겐페이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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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겐페이 전쟁은 12세기 말 일본에서 일어난 다이라(헤이시) 씨와 미나모토(겐지) 씨 간의 권력 다툼으로,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을 가져온 대규모 내전이다. 조정의 주도권을 둘러싼 수십 년간의 갈등이 배경이 되었으며, 호겐의 난, 헤이지의 난을 거치며 겐지는 헤이시에 번번이 패했다. 1180년 모치히토 왕의 거병을 시작으로, 우지 전투, 이치노다니 전투, 야시마 전투 등을 거쳐 1185년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시가 멸망하면서 겐지가 승리했다. 이 전쟁의 결과로 무사 계급이 권력을 장악하고, 일본의 정치 체제가 공가(귀족) 중심에서 무가(무사) 중심으로 전환되었으며, 가마쿠라 막부가 수립되었다. 겐페이 전쟁은 일본의 전통적인 국가 색상인 빨간색과 흰색의 기원을 제공했으며, 이후 일본 문화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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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페이 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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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분쟁 명칭 | 겐페이 전쟁 (지쇼·주에이의 난) |
다른 이름 | 지쇼-주에이 전쟁 |
일부 | 미나모토 가문-다이라 가문 간의 헤이안 시대 후기 분쟁 |
기간 | 1180년 6월 10일 – 1185년 4월 25일 |
장소 | 일본 전역 (오슈 제외) |
결과 | 미나모토 가문의 승리, 가마쿠라 막부 성립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미나모토 가문 (요리토모) |
교전국 1 동맹 | 미우라 가문 다케다 가문 호조 가문 지바 가문 |
교전국 2 | 다이라 가문 |
교전국 3 | 미나모토 가문 (요시나카) |
지휘관 | |
지휘관 1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미나모토노 요시쓰네 |
지휘관 2 | 다이라노 무네모리 다이라노 시게히라 다이라노 도모모리 |
지휘관 3 | 미나모토노 요시나카 이마이 가네히라 |
추가 지휘관 및 관련 인물 (미나모토 가문) | |
황실 | 고시라카와 법황 모치히토 왕 고토바 천황 (1183-) |
주요 장군 | 미나모토노 요리마사 미나모토노 노리요리 미나모토노 기요시 미나모토노 요시모토 미나모토노 미쓰나가 |
문관 | 오에노 히로모토 |
사찰 | 도다이지 고후쿠지 구마노 산잔 온조지 |
기타 호족 및 무장 | 고노 미치키요 고노 미치노부 기쿠치 다카나오 (-1182.4) 호조 도키마사 외 이즈 호족 하타케야마 시게타다 외 무사시 당 히키 요시카즈 지바 쓰네타네 외 지바 당 가즈사노스케 히로쓰네 미우라 요시즈미 외 미우라 당 가지와라 가게토키 오가타 고레요시 다카마사 에치젠 호족 가가 호족 |
양측 교전 (미나모토 가문) | 다케다 노부요시 (가이 겐지) 시다 요시히로 (가와치 겐지) 미나모토노 유키이에 미나모토노 요시나카 (아사히 장군) 야마모토 요시쓰네 (오미 겐지) |
추가 지휘관 및 관련 인물 (다이라 가문) | |
황실 | 안토쿠 천황 |
주요 인물 | 다이라노 기요모리 (1180-81) 다이라노 무네모리 (1181-85) 다이라노 요리모리 다이라노 도키타다 다이라노 도모모리 다이라노 시게히라 다이라노 고레모리 다이라노 스케모리 다이라노 다다노리 다이라노 미치모리 다이라노 사다요시 후지와라노 다다키요 다이라노 이에쓰구 야마키 가네타카 오바 가게치카 이토 스케치카 (후지와라 남가 무치마로 계열) 후지와라노 지카마사 사타케 히데요시 하스이케 이에쓰나 히라타 도시하루 누카 입도 사이자쿠 다구치 시게요시 하라다 다네나오 기쿠치 다카나오 (1182.4-85) 조 스케나가 조 스케모토 세노 가네야스 |
기타 | †: 전란으로 인한 전사, 형사, 자결, 병사, 암살 무장 |
전력 및 피해 | |
전력 1 | (정보 없음) |
전력 2 | (정보 없음) |
피해 1 | 도다이지와 고후쿠지 소실 요시나카 군 괴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군에 의해), 모치히토 왕자 및 미나모토노 요리마사 전사 |
피해 2 | 다이라 가문 대패 |
원인 | |
원인 | 황위 계승을 둘러싼 가문 간의 분쟁 |
2. 배경
