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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권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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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임권 투쟁은 중세 시대에 교회의 고위 성직자 임명 권한을 놓고 교황과 세속 군주 사이에 벌어진 권력 다툼을 의미한다. 8세기 프랑크 왕국과 교황령의 밀월 관계, 로마 교회의 세속화와 타락, 그리고 사유 교회 증가로 인한 영주들의 서임권 행사 등이 투쟁의 배경이 되었다. 신성 로마 황제들은 교황 임명 권한을 주장하며 교황 선출에 개입했고, 교황은 귀족들의 허수아비가 되어 권위가 추락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세속 군주의 서임권 행사를 금지하는 개혁을 추진했고, 이에 하인리히 4세가 반발하며 서임권 투쟁이 본격화되었다.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을 폐위하고 대립 교황을 옹립했으나, 카노사의 굴욕을 통해 일시적으로 교황에게 굴복했다. 이후에도 투쟁은 계속되었고, 결국 1122년 보름스 협약을 통해 교황이 성직 서임권을 갖되, 세속적 권한은 황제가 부여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서임권 투쟁은 교회의 중앙집권화를 촉진하고, 황제의 권력을 약화시켰으며, 잉글랜드에서도 유사한 분쟁이 벌어졌다. 보름스 협약은 유럽 가톨릭 지역 통치자들에게 인센티브 구조를 만들어 북부 지역에서 개혁이 교황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종교 개혁의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평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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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권 투쟁
분쟁 개요
명칭서임권 투쟁
다른 명칭성직 서임권 투쟁
로마자 표기Seoim-gwon Tujaeng
독일어 명칭Investiturstreit (인베스티투어슈트라이트)
시기11세기 ~ 12세기 초
원인교황과 세속 군주 간의 성직자 임명 권한 다툼
주요 인물교황 그레고리오 7세
하인리히 4세
결과보름스 협약 (1122년) 체결, 교황권 강화
배경
키워드성직매매
니콜라이주의
클뤼니 수도원
주요 사건
사건카노사의 굴욕
보름스 협약

2. 서방교회의 타락

서로마 제국 쇠퇴 이후, 이론상 교회가 가져야 할 성직자 임명권(서임권)은 현실적으로 각 지역의 유력 귀족들이 행사하는 세속 서임으로 변질되었다. 이는 귀족 가문 출신들이 교회 고위직을 차지하고, 영주들이 사유 교회의 성직자를 임명하는 관행과 맞물려 심화되었다. 특히 주교나 수도원장 직위에 막대한 부와 토지가 결부되면서, 세속 권력자들에게 서임권 장악은 중요한 이권 문제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교회 직위를 돈으로 사고파는 성직 매매(시모니아)가 공공연히 이루어졌고, 이는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심화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은 제국 통치를 위해 주교 서임권에 깊이 개입했다. 오토 1세 이후 주교들은 제국의 제후로서 막강한 권력을 누렸고, 황제들은 충성스러운 인물을 주교로 임명하여 제국 내 영향력을 확보하고자 했다. 심지어 교황 선출 과정에도 황제의 입김이 작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세속 권력의 과도한 개입과 그로 인한 교회의 타락, 특히 1045년 교황 베네딕토 9세의 교황직 매매 의혹과 같은 사건들은 교회 내부의 자정 노력을 촉발했다.

10세기 클뤼니 수도원을 중심으로 시작된 교회 개혁 운동은 세속 권력의 간섭을 비판하며 교회의 정화와 자율성 회복을 추구했다. 교황 레오 9세와 그레고리우스 7세 등 개혁적인 교황들은 성직 매매를 근절하고 성직자의 기강을 바로잡으려 노력했으며, 특히 세속 군주가 행사하던 서임권을 교회로 되돌려 놓으려 했다. 이러한 개혁 의지는 서임권을 둘러싼 교회와 세속 권력 간의 갈등을 격화시켰고, 결국 서임권 투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2. 1. 교회의 부패

교황 레오 1세(재위 440~461)가 주장한 로마 대주교의 수위권 이론은 점차 인정받아 교황권의 기초가 되었다.[34] 8세기 프랑크 왕국과의 관계 속에서 피핀의 기증(756년)으로 교황령이 형성되었고, 이는 로마 대주교의 권위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35] (피핀의 기증과 이후 등장한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문서는 후대에 위조된 것으로 밝혀졌다.[36]) 교황의 지위가 높아지면서 교황직은 세속 권력 투쟁의 목표가 되었고, 로마 교회는 점차 세속화되며 부패하기 시작했다.

