머니 노리코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츠노다 분에이와 스미다 후미오 등은 노리코 밑에서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헤이케 관련 인물들과 교류했던 환경이 준토쿠 천황의 반막부 의식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노리코의 정확한 사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가로쿠 2년(1226년) 7월까지 생존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2. 4. 사망

사망한 해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카로쿠 2년(1226년) 7월까지는 생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그 이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3. 평가

(내용 없음)

3. 1. 준토쿠 천황에게 미친 영향

준토쿠 천황의 정치적 성향 형성에 외할머니인 교코(다이라노 노리코)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있다. 교코는 헤이케 일족 출신으로, 그의 딸 시게코가 고토바 천황과의 사이에서 겐큐 8년(1197년) 준토쿠 천황을 낳으면서 준토쿠 천황의 외할머니가 되었다. 교코는 헤이케 가문이 몰락하는 과정을 직접 겪은 인물인데, 아버지 노리모리는 단노우라 전투에서 일족과 함께 자결했고, 여러 형제들도 이치노타니 전투 등에서 전사했다.

역사학자 스미다 후미오는 준토쿠 천황이 강한 반가마쿠라 막부 의식을 갖게 된 배경 중 하나로, 헤이케의 생존자인 외할머니 교코와 주변의 헤이케 관련 인물들의 영향을 지적했다. 이러한 환경은 훗날 준토쿠 천황이 아버지 고토바 상황을 따라 가마쿠라 막부 타도를 목표로 한 조큐의 난(1221년)에 적극 가담하게 된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을 수 있다. 이 난에서 교코의 아들이자 준토쿠 천황의 외삼촌인 노리시게는 막부 타도 세력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다가 패배 후 처형당했다.

3. 2. 역사적 위치

교코는 헤이케 출신으로, 헤이케가 몰락하고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하는 일본 역사의 격동기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인물이다. 그녀의 삶은 겐페이 전쟁조큐의 난 등 주요 역사적 사건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처음 '하리마나이시'로 불리며 종5위 하의 지위를 얻고 준고 타이라노 시게코를 섬겼던 교코는 후지와라노 노리스에와 혼인했다. 지쇼 4년(1180년)에 태어난 타카쿠라 천황의 제4황자 타카나리 친왕(고토바 천황)이 노리스에 부부에게 맡겨져 양육되었다.

쥬에이 2년(1183년), 헤이케 일문이 안토쿠 천황을 받들고 서쪽으로 피난하면서 아버지 타이라노 노리모리도 동행했다. 수도에서는 고시라카와 법황의 결정에 따라 교코 부부가 양육하던 타카나리 친왕이 고토바 천황으로 즉위했다. 헤이케 출신인 교코가 새로운 천황을 양육하게 된 것이다. 겐페이 전쟁 과정에서 미치모리, 노리츠네 등 교코의 형제들은 이치노타니 전투 등에서 전사했으며, 아버지 노리모리는 쥬에이 4년(1185년)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케 일문과 함께 생을 마감했다.

헤이케 멸망 후에도 교코의 영향력은 이어졌다. 분지 원년(1185년) 아들 노리시게를 낳았고, 딸 시게코는 고토바 천황의 총애를 받아 미나모토노 자리코에 이어 겐큐 8년(1197년) 준토쿠 천황을 낳았다. 외손자인 준토쿠 천황이 쇼지 2년(1199년) 황태제로 책봉되면서 교코의 지위는 더욱 공고해졌다. 교코 자신도 겐큐 말년경 종3위에 오르고 '중납언전시'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조큐 3년(1221년) 고토바 상황이 가마쿠라 막부 타도를 위해 일으킨 조큐의 난은 교코에게 또 다른 시련을 안겨주었다. 준토쿠 상황과 함께 교코의 아들 노리시게가 막부 타도 세력의 중심인물로 참여했으나, 난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노리시게는 처형당했고, 고토바 상황과 준토쿠 상황은 유배되었다.