헤이시(平氏)와 겐지(源氏) 두 무사 가문이 조정을 장악하기 위해 수십 년 동안 벌인 갈등이 겐페이 전쟁으로 이어졌다. 겐지는 이전에 호겐의 난과 헤이지의 난에서 헤이시에 도전했지만 실패했고, 주요 인물들은 처형당했다.[4][5][6]
1177년, 상황으로 물러나 인세이를 통해 섭정을 하던 고시라카와인은 태정대신 다이라노 기요모리와 갈등이 깊어졌다. 고시라카와인은 쿠데타를 일으켜 기요모리를 몰아내려 했으나 실패했고, 기요모리는 지쇼 3년의 정변을 일으켜 인세이를 폐지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1180년 3월 21일, 기요모리는 다카쿠라 천황을 퇴위시키고 자신의 친손자(당시 2세)를 안토쿠 천황으로 즉위시켰다. 이에 다카쿠라 상황의 배다른 형인 모치히토 왕은 왕위를 빼앗겼다고 생각하여, 5월에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의 도움을 받아 여러 무가와 불교 사원에 격문을 보내 헤이시 토벌을 주장했다(모치히토 왕의 거병).[6]
6월에 기요모리는 후쿠하라쿄(지금의 고베)로 도읍을 옮겨 송나라와의 교역으로 이득을 얻으려 했다. 6월 16일, 모치히토는 교토를 탈출하여 나라의 미이데라로 피신했다.[6]
하지만, "겐페이"라는 용어는 전쟁 당사자들을 정확하게 나타내지 못한다는 주장이 있다.[14] 이 전쟁은 겐지와 헤이시 간의 싸움만이 아니었고, 헤이시 측 많은 인물이 겐지 편에서 싸웠으며, 두 가문의 구성원 중에는 무사가 아닌 귀족도 있었고, 이들은 전쟁과 관련이 없었다.[14]
2. 1. 헤이시의 번영과 조정과의 갈등
호겐의 난과 헤이지의 난에서 헤이시(平氏)에 패한 겐지(源氏)의 유력 인물들은 처형되었고, 이후 헤이시는 조정의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에서 우위를 점했다.[4][5]1177년, 인세이를 통해 섭정을 맡고 있던 고시라카와인은 태정대신 다이라노 기요모리와 갈등이 깊어졌다. 고시라카와인은 쿠데타를 일으켜 기요모리를 축출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기요모리는 지쇼 3년의 정변을 일으켜 인세이를 폐지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로 인해 헤이시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6]
1180년 3월 21일, 기요모리는 다카쿠라 천황을 퇴위시키고 자신의 친손자인 안토쿠 천황을 즉위시켰다. 다카쿠라 상황의 배다른 형 모치히토 왕은 왕위를 빼앗겼다고 생각하여, 5월에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의 도움을 받아 여러 무가와 불교 사원에 격문을 보내 헤이시 토벌을 주장했다. (모치히토 왕의 거병)[6]
6월, 기요모리는 후쿠하라쿄(지금의 고베)로 도읍을 옮겨 송나라와의 교역으로 이득을 취하려 했다. 6월 16일, 모치히토는 교토를 탈출하여 나라의 미이데라로 피신했다.[6]
헤이안 시대 말기, 조정과 귀족 내부의 권력 투쟁은 호겐의 난과 헤이지의 난과 같은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이 내란에서 큰 역할을 한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는 고시라카와 상황(後白河上皇)과 니조 천황 사이의 대립을 이용하여 정치적 지위를 높였다. 고노에 모토자네(近衛基実)와 인척 관계를 맺는 등 정계에서 영향력을 강화하며, 헤이시 일족의 관직과 지행국을 늘려갔다.
니조 천황이 사망하고 로쿠조 천황이 즉위했지만, 곧 다카쿠라 천황이 즉위한다. 이 기간 동안 기요모리는 고시라카와 상황과 정치적으로 협력하여 번영을 누렸고, 1167년에는 태정대신에 취임하여 조정 내 발언권을 강화했다.
고시라카와 상황과 시게모리의 정치적 제휴는 다이라노 시게코(平滋子, 건춘문원)(시게모리의 시누이)가 1176년에 사망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1177년, 히에이 산과 궁중 근신의 대립을 계기로 고시라카와 상황은 시게모리에게 히에이 산 공격을 지시했지만, 시게모리는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히에이 산 측의 요구를 들어 궁중 근신의 신병을 구속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로 인해 고시라카와 상황은 근신 추방을 허락하게 된다.(시시가타니 음모)
한편, 다카쿠라 천황이 정치적 발언권을 강화하기 시작했고, 1178년, 다이라노 도쿠코(平徳子)(시게모리의 딸)가 황자를 출산하면서 상황이 바뀐다. 후계자가 될 황자의 탄생으로 다카쿠라 천황이 양위하여 인정을 펼칠 조건이 갖춰졌다.
그러나 1179년, 시게모리의 아들 다이라노 고레모리(平維盛)와 딸 다이라노 모리코(平盛子)가 잇달아 사망하면서, 이들의 유령과 지행국을 둘러싸고 당시의 섭정 마쓰도노 모토후사(松殿基房)와 고시라카와 상황, 시게모리 사이에 대립이 발생했다.