교황 선출 과정에서 정치적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이론상 교황 선출권은 성직자와 평신도에게 있었으나, 실제로는 외부 세력의 간섭이 심했다. 불만을 품은 세력은 대립교황을 내세우기도 했으며, 로마 귀족들은 권력 다툼 과정에서 교황을 마음대로 폐위시키거나 새로 세우고, 심지어 살해하는 일까지 벌였다. 교황이 귀족들의 꼭두각시로 전락하면서 교황의 권위는 크게 떨어졌고, 이러한 타락상은 유럽 교회 전체로 퍼져나갔다.

서로마 제국이 약화된 후, 이론적으로는 교회가 가져야 할 성직자 임명권(서임권)을 실제로는 각 지역의 지배 귀족들이 행사하는 세속 서임이 일반화되었다. 이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 귀족 가문의 영향력: 많은 주교와 수도원장들이 지배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당시 유럽 귀족 사회의 장자 상속 관행에 따라, 장남이 가문의 작위를 물려받으면 다른 아들들은 교회 내 고위직에서 경력을 쌓는 경우가 많았다.
  • 사유 교회: 고대 말기부터 서유럽에서는 개인이 자신의 사유지에 성당이나 수도원을 짓는 경우가 늘어났는데, 이러한 사유 교회의 성직자나 수도원장을 임명할 권한은 해당 토지를 소유한 영주에게 있었다.
  • 교회 재산: 주교나 수도원장 직위에는 막대한 부와 토지가 따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교회 직위를 통제하는 것은 세속 권력에게 매우 중요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 직위를 돈으로 사고파는 성직 매매(시모니아)가 성행했다. 이는 귀족들에게 중요한 수입원이었고, 귀족들은 자신들의 토지에 교회를 세우는 것을 허가받기도 했다. 세속 군주가 임명한 성직자 중에는 군주의 친인척이나 측근 등 자격 미달인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성직 매매를 일삼았고, 성직자의 독신 의무를 어기고 결혼하거나 약혼하여 교회의 재산과 성직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성직 세습 행태까지 보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교회는 급속도로 부패하고 타락해갔다.[38]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 역시 서임권에 깊이 개입했다. 오토 1세(재위 936–972) 이후 주교들은 제국의 제후가 되어 많은 특권을 누렸고, 광대한 영지를 다스리는 봉건 영주가 되었다. 황제들은 세속 행정을 위해 주교들에게 크게 의존했는데, 주교들은 세습적인 귀족들과 달리 특정 가문의 이해관계에 덜 얽매여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황제들은 자신에게 충성스러운 인물을 주교로 임명하여 제국 내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했으며, 왕권신수설을 내세워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했다. 1059년 이전 교황 선출 과정 상당 부분 역시 왕이나 황제가 교황 후보를 지명하면 교황 선출인단이 이를 추인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1045년에는 교황 베네딕토 9세가 교황직을 팔았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성직 매매 문제가 큰 논란이 되었다.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3세는 1046년부터 1056년까지 여러 차례 교황을 직접 임명하며 교황 선출 과정에 개입했는데, 이는 황제가 교황 선출을 성공적으로 통제한 마지막 사례 중 하나였다. 그의 아들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는 1056년 여섯 살의 나이로 독일 왕위에 올랐다.

2. 2. 테러당한 교황

799년 4월 레오 3세는 반대파에게 눈알과 혀를 뽑힐 뻔한 심각한 공격을 받았다.[39][40] 다행히 주변의 도움으로 구조된 후, 독일 파더보른에 있는 샤를 1세의 궁전으로 피신했다. 레오 3세는 프랑크 왕국의 보호를 받으며 로마로 돌아왔으나, 성직매매, 위증, 간통 등의 혐의로 고소를 당했다.

이듬해인 800년 11월 로마에 도착한 샤를 1세는 이 고소 사건의 처리를 의뢰받고 곤란한 입장에 처했다. 교황의 범죄 유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과연 누가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을 심판할 자격이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혐의에 대한 의혹이 짙었으나, 샤를 1세는 교황이 신 앞에서 무죄를 서약하는 절차를 통해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41] 이에 대한 보답으로 레오 3세는 샤를 1세에게 서로마 황제의 왕관을 수여했다. 이 대관식은 교황이 의도한 대로 효력을 발휘하여, 바로 다음 날 샤를 1세는 교황을 고소했던 반대파 주도자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42]

이 사건은 일단 원만히 수습되었지만, 결과적으로 황제의 위상이 높아져 교회의 일에 간섭하는 계기가 되었다.[43]

2. 3. 시체 시노드

샤를 대제 사후 그의 제국이 쇠퇴하면서[44] 이탈리아의 힘의 균형도 무너졌다. 로마의 귀족들은 권력 다툼을 벌이며 교황의 폐위와 옹립을 좌지우지했고, 교황을 자신들의 꼭두각시로 만들어 그 권위를 농락하였다.[45]

장 폴 로랑스의 '''시체 시노드'''.


