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광 (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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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광은 오호 십육국 시대 후량의 초대 황제이다. 전진의 장수로 활동하며 여러 반란을 진압하고 서역을 정벌하는 등 공을 세웠다. 386년 부견 사후 독립하여 후량을 건국하고, 396년 천왕에 즉위하여 국호를 대량으로 정했다. 말년에는 반란과 주변 국가의 침략으로 혼란을 겪었고, 399년 아들 여소에게 양위한 후 사망했다. 사후 후량은 멸망했으며, 여광은 의무황제로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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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량 (오호 십육국)의 황제 - 여륭
여륭은 오호십육국 시대 후량의 마지막 군주로, 401년에 옹립되어 천왕이 되었지만, 실권을 잃고 주변 국가의 공격을 받다가 403년 후진에 항복하여 후량을 멸망시켰으며, 이후 반란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여광 (후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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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여광 |
자 | 세명(世明) |
칭호 | 천왕 |
시호 | 의무황제(懿武皇帝) |
묘호 | 태조(太祖) |
생년 | 338년 |
몰년 | 399년 |
아버지 | 여파루 |
능묘 | 고릉(高陵) |
통치 정보 | |
정치 체제 | 천왕 |
재위 기간 | 386년 - 399년 |
연호 | 태안(太安): 386년–389년 린자(麟嘉): 389년–396년 룽페이(龍飛): 396년–400년 청캉(承康): 399년 |
봉작 및 관직 | |
386년–389년 | 절을 받들도록 명령받음 시중(侍中) 중외대도독(中外大都督) 농우(隴右)와 하서(河西)의 모든 군사를 감독하는 도독 대장군(大將軍) 량주(涼州) 목사(牧) 주취안(酒泉) 공작(公) |
389년–396년 | 산허(三河) 왕(王) |
396년 이후 | 대량(大涼) 천왕(天王) |
2. 즉위 이전
여광은 저족(氐族) 약양(略陽) 출신으로, 아버지는 전진의 중신 여파루(呂婆樓)였다. 여광은 전진의 장수로 각지에서 활약하였고, 383년에는 사지절·도독서역정토제군사(使持節、都督西域征討諸軍事)로 임명되어 서역 원정에 나섰다. 12월에 서역에 도착한 여광은 쿠처(龜玆)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서역 일대를 평정하였다. 서역에는 중원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불승 구마라습(鳩摩羅什)이 있었는데, 여광은 구마라습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받아 그를 모시기도 하였다.
당시 전진의 부견(苻堅)은 비수대전에서 패배하여 몰락하고 있었으나, 혼란으로 인해 교통이 마비되어 여광은 서역 평정 이후 추가적인 명령을 받지 못하였다. 여광은 서역에 정착하려 하였으나, 구마라습이 중원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여 385년 귀향길에 올랐다. 고창(高昌)에 도착한 여광은 양주자사(凉州刺史) 양희를 공격하여 무너뜨리고 양주를 장악하였다. 386년 초, 전량(前凉) 왕실의 후예인 장대예(張大豫)가 반란을 일으켜 하서회랑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 반란에는 독발부(禿髮部), 흉노(匈奴) 등이 개입하여 2년 여를 끌었으며, 여광은 서역과 교통이 단절되어 큰 곤란을 겪었다.
여광은 저족 출신이었지만, 재앙으로 인해 패현 (현재의 쉬저우, 장쑤)에서 도망쳐 저족에 정착한 한족 출신 여문화()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337년에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 여파루는 저족 추장이며 후조 장군이었던 보홍 (蒲洪, 이후 포(蒲)씨에서 부(苻)씨로 성씨를 변경함)의 추종자였다.
2. 1. 전진의 장수
여광은 저족(氐族) 약양(略陽) 출신으로, 아버지는 전진의 중신 여파루이다. 여파루는 전진 건국 이래 중신으로, 부견 시대에는 태위까지 올랐다. 여광은 학문보다 사냥과 승마에 집중하여 아버지의 동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부견의 재상 왕맹은 그를 높이 평가하여 장군으로 임명하도록 설득했다.여광은 전진의 장수로서 다음과 같은 공적을 세웠다.
