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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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빈 회의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의 정치 지형을 재편성하기 위해 1814년부터 1815년까지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국제 회의이다. 오스트리아,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 등 4개국이 주도했으며, 프랑스도 탈레랑의 외교적 노력으로 참여했다. 회의의 주요 목적은 프랑스 혁명 이전의 상태로 복귀하는 '정통주의'를 기본 원칙으로 삼고, 강대국 간의 세력 균형을 통해 유럽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회의 결과, 러시아는 폴란드 입헌왕국을 수립하고, 프로이센은 작센 영토 일부와 라인란트 등을 획득했으며, 오스트리아는 독일 연방 의장국이 되었다. 네덜란드, 스웨덴, 스위스, 영국, 사르데냐 왕국 등도 영토를 조정받았다. 노예 무역 금지 선언과 라인강의 자유 항행 보장 등도 합의되었다. 빈 회의는 이후 '빈 체제'로 불리는 국제 질서를 구축하여 유럽에 약 30년간의 평화를 가져왔지만,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운동을 억압하고 반동을 강요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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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헌법은 1814년에 제정되어 유럽에서 가장 민주적인 헌법으로 평가받았으며, 노르웨이 독립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고, 국왕, 국무회의, 스토르팅, 사법부, 인권 등 주요 내용을 담고 있으며, 2018년 개정된 121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빈 회의 | |
---|---|
지도 | |
회의 정보 | |
회의명 | 빈 회의 |
시기 | 1814년 9월 ~ 1815년 6월 9일 |
장소 | 오스트리아 제국, 빈 |
주요 참가국 | 오스트리아 제국 영국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프랑스 왕국 |
주요 인물 | |
오스트리아 |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
영국 | 캐슬레이 자작 |
러시아 | 알렉산드르 1세 |
프로이센 | 카를 아우구스트 폰 하르덴베르크 |
프랑스 |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 |
회의 배경 | |
주요 원인 | 나폴레옹 전쟁 이후의 유럽 재편 |
회의 결과 | |
주요 결정 | 유럽 협조 체제 형성 프랑스 복구 및 국경선 조정 신성 동맹 및 4국 동맹 결성 각국의 영토 및 지배권 조정 |
기타 정보 | |
초대 | 로버트 리스턴 (외교관),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가 오스만 제국을 공식적으로 초청했으나, 마흐무트 2세는 대표단을 보내지 않았음 |
2. 역사적 배경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유럽은 혼란에 빠졌으며, 신성 로마 제국 해체, 라인 동맹 결성 등 유럽의 정치 지형이 크게 변화하였다.[2] 대륙 봉쇄령으로 유럽 경제가 큰 타격을 입었다. 제6차 대프랑스 동맹과 프랑스 간의 파리 조약과 킬 조약에서 이미 부분적인 해결이 이루어졌다.[3] 파리 조약에서는 "전쟁에 참여한 모든 강대국"에게 초청장이 발부될 것이며, 빈에서 "총회"가 개최되어야 함을 결정했다.[3] 개회식은 1814년 7월로 예정되었다. 1814년 쇼몽 조약은 이미 결정되었고 빈 회의에서 더욱 중요하게 비준될 결정들을 재확인했다. 여기에는 독일 연방의 설립, 이탈리아의 독립 국가로의 분할,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복위, 그리고 1830년에 현대 벨기에가 된 지역을 포함한 네덜란드의 확장이 포함되었다. 쇼몽 조약은 수십 년 동안 세력 균형을 형성한 유럽 동맹의 초석이 되었다.[2]
