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위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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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공위 시대는 1250년 프리드리히 2세 사망 이후 신성 로마 제국에서 황제 자리를 놓고 벌어진 혼란스러운 시기를 의미한다. 호엔슈타우펜 왕조 단절 후, 여러 후보가 로마 왕으로 선출되었으나, 교황의 반대, 제후들의 권력 다툼, 그리고 이중 선거 등으로 인해 제국은 혼란에 빠졌다. 결국 1273년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가 로마 왕으로 옹립되면서 대공위 시대는 종식되었고, 선제후 제도가 확립되어 황제 선출 권한을 갖게 되었다. 이 시기, 황제의 권위는 약화되었고, 지방 분권화가 심화되어 독일은 여러 소국으로 분열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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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위 시대 | |
---|---|
지도 | |
기본 정보 | |
기간 | 1245년 ~ 1312년/1347년 |
이전 | 프리드리히 2세 |
이후 | 하인리히 7세 또는 카를 4세 |
원인 | |
사유 |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몰락 |
교황의 역할 | 교황의 신성 로마 황제에 대한 지지 철회 및 반대 황제 옹립 시도 |
주요 사건 | |
왕위 분쟁 | 여러 왕이 선출되어 경쟁함. |
정치적 혼란 | 제후들의 권력 강화 및 황제권 약화 |
영향 | |
제후 세력 강화 | 제후들의 독립적인 세력 확장 |
황제권 약화 | 황제의 권위 하락 및 제국 통치력 약화 |
지역 분열 심화 | 제국 내 지역 간 분열 가속화 |
관련 인물 | |
빌렘 2세 반 홀란드 | 대공위 시대의 왕 중 한 명 |
리처드 콘월 | 대공위 시대의 왕 중 한 명 |
알폰소 10세 | 대공위 시대의 왕 중 한 명 |
루돌프 1세 | 대공위 시대 이후 황제로 선출 |
하인리히 7세 | 룩셈부르크 가문 출신 황제 |
카를 4세 | 룩셈부르크 가문 출신 황제 |
2. 역사적 배경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과 대립하며 제국을 통치했으나, 1250년 그의 사망은 제국 내 권력 공백을 야기했다. 그의 아들 콘라트 4세가 뒤를 이었지만, 1254년에 재위 4년 만에 사망하여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단절되었다. 콘라트 4세의 아들 코라디노는 로마 왕위에 오르지 못했고, 계승자도 없었다.
프리드리히 2세가 1250년에 사망한 후, 황제 자리를 놓고 그의 아들 콘라트 4세와 교황이 지지한 대립왕 홀란드의 빌럼이 다투었다. 1254년 콘라트 4세가 죽자 빌럼 2세는 2년간 통치했지만, 1256년 그의 죽음은 1257년 콘월의 리처드와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 사이의 이중 선거로 이어졌다. 알폰소 10세는 생전에 독일 땅을 밟지 않았고, 리처드는 1257년에 즉위하여 1272년 사망할 때까지 잉글랜드와 독일을 오가며 통치했다.
콘라트 4세의 대립왕이었던 홀란트 백작 빌렘 2세(빌헬름 폰 홀란트, 재위: 1247년 - 1256년)는 콘라트 4세의 사망으로 유일한 로마 왕이 되었으나, 1256년에 원정 중 사망하여 로마 왕위는 다시 공석이 되었다. 빌렘 2세는 "신성 로마 제국"을 정식 국호로 사용한 최초의 군주였다.
3. 전개 과정
리처드 사후, 보헤미아의 오토카르 2세와 합스부르크의 루돌프 1세가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으나, 제후들은 강력한 왕을 원치 않았기에 비교적 약소 세력이었던 루돌프 1세를 1273년에 로마 왕으로 선출했다.[1] 루돌프 1세는 호엔슈타우펜 영지 회복 정책을 추진하여 제국 재정을 강화하려 했으나,[2] 1274년 뉘른베르크 제국 의회에서 라인 궁정 백작에게 재판권을 부여하면서 제후들의 반발에 직면했다.[2]
1291년 루돌프 1세 사후, 제후들은 나사우의 아돌프를 왕으로 선출했다. 아돌프는 제후들에게 양보하며 왕실 영토 확장을 추진했으나, 튀링겐 장악 과정에서 제후들과 갈등을 빚었다. 결국 제후들은 아돌프를 폐위하고 1298년 루돌프 1세의 아들 알브레히트를 로마 왕으로 선출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견제를 위해 1308년 룩셈부르크 가문의 하인리히 7세가 로마 왕으로 선출되었다. 하인리히 7세는 보헤미아와 튀링겐 통합 시도로 인해 다른 제후들에게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주었기 때문에 선출되었다. 하인리히 7세는 로마에서 황제 대관을 받아 명성을 얻었으나, 1313년에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1]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프리드리히와 비텔스바흐 가문의 루이 4세 사이에 이중 선거가 발생하여 제국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두 사람은 1313년부터 1322년까지 서로 싸웠고, 그해 프리드리히가 포로로 잡혔다. 1325년에 루이는 프리드리히를 공동 왕으로 선포하고 합스부르크 가문에 오스트리아의 영토를 부여함으로써 둘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1347년, 루이 4세는 뇌졸중으로 사망하였고, 같은 해 카를 4세가 황제로 선출되었다.