시기 | 사건 | 내용 |
---|---|---|
358년 2월 | 장평 토벌 | 병주 일대를 영유하던 장평 토벌에 종군. 양자인 장호를 생포하여 명성을 떨치고 녕삭장군에 임명됨. |
367년 | 부쌍·부무 등의 반란 진압 | 부견의 사촌인 위공 부수, 진공 부류, 연공 부무, 조공 부쌍의 반란 진압. 왕감, 곽장, 적늑 등과 함께 부쌍과 부무를 토벌, 상규를 함락하고 부쌍과 부무를 사로잡음. |
371년 5월 | 전연 정벌 | 왕맹 휘하에서 전연 정벌에 참여, 호관, 진양 함락 및 수도 업 함락에 공헌하여 도정후에 봉해짐.[1] |
378년 9월 | 부중 체포 | 뤄양에서 반란을 일으킨 북해공 부중을 체포하여 장안으로 압송. |
379년 3월 | 이오 격파 | 촉(蜀)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오를 격파하고 난을 평정, 파로장군(巴虜將軍) 및 보병교위(步兵校尉)에 임명됨. |
380년 | 부중·부락의 반란 진압 | 용성에서 반란을 일으킨 행당공 부락과 계에서 호응한 부중을 격파. 중산에서 부락을 격파하고 유주까지 추격하여 부중을 죽임. 효기장군에 임명됨. |
383년 | 서역 원정 | 사지절·도독서역정토제군사(使持節、都督西域征討諸軍事)로 임명되어 서역 원정에 나섬. 쿠처(龜玆)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서역 일대를 평정. 불승 구마라습(鳩摩羅什)을 확보. |
2. 1. 1. 장호 생포
358년 2월, 부견이 병주 일대를 영유하고 있던 장평을 토벌하기 위해 나서자, 여광 또한 이를 따라 종군했다. 3월, 전진군은 동벽(분수 근처의 퉁촨을 따라 축조된 요새)까지 진군했고, 장평은 양자인 장호에게 이를 막도록 했다. 장호는 출격하여 큰 소리를 지르며 4~5차례에 걸쳐 전진의 병진으로 돌격하여 크게 휩쓸었다. 이를 본 부견은 그의 무용에 반하여 여러 장수들에게 그를 생포하라고 명하고 성공한 자에게는 포상을 약속했다. 여광은 직접 출격하여 장호에게 덤벼들어 상처를 입히고, 생포하는 데 성공했다. 장호가 사로잡히자 장평군은 붕괴되었고, 장평 또한 더 이상 싸울 의지를 잃고 부견에게 항복했다.이 공로로 여광의 위명은 크게 떨쳤으며, 이후 녕삭장군에 임명되었다.
2. 1. 2. 부쌍·부무 등의 반란 진압
367년, 부견의 사촌인 위공 부수, 진공 부류, 연공 부무, 조공 부쌍이 반란을 일으켰다. 여광은 부쌍과 부무를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368년 1월, 부견은 양성세와 모숭을 상규와 안정으로 보냈으나, 3월에 양성세는 부쌍 휘하의 구흥에게, 모숭은 부무에게 패했다.
같은 달, 여광은 왕감, 곽장, 적늑 등과 함께 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부쌍과 부무를 토벌하러 나섰다. 부아와 두충은 7천 명의 우림 기병을 이끌고 뒤따랐다. 4월, 부쌍과 부무는 구흥을 선봉으로 삼아 隃麋(유미, 현재의 산시성바오지시첸양현)까지 진출했다. 왕감은 속전속결을 원했지만, 여광은 지구전을 펼쳤다. 20여 일 후 구흥군이 후퇴하자, 여광은 추격하여 격파하고 부쌍과 부무의 본대도 대파하여 1만 5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부무는 안정을 버리고 부쌍과 함께 상규로 퇴각했고, 여광은 다시 상규로 진격했다.[1]
7월, 여광은 상규를 함락하고 부쌍과 부무를 사로잡았다. 9월, 왕맹과 등강이 이끄는 별동대가 蒲坂(포판)을 공략하여 부류를 사로잡았다. 여광은 양안, 장호, 등강과 합류하여 부수가 지키는 陝城(섬성)을 공격했다. 12월, 섬성을 함락하고 부수를 사로잡아 장안으로 보냈다.[1]
2. 1. 3. 전연 정벌
371년 5월, 부견은 전연 정벌을 대대적으로 감행했고, 보국장군 왕맹이 총대장이 되어 6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출격했으며, 여광 또한 이에 종군했다.[1] 전진 군은 요지인 호관, 진양을 순식간에 함락시켰고, 전연의 총대장 모용평이 이끄는 30만 군대도 노천에서 격파했으며, 11월에는 수도 업을 함락시켰다.[1]여광은 이 공적으로 도정후에 봉해졌다.[1]
2. 1. 4. 부중 체포
378년 9월, 부견의 사촌인 북해공 부중이 뤄양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부견은 여광이 충성심이 강하고 정직하여 부중에게 동조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여광에게 부중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여광은 부견의 명에 따라 부중을 체포하여 감옥 수레에 실어 장안으로 압송했다. 부견은 부중을 처벌하지 않고 작위도 그대로 둔 채 저택에 연금하는 데 그쳤다.2. 1. 5. 이오 격파
379년 3월, 촉(蜀)에서 이오가 2만 명의 무리를 모아 전진에 반기를 들고 성도를 포위했다.부견의 명에 따라 여광은 파로장군(巴虜將軍)에 임명되어 이오 토벌을 명받았다. 여광은 익주로 진격하여 이오 등을 격파하고 난을 평정했다.