2. 1. 빈 회의 이전의 유럽 정세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유럽은 혼란에 빠졌으며, 신성 로마 제국 해체, 라인 동맹 결성 등 유럽의 정치 지형이 크게 변화하였다.[2] 대륙 봉쇄령으로 유럽 경제가 큰 타격을 입었다. 제6차 대프랑스 동맹과 프랑스 간의 파리 조약과 킬 조약에서 이미 부분적인 해결이 이루어졌다.[3] 파리 조약에서는 "전쟁에 참여한 모든 강대국"에게 초청장이 발부될 것이며, 빈에서 "총회"가 개최되어야 함을 결정했다.[3] 개회식은 1814년 7월로 예정되었다. 1814년 쇼몽 조약은 이미 결정되었고 빈 회의에서 더욱 중요하게 비준될 결정들을 재확인했다. 여기에는 독일 연방의 설립, 이탈리아의 독립 국가로의 분할,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복위, 그리고 1830년에 현대 벨기에가 된 지역을 포함한 네덜란드의 확장이 포함되었다. 쇼몽 조약은 수십 년 동안 세력 균형을 형성한 유럽 동맹의 초석이 되었다.[2]2. 2. 빈 회의의 목적과 기본 원칙
빈 회의는 프랑스 혁명 이전의 상태로 복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통주의'를 기본 원칙으로 삼았다.[44] 그러나 각국의 이해관계가 충돌하여 이 원칙은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강대국 간의 세력 균형을 통해 유럽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목표였다.[2] 탈레랑은 정통주의 원칙을 주장하여 프랑스의 지위를 회복하고자 했다.[44]쇼몽 조약은 독일 연방의 설립, 이탈리아의 독립 국가로의 분할,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복위, 네덜란드의 확장 등을 결정했다.[2] 제6차 대프랑스 동맹과 프랑스 간의 파리 조약 및 킬 조약에서 이미 부분적인 해결이 이루어졌으며, 빈에서 "총회"가 개최되어 "전쟁에 참여한 모든 강대국"에게 초청장이 발부되었다.[3]
빈 회의에서는 프랑스 혁명 이전 체제의 완전한 부활이 아니라, 강대국에 의한 세력균형을 고려한 형태로 정통주의가 실현되었다. 예를 들어,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고 나폴레옹이 정리했던 독일의 여러 나라는 독일 연방으로 재출발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강대국들이 서로 균형을 유지하는 국제 질서(빈 체제)가 구축되었고, 유럽에는 약 30년간의 평화가 유지되었다.
3. 주요 참여국 및 대표
빈 회의는 오스트리아,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 등 4개국이 주도했다.[4] 패전국 프랑스도 탈레랑의 외교적 노력으로 회의에 참여하여 발언권을 얻었다.
- '''오스트리아 제국'''
군주: 황제 프란츠 1세 (Franz I)
전권대사: 외무대신 메테르니히 공작 클레멘스 벤첼 로타르 (Prince Klemens Wenzel Lothar von Metternich)
- '''러시아 제국'''
군주: 황제 알렉산드르 1세 (Alexander I)
수석 전권대사: 국무장관 네셀로데 백작 카를 로베르트 (Count Karl Robert Nesselrode)
- '''프로이센 왕국'''
군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Friedrich Wilhelm III)
수석 전권대사: 재상 할덴베르크 후작 카를 아우구스트 (Prince Karl August von Hardenberg)
- '''영국 및 아일랜드 연합 왕국'''
수석 전권대사: 외무대신 카슬리 백작 로버트 스튜어트 (Viscount Castlereagh, Robert Stewart)
수석 전권대사 대리: 주 프랑스 대사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 (1st Duke of Wellington, Arthur Wellesley) (내각 개편으로 카슬리 백작이 회의 도중 본국으로 귀국했기 때문)
수석 전권대사 대리: 주 네덜란드 대사 2대 클랜카티 백작 리처드 트렌치 (Richard Trench, 2nd Earl of Clancarty) (나폴레온의 백일천하를 진압하기 위해 웰링턴 공작이 남네덜란드로 출진했기 때문)
- '''프랑스 왕국'''
수석 전권대사: 총리 베네방트 공작 샤를 모리스 탈레랑 (Charles Maurice de Talleyrand-Périgord)
- '''교황령'''
수석 전권대사: 국무장관 추기경 엘콜레 콘살비 (Cardinal Ercole Consalvi)