카를 4세는 선제후라는 제도를 확립하여 독일 왕을 선출할 수 있는 법적 실체를 만들었다. 카를 4세의 통치는 이탈리아에 대한 제국의 관심을 부활시켰고,[8] 독일 정치의 중심지를 중부 및 남부 독일에서 보헤미아, 그리고 이후 오스트리아로 옮겼다. 동시에 이전 왕조와 통치자 아래에서 이루어졌던 중앙 집권화는 퇴보하였고 황제와 왕의 권위는 약화되었다.
3. 1. 혼란의 시작
프리드리히 2세가 1250년에 사망한 후, 황제 자리를 놓고 그의 아들 콘라트 4세와 교황이 지지한 대립왕 홀란드의 빌럼이 다투었다. 프리드리히 2세 사망 당시 콘라트 4세는 빌럼 2세를 격파하고 복종을 강요했으며, 이탈리아로 떠날 때 독일에서 강력한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 1254년 콘라트 4세가 죽자 빌럼 2세는 2년간 통치했지만, 1256년 그의 죽음은 1257년 콘월의 리처드와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 사이의 이중 선거로 이어졌다. 알폰소 10세는 생전에 독일 땅을 밟지 않았고, 리처드는 1257년에 즉위하여 1272년 사망할 때까지 잉글랜드와 독일을 오가며 통치했다. 리처드는 재위 기간 동안 독일에서 굳건한 지지 기반을 유지하며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봉건 관계를 유지하고 홀란드의 빌럼의 일부 관리를 그대로 썼다.
3. 2. 제후들의 권력 투쟁
프리드리히 2세 사후, 콘라트 4세와 홀란드의 빌럼이 황제 자리를 두고 다투었다. 콘라트 4세는 빌럼을 제압했으나 1254년에 사망했고, 빌럼 역시 1256년에 사망하면서 1257년 콘월의 리처드와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가 로마 왕으로 이중 선출되는 상황이 벌어졌다.[1] 알폰소 10세는 독일 땅을 밟지 못했고, 리처드는 1272년 사망할 때까지 잉글랜드와 독일을 오가며 통치했다. 리처드는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봉건 관계를 유지하며 독일 내 지지 기반을 다졌다.
리처드 사후, 보헤미아의 오토카르 2세와 합스부르크의 루돌프 1세가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제후들은 강력한 왕을 원치 않았기에, 비교적 약소 세력이었던 루돌프 1세를 1273년에 로마 왕으로 선출했다.[1]
루돌프 1세는 호엔슈타우펜 영지 회복 정책을 추진하여 제국 재정을 강화하려 했으나,[2] 1274년 뉘른베르크 제국 의회에서 라인 궁정 백작에게 재판권을 부여하면서 제후들의 반발에 직면했다.[2] 또한, 왕실 영지에 대한 사법 감독을 강화하여 수입을 늘리려 했으나, 오스트리아 지역 장악에는 실패했다.
1291년 루돌프 1세 사후, 제후들은 알브레히트의 잠재적 위협을 우려하여 나사우의 아돌프를 왕으로 선출했다. 아돌프는 제후들에게 양보하며 왕실 영토 확장을 추진했으나, 튀링겐 장악 과정에서 제후들과 갈등을 빚었다. 결국 제후들은 아돌프를 폐위하고 1298년 루돌프 1세의 아들 알브레히트를 로마 왕으로 선출했다. 알브레히트 1세는 튀링겐과 보헤미아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려 했으나, 1308년 조카 요한에게 암살당하면서 실패했다.