이후 보병교위(步兵校尉)로 임명되었다.
2. 1. 6. 부중·부락의 반란 진압
380년 1월, 부견은 부중의 근신을 풀고 진북대장군에 임명하여 계를 지키게 했다. 3월, 용성을 지키고 있던 행당공 부락(부중의 동생)은 대도독, 대장군, 진왕을 자칭하며 전진에 반기를 들었다. 4월, 부락은 7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용성을 출발했고, 부중 또한 계성의 전군 10만 명을 이끌고 부락에 호응하여 중산에 주둔했다.부락 등의 반란을 들은 부견은 여러 신하들을 소집하여 대응책을 논의했다. 여광은 "행당공은 가까운 친족인데 반역을 저질렀습니다. 이는 천하가 미워하는 바입니다. 바라건대 신에게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주시면, 이를 평정해 보이겠습니다"라고 진언했다. 부견은 "중·락 형제는 동북의 한 구석에 의지하고 있으며, 병력과 물자를 모두 갖추고 있어 가볍게 상대할 수 없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여광은 "그들의 무리는 흉악한 위세에 억눌려 억지로 따르는 것뿐이며, 일시적으로 개미가 모이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만약 대군을 이끌고 공격하면, 반드시 그 기세는 와해될 것입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부견의 명에 따라, 여광은 좌장군 두충과 함께 4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토벌에 나섰다. 5월, 여광 등은 중산에서 부락이 이끄는 주력군과 교전하여 크게 격파하고, 부락과 장군 란수를 포박하여 장안으로 보냈다. 부중은 계성까지 도주를 시도했지만, 여광은 이를 유주까지 추격하여 부중을 쳐 죽였다. 둔기교위 석월 또한 동래에서 별동대를 이끌고 용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로 인해 유주는 평정되었다.
이러한 공적으로 인해, 여광은 효기장군에 임명되었다.
2. 2. 서역 정벌
382년, 전진의 부견은 서역 국가들인 산산의 왕 휴밀타와 전거사의 왕 미전의 요청에 따라, 여광에게 10만 명의 보병과 5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서역으로 가도록 명령했다. 이는 한나라 때처럼 서역에 도호부를 설치하려는 의도였다. 383년 여광은 서역 원정을 시작하여 언기와 구자 등을 정복하고 서역을 평정했다. 385년, 구마라습의 권유로 동쪽으로 귀환하기 시작했다.2. 2. 1. 장안 출발
383년 1월, 여광이 장안을 출발하자 부견은 건장궁(建章宮)까지 전송하며 서역 정벌에 대해 훈계했다. 부견은 "서융(西戎)은 거친 풍속을 지니고 있어 예의의 나라가 아니오. 기미(羈縻)의 도는 복종하면 용서하는 데에 있소. 이를 통해 중국의 위엄을 보이고, 왕화(王化)의 법에 따라 이끄는 데에 연결되는 것이오. 무력을 휘두르거나 지나친 약탈을 해서는 안 되오"라고 말했다. 선선왕 휴밀타와 차사전부왕 미전은 각각 사지절, 산기상시, 도독 서역 제군사, 녕서장군(寧西將軍)과 사지절, 평서장군, 서역도호(西域都護)에 임명되어 그 나라의 병사를 이끌고 여광의 행군 안내역을 맡았다.2. 2. 2. 서역 평정
383년 12월, 여광은 쿠처(龜玆)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서역 일대를 평정하였다. 384년에는 구자성(龜玆城)을 공격, 구자왕 백순은 저항하였으나, 결국 패배하고 도주하였다. 이후 서역의 여러 나라들이 전진에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여광은 백순의 동생 백진(帛震|백진중국어)을 새로운 구자 왕으로 임명했다.2. 2. 3. 귀환 결정