2. 2. 겐지의 재기와 모치히토 왕의 봉기
겐페이 전쟁은 조정의 주도권을 둘러싼 헤이시와 겐지의 오랜 갈등이 폭발하여 발생했다. 겐지는 이전의 호겐의 난과 헤이지의 난에서 헤이시에 도전했으나 실패했고, 주요 인물들은 처형되었다.[4][5][6]1177년, 퇴위 후 인세이를 통해 섭정을 맡고 있던 고시라카와인은 다이라노 기요모리와 갈등이 깊어졌고, 고시라카와인은 쿠데타를 시도했다. 기요모리는 이를 진압하고 지쇼 3년의 정변을 일으켜 인세이를 폐지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1180년 3월 21일, 기요모리는 다카쿠라 천황을 퇴위시키고 2세의 친손자를 안토쿠 천황으로 즉위시켰다. 다카쿠라 상황의 배다른 형 모치히토 왕은 왕위를 빼앗겼다고 생각하여 5월에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의 도움을 받아 여러 무가와 불교 사원에 격문을 보내 헤이시 토벌을 주장했다(모치히토 왕의 거병).[6]
6월에 기요모리는 후쿠하라(현재의 고베)로 도읍을 옮겨 송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이익을 얻으려 했다. 6월 16일, 모치히토는 교토를 탈출하여 나라의 미이데라로 피신했다.[6]
모치히토 왕의 봉기는 6년에 걸친 내란의 계기가 되었다.[19]
3. 전쟁의 전개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강압적인 통치는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와 모치히토 왕이 겐지 일족에게 봉기를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요모리는 모치히토 왕을 체포하려 했으나, 그는 미이데라를 거쳐 뵤도인으로 피신했다. 겐페이 전쟁의 첫 전투는 우지 강 다리에서 벌어졌으며(우지 전투 (1180)), 이 전투에서 요리마사는 할복하고 모치히토 왕은 처형되었다.[6][7]
이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겐지 일족의 지도자가 되어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요리토모는 이시바시야마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가이국과 고즈케국으로 탈출하여 다케다씨 등 동맹 세력의 도움을 받아 헤이시 군대를 격퇴했다. 한편, 기요모리는 모치히토 왕을 숨겨준 것에 대한 보복으로 나라를 공격하여 도시 대부분을 불태웠다.[8]
1181년, 스노마타가와 전투에서 미나모토노 유키이에가 다이라노 도모모리에게 패배했지만, 도모모리의 병으로 인해 헤이시 군은 더 이상 추격하지 못했다. 같은 해, 기요모리가 병으로 사망하고 일본 전역에 기근이 발생했다. 요리토모의 사촌 미나모토노 요시나카가 북쪽에서 군사를 일으켰으나, 헤이시의 공격은 실패했다. 이후 약 2년간 큰 전투 없이 1183년 봄, 전쟁이 재개되었다.[6]
요시나카는 구리카라 전투에서 다이라노 고레모리에게 대승을 거두며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후 요시나카와 유키이에가 교토를 포위하자, 다이라노 무네모리는 안토쿠 천황과 삼종신기를 가지고 서쪽으로 피신했다. 고시라카와 법황은 요시나카에게 헤이시 토벌을 명했으나, 이는 헤이시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삼종신기를 되찾기 위한 계략이었다.[6]
요시나카는 겐지 내부의 권력 투쟁에서 요리토모와 대립했고, 교토를 장악하려 했으나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와 미나모토노 노리요리에게 패배하여 아와즈 전투에서 최후를 맞이했다.[6]
요시쓰네와 노리요리가 이끄는 겐지군은 이치노타니 전투에서 헤이시군을 격파하고, 야시마 전투에서 헤이시군의 허를 찌르는 전략으로 승리했다. 결국 겐페이 전쟁은 단노우라 전투에서 겐지 수군이 헤이시 수군을 격파하면서 겐지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에서 안토쿠 천황과 다이라노 도키코를 비롯한 헤이시 일족은 바다에 몸을 던져 최후를 맞았다.[6][9]
3. 1. 겐지의 봉기와 세력 확장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와 모치히토 왕은 겐지들에게 무력 봉기를 촉구했고, 이에 호응하여 센고쿠에 산재한 겐지들이 일제히 봉기했다.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모치히토를 체포하려 했으나, 모치히토는 미이데라를 나와 교토 근처의 뵤도인으로 도망쳤다.[6]겐지와 헤이시의 본격적인 전투는 우지 강의 다리에서 시작되었다(우지 전투 (1180)). 이 전투에서 셋쓰 겐지는 패배하여 요리마사와 그의 아들 미나모토노 나카쓰나는 할복하고, 모치히토는 잡혀 처형되었다.[6][7]
요리마사가 죽자, 가와치 겐지의 수장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뒤를 이어 봉기하였다. 요리토모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지지자를 규합했다. 요리토모가 이즈를 떠나 하코네로 가는 동안 헤이시에게 이시바시야마 전투에서 패했다.[6] 그러나 가이국과 고즈케국으로 탈출, 가이 겐지 (다케다씨) 등 동맹세력을 규합하여 추격해 온 헤이시 군대를 격퇴했다. 한편, 기요모리는 모치히토를 숨겨준 미이데라에 보복하기 위해 나라를 포위하여 대부분의 시를 불살랐다.(나라 공성전)[8]
다음 해에는 스노마타가와 전투가 벌어져 미나모토노 유키이에가 다이라노 도모모리에 대해 선제공격을 했으나 패배하였다.[6] 유키이에는 패주하면서 추격자들을 늦추기 위해 야하히 강의 다리를 파괴하였다. 다시 군사를 모아 헤이시를 공격했으나 또다시 패배했다. 그러나 도모모리는 병이 들어 유키이에를 더 이상 추격할 수 없었다.
