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라노 무네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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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이라노 무네모리는 헤이안 시대 말기, 가마쿠라 시대 초기의 무장으로,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호겐의 난 이후 관직을 시작하여 니조 천황 친정 시기에 측근으로 활동하며, 겐슌몬인의 유자로 시게코를 섬겼다. 지쇼 3년의 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했으나, 겐페이 전쟁에서 패배하여 몰락했다. 그는 겐페이 전쟁에서 잇따른 패배 후 교토를 포기하고 서쪽으로 도주했으나, 단노우라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다. 가마쿠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으며, 무능하고 겁이 많은 인물로 묘사되지만, 실무 능력과 가족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면모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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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라노 무네모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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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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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다이라노 무네모리 |
한자 표기 | 平 宗盛 |
출생 | 1147년 |
사망 | 1185년 7월 19일 (향년 39세) |
묘소 | 시가현야스시의 몸통 무덤 |
직업 | 군사 지도자 |
관직 | |
관위 | 종1위, 내대신 |
주군 | 고시라카와 천황 → 니조 천황 → 로쿠조 천황 → 다카쿠라 천황 → 안토쿠 천황 |
가문 | |
씨족 | 간무 헤이시다이라노 고레히라 류반도 헤이시 (이세 헤이시) |
부모 | 아버지: 다이라노 기요모리, 어머니: 다이라노 도키코 |
형제자매 | 시게모리, 모토모리, 무네모리, 도모모리, 도쿠코, 모리코 시게히라, 간시, 도모노리, 기요후사, 미코히메기미, 기타 |
배우자 | 정실: 다이라노 기요코 계실: 불명 (노무네 어머니), 다이라노 교모리의 딸 |
자녀 | 기요무네, 노무네, 아들, 아들, 딸 (다이라노 미치모리 부인) |
2. 생애
1147년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다이라노 도키코이다. 1157년 11세의 나이로 종5위하에 서임되었는데, 이는 아버지 기요모리보다 빠른 것이었다.[5]
1161년 고시라카와 인세이파와 니조 친정파의 대립이 심화되자, 기요모리는 무네모리를 니조 천황의 측근으로 보냈다.[6] 1162년에는 사마노카미(궁중의 군마를 관리하는 마료의 장관)가 되었다.
무네모리는 시게코의 유자였고, 시게코를 꾸준히 섬겼다. 아내로는 시게코의 동복 여동생 기요코를 맞이했다.[7]
1176년 시게코가 사망하고, 1179년 시게모리마저 사망하면서, 무네모리는 헤이시 가문의 수장이 되었지만 리더십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지쇼 3년의 정변으로 고시라카와 법황을 유폐하고 권력을 장악했으나, 각지에서 반란이 발생했다.[10]
1180년 모치히토 왕의 모반을 진압하고, 아들 기요무네가 종삼위에 서임되면서 헤이시 씨의 적류가 무네모리 가문으로 옮겨졌다. 후쿠하라 천도를 강행했으나, 후지 강 전투에서 패배 후 환도를 주장하여 기요모리와 대립했다.[14] 결국 1180년 교토로 돌아왔다.
1181년 기요모리가 사망하면서 무네모리는 헤이시의 수령이 되었다.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공순한 자세를 보이며 추토 중단을 결정했지만,[22] 군사적 권한은 유지했다. 스노마타 강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요코타가와라 전투 패배,[26] 호쿠리쿠도 반란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화평 제안을 기요모리의 유언을 이유로 거절했다.[28]
1183년 구리카라 고개 전투에서 요시나카 군에게 대패한 헤이시는[47] 교토를 포기하고 서쪽으로 후퇴했다. 고시라카와 법황은 헤이시 추토 선지를 내렸고,[41] 헤이시는 적군으로 전락했다.