상기한 5대 강국 외에도 유럽 각국이 사절단을 파견하여 회의에 자국의 입장을 반영하고 조그마한 이익이라도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 에스파냐는 라브라도 후작, 포르투갈은 팔멜라 백작, 스웨덴-노르웨이 연합왕국은 로웬히엠 백작을 대표로 하는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나폴리 왕국은 뮈라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절단과 부르봉 왕가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절단이 각각 파견되어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의 장래를 둘러싼 합의에 결사적으로 영향을 미치려 노력하였다. 교황령에서는 콘살비 추기경, 오스만 제국에서는 마브로제니 파샤를 파견하였으며, 네덜란드에서는 자국 주재 영국대사인 클렌카티 백작을 대표로 참석시켰다. 그 외에도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인 수많은 독일의 영방국가들과 심지어 북아메리카에서 영국과 동맹하여 프랑스와 싸우고 있던 이로쿼이 부족도 대표자를 파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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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Arthur Wellesley, 1st Duke of Wellington)
|: 오리올라 백작 호아킨 로보 실베이라(Joaquim Lobo Silveira, 7th Count of Oriola)
|: 포르투산투 백작 안토니우 드 살다냐 다 가마(António de Saldanha da Gama, Count of Porto Santo)
|: 칼 뢰벤헬름 백작(Count Carl Löwenhielm)
|: 루이 조제프 알렉시 드 누아이유 백작/Louis Joseph Alexis, Comte de Noailles프랑스어
|: 메테르니히 공 클레멘스 벤첼 로타르(Klemens Wenzel, Prince von Metternich)
|: 프레데리크 세라팡 드 라 투르 뒤 팽 구베르네/Frédéric-Séraphin de La Tour du Pin Gouverne프랑스어
|: 네셀로드 백작 카를 로베르트(Count Karl Robert Nesselrode)
|: 팔멜라 백작 페드루 드 수자 홀스타인(Pedro de Sousa Holstein, 1st Count of Palmela)
|: 캐슬리리 경 로버트 스튜어트(Robert Stewart, Viscount Castlereagh)
|: 달베르크 공작 에메리히 요제프(Emmerich Joseph, Duke of Dalberg)
|: 바론 요한 폰 베센베르크(Baron Johann von Wessenberg)
|: 라주모프스키 공작 안드레이 키릴로비치(Prince Andrey Kirillovich Razumovsky)
|: 스튜어트 남작 찰스 스튜어트(Charles Stewart, 1st Baron Stewart)
|: 라브라도르 후작 페드로 고메스 라브라도르(Pedro Gómez Labrador, 1st Marquess of Labrador)
|: 클랜카티 백작 리처드 르 푸어 렌치(Richard Le Poer Trench, 2nd Earl of Clancarty)
|Nikolaus von Wackende (기록관)
|: 프리드리히 폰 겐츠(Friedrich von Gentz) (회의 서기)
|: 훔볼트 남작 빌헬름 폰 훔볼트(Baron Wilhelm von Humboldt)
|: 캐서카트 백작 윌리엄 캐서카트(William Cathcart, 1st Earl Cathcart)
|: 하르덴베르크 공 카를 아우구스트 폰 하르덴베르크(Prince Karl August von Hardenberg)
|: 탈레랑 페리고르 샤를 모리스(Charles Maurice de Talleyrand-Périgord)
|: 슈타켈베르크 백작 구스타프 에른스트 폰 슈타켈베르크(Count Gustav Ernst von Stackel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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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4대 강국
빈 회의는 5대 강국에 의해 주도되었다.[4]- 영국에서는 캐슬레이 자작과 웰링턴 공작이 대표로 참석하였다.[5] 캐슬레이 자작이 1815년 2월 영국으로 돌아간 후에는 웰링턴 공작이 대표했고, 웰링턴 공작이 백일천하 동안 나폴레옹에 맞서 싸우러 떠난 후에는 클랜카티 백작이 마지막 몇 주 동안 대표를 맡았다.
- 프로이센에서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국왕이 직접 참석하였으나, 하르덴베르크 공작이 사절단을 대표하고, 빌헬름 폰 훔볼트가 그를 보좌하였다.