1181년 기요모리는 병으로 사망했고, 같은 해 일본에는 심한 기근이 들었다. 기근은 다음 해에도 계속되었으나, 전쟁은 계속되었다. 요리토모의 사촌인 미나모토노 요시나카(미나모토노 요시카타의 차남)는 북방에서 군대를 기르고 있었는데, 헤이시는 요시나카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약 2년간 별다른 전투가 없다가 1183년 봄에 다시 재개되었다.[6]
3. 2. 겐지 내부의 권력 투쟁
요리토모는 겐지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사촌 요시나카의 의도를 의심했고, 요시나카를 몇 번 공격하였다. 요시나카는 요리토모에게 영지를 바치고 요리토모의 주도권을 확인하여 둘은 가까스로 힘을 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동의 적인 헤이시에 대항해 함께 싸우면서도 겐지의 주도권을 둘러싼 요리토모와 요시나카의 경쟁 의식은 결코 없어지지 않았다. 요시나카는 장남 요시타카를 가마쿠라에 있는 요리토모에게 인질로 보냈다. 그런 한편으로 요시나카는 스스로의 힘만으로 헤이시를 격파하고 교토에 입성하여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려고 하였다.[6]요시나카는 유키이에와 공모하여 수도와 천황을 장악하고, 아마도 북쪽에 새로운 조정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유키에는 이 계획을 천황에게 알렸고, 천황은 요리토모에게 전달했다. 유키이에에게 배신당한 요시나카는 교토를 지휘하고 1184년 초 호쥬지도노에 불을 지르고 천황을 구금했다.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그의 형제 노리요리와 상당한 병력을 이끌고 곧 도착하여 요시나카를 도시에서 몰아냈다. 우지 다리에서 사촌들과 싸운 후, 요시나카는 아와즈(오미 국)에서 최후의 항전을 했다. 그는 요시츠네에게 패배하여 도망치려다가 죽임을 당했다.[6]
3. 3. 헤이시의 몰락
요시나카는 요리토모가 겐지의 주도권을 쥐는 것에 의심을 품고 갈등을 겪었다. 요시나카는 요시타카를 인질로 보내 요리토모와 가까스로 협력 관계를 맺었으나, 겐지 주도권을 둘러싼 경쟁은 계속되었다. 이후 요시나카는 다이라노 고레모리와의 구리카라 전투에서 크게 이겨 겐페이 전쟁의 전환점을 만들었고, 헤이시는 수세에 몰렸다.[6]1183년, 요시나카와 유키이에는 교토를 포위했고, 다이라노 무네모리는 안토쿠 천황과 삼종신기를 가지고 피신했다. 고시라카와인은 헤이시에 항복을 제안하는 서한을 보냈지만, 이는 삼종신기를 되찾고 헤이시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였다.[6]
요시쓰네와 노리요리가 이끄는 겐지 군은 이치노타니 전투에서 헤이시의 주요 거점인 이치노타니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헤이시는 시코쿠로 후퇴했지만, 겐지 군은 6개월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시코쿠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 헤이시는 지리적 이점과 강력한 수군을 가지고 있었지만, 겐지 군은 야시마 전투에서 헤이시를 기만하여 승리했고, 헤이시는 다시 도망쳤다.[6]
단노우라 전투에서 겐지 수군과 헤이시 수군은 시모노세키 해협에서 격돌했다. 처음에는 헤이시 수군이 우세했지만, 다구치 시게요시의 배신으로 겐지가 안토쿠 천황과 신기가 있는 배를 공격하면서 전세가 바뀌었다. 결국 헤이시의 많은 무사와 도키코, 안토쿠 천황은 패배를 직감하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6][9]
4. 주요 전투
연도 | 사건 | 비고 |
---|---|---|
1180년 | 우지 전투 | 겐페이 전쟁의 첫 전투.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와 모치히토 왕이 뵤도인에서 헤이시 군에 맞서 싸웠으나 패배. 요리마사와 그의 아들 미나모토노 나카쓰나는 할복하고 모치히토 왕은 처형됨. |
1180년 | 나라 포위전 |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모치히토 왕을 숨겨준 미이데라에 보복하기 위해 나라를 포위, 도시 대부분을 불태움. |
1180년 | 이시바시야마 전투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헤이시와 첫 번째로 싸웠으나 패배. |
1180년 | 후지가와 전투 | 헤이시 군이 밤에 가마우지 떼를 겐지 군의 기습으로 오인하고 전투 없이 도주. |
1181년 | 스노마타가와 전투 | 미나모토노 유키이에가 다이라노 도모모리에게 기습을 시도했으나 패배. |
1181년 | 야하기가와 전투 | 스노마타에서 패주하던 겐지 군이 저항을 시도했으나 다시 패배. |
1183년 | 히우치 포위전 | 헤이시가 겐지의 거성을 공격. |