385년, 구마라습은 구자가 불행을 가져올 땅이며, 동쪽으로 가면 고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고, 여광은 그의 권유를 받아들여 동쪽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여광은 서역에서 얻은 재물들을 가지고 귀환길에 올랐다.3. 양주 점령
383년 서역 원정을 떠난 여광은 385년에 귀향길에 올라, 도중에 고창에서 양주자사 양희를 공격하여 무너뜨리고 양주를 장악했다. 386년 초 전량 왕실의 후예인 장대예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387년에 진압되었다.[2]
3. 1. 양희 격파
385년 고창에 도착한 여광은 양주자사 양희를 공격하여 무너뜨리고 고장에 입성했다. 양희는 처형되었고, 여광은 양주자사, 호강교위(護羌校尉)를 자칭했다.3. 2. 장대예의 난
장대예는 전량 왕실의 후예로, 386년 초 반란을 일으켜 하서회랑 일대를 장악했다.[2] 이 반란에는 독발부, 흉노 등이 개입하여 2년 여를 끌었으며, 여광은 서역과의 교통이 단절되어 큰 어려움을 겪었다.[2] 387년 가을, 여광은 장천석의 아들 장대예를 체포하여 처형함으로써 이 반란을 진압했다.4. 치세
386년 10월, 부견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여광은 태안으로 연호를 고치고 주천공(酒泉公)을 자칭하며 독립 정권을 세웠다.[1] 387년 말에는 장대예의 반란을 진압했다.[1] 389년에는 삼하왕(三河王)을 자칭했고,[1] 396년에는 국호를 대량(大凉)으로 정하고 천왕(天王)에 즉위하였다.[1]
여광은 양주 일대의 여러 세력들을 복속시키고 양주를 평정하였으며, 걸복부의 서진을 지속적으로 공격하여 397년에는 금성(金城 : 간쑤 성 란저우)을 점령하기도 했다.[2] 그러나 독발오고가 거병하고, 단업, 저거몽손 등이 반란을 일으켜 후량은 분열되기 시작하였다.[2] 여광은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여찬을 파견하였으나, 수도 고장(姑臧)에서 곽논이 반란을 일으켜 여찬을 다시 불러들였다.[2] 수도에서 일어난 반란은 서평(西平)에서 양궤의 반란으로 이어졌고, 독발오고가 원군을 보내는 등 1년 여를 끌었다.[2] 398년 6월 경, 곽논 등을 격파하여 수도는 안정되었으나 지방의 반란은 진압하지 못했다.[2]
399년 병으로 쇠약해진 여광은 태자 여소에게 양위하고 태상황제를 자칭했으며 곧이어 병사하였다.[2]
4. 1. 후량 건국
386년 10월, 여광은 부견의 사망 소식을 듣고 태안으로 개원하고 주천공(酒泉公)을 자칭하며 독립 정권을 세웠다.[1] 이는 후량 건국의 시작이었다. 389년에는 삼하왕(三河王)을 자칭하였다.[1] 387년 말에는 장대예의 반란을 진압하였다.[1]여광은 자신의 영지를 효과적으로 통치하지 못했고, 그의 통치에 대한 반란이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그는 엄격한 법률을 제정하여 대응했지만, 관료 단예는 388년에 이러한 엄격한 법률에 반대했다. 여광은 단예에게 동의했지만, 실제로 백성들의 상황을 더 쉽게 만들지는 못했다.
4. 2. 왕위 즉위
386년 10월, 여광은 부견의 사망 소식을 듣고 시호를 올렸다. 그는 부견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태안으로 개원하고 주천공(酒泉公)을 자칭하며 독립 정권을 세웠다.[1] 387년 말, 장대예의 반란을 진압했다.[1]389년 2월, 여광은 삼하왕(三河王)을 자칭하고, 영내에 대사령을 내렸으며, 린가로 개원하고, 승랑 이하 백관을 설치했다. 이때, 그의 아내 부인 석씨와 아들 여소, 형제 여덕세가 주지에서 수년간 머문 후 고장에 도착하여, 성 동쪽에서 맞이하고, 이를 축하하며 군신과 연회를 열었다.