897년, 람베르토 2세의 영향 아래 있었던 교황 스테파노 6세(재위 896~897)는 이른바 시체 시노드라고 불리는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끔찍한 복수극을 벌였다.[46] 그는 이미 사망한 전임 포르모소 교황의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어 교황의 제의를 입힌 뒤 피고석에 앉히고 재판을 진행했다. 포르모소에게는 유죄가 선고되었고, 그의 시신은 테베레강에 던져졌다.

이 사건 직후 로마에 지진이 발생하여[47] 라테라노 궁전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자,[48] 사람들은 이를 신의 진노로 여겼다. 분노한 군중은 폭동을 일으켰고, 교황 스테파노 6세는 결국 투옥된 후 교살당했다.[49] 이 사건 이후 로마 교황청은 극심한 혼란에 빠져, 7년 동안 무려 6명의 교황이 교체되는 등 당파 싸움이 극에 달했다.

2. 4. 창부 정치

904년 교황 세르지오 3세가 즉위한 후부터 약 60년간 로마의 귀족 부인인 테오도라와 그녀의 딸 마로치아, 손자 알베리코에 의해 교황권이 좌우되는 '창부정치'(Pornocracy)라고 불리는 교황 역사의 암흑기를 맞이하였다.[50] 이 시기 교황들은 귀족들의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로마를 장악했던 테오필락투스 가문의 마로치아는 교황 세르지오 3세의 정부였으며, 어머니 테오도라와 함께 교황들을 꼭두각시로 만들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두 모녀에 의해 5명의 교황이 교체되었고 대부분 의문사하였다. 931년에는 마로치아의 아들 교황 요한 11세가 교황에 즉위하였으나, 932년 다른 아들 알베리코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마로치아는 권좌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테오필락투스 가문의 영향력은 계속되어, 955년에는 마로치아의 손자인 교황 요한 12세가 교황이 되었다. 요한 12세는 교황궁을 매음굴로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방탕하고 타락한 삶을 살았으며, 그의 시대에는 수도 셀 수 없이 많은 정부들이 창부정치의 계보를 이어나갔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오토 대제가 개입하여 교회가 잠시 안정되는 듯했으나, 오토 대제가 사망한 후 로마는 다시 당파 싸움으로 얼룩지며 교황들의 수난사가 이어졌다.

2. 5. 성직매매의 끝판왕

교황 베네딕토 9세는 성직매매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그는 아버지 알베리코 3세가 선거인단을 매수한 덕분에 1032년, 20대 후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교황직에 오를 수 있었다.[51] 당시 로마는 베네딕토 9세의 가문인 투스쿨룸 가문이 장악하고 있었으나, 1044년 반대 세력의 반란으로 그는 로마에서 추방당했다. 이후 스테파노 가문에 의해 실베스테르 3세가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51]

그러나 베네딕토 9세는 이듬해인 1045년 3월, 군대를 동원하여 로마를 다시 점령하고 실베스테르 3세를 축출하며 교황직에 복귀했다. 하지만 불과 두 달 만에, 그는 거액의 돈을 받고 자신의 대부였던 그레고리오 6세에게 교황직을 팔아넘기는 전례 없는 성직매매 사건을 일으켰다.[52] 심지어 베네딕토 9세는 이후 자신의 매각 결정을 번복하고 다시 자신이 교황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교회를 극심한 혼란에 빠뜨렸다. 이러한 교황직 매매는 당시 만연했던 성직매매와 교회 부패의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3. 교회의 개혁과 정화

서유럽에서는 고대 말기부터 사유 교회, 즉 개인이 자신의 영지에 세운 성당이나 수도원이 늘어났다. 이러한 교회의 성직자나 수도원장을 임명하는 권리인 서임권은 자연스럽게 토지를 소유한 영주가 가지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세속 군주의 힘이 강해지자, 이들은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의 주교 선출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교회는 상당한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교회 재산의 관리권을 확보하는 것은 세속 권력에게도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중세에 들어 교황권이 점차 강화되면서, 성직자 임명 권한인 서임권을 둘러싼 세속 권력과 교회 간의 갈등이 잦아졌다.