역사학자 스미다 후미오는 준토쿠 천황가마쿠라 막부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졌던 배경 중 하나로, 헤이케의 생존자인 외할머니 교코 밑에서 성장하며 헤이케 관련 인물들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스미다 후미오의 주장은 교코가 헤이케 멸망 이후에도 간접적으로 후대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교코의 정확한 몰년은 알 수 없으나, 카로쿠 2년(1226년)까지 생존했던 기록이 남아있다.

4. 가계

헤이케 출신으로, 처음에는 '''하리마노나이시'''(播磨内侍)라 불리며 종5위하의 관위를 받고 준후 타이라노 모리코를 섬겼다. 이 무렵 후지와라노 노리스에의 정실이 된 것으로 보인다. 남편 노리스에와 함께 지쇼 4년(1180년)에 태어난 타카쿠라 천황의 제4황자 다카나리 친왕(훗날의 고토바 천황)을 맡아 양육했다.

주에이 2년(1183년), 아버지 타이라노 노리모리를 비롯한 헤이케 일문이 안토쿠 천황을 모시고 서쪽으로 낙향한 뒤 단노우라 전투(1185년) 등에서 몰락하는 비극을 겪었다. 한편 교토에서는 노리코 부부가 양육하던 다카나리 친왕이 고시라카와 법황의 뜻에 따라 4살의 나이로 고토바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노리코는 주에이 원년(1182년)에 딸 쥬시(시게코)를, 분지 원년(1185년)에 아들 노리모치(노리시게)를 낳았다. 딸 쥬시가 뇨보로서 다이리에 들어가 고토바 천황의 총애를 받아 겐큐 8년(1197년) 모리나리 친왕(훗날의 준토쿠 천황)을 낳으면서 노리코의 영향력도 커졌다. 겐큐 말년 경 노리코는 다이리 뇨보가 되었고 텐지로 임명되어 '''츄나곤노텐지'''(中納言典侍)라 불렸으며,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종3위에 올랐다.

조큐 3년(1221년) 조큐의 난이 일어나자 아들 노리모치가 고토바 상황 측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다 패배 후 막부군에게 처형되었고, 고토바 상황과 준토쿠 상황은 유배되는 등 가문의 비극을 다시 겪었다. 쓰노다 분에이는 준토쿠 천황의 강한 반(反)가마쿠라 의식의 배경에는 헤이케 생존자인 할머니 노리코 밑에서 자라며 주변의 헤이케 관계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점이 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정확한 사망 연도는 알 수 없으나, 가로쿠 2년(1226년) 7월까지 생존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4. 1. 부모

아버지는 타이라노 노리모리이다. 헤이케 일문이었던 노리모리는 주에이 2년(1183년) 7월, 안토쿠 천황을 모시고 도성을 떠나 서쪽으로 향했다. 이후 주에이 4년(1185년) 3월, 단노우라 전투에서 안토쿠 천황 및 다른 헤이케 일족과 함께 바다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4. 2. 배우자

후지와라노 노리스에의 정실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편 노리스에와 함께 타카쿠라 천황의 4황자 타카히라 친왕(훗날의 고토바 천황)을 양육하였다. 남편 노리스에는 겐큐 2년(1205년) 5월에 사망하였다.

4. 3. 자녀

주에이 원년(1182년)에 딸 쥬시(시게코)를 낳았다. 쥬시는 뇨보로서 다이리를 섬기며 고토바 천황의 총애를 받았고, 겐큐 8년(1197년)에는 훗날 준토쿠 천황이 되는 모리나리 친왕을 낳았다.

분지 원년(1185년)에는 아들 노리모치(노리시게)를 낳았다. 노리모치는 조큐 3년(1221년)에 일어난 조큐의 난 당시, 고토바 상황 측의 막부 토벌 중심 세력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상황 측이 난에서 패배하면서 노리모치는 막부군에 의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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