- 오스트리아는 회의 주재국으로서 외무상인 메테르니히가 대표하였다. 메테르니히는 회의 주재자였으므로, 실질적으로 오스트리아의 입장을 대변한 것은 차석대표인 베센베르크 남작이었다. 라데츠키 등이 군사고문으로 보좌하였다.
- 러시아는 알렉산드르 1세가 직접 참석하였으며, 형식상으로는 외무상인 네셀로데 백작이 사절단을 대표하였으나, 실제로는 황제 본인이 각종 결정에 직접 참가하고 의견을 정하였다.
- 프랑스는 패전국이었으나, 외무상 탈레랑이 승전 4국의 분열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책략으로 발언력을 높여 회의 합의사항 전반에 걸쳐 의견을 개진하고 반영시켰다.[6]
5대 강국 외에도 에스파냐는 라브라도 후작, 포르투갈은 팔멜라 백작, 스웨덴-노르웨이 연합왕국은 로웬히엠 백작, 나폴리 왕국은 뮈라와 부르봉 왕가의 사절단, 교황령에서는 콘살비 추기경, 오스만 제국에서는 마브로제니 파샤, 네덜란드에서는 클렌카티 백작 등 유럽 각국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심지어 북아메리카에서 영국과 동맹하여 프랑스와 싸우고 있던 이로쿼이 부족도 대표자를 파견하였다.
3. 2. 기타 참여국
프랑스는 패전국이었으나, 외무상 탈레랑과 달베르크 공작의 노련한 외교술과 승전 4국의 분열을 이용한 책략으로 회의에서 주요 의사 결정에 참여했다.[4] 에스파냐는 라브라도 후작,[7] 포르투갈은 팔멜라 백작, 포르투 산투 백작, 오리올라 백작이 대표로 참석했다.[8][9] 스웨덴-노르웨이 연합왕국은 로웬히엠 백작, 교황령에서는 콘살비 추기경이 대표단을 이끌었다. 오스만 제국은 마브로제니 파샤를 파견하였다.
4. 회의 진행 과정 및 외교 전술
빈는 공식 회의 외에도 살롱, 연회, 무도회 등 비공식적인 사교 모임을 통해 진행되었다.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가 빈에 사절단을 파견했으며, 200개가 넘는 국가와 군주국이 의회에 참석했다.[20] 이 외에도 도시, 기업, 종교 단체 및 특수 이익 집단의 대표자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저작권법과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는 독일 출판사 대표단이 있었다. 그들과 함께 오스트리아 궁정의 화려한 사교 생활을 즐기려는 많은 신하, 비서, 공무원, 귀부인들이 왔다. 이 의회는 사치스러운 오락으로 유명했다. 참석자의 유명한 농담에 따르면, 의회는 많이 춤을 추었지만 전진하지는 않았다.[20] 각국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여 회의는 난항을 거듭했다. 나폴레옹의 엘바 섬 탈출 소식은 각국 간의 타협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는 패전국 프랑스를 대표하여 빈 회의에서 능숙한 협상가로 활약했다.[21] 초기에는 주요 4개 승전국이 프랑스를 협상에서 배제하려 했으나, 탈레랑은 스페인, 스웨덴, 포르투갈 등 소국 위원회와의 동맹을 통해 협상에 참여하는 데 성공했다.[21] 이후 탈레랑은 동맹국들을 다시 한번 버렸다.[21]
탈레랑은 주요 동맹국의 우유부단함을 이용하여 1814년 9월 30일 예비 의정서 회의에 스페인 대표 라브라도르와 함께 초청받았다.[22] 회의 서기 프리드리히 폰 겐츠는 "탈레랑과 라브라도르의 개입은 우리의 모든 계획을 망쳐놓았습니다."라고 기록할 정도로 탈레랑은 회의 절차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했다.[23]
탈레랑의 정책은 국가적 야망뿐 아니라 개인적 야망에도 영향을 받았으며, 그는 라브라도르와 가깝지만 우호적이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다.[24] 탈레랑은 조제프 보나파르트에게 충성을 맹세한 12,000명의 아프랑세자도와 스페인에서 약탈한 문서, 그림, 미술품 등을 넘기지 않으려 했다.[26]
폴란드-작센 문제에서 러시아는 폴란드 대부분을, 프로이센은 작센 전체를 원했고, 러시아 황제는 폴란드의 왕이 되기를 원했다.[27] 오스트리아와 영국은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우려하여 반대했다. 탈레랑은 이러한 강대국 간의 갈등 상황에서 프랑스를 중재자로 내세워 오스트리아와 영국을 지지하는 전략을 택했다. 프랑스, 오스트리아, 영국은 1815년 1월 3일 비엔나 비밀 조약을 체결하여 러시아와 프로이센에 대항하기로 합의했다.[28] 이러한 분열을 통해 프랑스의 발언권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결국 러시아는 바르샤바 공국 대부분을 폴란드 의회 왕국으로 얻었고, 프로이센은 작센의 60%를, 나머지는 작센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가 작센 왕국으로 돌려받았다. 또한, 정통주의 원칙을 내세워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복위를 정당화했다.