특히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가 주교 임명권을 장악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키웠고, 심지어 교황 선출에까지 개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속 권력이 성직 임명권을 통제하면서 시모니아(성직 매매)가 성행하고 성직자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하는 등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났다.

이러한 교회의 부패와 세속화에 대한 반성으로 10세기 부르군트 왕국에 세워진 클뤼니 수도원을 중심으로 세속 권력의 간섭을 배제하려는 개혁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후 교황 레오 9세는 세속 군주에 의한 성직 서임을 부정했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흐트러진 성직자의 기강을 바로잡으려 노력하는 등 교회 개혁이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개혁 운동은 서임권을 세속 권력으로부터 되찾아 교회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려는 흐름을 만들었으며, 이는 결국 황제와 교황 사이의 격렬한 서임권 투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3. 1. 하인리히 3세의 개입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는 1046년, 황제 대관식을 위해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향했다.[53] 그러나 로마에 도착한 후 개혁파 추기경들을 만나면서, 당시 교황청이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음을 알게 되었고 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당시 로마에는 한 명의 교황과 두 명의 교황 요구자가 존재하는 등 교황직을 둘러싼 분열이 심각한 상태였다. 이에 하인리히 3세는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이들 3명을 모두 폐위시킨 뒤, 새로운 교황을 직접 추대하며 사태를 수습했다.[53] 이후에도 하인리히 3세는 황제의 교황 임명권을 지속적으로 행사하여 1056년까지 총 4명의 교황을 연이어 임명했다. 이는 황제가 교황 선출 과정을 성공적으로 통제했던 마지막 사례로 기록된다.

황제의 이러한 적극적인 개입은 성직 매매 등으로 부패했던 교회를 정화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교황 임명권을 황제가 직접 행사하는 등 교회의 권한을 침범하고 지나치게 간섭함으로써 교회의 독립성을 크게 훼손하는 심각한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54] 교회 내부에서는 이러한 황제의 간섭에 대한 반발이 있었으나, 그의 개입은 약 10년간 지속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 힐데브란트(훗날 교황 그레고리오 7세)나 훔베르트 추기경과 같은 개혁파 성직자들은 역설적으로 황제의 강력한 권력을 이용하여 로마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교회 개혁 작업을 꾸준히 추진했다. 특히 황제가 임명한 교황 레오 9세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교회 개혁을 위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54]

3. 2. 1059년 교회 개혁

1058년 3월 교황 스테파노 9세가 사망하자 로마 귀족들은 베네딕토 10세를 교황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개혁파 추기경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시에나에서 교황 니콜라오 2세를 선출했다. 니콜라오 2세는 군대를 동원하여 로마에서 시가전을 벌인 끝에 베네딕토 10세를 축출하였다.[55] 귀족들에 의해 교황이 옹립된 이 사건은 교황 선출 방식 개선의 필요성에 대한 강한 공감대를 형성하며 개혁으로 이어졌다.

1059년 4월 13일 부활절교황 니콜라오 2세는 라테란에서 시노드를 소집하여 교회 개혁을 단행했다.[56] 개혁의 핵심 내용은 교황 칙서 In nomine Dominila에 명문화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조치는 교황 선출권을 추기경들에게 부여하고 로마 귀족들의 선거 개입을 금지한 것이었다. 이는 훗날 추기경단으로 발전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선출된 교황을 승인할 형식적인 권한만을 가졌다. 또한 이 칙서는 세속 군주가 성직자에게 영지와 교회 직책을 수여하는 서임권 행사를 금지했다.

이러한 개혁은 황제나 로마 귀족과 같은 세속 권력으로부터 교회의 독립성을 확보하고 부당한 간섭을 차단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이전에는 성직자와 평신도가 교황 선출권을 가졌으며, 새로 선출된 교황은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즉위할 수 있었다.[57] 이에 반발한 독일의 황제파 주교들은 1061년에 모여 니콜라오 2세의 모든 칙령이 무효라고 선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교황 알렉산데르 2세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황제의 개입 없이 새로운 교회 규정에 따라 선출되었다.

3. 3. 비호 세력 확보

1059년 교황 니콜라오 2세는 교황 선출권을 추기경들에게 부여하는 개혁을 단행했는데, 이는 세속 권력으로부터 교회의 독립성을 확보하려는 중요한 조치였다.[56][57] 이러한 과감한 개혁은 독일 황실과 로마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교회는 외부의 지원 세력을 확보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교회는 우선 노르만족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58] 당시 이탈리아 남부를 장악하며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한 노르만족은 1053년 치비타테 전투 이후 교황청과 불편한 관계에 있었으나,[59] 1059년 8월 멜피에서 양측은 화해하고 새로운 동맹을 맺었다. 이 협약을 통해 교황은 로베르 기스카르와 리샤르를 공작으로 책봉하고 교회의 봉신으로 삼아, 강력한 군사적 지원 세력을 확보했다.