1183년 | 구리카라 전투 | 미나모토노 요시나카가 다이라노 고레모리에게 대승. 겐페이 전쟁의 전환점. |
1183년 | 시노하라 전투 | 미나모토노 요시나카가 구리카라에서 패주하는 헤이시 군을 추격. |
1183년 | 미즈시마 전투 | 헤이시가 야시마로 접근하던 겐지 군을 요격. |
1183년 | 후쿠류지 포위전 | 겐지가 헤이시의 요새를 공격. |
1183년 | 무로야마 전투 | 미나모토노 유키이에가 미즈시마 전투의 패배를 만회하려 했으나 실패. |
1184년 | 호주지도노 포위전 | 미나모토노 요시나카가 호주지전을 불태우고 고시라카와 법황을 납치. |
1184년 | 제2차 우지 전투 | 미나모토노 요시나카가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와 미나모토노 노리요리에게 쫓겨 수도에서 퇴각. |
1184년 | 아와즈 전투 | 미나모토노 요시나카가 요시쓰네와 노리요리에게 패배하여 사망. |
1184년 | 이치노타니 전투 | 미나모토노 요시쓰네가 헤이시의 주요 거점 중 하나인 이치노타니 성을 공격. 헤이시는 시코쿠로 후퇴. |
1184년 | 고지마 전투 | 이치노타니를 탈출한 헤이시 군이 노리요리에게 공격당함. |
1185년 | 야시마 전투 | 겐지가 헤이시의 요새를 공격하여 시코쿠와의 연결로를 끊음. |
1185년 | 단노우라 전투 | 시모노세키 해협에서 겐지 수군과 헤이시 수군이 격돌. 헤이시 멸망. 안토쿠 천황과 다이라노 도키코 등 헤이시 일족이 바다에 투신.[6] [9] |
5. 겐페이 전쟁의 결과와 의의
헤이시가 멸망하고 겐지가 승리하면서 가마쿠라 막부가 설립되었다. 요리토모는 쇼군 직위를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실질적인 센고쿠의 지배자로서 쇼군은 그가 처음이었다. 이 전쟁으로 공가를 제치고 무가가 실질적인 지배 권력으로 떠올랐고, 일왕의 권력은 매우 축소되어 정치적, 군사적 실권은 거의 없어졌다. 이러한 상태는 650년 후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지속되었다.[6]
또한 헤이시의 붉은 군기와 겐지의 하얀 군기에서 일본의 전통적인 국색(國色)인 붉은색과 흰색이 유래되었다.[10] 오늘날 이 색깔들은 일본 국기에서 볼 수 있으며, 스모 등 전통 행사에서도 볼 수 있다.[10]
1185년 12월, 고시라카와 천황은 요리토모에게 세금 징수권과 전국 각지의 수령 및 관리 임명권을 부여했다. 1192년, 고시라카와 천황 사후 요리토모는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 칙임을 받았다. 이는 일본 봉건 국가의 시작이었으며, 실질적인 권력은 가마쿠라에 있었다. 그러나 교토는 국가 의례와 제사의 중심지이자 법률상 수도로 남았다.[6]
겐페이 전쟁 이전에도 일본에는 대규모 내란이 있었지만, 변방 지역에 국한되거나 중앙 지역(畿內 주변)에서 단기간 발생했다. 하지만 겐페이 전쟁은 중립적인 오슈 후지와라 씨가 지배하는 도호쿠 지방을 제외한 당시 일본 영토의 거의 전역을 휘말리게 했고, 5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당시 조정의 군제는 교토 및 그 주변의 단기간 소요(승병이나 도적 등) 및 해적 대책에는 충분했지만, 이러한 대규모 내란에는 대응할 수 없었다.
평씨 정권은 호겐의 난, 헤이지의 난에서 가신 등으로 구성된 소수의 직속 부대로 승리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이후 필요에 따라 공권력을 발동하여 제국의 병사들을 동원했다. 그러나 겐페이 전쟁에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세력은 관동 지방 지배권 확보 및 평씨 정권 타도라는 장기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부하 무사들에게 독자적인 본령안도(점령 토지 지급) 등을 실시하고, 장기전에 견딜 수 있는 군제를 확립했다.[23] 반면 평씨 정권은 조정 내 구세력(왕가, 귀족, 사찰)과의 타협 때문에 이러한 과감한 조치를 취하기 어려웠고, 이는 평씨 정권의 고전으로 이어졌다.[24]
전투 방식도 변화했다. 이전에는 정규 무사가 기사(騎射)로 시작하는 등 예법이 있었지만, 겐페이 전쟁에서는 전투의 대규모화로 동원 대상이 미숙한 무사나 비무사 계급인 촌락 영주 계급까지 확대되었다.[25] 이들은 기마술과 궁술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의 말 공격이나 말을 이용한 돌격이 행해졌고, 타도(太刀)의 기승 사용도 증가했다.[26] 이후 궁기병(弓騎兵)이었던 무사는 타도를 사용하는 타격 기병으로 변화해 갔다.[27]
5. 1.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