무네모리는 대재부를 목표로 했으나 실패하고, 시코쿠로 이동하여 야시마를 거점으로 세력을 회복했다. 미즈시마 전투水島の戦い|미즈시마 전투일본어, 무로야마 전투室山の戦い|무로야마 전투일본어에서 승리했지만,[61][63] 이치노타니 전투一ノ谷の戦い|이치노타니 전투일본어[69], 야시마 전투屋島の戦い|야시마 전투일본어에서 패배하고, 단노우라 전투壇ノ浦の戦い|단노우라 전투일본어에서 헤이시 일족이 멸망하면서 포로로 잡혔다.[24]
1185년 교토로 돌아온 무네모리는[75]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목숨을 구걸했으나, 오미국 시노하라에서 참수되었다. 향년 39세였다. 아들 기요무네 등도 처형되어 무네모리의 남자 혈통은 끊어졌다.[77]
2. 1. 유년기 및 초기 관직 생활
1147년에 기요모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때 기요모리는 30세, 어머니 도키코는 22세, 맏형인 시게모리는 10세였다. 시게모리와 무네모리는 둘 다 정실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어머니가 달랐고, 나이 차이도 10세나 났기 때문에 처음부터 둘 사이에는 대립의 싹이 내포되어 있었다.호겐의 난이 끝난 후인 1157년 10월, 신제이의 주도로 대내리가 재건되었다. 10월 22일에는 대내리 재건의 상으로 서위가 행해졌는데, 이때 시게모리, 요리모리, 노리모리, 쓰네모리에게 각각 위계 승서가 있었다. 같은 날, 무네모리는 11세로 종5위하에 서임되었다. 이는 기요모리나 시게모리보다 빠른 서작이었으며, 무네모리가 정실 도키코의 장자로서 우대받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2. 2. 니조 천황 친정기
에이랴쿠 원년(1161년) 11월, 토바 상황의 유언으로 가장이 된 비후쿠몬인이 사망하면서, 고시라카와 인세이파와 니조 친정파의 대립이 본격화되었다. 오호 원년(1161년) 9월, 노리히토 친왕(고시라카와 상황의 일곱째 황자) 입태자 음모가 발각되자, 니조 천황은 인신을 해관하여 고시라카와 상황의 정치 개입을 중지했다. 니조 천황은 친정 확립에 의욕을 보이며, 구로도노토 나카야마 타다치카에게 직접 어전에 와서 주상하도록 명했지만, 그 연락역을 맡은 것은 무네모리였다.[6] 기요모리는 니조 친정을 지지하는 자세를 보이기 위해, 무네모리를 니조 천황의 측근으로 보냈던 것으로 추측된다.오호 2년(1162년) 10월 28일, 무네모리는 사마노카미가 되었다. 사마노카미는 궁중의 군마를 관리하는 마료의 장관이며, 헤이지의 난 이전에는 미나모토노 요시토모가 맡고 있었다. 군사 귀족에게는 극히 중요한 관직이었기 때문에, 헤이지의 난 이후에는 시게모리가 임명되었다. 이날 시게모리는 우효에노카미가 되었으므로, 시게모리가 사마노카미를 사임한 것에 따른 후임 인사로 보인다. 또한 무네모리가 사임한 후의 사마노카미는 시게히라이며, 마료를 헤이시 일문으로 독점하려는 기요모리의 강한 의지가 느껴진다.