4. 1. "회의는 춤추지만 나아가지 않는다"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가 빈에 사절단을 파견했으며, 200개가 넘는 국가와 군주국이 의회에 참석했다.[20] 이 외에도 도시, 기업, 종교 단체 및 특수 이익 집단의 대표자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저작권법과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는 독일 출판사 대표단이 있었다. 그들과 함께 오스트리아 궁정의 화려한 사교 생활을 즐기려는 많은 신하, 비서, 공무원, 귀부인들이 왔다. 이 의회는 사치스러운 오락으로 유명했다. 참석자의 유명한 농담에 따르면, 의회는 많이 춤을 추었지만 전진하지는 않았다.[20] 각국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여 회의는 난항을 거듭했다. 나폴레옹의 엘바 섬 탈출 소식은 각국 간의 타협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4. 2. [[탈레랑]]의 외교 전략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는 패전국 프랑스를 대표하여 빈 회의에서 능숙한 협상가로 활약했다.[21] 초기에는 주요 4개 승전국이 프랑스를 협상에서 배제하려 했으나, 탈레랑은 스페인, 스웨덴, 포르투갈 등 소국 위원회와의 동맹을 통해 협상에 참여하는 데 성공했다.[21] 이후 탈레랑은 동맹국들을 다시 한번 버렸다.[21]탈레랑은 주요 동맹국의 우유부단함을 이용하여 1814년 9월 30일 예비 의정서 회의에 스페인 대표 라브라도르와 함께 초청받았다.[22] 회의 서기 프리드리히 폰 겐츠는 "탈레랑과 라브라도르의 개입은 우리의 모든 계획을 망쳐놓았습니다."라고 기록할 정도로 탈레랑은 회의 절차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했다.[23]
탈레랑의 정책은 국가적 야망뿐 아니라 개인적 야망에도 영향을 받았으며, 그는 라브라도르와 가깝지만 우호적이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다.[24] 탈레랑은 조제프 보나파르트에게 충성을 맹세한 12,000명의 아프랑세자도와 스페인에서 약탈한 문서, 그림, 미술품 등을 넘기지 않으려 했다.[26]
폴란드-작센 문제에서 러시아는 폴란드 대부분을, 프로이센은 작센 전체를 원했고, 러시아 황제는 폴란드의 왕이 되기를 원했다.[27] 오스트리아와 영국은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우려하여 반대했다. 탈레랑은 이러한 강대국 간의 갈등 상황에서 프랑스를 중재자로 내세워 오스트리아와 영국을 지지하는 전략을 택했다. 프랑스, 오스트리아, 영국은 1815년 1월 3일 비엔나 비밀 조약을 체결하여 러시아와 프로이센에 대항하기로 합의했다.[28] 이러한 분열을 통해 프랑스의 발언권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결국 러시아는 바르샤바 공국 대부분을 폴란드 의회 왕국으로 얻었고, 프로이센은 작센의 60%를, 나머지는 작센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가 작센 왕국으로 돌려받았다. 또한, 정통주의 원칙을 내세워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복위를 정당화했다.