또한 로마 교회는 밀라노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민중 종교개혁 운동인 파타리노(it)[60] 운동 세력과도 연대했다. 파타리노 운동은 타락한 성직자들의 개혁을 요구하며 때로는 과격한 양상을 보이기도 했지만,[61] 교황청은 이들의 활동을 지지하고 황제가 임명한 주교에 대한 반발을 부추겼다.[62] 교황 특사를 파견하여 밀라노 대교구장을 교황청에 종속시킴으로써, 이 지역에 대한 독일 황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교회는 황제권에 맞설 수 있는 정치적, 군사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

4. 서임권 투쟁

중세 유럽에서 교황과 황제 사이에 벌어진 성직자 임명권(서임권)을 둘러싼 오랜 권력 다툼이다. 본래 성직자 임명은 교회의 고유한 권한이었으나, 봉건제가 확립되면서 세속 군주가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성직자 임명권을 관행적으로 행사하게 되었다. 특히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교회 영지를 통해 제국을 통치하는 데 서임권을 중요하게 여겼고, 이 과정에서 성직매매와 같은 부패가 만연하게 되었다.

11세기 후반,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이러한 세속 군주의 서임권 행사를 교회 타락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하고 강력한 교회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세속 군주의 서임권을 금지하고 교황의 절대적인 권위를 주장했다. 이에 당시 황제였던 하인리히 4세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위협하는 교황의 개혁에 정면으로 반발하면서 양측의 충돌이 본격화되었다.

이 갈등은 1076년 교황이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이듬해 황제가 교황에게 굴복하여 용서를 구한 카노사의 굴욕 사건으로 극적인 국면을 맞이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봉합이었을 뿐, 이후에도 양측의 대립은 내전, 황제의 로마 침공과 교황의 망명, 대립교황 옹립 등으로 격화되며 수십 년간 지속되었다. 서임권 투쟁은 교황권과 황제권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유럽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4. 1. 서임권 행사

성직자 임명은 원칙적으로 교회의 고유한 권한이었으며, 세속 군주가 성직자를 임명하는 관행은 교회법에 근거가 없는 행위였다.[63] 초기 교회에서는 주교의 선출과 축성이 동료 주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중세 초기에 봉건제가 자리를 잡으면서, 교회는 세속 군주의 보호와 지원을 받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양측의 관계는 점차 군주와 신하 사이의 종속 관계로 발전했다. 교회와 국가 권력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세속 군주가 성직자를 임명하는 서임권 행사는 점차 관행으로 굳어졌으며 당시에는 권한 남용으로 여겨지지 않았다.[63]

교회는 귀족 가문의 후원과 기부를 통해 유지되었는데, 당시 게르만족의 재산 관념에 따르면 토지나 재산을 기부한 사람이 그 재산을 관리할 성직자를 임명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64] 또한, 세습 귀족들에 대한 왕의 영향력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왕들은 이들을 완전히 신뢰하기 어려웠다. 반면, 주교대수도원장과 같은 고위 성직자들은 영지를 소유하고 교회 직무뿐 아니라 세속적인 행정 업무까지 수행하는 유능한 인재들이었다. 따라서 교회와 국가가 밀접하게 연결된 왕국에서 군주에게 성직자 서임권은 왕권을 유지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간주되었다.[65] 특히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교황 임명에도 특별한 권한을 행사하려 했기 때문에, 다른 세속 군주들에 비해 성직자 서임권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65] 오토 1세 황제 이후 주교들은 제국의 제후가 되어 광대한 영지와 특권을 누렸으며, 이러한 막대한 경제적, 군사적 권력을 통제하는 것은 황제의 권위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세속 군주들은 종종 자신의 친인척이나 측근 등 자격이 부족한 인물들을 성직자로 임명하는 일을 관례화했다.[37] 또한, 귀족 가문들은 장자 상속 원칙에 따라 장남에게 작위를 물려주고 남은 아들들을 교회의 고위직에 앉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가문이 소유한 사유 교회나 수도원의 경우 더욱 흔했다. 교회 직위에는 상당한 부와 토지가 따랐으므로, 직위를 돈으로 사고파는 성직 매매(시모니아)는 영주들에게 중요한 수입원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세속 서임 관행은 성직 매매를 부추겼고, 임명된 성직자들은 독신의 의무를 저버리고 결혼하여 교회의 재산과 직위를 세습하는 등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심화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38] 군주들은 때때로 왕권신수설을 내세워 이러한 권력 행사를 정당화하기도 했다.