2. 3. 겐슌몬인과의 관계
무네모리는 어머니 도키코와의 관계에서 시게코의 유자가 되었다. 시게코가 뇨고, 황태후, 여원이 되었을 때, 가사, 황태후궁권대부, 여원 별당이 되는 등 시게코를 꾸준히 섬겼고, 아내로 시게코의 동복 여동생 기요코 (다카쿠라 천황의 덴지, 중납언 삼위)를 맞이했다.[7] 이는 무네모리가 어머니의 출신인 타카토류 헤이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2. 4. 정권 장악과 동요
1176년 시게코가 사망하면서 헤이시 가문과 고시라카와 법황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1179년 시게모리가 사망한 이후, 무네모리는 헤이시 가문의 수장이 되었으나, 리더십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지쇼 3년의 정변을 통해 고시라카와 법황을 유폐하고 권력을 장악했으나, 각지에서 반란이 발생했다.[10] 1180년 2월에는 안토쿠 천황이 즉위하고, 다카쿠라 상황에 의한 원정이 시작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모치히토 왕의 모반이 일어났다. 헤이시 군은 모치히토 왕과 미나모토노 요리마사를 토벌하여 난을 진압했지만, 그 후에도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11][12]
2. 5. 반란 진압과 실패
1180년 5월, 모치히토 왕의 모반이 드러나자, 다이라노 무네모리는 10명의 대장 중 한 명으로 온죠지 공격을 명받는다.[11] 그러나 미나모토노 요리마사가 모치히토 왕에게 가담하고, 엔랴쿠지와 고후쿠지도 봉기하는 등 사태가 심각해졌다.[12] 하지만 헤이시 군은 모치히토 왕과 요리마사를 토벌하여 난을 진압했고, 무네모리의 아들 기요무네는 종삼위에 서임되었다. 이는 헤이시 씨의 적류가 고마쓰 가에서 무네모리 가문으로 옮겨졌음을 보여준다.6월, 기요모리는 후쿠하라 천도를 강행하고, 무네모리는 다카쿠라, 고시라카와 양원을 수행했다. 그러나 신도 건설 계획은 난항을 겪었고, 8월부터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후지 강 전투에서 추토군이 대패하자, 무네모리는 환도를 주장하여 기요모리와 격렬하게 대립했다.[14] 결국 기요모리도 환도에 동의하여,[15] 11월 26일에 교토로 돌아왔다.
1181년 정월, 다카쿠라 상황이 붕어하고, 고시라카와 법황의 원정 재개가 불가피해졌다. 무네모리는 다카쿠라 상황의 유언을 명분으로 기나이 총관직을 맡아[16] 군사 지휘권을 장악하고 반격 준비를 갖췄다. 그러나 윤 2월, 기요모리가 사망하고, 무네모리는 헤이시의 수령이 되었다.
무네모리는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공순한 자세를 보이며 추토 중단을 결정했지만,[22] 군사적 권한은 여전히 헤이시가 장악했다. 3월, 스노마타 강 전투에서 승리하고, 친제 반란 진압에 나섰지만, 병량 부족과 요코타가와라 전투 패배,[26] 호쿠리쿠도 반란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화평을 제안했지만, 무네모리는 기요모리의 유언을 이유로 거절했다.[28]
8월, 무네모리는 대규모 원정 계획을 세웠지만,[34] 요와의 기근과 고시라카와 법황의 세력 회복 등으로 인해 실행되지 못했다. 1182년 9월, 무네모리는 권대납언으로 환임하고, 10월에는 내대신이 되었다.[40] 11월에는 안토쿠 천황의 다이조에가 거행되었다.[29]
1183년 5월, 구리카라 고개 전투에서 요시나카 군에게 대패한 헤이시는[47] 교토 방어를 포기하고 서쪽으로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7월 24일, 안토쿠 천황은 호주지전으로 피신했지만,[55] 다음 날 새벽 고시라카와 법황이 엔랴쿠지로 탈출했다. 당황한 무네모리는[57] 로쿠하라에 불을 지르고 안토쿠 천황과 일족을 데리고 서쪽으로 달아났다.[58]
고시라카와 법황은 7월 28일 헤이시 추토 선지를 내렸고,[41] 헤이시는 적군으로 전락했다.