석씨를 왕비로 삼고, 여소를 세자로 세웠으며, 다시 내원 신당에서 연회를 열었다. 태묘가 새로 완성되자, 고조부를 경공, 증조부를 공공, 조부를 선공, 아버지 여파루를 경소왕으로, 어머니를 소열비로 추존했다.
중서시랑 양영은 상소를 올려 삼대(하, 은, 주)의 고사에 따라, 여망(태공망)을 시조로 추존하고, 영구히 옮겨지지 않는 묘로 삼도록 건의하자, 여광은 이를 따랐다.
4. 3. 천왕 즉위
396년, 여광은 국호를 대량(大凉)으로 정하고 천왕(天王)에 즉위하였다.[1] 이때부터 후량이 건국된 것으로 본다. 연호를 용비로 정하고, 영내에 대사면을 내렸다.백관(百官)을 설치하고, 세자 여소를 천왕 태자에, 여러 자제 20명을 공(公) 또는 후(侯)에 봉했다. 중서령 왕상을 상서좌복야에, 저작랑 단업, 저거라구 등 5명을 상서에 임명했다.
같은 달, 여광은 독발오고에게 사자를 보내 정남대장군, 익주목, 좌현왕에 임명하려 했다. 그러나 독발오고는 "여왕(여광)의 아들들은 탐욕스럽고, 조카들은 포악하다. 백성들이 근심하고 원망하는데, 내가 어찌 백성의 마음에 어긋나게 불의한 작위를 받겠는가! 제왕의 사업은 내가 스스로 행하겠다"라며 거절하였다. 다만, 여광이 보낸 고취(鼓吹)와 우의(羽儀)는 그대로 두었다.
4. 4. 통치와 반란
386년 10월, 여광은 부견의 사망 소식을 듣고 문소황제라는 시호를 올렸다. 부견의 계승자를 자처하기 위해 태안으로 개원하고 주천공(酒泉公)을 자칭하며 독립 정권을 세웠다.[2] 387년 말, 장대예의 반란을 진압하고, 389년에는 삼하왕(三河王)을 자칭했다.[2] 396년에는 국호를 대량(大凉)으로 정하고 천왕(天王)에 즉위하여 독발부, 흉노 등 양주 일대의 여러 세력들을 복속시키고 양주를 평정했다.[2]여광은 걸복부(乞伏部)의 서진을 지속적으로 공격하여 397년에는 금성(金城 : 간쑤 성 란저우)을 점령하기도 했다.[2] 그러나 후량에 복속해 있던 독발오고가 거병하고, 단업, 저거몽손 등이 반란을 일으켜 하서회랑 서쪽을 장악하면서 후량은 분열되기 시작했다.[2]
여광은 여찬을 파견하여 이들을 토벌하려 했으나, 수도 고장(姑臧)에서 곽논이 반란을 일으켜 동원성(東苑城)을 점령하여 여찬을 다시 불러들였다.[2] 수도에서 일어난 반란은 서평(西平)에서 양궤의 반란으로 이어졌고, 독발오고가 원군을 보내는 등 1년 여를 끌었다.[2] 398년 6월 경, 곽논 등을 격파하여 수도는 안정되었으나 지방의 반란은 진압하지 못했다.[2]
399년 5월, 여소와 여찬은 북량 정벌을 감행했으나, 단업이 수비를 굳혀 실패했다.[2] 병으로 쇠약해진 여광은 399년에 태자 여소에게 양위하고 태상황제를 자칭했으며 곧이어 병사하였다.[2]
4. 4. 1. 서진과의 항쟁
391년, 여광은 서진의 왕 걸복건귀가 반군 모익간을 공격하는 틈을 타 기습 공격을 시도했지만, 걸복건귀가 신속하게 대응하여 실패했다. 그러나 이것이 서진과의 일련의 전투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2] 392년, 여광은 그의 형제 여보와 아들 여준을 서진과 서진의 속국인 강의 수장 팽희념에게 보냈지만 모두 패배했다. 하지만 여광은 직접 팽희념을 공격하여 그의 도시 부한(枹罕, 현대의 린샤 후이족 자치주 간쑤)을 점령하고 그를 도주하게 만들었다.[2]395년 가을, 여광은 서진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걸복건귀를 신하로 복속시키고 그의 아들 걸복척발(乞伏敕勃)을 인질로 보냈다. 그러나 걸복건귀는 곧 이 조치를 후회하여 이를 제안한 관료를 처형하고 복속을 거부했을 것으로 보인다.[2]
