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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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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단기 의회는 1640년 4월 13일부터 5월 5일까지 찰스 1세에 의해 소집된 잉글랜드 의회이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와의 갈등으로 인한 재정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의회를 소집했으나, 의회는 국왕의 전제 정치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며 전비 보조금 지급을 거부했다. 결국 찰스 1세는 의회를 해산했고, 이는 3주 만에 이루어졌다. 이후 국왕은 아일랜드 의회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소집했지만,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서 패배했고, 이로 인해 11월 3일 장기 의회가 소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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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의회
개요
정식 명칭찰스 1세의 제4 의회
별칭단기 의회
소집1640년 4월 13일
해산1640년 5월 5일
선행 의회1628–29년 의회
후임 의회장기 의회
군주찰스 1세
배경 및 원인
소집 배경주교 전쟁 자금 확보
주요 쟁점왕의 권한, 과세, 종교 문제
주요 인물
의장존 핀치 남작
주요 인물존 핌
존 햄든
올리버 세인트존
결과 및 영향
해산 이유왕과 의회의 의견 불일치
영향장기 의회 소집의 계기, 잉글랜드 내전의 심화
관련 사건
관련 사건주교 전쟁
잉글랜드 내전
램버스 궁전 공격 (1640년)
추가 정보
추가 정보17세기 잉글랜드 정치사

2. 배경

1629년, 찰스 1세는 국왕 대권을 내세워 권리 청원을 무시하고 의회를 해산했다. 이후 11년 동안 찰스 1세는 직접 통치(친정)를 하면서 의회의 승인 없이 세금을 거두고, 캔터베리 대주교윌리엄 로드와 스트라포드 백작토머스 웬트워스를 등용하여 탄압 정책을 펼쳐 국민들의 불만을 샀다. 이러한 정책은 잉글랜드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아일랜드에도 나쁜 영향을 미쳤다.[4]

1639년, 찰스 1세가 로드의 권유로 잉글랜드 국교회 형식의 기도서를 스코틀랜드에 강요하자, 스코틀랜드는 국민 서약을 맺고 반란을 일으켰다(제1차 주교 전쟁). 찰스 1세는 군대를 모아 진압하려 했으나,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스코틀랜드와 평화 협정을 맺고 전쟁을 끝냈다(베릭 조약). 그러나 종교 문제로 인한 갈등은 계속되었고, 찰스 1세는 무력 사용을 고려했다. 전쟁 비용으로 재정이 어려워지자, 찰스 1세는 스트라포드 백작의 제안을 받아들여 11년간의 친정을 중단하고 1640년 4월 13일에 의회를 소집했는데, 이것이 단기 의회이다.[5][6]

하지만 찰스 1세의 독단적인 정치를 막으려는 의회와, 전쟁 비용을 위한 보조금을 원하는 국왕 사이의 갈등은 깊었다. 의회에서 하원 의원 존 핌은 각지에서 제기된 불만을 바탕으로 2시간 동안 연설했고(「불만 카탈로그」), 하원은 왕이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지 않으면 보조금을 줄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찰스 1세는 귀족원을 통해 하원을 설득하려 했지만 오히려 하원의 태도는 강경해졌고, 스코틀랜드에 대한 의회의 동정심도 있어 국왕과의 협상은 결렬되었다. 4월 29일에는 로드의 강압적인 종교 정책이 의회의 공격 대상이 되자, 찰스 1세는 5월 5일에 의회를 해산했다. 회의 기간은 불과 3주였다. 국왕을 지지하던 하원 의원 에드워드 하이드는 의회 해산으로 온건파를 적으로 만들 것을 우려하여 로드에게 찰스 1세에게 해산 철회를 건의할 것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5월 11일에는 해산에 분노한 민중들이 폭동을 일으켜 로드의 저택(램버스 궁전)을 습격하기도 했다.[7]

이후, 전쟁 비용을 얻지 못한 찰스 1세는 아일랜드 의회의 도움을 받아 군대를 모았지만, 병력이 부족했다. 이를 알아챈 스코틀랜드 군대는 즉시 움직여 잉글랜드 군대와 전투를 벌였고, 스코틀랜드 군대가 크게 승리했다(8월 28일, 제2차 주교 전쟁, 뉴번 전투). 리폰 조약에서 찰스 1세에게 부과된 전쟁 배상금 때문에, 11월 3일에 다시 의회가 소집되었다(이 의회는 1653년까지 이어져 장기 의회라고 불린다).[8]

3. 스코틀랜드와의 갈등

1639년, 찰스 1세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로드의 권고에 따라 잉글랜드 국교회 형식에 따른 기도서스코틀랜드에 강요하면서, 스코틀랜드는 국민 서약을 결성하고 반란을 일으켰다(제1차 주교 전쟁).[5] 국왕군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모았으나,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스코틀랜드 서약군과 대치 상황에서 화평을 제안했고, 베릭 조약 체결로 전투 없이 전쟁은 종결되었다.[5] 그러나 이후에도 종교 문제를 둘러싼 대립은 해소되지 않았고, 찰스 1세는 무력 행사를 검토하게 된다.[5]

4. 단기 의회 (1640년 4월 13일 ~ 5월 5일)

1639년, 찰스 1세윌리엄 로드의 권고에 따라 잉글랜드 국교회 형식에 따른 기도서스코틀랜드에 강요하면서, 스코틀랜드는 국민 서약을 결성하고 반란을 일으켰다(제1차 주교 전쟁). 국왕 측은 군대를 모아 스코틀랜드 서약군과 대치했지만,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화평을 제안했고, 싸우지 않고 전쟁은 종결되었다 (베릭 조약). 그러나 이후에도 종교 문제로 인한 대립은 해소되지 않았고, 찰스 1세는 실력 행사를 검토했다. 이때의 전비와 함께 이미 재정은 한계에 달했고, 새로운 전비를 원했던 찰스 1세는 스트라포드 백작토머스 웬트워스의 건의를 받아들여 11년간 이어진 친정을 중단하고, 1640년 4월 13일에 의회를 소집했다. 이를 단기 의회라고 부른다.[5][6]