2. 6. 서국에서의 저항과 몰락
무네모리는 대재부를 목표로 했으나, 규슈 호족들의 협력을 얻지 못하고 시코쿠로 이동했다.[24] 야시마를 거점으로 세력을 회복하고, 미즈시마 전투水島の戦い|미즈시마 전투일본어, 무로야마 전투室山の戦い|무로야마 전투일본어 등에서 승리했다.[61][63] 요시나카와의 화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요시나카는 요리토모에게 멸망당했다.[66] 이치노타니 전투一ノ谷の戦い|이치노타니 전투일본어에서 대패하고,[69] 야시마 전투屋島の戦い|야시마 전투일본어에서도 패배하여 세토 내해의 제해권을 상실했다. 단노우라 전투壇ノ浦の戦い|단노우라 전투일본어에서 헤이시 일족이 멸망하면서 무네모리는 포로로 잡혔다.[24]2. 7. 최후
1185년 4월 26일, 무네모리는 다른 포로들과 함께 교토로 돌아갔다. 정의를 입은 무네모리는 도이 사네히라, 이세 요시모리 등의 무사들의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수레에 아들 기요무네와 함께 타고 대로를 건너갔는데, 구경꾼들이 무리를 지어 이를 전송했다.[75]5월 7일, 무네모리와 기요무네는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에게 연행되어 가마쿠라로 향했다. 구조 가네자네는 이를 두고 "유배의 의식이 아니다"[76]라고 기록하고 있어, 이때 이미 사형이 결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네모리는 가마에, 기요무네는 말을 타고[24] 5월 16일, 가마쿠라에 들어갔다. 6월 7일, 무네모리는 패군의 장수로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앞에 끌려갔다. 요리토모는 승자로서 발 사이에서 무네모리를 내려다보며, 히키 요시카즈를 시켜 자신의 말을 전하게 했다. 『아즈마카가미』와 『헤이케 이야기』에 따르면, 무네모리는 비굴한 태도로 일관하며 목숨을 구걸했고, 모인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조소를 받았다고 한다.
6월 9일, 무네모리는 교토로 송환되어, 21일에 요시쓰네의 명령을 받은 다치바나 기미나가에 의해 오미국 시노하라 숙소에서 참수되었다. 향년 39세. 적남 기요무네, 차남 노리무네(유아명・부장), 그 외 남자 아이 두 명(이름은 불명)도 차례로 처형되어, 무네모리의 남자 혈통은 끊어졌다.[77] 『헤이케 이야기』에서는 "부자 모두 야스에서", 『겐페이 조스이키』에서는 "6월 22일에 부자 모두 세타에서 참수되었다"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무네모리와 기요무네 부자의 목은 6월 23일에 로쿠조가와라로 옮겨져 검비위사인 타이라노 토모야스 등이 받아 옥문 앞의 나무에 걸었다고 한다.
3. 평가
헤이케 이야기 등 군담소설에서는 무네모리가 어리석고 무능한 인물로 묘사된다.[79]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무네모리를 겁이 많고 무능한 자로 평가했으며, 단노우라 전투 직전 동생 미나모토노 노리요리에게 보낸 서신에서는 "내부 대신은 매우 겁이 많은 사람이니, 자해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적었다.[79]
무네모리는 낙마나 배탈 등 무가의 맹주로서 어울리지 않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교쿠요』에 따르면, 기요모리 사후 무네모리가 대식가여서 배탈이 났다는 소문이 있었고, 안토쿠 천황의 다이죠에 어계행행 의식에서 구치토리가 끄는 말에서 두 번이나 낙마했다.[79] 『구칸쇼』에는 "무네모리는 수영을 잘해서, 물 위로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하는 중에, 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어 생포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79]
그러나 최근에는 무네모리의 능력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79] 특히, 병란의 시대를 지나 왕권과 결합하여 정치적으로 안정된 헤이케 정권에서 요구되었던, 공가 사회에서의 실무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는 견해가 있다.[79]
또한, 아내와 자식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진 가장이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들이 있다. 요와 2년(1182년) 3월 『교쿠요』 기사에는 "아버지는 유감이 있으면 곧바로 보복을 했다. 나는 일을 크게 만들지 않도록 모르는 척한다"라는 무네모리의 말이 기록되어 있어, 평화적인 해결을 모색하려 했던 인물이라는 평가도 있다.