3. 3. 룩셈부르크 가문과 비텔스바흐 가문
합스부르크 가문의 견제를 위해 1308년 룩셈부르크 가문의 하인리히 7세가 로마 왕으로 선출되었다. 하인리히 7세는 보헤미아와 튀링겐 통합 시도로 인해 다른 제후들에게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주었기 때문에 선출되었다. 하인리히 7세는 로마에서 황제 대관을 받아 명성을 얻었으나, 1313년에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1]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프리드리히와 비텔스바흐 가문의 루이 4세 사이에 이중 선거가 발생하여 제국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룩셈부르크 가문과 합스부르크 가문은 영토를 점진적으로 수집하여 비슷한 수준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하인리히의 아들 요한은 루이 4세를 황제 후보로 내세웠다. 프리드리히는 황제의 문장과 대관식을 담당하는 전통적인 인물인 쾰른 대주교를 설득하여 루이보다 먼저 그를 대관할 수 있었지만, 루이는 제국의 전통적인 정치 수도인 아헨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따라서 어느 쪽도 확실하게 황제를 칭할 수 없었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공개적인 전쟁으로 돌입했다.
두 사람은 1313년부터 1322년까지 서로 싸웠고, 그해 프리드리히가 포로로 잡혔다. 1325년에 루이는 프리드리히를 공동 왕으로 선포하고 합스부르크 가문에 오스트리아의 영토를 부여함으로써 둘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 후 루이는 전 지지자인 보헤미아의 요한과 브란덴부르크 상속 문제로 갈등을 겪게 되었고, 프랑스와 교황이 나중에 합류하여 갈등이 심화되어 1346년 요한의 아들 카를이 루이에 반대하는 반왕으로 선출되었다. 1347년, 루이 4세는 뇌졸중으로 사망하였고, 같은 해 카를 4세가 황제로 선출되었다.
3. 4. 1356년 금인칙서
카를 4세는 선제후라는 제도를 확립하여 독일 왕을 선출할 수 있는 법적 실체를 만들었다. 선제후단은 독일 왕의 유일한 정당성의 근원이 되었다.[8] 카를 4세의 통치는 이탈리아에 대한 제국의 관심을 부활시켰고,[8] 독일 정치의 중심지를 중부 및 남부 독일에서 보헤미아, 그리고 이후 오스트리아로 옮겼다. 동시에 이전 왕조와 통치자 아래에서 이루어졌던 중앙 집권화는 퇴보하였고 황제와 왕의 권위는 약화되었다. 중앙 정부의 부재는 슈바벤 도시 동맹, 한자동맹, 스위스 연방과 같은 코뮌 운동을 강화시켰다. 또한 소규모 귀족들 사이의 봉건 분쟁을 증가시켜 튀링겐 백작 전쟁과 같은 갈등을 초래하여 독일에서 일반적인 무법 상태가 되었고, 여기에서 강도 남작들은 명목상의 사법 시스템의 방해 없이 활동했다. 교황의 선거 및 제국 일반 통치에서의 역할 또한 의문시되었고, 이후 황제들이 선거 과정에서 로마를 완전히 무시할 때까지 꾸준히 줄어들었다. 독일은 스스로를 지키는 수많은 소규모 국가로 분열되었고, 이러한 상황은 현대 시기까지 지속되었으며, ''클라인슈타테라이''라고 불리며 국가 통일이라는 현대적 과제에 걸림돌이 되었다.
4. 교황과 황제의 관계
교황권과 신성 로마 제국은 1000년대의 서임권 분쟁 이후 어려운 관계를 맺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인노첸시오 4세로부터 리옹 공의회에서 공식적인 폐위 통보를 받았으나[5], 황제 지위와 대부분의 지지자들을 유지했다. 인노첸시오 4세는 황제의 정통성을 부여하고 박탈할 수 있는 독점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이론적으로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이를 믿는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강력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교회의 범죄와 성직자들의 잘못을 열거하며 유럽의 다른 귀족들에게 지지를 얻기 위해 직접 편지를 보냈다.[6] 교황은 50년 후인 하인리히 7세가 로마에서 왕으로 즉위했고, 공개적으로 그렇게 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정통성을 결정하는 데 여전히 어느 정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330년대에는 루이 4세와 프리드리히 3세 사이의 분쟁으로 교황의 선거 개입과 정통성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당시 교황 요한 22세는 루이의 선출이 정당하지 않다고 부인하며, 교회법에 따르면 선거의 정당성은 교황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7] 이에 루이는 렌세 선언을 발표하여, 황제가 충분한 민중의 지지를 받으면 교황의 간섭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선언했다. 이 때문에 요한 22세와 그의 후임 클레멘스 6세는 루이에게 도전하고 그를 대체할 다른 황제 후보를 찾았고, 결국 루이의 사후 황제 자리를 성공적으로 얻게 된 룩셈부르크의 카를 4세를 지지하게 되었다.