헤이시가 멸망하고 겐지가 승리하면서 가마쿠라 막부가 설립되었다. 요리토모는 쇼군 직위를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실질적인 센고쿠의 지배자로서 쇼군은 그가 처음이었다. 이 전쟁으로 공가를 제치고 무가가 실질적인 지배 권력으로 떠올랐고, 일왕의 권력은 매우 축소되어 정치적, 군사적 실권은 거의 없어졌다. 이러한 상태는 650년 후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지속되었다.[6]1185년 12월, 고시라카와 천황은 요리토모에게 세금 징수권과 "전국 각지의 수령과 관리 임명권"을 부여했다. 1192년, 고시라카와 천황 사후 요리토모는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 칙임을 받았다. 이는 일본 봉건 국가의 시작이었으며, 실질적인 권력은 가마쿠라에 있었다. 그러나 교토는 "국가 의례와 제사의 중심지"이자 법률상 수도로 남았다.[6]
당시 관동(関東) 무사들에게 최우선 과제는 각자 지방 내 권익 확보와 확장이었다. 요리토모는 고케닌(御家人) 권리를 보장해야 했고, 경쟁 세력과 항상 다툼을 벌였다. 요리토모는 시다 요시히로, 니타 요시시게, 사타케씨(佐竹氏), 아시카가 타다쓰나 등 주변 적대 세력을 제거하거나 복종시키는 데 힘썼다. 1180년 11월 킨사조 성 전투(金砂城の戦い), 이듬해 아시카가 토시쓰나와 전투, 1183년 2월 노기궁 전투(野木宮合戦), 같은 해 3월경 키소 요시나카와 대군을 이끌고 대치 후 화평을 맺는 등, 요리토모는 관동에서 세력 기반을 확보하고 확장하는 데 주력했다. 또한 오슈 후지와라씨(奥州藤原氏)와 킨사조 성 전투 후에도 히타치에 세력을 남긴 사타케씨 위협을 안고 있었다. 요리토모는 고케닌들에게 본령안도(本領安堵), 신은급부(新恩給付) 등 소령 보증을 실시하여 주종 관계를 공고히 하고, 도쿄(都)와 인맥을 통해 조정(朝廷)과 접촉 및 교섭하여 관동에서 우위를 확보했다.
1181년 6월, 키소 요시나카는 요코타가와라 전투(横田河原の戦い)에서 조우 스케토키를 무찌르고 신슈에서 에치고를 장악했다. 코즈케까지 진출했지만, 호쿠리쿠 방면으로 전진, 에치젠, 와카사 등에서 거병한 호쿠리쿠 지방 세력과 결탁했다. 이후 요시나카에게 의지해 온 이니노오(以仁王)의 아들(호쿠리쿠궁)을 추대하여 호쿠리쿠에서 우위를 확립했다.
이 시기 동일본은 오슈는 오슈 후지와라씨 세력 하, 남관동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에치고와 북관동 신슈 일부는 미나모토노 요시나카, 카이, 스루가, 토토미와 신슈 일부는 카이겐씨(甲斐源氏)가 할거(割據)했다.
구세력은 평氏 정권을 배제할 군사력이 없었고, 그 힘은 무사 계급이 가지고 있었다. 동국과 북륙에서 흥기한 반평씨 세력은 평씨 토벌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권리 확보와 중앙 정부로부터 일정 범위 내 독립을 목적으로 했다. 구세력은 평씨 타도라는 목적을 위해 관토 정권에 의존해야 했고, 주영 2년 10월 선지 발급과 같은 대폭적인 권한 위임을 허용했다.
그 결과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되었다. 창조기 가마쿠라 막부는 동국 지배권만 가졌지만, 당시 막부 구성 무사들에게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창성기 가마쿠라 막부와 조정은 마찰을 빚었지만 쇼엔 공료제 유지라는 점에서는 이해관계가 일치했고, 1190년 요리토모 상락으로 협조 체제가 확인되었다. 가마쿠라 막부와 조정의 전면 충돌은 약 30년 후 죠큐의 난에서 발생한다.
5. 2. 무사 계급의 지위 향상
헤이시가 멸망하고 겐지가 승리하면서 가마쿠라 막부가 설립되었다. 요리토모는 쇼군은 아니었지만, 실질적인 센고쿠의 지배자로서 최초의 쇼군이었다. 이 전쟁으로 공가를 제치고 무가가 실질적인 지배 권력으로 떠올랐으며, 일왕의 권력은 크게 줄어들어 정치적, 군사적 실권이 거의 없어졌다. 이러한 상태는 650년 후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지속되었다.[6]겐페이 전쟁과 가마쿠라 막부의 시작은 무사 계급(사무라이)의 권력 부상과 일왕 권력의 억압을 의미했다. 일왕은 실질적인 정치적, 군사적 권력 없이 통치할 수밖에 없었고, 650년 이상 후 메이지 유신까지 사실상 상징적이고 의례적인 국가 원수로 전락했다. 비록 1330년대에 겐무 신정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궁정 복고 시도가 있었지만 실패했다.[10]
이 전쟁 이전에도 일본에는 대규모 내란이 있었지만, 규모가 크더라도 변방 지역에 국한되거나 중앙 지역(畿內 주변)에서 단기간 발생했다. 하지만 겐페이 전쟁은 중립적인 오슈 후지와라 씨가 지배하는 도호쿠 지방을 제외한 당시 일본 영토의 거의 전역을 휘말리게 했고, 5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당시 조정의 군제는 교토 및 그 주변의 단기간 소요(승병이나 도적 등) 및 해적 대책에는 충분했지만, 이러한 대규모 내란에 대응할 수 있는 체제는 아니었다.