3. 1. 부정적 평가
《헤이케 이야기》를 비롯한 군담소설에서 무네모리는 어리석고 무능한 인물로 묘사된다.[79]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무네모리를 겁이 많고 무능한 자로 평가했는데, 단노우라 전투 직전에 동생 미나모토노 노리요리에게 보낸 서신에서는 "내부 대신은 매우 겁이 많은 사람이니, 자해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적었다. 가마쿠라로 호송되었을 때에는 권유받은 식사도 하지 않고 울기만 했으며, 요리토모와의 대면에서는 변명도 못하고 그저 출가와 구명을 요청하여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아들이 맞느냐는 비난을 받았다.[79]무네모리는 낙마나 배탈 등 무가의 맹주로서 어울리지 않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교쿠요』에 따르면, 기요모리 사후 무네모리가 대식가여서 배탈이 났다는 소문이 있었고, 안토쿠 천황의 다이죠에 어계행행 의식에서 구치토리가 끄는 말에서 두 번이나 낙마하기도 했다.[79] 『구칸쇼』에는 "무네모리는 수영을 잘해서, 물 위로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하는 중에, 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어 생포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79]
3. 2. 긍정적 재평가
무네모리는 시게모리와 같은 뛰어난 인물과는 달리, 어리석고 오만한 성격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무네모리의 능력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79]특히, 무네모리는 병란의 시대를 지나 왕권과 결합하여 정치적으로 안정된 헤이케 정권에서 요구되었던, 공가 사회에서의 실무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는 견해가 있다.[79]
또한, 아내가 출산으로 사망했을 때 관직을 반납하고 슬퍼했으며, 아내의 유언에 따라 어린 아들 요시무네를 직접 키웠다는 점, 처형 직전 마지막 말이 자식을 생각하는 것이었다는 점 등을 통해 아내와 자식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진 가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요와 2년(1182년) 3월의 『교쿠요』기사에는 "아버지는 유감이 있으면 곧바로 보복을 했다. 나는 일을 크게 만들지 않도록 모르는 척한다"라는 무네모리의 말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무네모리가 평화적인 해결을 모색하려 했던 인물이며, 무조건적인 강경파는 아니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4. 전설
다이라노 무네모리에 관한 여러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이러한 일화들은 전설이며, 진실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다.
- 명마 강탈: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의 아들 미나모토노 나카쓰나가 소유한 명마 '기노시타'를 탐내어 강제로 빼앗고 돌려주지 않았다. 그 말의 이름을 '나카쓰나'로 바꾸고 엉덩이에 낙인까지 찍어 굴욕을 주었다. 이 원한이 훗날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의 거병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80]
- 미나모토노 기소에 의한 보복: 요리마사 휘하의 무사 미나모토노 기소는 나카쓰나의 원한을 풀기 위해 거짓으로 무네모리에게 투항, 명마를 받은 후 다시 요리마사 진영으로 돌아갔다. 기소는 말의 갈기와 꼬리털을 자르고 엉덩이에 "옛날에는 暖廷(단정), 지금은 다이라노 무네모리 입도"라는 낙인을 찍어 헤이케 측에 돌려보냈다. 격노한 무네모리는 기소를 직접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고, 기소는 장렬히 죽었다. 이 일로 무네모리의 좁은 마음은 같은 헤이케 측으로부터도 경멸을 받았다.[81]