397년 1월, 여광은 서진 정벌군을 일으켜, 태원공 여찬에게 양궤, 두구 등과 함께 보병과 기병 3만을 주어 금성(金城 : 간쑤 성 란저우)을 점령하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진의 금성군 태수 위건이 사로잡혔다. 그러나 서진의 군주 걸복건귀는 이간책을 써서 여광의 동생 천수공 여연을 전사하게 만들었고, 결국 여광은 고장으로 군대를 돌렸다.[2]
4. 4. 2. 남량·북량의 자립
397년, 후량에 복속해 있던 독발오고가 거병하여 금성(金城 : 간쑤 성 란저우)을 점령하고 남량을 건국하였다.[2] 같은 해, 단업과 저거몽손 등이 반란을 일으켜 하서회랑 서쪽을 장악하고 북량을 건국하면서 후량은 분열되기 시작하였다.[2]4. 4. 3. 곽논의 반란
397년 여찬을 파견하여 단업과 대치하고 있던 중, 수도 고장(姑臧)에서 곽언이 반란을 일으켜 동원성(東苑城)을 장악하였다. 이에 여광은 여찬을 다시 불러들였다.[2] 곽논은 천문에 밝고 점괘에 능하여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반란을 일으키자 많은 백성들이 호응하였다.[2]여찬이 번화까지 진군했을 때, 사마 양통이 곽언에게 망명하였다. 곽언은 군대를 출동시켜 백석에서 여찬을 공격했고, 여찬은 대패하였다. 여광은 서안군태수 석원량에게 보병·기병 5천을 주어 구원에 나섰고, 석원량은 여찬과 함께 곽언 군을 격파하고 고장까지 진출했다.[2]
수도에서 일어난 반란은 서평(西平)에서도 양궤의 반란을 일으켰고, 독발오고가 원군을 보내 1년 여를 끌었다. 398년 6월 경에 곽논 등을 격파하는데 성공하여 수도는 안정되었으나 지방의 반란은 진압하지 못하고 계속되었다.[2]
4. 4. 4. 양궤의 자립
386년 량주 사람인 장첩과 송생 등은 호인과 한인 3천 명을 규합하여 휴도성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곽언과 결탁하여 함께 후량의 후장군 양궤를 맹주로 추대했다. 양궤는 이에 호응하여 대장군, 량주목, 서평공을 자칭했다.[2]이후 여광은 양궤에게 서신을 보냈으나, 양궤는 답하지 않았다.[2]
4. 5. 최후
399년, 병으로 쇠약해진 여광은 태자 여소에게 양위하고 태상황제를 자칭했으며,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63세였다. 재위 기간은 10년이었다.[1]여광은 죽음을 앞두고 여소에게 "내 질병은 악화될 뿐이며, 아마 낫지 않을 것이다. 지금 국가는 다난하여 삼구(북량, 남량, 서진)가 번갈아 틈을 노리고 있는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여소와 그의 형제들인 태원공(太原公) 여찬과 장산공(長山公) 여홍에게 서로 협력하여 나라를 지킬 것을 당부했다. 특히 여찬에게는 참언을 듣지 말고 여소를 잘 보좌할 것을 경계했다.[1]
그러나 여광의 사후, 여찬은 유명을 어기고 정변을 일으켜 여소로부터 왕위를 찬탈했다.[1] 여광은 여찬에 의해 의무황제(懿武皇帝)라는 시호를 받았고, 묘호는 태조, 능묘는 고릉으로 정해졌다.[1] 여광 사후 후계 다툼과 주변 국가들의 침략으로 후량은 403년 후진에 항복하며 멸망했다.
참조
[1]
문서
当時、前秦の基礎を作った苻洪(当時の名は蒲洪)は後趙に仕えて枋頭に駐屯しており、恐らく呂光の一族もこれに従っていたものと思われる。
[2]
서적
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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