4. 2. 교권과 속권의 충돌

1073년,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높은 지지 속에 교황으로 즉위했다. 그는 추기경 시절부터 교회 개혁을 주도해 온 인물로, 교회의 정화에 대한 강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66] 그레고리오 7세는 교회 부패의 근본 원인을 성직매매, 성직자의 결혼, 그리고 세속 군주의 서임권 행사로 보았다. 특히 세속 군주가 성직자를 임명하는 관행을 완전히 없애야만 교회의 개혁을 지속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67]

이러한 개혁 의지는 1075년에 작성된 ''교황 칙서(Dictatus papae)'' (당시에는 공표되지 않음)에 명확히 드러난다. 이 문서는 로마 교회가 오직 신에 의해 세워졌으며, 교황의 권력만이 유일한 보편적 권력임을 선언했다. 특히 교황만이 성직자를 임명하거나 폐위시킬 수 있으며, 심지어 황제를 폐위시킬 권한까지 갖는다고 주장했다.[1] 같은 해 2월 라테라노 궁전에서 열린 공의회에서는 이러한 원칙을 재확인하며, 교황만이 성직자를 임명하거나 다른 관구로 이동시킬 수 있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2] 이는 1059년 교황 니콜라오 2세가 라테란 시노드에서 발표한 교황 칙서 In nomine Domini|인 노미네 도미니la를 통해 세속 군주의 서임권 행사를 금지하고 교황 선출 방식을 추기경단 중심으로 개편하려 했던 개혁 노선을 계승하고 더욱 강화한 것이었다.

한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는 더 이상 어린 군주가 아니었다. 모후의 섭정 기간 동안 약화되었던 왕권은 1075년 작센에서 발생한 대규모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면서 강화되었고, 그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 정책에 명백히 반대했으며, 특히 밀라노 대주교 임명 문제에서 교황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밀라노는 이탈리아에서 로마 다음으로 중요한 교구였기에,[68] 교황에게는 교회 개혁의 원칙을 관철하기 위해 양보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69]

1075년 6월, 하인리히 4세가 밀라노, 페르모, 스폴레토의 주교를 자신의 의지대로 임명하자 교황은 이를 강하게 비난했다.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의 간섭을 거부하고, 오히려 1076년 1월 보름스에서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그레고리오 7세의 교황직 폐위를 선언했다. 그는 교황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서임이 아닌 찬탈을 통해 왕이 된 하인리히가, 현재 교황이 아닌 거짓 수도사 힐데브란트에게"라는 모욕적인 표현을 사용하며 교황의 권위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새로운 교황 선출을 요구했다.

이에 그레고리오 7세는 1076년 사순절 시노드에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독일 왕위에서 폐위시키는 초강수로 맞섰다. 또한 제국의 모든 봉신들에게 황제에 대한 충성과 복종의 의무를 해제한다고 선언했으며, 하인리히 4세를 지지하는 귀족이나 사제 역시 파문하겠다고 경고하며 황제를 압박했다. 이로써 교황권과 황제권 사이의 서임권을 둘러싼 정면 충돌, 즉 서임권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4. 3. 카노사의 굴욕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교황권이 황제권보다 우위에 있음을 주장하며, 1076년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했다. 서임권은 세속 군주가 고위 성직자를 임명하며 교회 영지를 관리하는 중요한 권한이었다. 고위 성직자는 공식적으로 독신이었기에 영지가 세습되지 않고 사후 황실로 귀속되었으므로, 황제에게 서임권은 성직매매와 측근 기용을 통해 권력을 강화하는 핵심 수단이었다. 과거 황제가 교황을 폐위시킨 사례는 있었으나, 교황이 황제를 파문하는 것은 전례 없는 조치였다.[70]

하인리히 4세는 처음에는 교황의 파문을 무시했으나, 상황은 그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독일 제후들은 잘리어 왕조 하에서 황제의 권력이 강화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특히 하인리히 4세가 작센 반란을 진압하며 힘이 커지자, 중앙집권적인 통치 강화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71] 이런 상황에서 교황의 파문은 황제에게 반발할 좋은 명분이 되었다.[72] 귀족들은 1077년 2월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교황 주재 하에 회의를 열어 하인리히 4세의 황제 자격과 거취를 논의하겠다고 통보했다.