평씨 정권은 호겐의 난, 헤이지의 난에서 가신 등으로 구성된 소수의 직속 부대로 승리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이후 필요에 따라 공권력을 발동하여 제국의 병사들을 동원하는 형태를 취했다. 그러나 겐페이 전쟁에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세력은 관동 지방의 지배권 확보 및 평씨 정권 타도라는 장기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부하 무사들에게 독자적인 본령안도(점령한 토지의 지급) 등을 실시하고, 장기전에 견딜 수 있는 군제를 확립했다.[23] 반면 평씨 정권은 조정 내 구세력(왕가, 귀족, 사찰)과의 타협 때문에 이러한 과감한 조치를 취하기 어려웠고, 이는 평씨 정권의 고전으로 이어졌다.[24]
전투 방식도 변화했다. 이전에는 정규 무사가 기사(騎射)로 시작하는 등 예법이 있었지만, 겐페이 전쟁에서는 전투의 대규모화로 동원 대상이 미숙한 무사나 비무사 계급인 촌락 영주 계급까지 확대되었다.[25] 이들은 기마술과 궁술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의 말 공격이나 말을 이용한 돌격이 행해졌고, 타도(太刀)의 기승 사용도 증가했다.[26] 이후 궁기병(弓騎兵)이었던 무사는 타도를 사용하는 타격 기병으로 변화해 갔다.[27]
5. 3. 문화적 영향
겐페이 전쟁은 일본 문화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이 전쟁으로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되었고, 무가가 공가를 제치고 실질적인 지배 권력으로 떠올랐다. 천황의 권력은 크게 줄어들어, 650년 후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정치적, 군사적 실권이 거의 없는 상징적인 존재로 남게 되었다.[10]또한, 헤이시의 붉은 군기와 겐지의 하얀 군기는 일본의 전통적인 국색인 붉은색과 흰색의 유래가 되었다.[10] 이 색깔들은 오늘날 일본 국기를 비롯하여, 스모 등 전통 행사에서도 볼 수 있다.[10]
이 전쟁은 여러 시대에 걸쳐 일본에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헤이케 이야기》이며, 가부키와 분라쿠에서도 이 전쟁의 많은 장면을 다루고 있다. 나미키 소스케의 《이치노타니 후타바 군키》도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이다.
로버트 셰이의 소설 《시케》,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 《피닉스》 9권 "내전", 캐서린 패터슨의 소설 《밤의 울음소리》 등도 겐페이 전쟁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다.
6. 겐페이 전쟁 관련 인물
겐페이 전쟁은 미나모토 씨(源氏)와 다이라 씨(平氏) 양 가문 간의 전쟁이었지만, 실제로는 더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미나모토 씨 측에는 다이라 씨와 싸운 인물도 많았지만, 다이라 씨를 위해 싸운 미나모토 씨도 있었다. 또한, 무사가 아닌 궁정 귀족들은 전쟁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14]
당시 미나모토 요시이에의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는 인물은 미나모토 요리토모만이 아니었다. 미나모토 요시나카와 미나모토 유키에도 그 자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14]
오슈 전투는 다이라 씨가 멸망한 지 수년 후, 미나모토 요리토모와 북부 후지와라 씨 사이에서 벌어졌다.[15]
6. 1. 겐지
미나모토 씨(源氏)는 헤이안 시대(794~1185년) 일본 정계를 지배했던 4대 씨족 중 하나였다. 그러나 1160년 헤이지의 난에서 다이라 씨에게 궤멸 직전까지 몰렸다. 당시 미나모토 씨의 당주는 미나모토 요시토모(源義朝)였는데,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에게 패배하면서 그의 아들 둘이 죽고, 셋째 아들 미나모토 요리토모(源頼朝)는 유배되었다. 1180년 모치히토 친왕(以仁王)과 미나모토 요리마사(源頼政)의 봉기 호소에 따라 미나모토 씨는 다시 힘을 모아 일어섰다. 겐페이 전쟁에서 미나모토 씨는 다이라 씨를 물리치고 전국을 장악했다.[14]- 주요 인물
- * 미나모토 노리요리(源範頼) - 요리토모의 동생이자 장군.
- * 미나모토 요리마사(源頼政) - 전쟁 초 미나모토 씨의 당주.
- * 미나모토 요리토모(源頼朝) - 요리마사 사후 미나모토 씨의 당주.
- * 미나모토 요시츠네(源義経) - 요리토모의 동생이자 미나모토 씨의 총사령관.
- * 미나모토 유키에(源行家) - 요리토모의 삼촌이자 장군.
- * 미나모토 요시나카(源義仲) - 요리토모의 사촌.
- 동맹 및 가신
- * 고시라카와 천황(後白河天皇)](상황(은퇴한 천황).
- * 모치히토 친왕(以仁王) - 황족.
- * 사이토 무사시보 벤케이(弁慶) - 소헤이(전투 승려), 요시츠네의 동맹.
- * 호조 도키마사(北条時政) - 호조 씨(北条氏)의 당주이자 요리토모의 장인.
