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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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단업은 4세기 말 오호십육국 시대에 북량을 건국한 인물이다. 후량의 장수였던 그는 397년 저거남성의 추대로 북량을 건국했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저거몽손에게 있었다. 저거몽손과 갈등을 겪던 단업은 결국 저거몽손의 모함으로 처형당하며 북량은 저거몽손의 통치 하에 놓이게 된다. 단업은 유학자였으나 권모술수와 위엄이 부족했고, 미신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어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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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업 | |
---|---|
기본 정보 | |
칭호 | 양왕 (涼王) |
재위 기간 | 397년–401년 |
이전 | 없음 |
이후 | 저거몽손 |
연호 | 신새 (神璽): 397년–399년 천새 (天璽): 399년–401년 |
성 | 단 (段) |
이름 | 업 (業) |
관직 | |
397–399 | 대도독, 용양대장군, 양주목, 건강공 (大都督 龍驤大將軍 涼州牧 建康公) |
399 이후 | 양왕 (涼王) |
생몰 | |
사망 년도 | 401년 |
2. 생애
단업은 경조군 출신의 한인으로, 후량의 의무제 여광 휘하에서 건강군(현재의 감숙성 고대현) 태수를 역임했다. 397년, 흉노 족장인 저거몽손에게 추대되어 후량에 반란을 일으켜 량주목·건강공을 자칭하며 북량을 건국했다. 400년에는 하서 서부의 대부분을 지배하여 량왕을 자칭했다.
그러나 북량의 군권과 정치는 단업을 옹립한 저거몽손에게 장악되어 있었다. 단업은 그를 모살하려 했으나, 오히려 저거몽손의 반격에 의해 401년에 살해되어 왕위를 빼앗겼다.
이후 북량은 저거몽손 휘하에서 더욱 번영했기 때문에, 북량의 사실상의 건국자는 저거몽손으로 기록되는 사료가 많고, 단업의 혈통은 일대만에 멸망했다.
2. 1. 초기 생애와 후량 건국
단업은 경조(京兆 : 현재의 장안) 출신의 한족으로, 후량의 건국자 여광의 부하 두진(杜進)의 부하였다. 여광이 전진 부견(苻堅)의 명을 받아 서역 정벌에 나설 때 두진을 따라 종군하였다. 여광이 후량을 건국한 뒤 건강(建康 : 간쑤성 주취안시)태수로 임명되었다.388년, 당시 후량의 통치자였던 여광은 주천공(酒泉公)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연회에서 여광과 그의 관리들은 그의 통치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이때 단업은 여광에게 법률을 지나치게 가혹하게 적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광은 법가의 오기와 상앙을 예로 들며 자신의 가혹한 적용을 옹호했고, 단업은 물러서지 않고 오기와 상앙이 모두 법의 사용으로 인해 죽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여광의 행동이 백성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여광은 진지하게 사과했다. 396년, 여광이 산하왕(三河王)이라는 더 큰 칭호를 주장했을 때, 단업을 그의 대신 중 한 명으로 임명했다.
2. 2. 북량 건국
397년, 후량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혼란에 빠졌는데, 건강(建康 : 간쑤성 주취안 시)에서는 저거몽손의 친척 저거남성(沮渠男成)이 반란을 일으켜 건강을 포위하였다. 저거남성은 농성 중인 단업을 추대하여 수장으로 삼고 건강 및 주천 일대를 장악하고자 하였다. 단업은 처음에는 거부하였으나, 구원군이 오지 않자 결국 성문을 열고 저거남성을 받아들여 대도독·용양대장군·양주목·건강공(大都督、龍驤大將軍、涼州牧、建康公)에 추대되었다. 일반적으로 이때부터 북량이 건국된 것으로 본다.2. 3. 북량 통치와 저거몽손과의 갈등
397년, 저거남성이 반란을 일으켜 감숙성 건강을 포위하였다. 저거남성은 농성 중인 단업을 추대하여 수장으로 삼고 건강 및 주천(酒泉) 일대를 장악하고자 하였다. 단업은 이를 거부하며 20일 가까이 농성하였으나 구원군이 오지 않자 결국 성문을 열고 저거남성을 받아들여 대도독·용양대장군·양주목·건강공(大都督、龍驤大將軍、涼州牧、建康公)에 추대되었다. 일반적으로 이때부터 북량이 건국된 것으로 본다.단업은 저거남성 및 저거남성의 친척 저거몽손 등에 의해 추대되어 실질적인 권력은 가지지 못하였다. 저거남성이 보국장군(輔國將軍), 저거몽손이 진서장군(鎭西將軍)에 임명되어 국가의 모든 실권을 장악하였다.
저거몽손 등은 단업의 지휘 아래 서방을 공략하여 서역 대부분을 영향권에 넣었으며, 후량의 장액(張掖)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단업은 장액 점령 직후 독자적으로 군사를 움직이다가 크게 패배하기도 하였다.
399년, 단업은 양왕(涼王)을 자칭하였고 후량과 지속적으로 대립하였다. 그러나 400년에 돈황(敦煌)에서 이고가 반란을 일으켜 서역 대부분을 상실하여 북량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단업은 저거몽손의 힘을 두려워하여 그를 견제하려 하였다. 그는 저거몽손 대신 자신의 부하 마권(馬權)을 장액태수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저거몽손의 힘에 밀려 마권을 처형해야만 했다.
이로 인해 불만을 품은 저거몽손은 401년, 저거남성을 추대하여 모반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저거남성이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저거몽손은 단업에게 저거남성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모함하였으며, 단업은 저거남성을 처형하였다.
2. 4. 최후
401년, 저거몽손은 단업이 저거남성을 처형한 것을 빌미로 군중을 선동하여 단업을 공격하였다. 단업은 패배하여 사로잡혔고, 목숨을 애걸하였으나 저거몽손에게 살해당했다.3. 평가
司馬光|사마광중국어은 단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러한 평가는 단업이 권모술수와 위엄이 부족하여 부하들을 통제하지 못하고, 미신에 의존하여 결국 패배하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단업의 혈통은 그가 죽은 후 곧 단절되었으며, 북량의 실질적인 건국자는 저거몽손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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