5. 결과 및 영향
대공위 시대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에 여러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황제를 선출하는 선제후 제도가 확립되어, 이들이 독일 왕을 선출하는 유일한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8] 이는 황제 권력의 분산을 의미하며, 중앙 집권화의 진전을 퇴보시켰다.
중앙 정부의 부재는 슈바벤 도시 동맹, 한자동맹, 스위스 연방과 같은 도시 동맹, 즉 중세 코뮌 운동을 강화시켰다. 또한, 소규모 귀족들 간의 봉건 분쟁이 증가하여 튀링겐 백작 전쟁과 같은 갈등을 초래했고, 강도 남작들이 활개 치는 등 독일은 전반적으로 무법 상태에 빠졌다.
교황의 황제 선거 개입 문제는 이후 황제들이 로마를 무시하는 경향으로 이어졌다. 독일은 수많은 소규모 국가로 분열되었고, 이러한 상황은 ''클라인슈타테라이''라고 불리며, 국가 통일이라는 근대적 과제에 걸림돌이 되었다.
대공위 시대는 "왕이 없는 시대"를 의미하지만, 실제로는 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콘라트 3세, 필리프 등 대공위 시대 이전에도 황제가 되지 못한 로마왕은 존재했다. 대공위 시대는 루돌프 1세의 로마왕 즉위로 종결되었지만, 루돌프 1세는 황제로 즉위하지 않았다. 이 시대의 특징은 이중 선거로 인해 로마 왕권이 약화되고, 약소 제후나 제국 외부 인물이 왕위를 획득하여 로마왕 부재와 같은 상황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또한, 로마왕 선거권이 7명의 선제후에게 있다는 인식이 이 시기에 확립되었다.
호엔슈타우펜 왕조에서는 1250년 프리드리히 2세 사후, 콘라트 4세가 왕위를 이었으나 1254년에 사망했다. 콘라트 4세의 아들 코라디노는 왕위에 오르지 못했고,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단절되었다.
1247년부터 콘라트 4세의 대립왕이었던 빌렘 2세는 콘라트 4세 사후 유일한 로마왕이 되었지만, 1256년에 사망하여 왕위는 다시 공석이 되었다.
1257년 로마왕 선거에서는 제국 외부에서 두 명의 후보가 추천되었다. 쾰른 대주교, 마인츠 대주교, 라인 궁정 백작,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는 잉글랜드 왕 헨리 3세의 동생 콘월 백작 리처드를, 트리어 대주교, 작센 대공,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오타카르 2세는 카스티야 왕 알폰소 10세를 추천했다. 알폰소 10세는 교황의 반대와 국내 사정으로 즉위하지 못했고, 리처드는 제국에 몇 차례 방문했지만 체류 기간은 짧았다.
이후 오타카르 2세가 왕위 획득을 노렸지만, 제후들과 교황은 강력한 군주를 원치 않았다. 프랑스 왕 필리프 3세의 즉위를 노리는 시칠리아 왕 카를로 1세의 야망도 있었다. 결국 제후들과 교황은 1273년,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를 로마왕으로 옹립하여 대공위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루돌프 1세는 황제 대관을 받지 못했다.
루돌프 1세는 호엔슈타우펜 가문과의 혈연, 프리드리히 2세와 콘라트 4세에 대한 충성심이 높이 평가받았다. 그는 1278년 마르히펠트 전투에서 오타카르 2세를 격파하고 오스트리아 공국을 획득하는 등 세력을 확장하며 제국 안정에 힘썼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의 제위 독점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나사우 가문의 아돌프, 룩셈부르크 가문의 하인리히 7세와 같이 약소 세력 군주 옹립 패턴이 계속되었다.
참조
[1]
서적
Holy Roman Empire A Thousand Years of Europe's History
Penguin Books, LTD
2017
[2]
간행물
Count Palatine as Judge over the Kings, Decree of the Diet of Nuremberg
2022-04-15
[3]
간행물
Golden Bull of Emperor Charles IV
2022-04-15
[4]
서적
Holy Roman Empire: A Thousand Years of Europe's History
Penguin Books LTD
2017
[5]
간행물
Letter of Deposition, Council of Lyons, 1245
2022-04-15
[6]
간행물
Letter from Frederick II to the kings of Christendom, 1246
2022-04-15
[7]
웹사이트
Constitutional Conflicts in the 14th Century
https://www.britanni[...]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8]
서적
Holy Roman Empire: A Thousand Years of Europe's History
Penguin Books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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