4. 3. [[메테르니히]]의 주도적 역할
4. 4. 폴란드-작센 문제
5. 빈 회의의 결과 및 합의 사항
러시아 제국은 바르샤바 대공국 대부분을 차지하여 폴란드 입헌왕국을 수립하고, 핀란드와 베사라비아의 영유권을 인정받았다.[29] 프로이센 왕국은 작센 왕국 영토의 58%를 획득하고, 포젠 공국, 단치히, 라인란트, 베스트팔렌을 차지했다.[29] 오스트리아 제국은 독일 연방의 의장국이 되었으며,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를 획득했다.[29]
네덜란드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 리에주 주교령을 흡수하여 네덜란드 연합왕국을 구성하고, 룩셈부르크와 동군연합을 이루었다.[30] 스웨덴은 포메라니아를 프로이센 왕국에 양여했다.[31] 스위스는 중립국 지위를 보장받았다. 영국은 몰타섬, 이오니아 제도, 케이프 식민지, 스리랑카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사르데냐 왕국은 피에몬테, 니스, 사부아를 회복하고, 제노바 공화국을 합병했다.
노예무역 금지가 선언되었으며, 이는 영국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라인강의 자유 항행이 보장되었다.
5. 1. 빈 최종 의정서의 주요 내용
러시아 제국은 바르샤바 대공국 대부분을 차지하여 폴란드 입헌왕국을 수립하고, 핀란드와 베사라비아의 영유권을 인정받았다.[29] 프로이센 왕국은 작센 왕국 영토의 58%를 획득하고, 포젠 공국, 단치히, 라인란트, 베스트팔렌을 차지했다.[29] 오스트리아 제국은 독일 연방의 의장국이 되었으며,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를 획득했다.[29]네덜란드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 리에주 주교령을 흡수하여 네덜란드 연합왕국을 구성하고, 룩셈부르크와 동군연합을 이루었다.[30] 스웨덴은 포메라니아를 프로이센 왕국에 양여했다.[31] 스위스는 중립국 지위를 보장받았다.[31] 영국은 몰타섬, 이오니아 제도, 케이프 식민지, 스리랑카 영유권을 인정받았다.[36] 사르데냐 왕국은 피에몬테, 니스, 사부아를 회복하고, 제노바 공화국을 합병했다.
노예무역 금지가 선언되었으며, 이는 영국의 주도로 이루어졌다.[34][35] 라인강의 자유 항행이 보장되었다.
6. 빈 체제
6. 1. 빈 체제의 특징
빈 회의에서 강대국들은 세력균형과 정통주의를 기본 원칙으로 삼았다.[44] 정통주의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혼란스러워진 유럽에서, 혁명 이전의 통치자를 복위시켜 구체제를 부활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념이다.[44] 이 이념은 프랑스 대표 탈레랑이 주장했고, 여러 민족을 거느린 오스트리아 제국의 외상 메테르니히가 지지했다.[44]그러나 빈 회의에서는 프랑스 혁명 이전 체제의 완전한 부활이 아니라, 강대국에 의한 세력균형을 고려한 형태로 정통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예를 들어, 혁명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고 나폴레옹이 정리·통합했던 독일 여러 나라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독일 연방으로 재출발하게 되었다.
이로써 세력균형을 유지하고 회복할 힘을 가진 강대국들이 서로 균형을 유지하는 국제 질서(빈 체제)가 구축되었고, 유럽에는 약 30년간의 평화가 찾아왔다. 빈 체제는 보수주의를 기반으로 자유주의, 민족주의 운동을 억압하였다.