- 단노우라 전투: 단노우라 전투에서 패배가 결정되자 당황하여 보기 흉한 모습을 보였다. 헤이시 장수들은 무네모리를 억지로 바다에 밀어 넣었으나, 수영에 능숙했던 무네모리는 겐지 군에게 구출되었다. 무네모리는 비만이었기 때문에 물에 뜨기 쉬웠다고 한다.[80]
- 요리토모와의 면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면회한 무네모리는 목숨을 구걸하며 아첨을 떨었고, 이를 본 겐지 군 장수들은 비웃었다. 요리토모는 무네모리의 이름을 '다이라노 스에쿠니(平末国)'로 바꾸었다.[80]
- 도쿠코와의 관계: 여동생 도쿠코와 정을 통해 안토쿠 천황을 낳았다는 설이 있다.[82]
- 토키코와의 관계: 단노우라 전투에서 추태를 보인 아들을 본 토키코는 무네모리가 다이라노 기요모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아니라고 말했다. 기요모리가 아들을 원했기에 교토 우산 장수의 아이와 바꿔치기했다는 것이다. 무네모리는 포로가 된 후 이 설을 인정하고 목숨을 구걸했다고 한다.[82]
- 포로가 된 후: 무네모리는 현재의 즈시 부근에 연금되었다. 처음에는 평판이 좋지 않았지만, 아이들과 장난치는 등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점차 마음을 열었다고 한다. 처형 후에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5. 가계
항목 | 내용 |
---|---|
아버지 | 다이라노 기요모리 |
어머니 | 다이라노 도키코 (다이라노 도키노부의 딸) |
정실 | 다이라노 기요코 (다이라노 도키노부의 딸) |
장남 | 다이라노 기요무네 |
계실 | 불명 (노무네의 어머니) |
차남 | 다이라노 노무네 |
아내 | 다이라노 노리모리의 딸 |
생모 불명의 자녀 |
6. 관직 이력
平 宗盛|다이라노 무네모리일본어의 관직 이력은 다음과 같다.[1]
취임년도 | 나이 | 관직 |
---|---|---|
1157년 | 11세 | 종5위하 |
1159년 | 13세 | 도토미수 (헤이지의 난 훈공) |
1160년 | 14세 | 아와지노카미 |
우효에노곤노사 겸임 | ||
1161년 | 15세 | 종5위상 |
1162년 | 16세 | 사효에노스케, 아와지노카미 |
사마노카미, 아와지노카미 | ||
1163년 | 17세 | 미마사카노카미, 사마노카미 |
1164년 | 18세 | 정5위하 |
1165년 | 19세 | 종4위하(로쿠조 천황 즉위, 중궁・후지와라 이쿠코 어사) |
1166년 | 20세 | 종4위상 |
정4위하(대장회, 고시라카와 상황 어사) | ||
사마노카미 사임(시게히라에게 양도) | ||
1167년 | 21세 | 우콘에노츄조, 미마사카노카미 |
킨지키 칙허 | ||
미마사카노카미 사임 | ||
산기 보임, 우콘에노츄조, 종3위 | ||
1168년 | 22세 | 에치젠곤노카미 겸임 |
고타이고구곤노다이부 겸임 | ||
정3위(황태후・타이라 시게코 입내의 상) | ||
1169년 | 23세 | 고타이고구곤노다이부 사임(원호 선하) |
1170년 | 24세 | 곤츄나곤, 우에몬노카미 겸임 |
1173년 | 27세 | 종2위(사이쇼코인 공양・행행・행사의 상, 겐슈몬인 어급) |
1175년 | 29세 | 사에몬노카미 |
1176년 | 30세 | 곤츄나곤 사임(겐슈몬인 사망) |
1177년 | 31세 | 곤츄나곤 환임, 우콘에노다이쇼 겸임 |
1178년 | 32세 | 정2위(조근 행행, 고시라카와 법황 어급) |
곤다이나곤, 우콘에노다이쇼 | ||
우콘에노다이쇼 사임(아내・타이라 키요코의 병) | ||
우콘에노다이쇼 환임, 토키히토 친왕 칙사별당 보임 | ||
슌궁다이후 | ||
1179년 | 33세 | 슌궁다이후 사임 |
곤다이나곤・우콘에노다이쇼 사임 | ||
1182년 | 36세 | 곤다이나곤 환임 |
나이다이진 | ||
1183년 | 37세 | 종1위 |
내대신 사임 | ||
제명 |
7. 관련 작품
참조
[1]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https://books.google[...]