귀족과 주교들에게 외면당하며 정치적으로 고립된 하인리히 4세는 결국 교황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사절단을 보내 용서를 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직접 교황을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로 향했다. 당시 그레고리오 7세는 아우크스부르크로 가던 중 토스카나 여백 마틸데의 영지인 카노사 성에 머무르고 있었다.

1077년 1월 25일, 하인리히 4세는 참회자의 복장을 하고 카노사 성문 밖에 나타나, 추운 날씨 속에서 3일 동안 교황에게 무릎 꿇고 용서를 빌었다. 이를 카노사의 굴욕이라 부른다. 교황은 클뤼니 수도원장 위그와 마틸데 등 측근들의 간청과 중재에 따라 마지못해 하인리히 4세를 용서하고 파문을 철회했다. 그러나 이는 교황의 사목적 관용이었을 뿐, 정치적으로는 현명하지 못한 결정이라는 평가를 받는다.[73]

이 사건으로 황제는 제국 교회에 대한 일부 권한을 유지했지만, 이전까지 왕에게 속했던 종교적 권위를 상당 부분 상실하며 그의 권력은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었다. 다른 유럽 국가의 왕들은 교회의 권위를 바탕으로 직할령의 권력을 강화하고 귀족들의 반란을 억제할 수 있었지만[20], 하인리히 4세는 이 사건으로 인해 그러한 신성한 권위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카노사의 굴욕 이후 세력을 회복한 하인리히 4세는 군대를 동원하여 로마를 공격했고, 결국 그레고리오 7세는 로마에서 도망쳐 살레르노에서 사망했다. 이후에도 황제와 교황의 서임권을 둘러싼 투쟁은 계속되었다.

4. 4. 내전과 두 번째 파문

카노사의 굴욕 이후 교황 그레고리오 7세하인리히 4세의 파문을 철회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제후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슈바벤 공작 루돌프를 새로운 독일 황제로 선출하고 반란을 계속 이어나갔다. 이로 인해 독일은 3년 동안 권력 투쟁을 위한 내전에 휩싸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처음에는 양측을 중재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1080년 3월 7일 사순절 시노드에서 루돌프를 독일의 왕으로 공식 인정하고 하인리히 4세를 다시 파문했다. 그러나 이 두 번째 파문은 정치적인 동기가 강했기 때문에 이전만큼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74]

이에 하인리히 4세는 브릭센에서 주교 회의를 열어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불법임을 선포하며 맞섰다. 결정적으로 같은 해에 제후들이 내세웠던 루돌프 폰 라인펠트가 전투 중 사망하면서 독일 내 반란 세력은 힘을 잃었고, 하인리히 4세는 다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는 교황을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만들었다.

권력을 되찾은 하인리히 4세는 1080년 6월 25일 브리크센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여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폐위시키고, 자신이 이전에 라벤나 주교로 임명했던 귀베르토를 새로운 교황(대립 교황 클레멘스 3세)으로 옹립하였다. 로마 내부에서도 교황의 입지는 불안정해졌다. 교황의 다소 급진적인 개혁 정책에 반발한 13명의 추기경을 포함한 많은 지지자들이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75]

4. 5. 하인리히의 복수

1080년, 하인리히 4세는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카노사의 성주 마틸다를 패퇴시켰다.[76] 카노사의 굴욕 이후 복수를 준비하던 하인리히 4세는 1081년 5월,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로마에 도착했다. 이 원정은 비잔틴 황제의 지원을 받았다. 당시 남부 이탈리아에서 비잔틴 세력을 몰아낸 노르만족의 로베르 기스카르가 발칸 반도를 침공하자, 비잔틴 황제는 그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 하인리히 4세에게 로마 교황 공격을 요청하며 막대한 재정 지원을 약속한 것이다.[77]

그러나 로마 정복은 쉽지 않았다. 견고한 아우렐리아누스 성벽과 남부 이탈리아 노르만족의 군사적 지원 때문이었다. 하인리히 4세는 3년에 걸쳐 포위 공격과 회유, 로마 귀족 매수 등[78]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인 끝에 1084년 3월 21일, 로마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했다.