6. 2. 빈 체제의 영향
7. 빈 회의와 빈 체제에 대한 평가
빈 회의는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운동을 억압하고, 반동을 강요했다는 비판을 받았다.[37] 이는 이른바 보수적 질서의 일환으로, 미국과 프랑스 혁명과 관련된 민주주의와 시민권을 덜 중요하게 여긴 결과였다.[37]
그러나 20세기 역사가들과 정치인들은 빈 회의가 거의 100년(1815~1914년) 동안 유럽 전역의 전쟁을 막고, 외교적 대화를 통해 평화를 유지하는 새로운 국제 질서로의 이행에 중요한 단계였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헨리 키신저는 1954년 빈 회의에 관한 박사 학위 논문 ''세계의 회복(A World Restored)''을 썼다. 역사가이자 법률가인 마크 재럿은 외교 회의 형식이 "우리 현대 시대의 진정한 시작"을 알렸다고 주장하며, 회의 조직은 의도적인 갈등 관리였으며, 갈등이 아닌 합의를 기반으로 국제 질서를 창출하려는 최초의 진정한 시도였다고 평가했다. 재럿은 "프랑스 혁명에 대한 대응으로 유럽은 전례 없는 수준의 국제 협력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말한다.[38] 역사가 폴 슈뢰더는 "힘의 균형"에 대한 기존 공식이 실제로는 매우 불안정하고 약탈적이었다고 주장하며, 빈 회의가 이를 피하고 대신 안정적이고 유익한 균형을 만들어내는 규칙을 설정했다고 평가했다. 빈 회의는 유럽 연주곡으로 알려지게 된 일련의 국제 회의 중 첫 번째였으며, 1919년 국제 연맹과 1945년 유엔과 같은 후대 조직의 모델이 되었다.
1918년 파리 강화 회의 개막 전에 영국 외무부는 성공적인 평화 달성을 위한 사례로 삼기 위해 빈 회의의 역사를 의뢰했다.[39] 그러나 회의의 주요 결정은 4대 강국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모든 유럽 국가가 회의에서 권리를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탈리아 반도는 롬바르디아-베네치아, 모데나, 나폴리-시칠리아, 파르마, 피에몬테-사르데냐, 토스카나, 교황령 등 7개 부분으로 나뉘어 단순한 "지리적 표현"이 되었다.[40] 폴란드는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사이에 분할된 채 남았고, 가장 큰 부분인 새로 만들어진 폴란드 왕국은 러시아의 통제하에 남았다.
4대 강국이 한 합의는 미래의 분쟁이 지난 20년간의 끔찍한 전쟁을 피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해결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41] 비록 빈 회의가 유럽의 힘의 균형을 유지했지만, 약 30년 후 대륙 전역의 혁명적 운동의 확산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일부 저자들은 빈 회의가 소련 해체 후 발생한 동유럽의 여러 상호 연관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모델을 제공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42][43]
7. 1. 긍정적 평가
빈 회의는 민족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움직임을 무시하고 대륙에 억압적인 반동을 강요했다는 비판을 받았다.[37] 미국과 프랑스 혁명과 관련된 민주주의와 시민권은 덜 중요하게 여겨졌다.[37]그러나 20세기에 과거를 되돌아보는 역사가들과 정치인들은 빈 회의를 칭찬하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거의 100년(1815~1914년) 동안 유럽 전역의 또 다른 전쟁을 막았고, 외교적 대화를 통해 평화가 대체로 유지되는 새로운 국제 질서로의 이행에 있어 중요한 단계였기 때문이다. 헨리 키신저는 1954년 빈 회의에 관한 박사 학위 논문 ''세계의 회복(A World Restored)''을 썼다. 역사가이자 법률가인 마크 재럿은 외교 회의 형식이 "우리 현대 시대의 진정한 시작"을 알렸다고 주장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회의 조직은 의도적인 갈등 관리였으며, 갈등이 아닌 합의를 기반으로 국제 질서를 창출하려는 최초의 진정한 시도였다. 재럿은 "프랑스 혁명에 대한 대응으로 유럽은 전례 없는 수준의 국제 협력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말한다.[38] 역사가 폴 슈뢰더는 "힘의 균형"에 대한 기존 공식이 실제로는 매우 불안정하고 약탈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빈 회의가 이를 피하고 대신 안정적이고 유익한 균형을 만들어내는 규칙을 설정했다고 말한다. 빈 회의는 유럽의 평화로운 힘의 균형을 구축하려는 시도였던 유럽 연주곡으로 알려지게 된 일련의 국제 회의 중 첫 번째였다. 이는 1919년 국제 연맹과 1945년 유엔과 같은 후대 조직의 모델이 되었다.