Cassell
2000
[2]
서적
A History of Japan to 1334
Stanford University Press
[3]
서적
The Tales of the Heike
Columbia University Press
[4]
서적
兵範記
[5]
서적
公卿補任
[6]
서적
山槐記
[7]
서적
兵範記
[8]
서적
兵範記
[9]
서적
玉葉
[10]
서적
玉葉
[11]
서적
玉葉
[12]
서적
玉葉
[13]
서적
玉葉
[14]
서적
玉葉
[15]
서적
吉記
[16]
서적
玉葉
[17]
서적
玉葉
[18]
서적
玉葉
[19]
서적
玉葉
[20]
서적
玉葉
[21]
서적
平清盛 福原の夢
講談社
[22]
서적
玉葉
[23]
서적
玉葉
[24]
서적
吉記
[25]
서적
玉葉
[26]
서적
玉葉
[27]
서적
玉葉
[28]
서적
玉葉
[29]
서적
百錬抄
[30]
서적
玉葉
[31]
서적
吉記
[32]
서적
玉葉
[33]
서적
玉葉
[34]
서적
玉葉
[35]
서적
吉記
[36]
서적
吉記
[37]
서적
明月記
[38]
서적
玉葉
養和2年3月9日
[39]
서적
玉葉
養和2年3月12日
[40]
서적
玉葉
[41]
서적
百錬抄、玉葉、吉記
[42]
서적
吉記
寿永2年2月21日
[43]
서적
玉葉
寿永2年6月5日
[44]
서적
玉葉
寿永2年4月14日
[45]
서적
玉葉
寿永2年5月16日
[46]
서적
吉記、玉葉
寿永2年6月9日
[47]
서적
吉記
寿永2年6月18日
[48]
서적
吉記
寿永2年6月29日
[49]
서적
百錬抄、吉記
寿永2年7月8日, 7月12日
[50]
서적
吉記
寿永2年7月10日
[51]
서적
吉記
寿永2年7月16日
[52]
서적
吉記
寿永2年7月21日
[53]
서적
玉葉
寿永2年7月21日
[54]
서적
玉葉、吉記
寿永2年7月22日, 7月24日
[55]
서적
吉記
寿永2年7月24日
[56]
서적
玉葉
養和元年9月19日, 9月29日
[57]
서적
愚管抄
[58]
서적
吉記
寿永2年7月25日
[59]
서적
玉葉
寿永2年11月14日
[60]
서적
玉葉
寿永2年9月21日
[61]
서적
玉葉
寿永2年閏10月2日
[62]
서적
玉葉
寿永2年閏10月21日
[63]
서적
玉葉
寿永2年12月2日
[64]
서적
玉葉
寿永2年11月27日
[65]
서적
玉葉
寿永3年正月9日
[66]
서적
玉葉
寿永3年正月13日
[67]
서적
百錬抄
寿永3年正月8日
[68]
서적
百錬抄、玉葉
寿永3年正月29日, 2月1日
[69]
서적
玉葉
寿永3年2月8日
[70]
서적
玉葉
2月10日
[71]
서적
吾妻鏡
1184-02-20
[72]
서적
玉葉
1184-02-19
[73]
서적
玉葉
1184-02-29
[74]
서적
玉葉
1184-03-10
[75]
서적
玉葉・百錬抄・吾妻鏡
[76]
서적
玉葉
[77]
문서
평종성의 마지막 직계 자손
[78]
뉴스
평종성 참수의 땅에 "목 씻는 연못" 야스 대시노하라 현지 주민들 복원
京都新聞
2021-06-15
[79]
논문
평중성론
思文閣出版
2009
[80]
서적
평가이야기
[81]
서적
평가이야기
[82]
서적
源平盛衰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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