그러나 찰스 1세의 전제 정치를 중단하려는 의회 측과, 전비를 위한 보조금을 원하는 국왕 측의 대립은 심각했다. 하원의 유력 의원 존 핌은 각지에서 접수된 전제의 불만을 토대로 2시간에 걸친 연설(「불만 카탈로그」)을 했고, 이에 동조한 하원은 전제를 고치지 않는 한 보조금을 내주지 않겠다는 자세를 보였다. 찰스 1세는 귀족원을 끌어들여 하원을 회유하려 했지만 오히려 하원의 태도가 굳어졌고, 기도서를 강요당한 스코틀랜드에 대한 의회의 동정심도 있어 국왕과의 회의는 결렬되었다. 4월 29일에는 로드의 강압적인 종교 정책도 의회가 공격하기에 이르자, 찰스 1세는 5월 5일에 의회를 해산했다. 회기는 불과 3주였다. 국왕 쪽에 기운 하원 의원 에드워드 하이드는 해산으로 체제 지지 온건파를 적으로 돌릴 것을 우려하여, 로드에게 찰스 1세에게 해산 철회를 조언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거부되었고, 5월 11일에는 해산에 분노한 민중이 폭도로 변하여, 해산의 주모자로 지목된 로드의 저택 (램버스 궁전)을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7]

5. 제2차 주교 전쟁 및 장기 의회 소집

1639년 찰스 1세가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로드의 권고에 따라 잉글랜드 국교회 형식에 따른 기도서를 스코틀랜드에 강요하면서, 스코틀랜드는 국민 서약을 결성하고 반란을 일으켰다(제1차 주교 전쟁). 국왕 측은 군대를 모아 스코틀랜드 서약군과 대치했지만,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화평을 제안했고, 싸우지 않고 전쟁은 종결되었다 (베릭 조약). 그러나 이후에도 종교 문제로 인한 대립은 해소되지 않았고, 찰스 1세는 실력 행사를 검토했다. 당시 전비와 함께 이미 재정은 한계에 달했고, 새로운 전비를 원했던 찰스 1세는 스트라포드 백작 토머스 웬트워스의 건의를 받아들여 11년간 이어진 친정을 중단하고, 1640년 4월 13일에 의회를 소집했지만, 이는 단기 의회로 끝났다.[5][6]

이후, 전비를 얻지 못한 찰스 1세는 아일랜드 의회의 협력을 얻어 군대를 모았지만, 병력이 부족했다. 그 움직임을 감지한 서약군은 즉시 움직여 양군은 격돌했고, 서약군이 압승했다 (8월 28일, 제2차 주교 전쟁, 뉴번 전투). 리폰 조약에서 찰스 1세에게 부과된 이 전쟁의 배상금 때문에, 11월 3일에 다시 의회가 소집되었다(이를 장기 의회라고 부른다).[8]

6. 결과

1640년 4월 13일에 소집된 단기 의회는 찰스 1세의 전제 정치에 대한 불만과 전비 보조금 문제로 국왕과 의회가 대립하면서 3주 만에 해산되었다.[5][6] 하원의 유력 의원 존 핌은 각지에서 접수된 전제 정치에 대한 불만을 토대로 2시간에 걸친 연설을 하였고, 하원은 전제 정치가 시정되지 않으면 보조금을 내줄 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찰스 1세는 귀족원을 통해 하원을 회유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스코틀랜드에 대한 의회의 동정 여론도 있어 국왕과의 협상은 결렬되었다. 결국 찰스 1세는 5월 5일에 의회를 해산했다.[7]

단기 의회 해산 이후, 찰스 1세는 전비를 얻지 못한 채 아일랜드 의회의 협력을 얻어 군대를 모았지만 병력이 부족했다. 스코틀랜드 서약군은 잉글랜드 군대를 격파하고 (제2차 주교 전쟁, 뉴번 전투) 찰스 1세에게 배상금을 요구했다. 결국 찰스 1세는 배상금 문제 때문에 1640년 11월 3일에 다시 의회를 소집해야만 했다. 이 의회는 1653년까지 이어져 장기 의회로 불린다.[8]

단기 의회와 장기 의회를 거치며 왕과 의회 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고, 이는 결국 잉글랜드 내전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참조

[1] 서적 Notes of the Treaty Carried on at Ripon Between King Charles I. and the Covenanters of Scotland, A.D. 1640, Taken by Sir John Borough, Garter King of Arms https://books.google[...] Camden Society
[2] 서적 Civil War: the wars of the three kingdoms; 1638-1660 Abacus 2010
[3] 논문 'This Infamous, Scandalous, Headless Insurrection': The Attack on William Laud and Lambeth Palace, May 1640, Revisited 2024
[4] 문서 浜林、P75 - P81、今井、P180 - P187、塚田、P97 - P102、清水、P19 - P24
[5] 문서 松村、P686
[6] 문서 浜林、P87 - P89、今井、P187 - P189、塚田、P103 - P105、清水、P31 - P33
[7] 문서 浜林、P89 - P91、今井、P191、塚田、P105 - P106、P124 - P126、P186 - P187、清水、P33
[8] 문서 浜林、P91 - P92、今井、P192、塚田、P106 - P107、P126、清水、P33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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