1918년 파리 강화 회의 개막 전에 영국 외무부는 자체 대표단이 마찬가지로 성공적인 평화를 달성하는 방법의 사례로 삼기 위해 빈 회의의 역사를 의뢰했다.[39] 회의의 주요 결정은 4대 강국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모든 유럽 국가가 회의에서 권리를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탈리아 반도는 롬바르디아-베네치아, 모데나, 나폴리-시칠리아, 파르마, 피에몬테-사르데냐, 토스카나, 그리고 교황령 등 7개 부분으로 나뉘어 단순한 "지리적 표현"이 되었다.[40] 폴란드는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사이에 분할된 채 남았고, 가장 큰 부분인 새로 만들어진 폴란드 왕국은 러시아의 통제하에 남았다.
4대 강국이 한 합의는 미래의 분쟁이 지난 20년간의 끔찍한 전쟁을 피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해결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41] 비록 빈 회의가 유럽의 힘의 균형을 유지했지만, 약 30년 후 대륙 전역의 혁명적 운동의 확산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일부 저자들은 빈 회의가 소련 해체 후 발생한 동유럽의 여러 상호 연관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모델을 제공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42][43]
7. 2. 부정적 평가
빈 회의는 민족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움직임을 무시하고 대륙에 억압적인 반동을 강요했다는 비판을 받았다.[37] 이는 미국과 프랑스 혁명과 관련된 민주주의와 시민권보다 보수적 질서를 중시한 결과였다.[37]이탈리아 반도는 롬바르디아-베네치아, 모데나, 나폴리-시칠리아, 파르마, 피에몬테-사르데냐, 토스카나, 교황령 등 7개 부분으로 나뉘어 "지리적 표현"이 되었다.[40] 폴란드는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사이에 분할되었고, 가장 큰 부분인 폴란드 왕국은 러시아의 통제하에 남았다. 4대 강국은 미래의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합의했지만,[41] 빈 회의는 약 30년 후 대륙 전역의 혁명적 운동의 확산을 막지 못했다.
8. 결론
9. 관련 자료
데이비드 킹(David King)은 2008년 저서 《비엔나, 1814: 나폴레옹 정복자들이 비엔나 회의에서 사랑, 전쟁, 평화를 만들어낸 방법》에서 빈 회의를 다루었다. 헨리 키신저는 1957년 저서 《복원된 세계; 메테르니히, 캐슬리, 그리고 평화의 문제들, 1812–22》에서 빈 회의를 다루었다. 폴 W. 슈뢰더(Paul W. Schroeder)는 1992년 논문 〈비엔나 협정은 세력 균형에 기초했는가?〉에서 빈 회의를 다루었다. 찰스 웹스터(Charles Webster)는 1913년 논문 〈비엔나 회의에서 영국과 폴란드-작센 문제〉를 발표하였다. 아담 자모이스키(Adam Zamoyski)는 2007년 저서 《평화의 의식; 나폴레옹의 몰락과 비엔나 회의》에서 빈 회의를 다루었다. 1921년 《영국 외교, 1813–1815: 유럽 재건을 다루는 문서 선집》이 출판되었다. 힐데 스필(Hilde Spiel)은 1968년 《비엔나 회의; 목격자 기록》을 출판하였다. 1968년 맥 워커(Mack Walker)가 편집한 《메테르니히의 유럽》이 출판되었다. 웰링턴 공작은 1862년 《웰링턴 공작의 보충 서한 및 각서》에서 섭정왕, 알렉산더 황제, 루이 18세, 나폴리 왕 무라트, 리버풀 백작, 캐슬리어 백작, 배서스트 백작 및 기타 저명한 인물들의 서신 일부를 제시하여, 웰링턴 공작이 빈 회의에서 영국 전권 대표로 참여한 외교 및 공공 거래를 해명하였다. 1911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11판은 〈비엔나 회의〉 항목에서 빈 회의를 다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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