- * 카지와라 카게토키(梶原景時) - 공식적으로는 요시츠네의 동맹이었으나 사실은 요리토모의 첩자였다.
- * 쿠마가이 나오자네(熊谷直実) - 요리토모의 가신.
- * 사사키 모리츠나(佐々木盛綱) - 고지마 전투(児島合戦)에서 공격을 지휘한 노리요리의 가신.
- * 타구치 시게요시(田口重能) - 단노우라 전투(壇ノ浦の戦い)에서 전세가 기울자 미나모토 진영으로 투항하여 미나모토의 승리를 확보한 다이라 씨 장군.
- * 나스노 요이치(那須与一) - 유명한 궁수이자 미나모토의 동맹.
- * 야다 요시야스(矢田義康) - 요시나카의 가신이자 미즈시마 전투(水島の戦い)에서 미나모토 군의 사령관.
- * 이마이 카네히라(今井兼平) - 세타(瀬田)로 탈출하는 요시나카에 합류했다.
- 미이데라(三井寺)와 다른 사찰들의 소헤이(전투 승려). 특히 『헤이케 이야기』에서 우지 전투(宇治川の戦い)에서 활약한 세 명이 언급된다.
- ** 츠츠이 조묘 메이슈(筒井浄妙明秀) - 우지 강 위의 다리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이며 60개가 넘는 화살을 맞고도 싸웠다.
- ** 고치인노 타지마(五智院但馬) - '화살 베는 타지마'라고 불리며 우지 강 위의 다리에서 그의 나기나타(薙刀)로 다이라 씨의 화살을 쳐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 ** 이치라이 호시(一来法師) - 조묘 메이슈보다 앞서 미이데라 승려들을 전투로 이끈 것으로 유명하다.
6. 2. 헤이시
헤이시(平氏)는 헤이안 시대(794~1185) 일본 정치를 지배했던 4대 명문 중 하나였다. 1160년 헤이지의 난에서 라이벌이었던 미나모토 씨(源氏)를 거의 괴멸시킨 결과, 헤이시의 당주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는 그의 권력이 정점에 달했을 때 겐페이 전쟁(源平合戦)을 일으켰다. 하지만 전쟁의 끝은 헤이시의 멸망으로 이어졌다.[14]- 주요 인물
인물 | 설명 |
---|---|
다이라노 아쓰모리(平敦盛) | 구마가이 나오자네(熊谷直実)에게 죽임을 당한 젊은 사무라이로, 그의 젊음과 순수함 때문에 사후에 매우 유명해졌다. |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 | 전쟁 초기 헤이시의 당주. |
다이라노 고레모리(平維盛) | 기요모리의 손자. |
다이라노 무네모리(平宗盛) | 기요모리의 아들이자 후계자. 전쟁 대부분 동안 헤이시의 당주였다. |
다이라노 노리쓰네(平教経) | 헤이시의 사무라이. |
다이라노 시게히라(平重衡) | 기요모리의 아들로 장군을 지냈다. |
다이라노 다다노리(平忠度) | 기요모리의 형제로 장군을 지냈다. |
다이라노 도키코(平時子) | 기요모리의 아내. 단노우라 전투에서 자결했다. |
다이라노 도모모리(平知盛) | 기요모리의 아들로 장군을 지냈다. |
다이라노 유키모리(平行盛) | 고지마 전투에서 헤이시군을 지휘한 장군. |
다이라노 카게키요(平景清) | 후지와라 씨(藤原氏)에서 입양된 헤이시의 사무라이. |
- 동맹 세력과 가신
인물 | 설명 |
---|---|
안토쿠 천황(安徳天皇) | 일본의 천황이자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손자. |
오바 가게치카(大庭景親) | 헤이시의 가신. |
사이토 사네모리(斎藤実盛) |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의 옛 가신이었으나, 다이라노 무네모리(宗盛)의 가신이 되었다. |
세노오 카네야스(妹尾兼康) | 후쿠류지 성(福隆寺城)을 지휘했던 헤이시의 가신. |
타구치 시게요시(田口重能) | 단노우라 전투에서 전세가 역전되는 것을 보고 미나모토 진영으로 투항하여 미나모토의 승리를 확보하는 데 기여한 헤이시의 장군. |
엔랴쿠지(延暦寺)의 승병 | 미이데라(園城寺) 승병과의 라이벌 관계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미나모토 측과 동맹을 맺은 미이데라 승병과 대립했다.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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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Warrior Rule in Japa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
문서
Jishō–Juei War (Jishō portion)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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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ōgen Rebell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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注進者に関しては異説も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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頼朝の征夷大将軍任官をめぐって-『三槐荒涼抜書要』の翻刻と紹介-
[21]
논문
元暦西海合戦試論-「範頼苦戦と義経出陣」論の再検討-
[22]
문서
三種の神器のうち剣以外は無事に確保された。
[23]
문서
頼朝が占領して武士に給付した土地の中には旧勢力側の荘園なども含まれており、その後頼朝と朝廷との間で問題となった。だが、「寿永二年十月宣旨」や翌年3月7日の後白河法皇の院宣によって頼朝勢力圏と認めた地域については武士たちを在地領主として認めることで旧勢力側が歩み寄ることにな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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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鎌倉幕府の草創神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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