라테라노궁에 거처를 정한 하인리히 4세는 즉시 로마의회를 소집하여 그레고리오 7세를 폐위시키고, 자신이 라벤나 주교로 임명했던 귀베르토를 새로운 교황 클레멘스 3세로 옹립했다. 그리고 1084년 3월 31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클레멘스 3세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대관식을 받으며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그레고리오 7세는 산탄젤로 성에서 저항을 계속하며 동맹인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구원을 요청했다.[4] 1084년 5월 27일,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끄는 노르만 군대가 로마에 도착하여 하인리히 4세의 군대를 몰아냈다.[5] 그레고리오 7세는 구출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노르만 군대가 로마를 약탈하면서 로마 시민들의 거센 비난에 직면했다. 결국 그는 노르만족의 보호 아래 로마를 떠나 살레르노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병을 얻어 1085년 5월 25일 사망했다.[6] 그의 마지막 말은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했으니, 추방당한 채 죽노라"였다고 전해진다.[7]

4. 6. 노르만의 군사개입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재위 1073-85)는 노르만족인 로베르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로베르는 교황의 안위에 직접적인 관심은 없었으나,[79] 독일로마를 점령하여 자신의 세력에 위협이 되자 개입할 필요성을 느꼈다. 1084년 5월, 로베르는 3만 6,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했다. 이 소식을 들은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이미 로마에 온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하고 불필요한 전투를 피하기 위해 로베르가 도착하기 3일 전에 도시에서 철수했다.

한편, 로마 내부에서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로베르 군대의 진입을 막기 위해 농성에 들어갔다. 이들은 교황의 지나치게 급진적인 개혁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교황이 서임권 분쟁을 일으켜 독일과의 갈등을 초래하고 그로 인해 3년간 많은 고통을 겪었다고 생각했다.

로베르는 군대 본진을 로마 동쪽의 로렌초 성문 밖에 주둔시켜 로마 수비군의 주의를 끌었다. 그리고 밤을 틈타 약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중 방어가 비교적 허술한 라티나 성문 쪽을 기습 공격했다. 이 전략은 성공적이었고, 로베르의 병사들은 성 안으로 진입하여 도시 곳곳에 불을 지르며 혼란을 일으켰다. 이 혼란을 틈타 로베르의 군대는 빠르게 도심을 가로질러 산탄젤로 성으로 진입하여 교황을 구출했다. 이 구출 작전 과정에서 저항 세력과의 시가전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대규모 약탈이 자행되었다.

약탈이 끝난 후 로마는 크게 파괴되었다. 특히 이번 약탈에서는 도시 곳곳에 방화가 일어나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는데, 성당들이 주요 목표가 되었다. 당시 성당들은 견고한 석조 건물로서 군사적 요새 역할도 했기 때문에,[80] 성당에 불을 지른 것은 그곳에 숨어 저항하는 세력을 소탕하기 위한 조치였다.

4. 7. 교황의 망명과 사망

로베르토 기스카르가 이끄는 군대로 인해 하인리히 4세가 물러나자 교황은 다시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교황과 제휴한 로베르 군대의 약탈 행위에 대해 로마 시민들이 분개하며 로마를 떠나라고 압박했다. 어쩔 수 없이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망명길에 올랐다. 로베르는 교황을 호위하여 남쪽 살레르노로 철수했다. 사실상 로마에서 축출당한 교황은 망명지에서 말년을 보내다 망명 1년 만인 1085년 5월 25일에 그곳에서 사망했다.[81][6] 교황은 숨을 거두면서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했다. 이로 인해 나는 망명지에서 죽는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7] 그레고리오 7세는 선종하기 3일 전에 하인리히 4세와 대립 교황 클레멘스 3세로 즉위한 라벤나의 귀베르트를 제외하고, 자신이 파문을 선고했던 모든 사람을 사면하였다.

4. 8. 하인리히 4세의 말년

무력을 동원하여 서임권 투쟁에서 승기를 잡은 하인리히 4세의 말년은 순탄치 않았다. 장남 콘라트가 토스카나의 마틸다와 벨프 가문의 영향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으나, 하인리히 4세는 이를 진압하고 콘라트를 공동왕에서 폐위시켰다. 1098년에는 차남 하인리히 5세를 공동왕위에 올리며[82]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제국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았으나, 하인리히 5세는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하인리히 4세는 교황과의 화해를 모색하며 십자군 참여를 선언했고, 하급 귀족을 중용하고 유대인 및 강제 개종자에 대해 온건한 정책을 펼치는 등 민중을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은 기존 귀족 세력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귀족들의 반발로 인해 자신의 왕위 계승에 차질이 생길 것을 염려한 하인리히 5세는 1105년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 하인리히 4세를 폐위시키고 감금했다.

결국 하인리히 4세는 1105년 12월 31일 퇴위를 강요당했으며, 하인리히 5세는 아버지가 내세웠던 대립교황들의 정당성을 부인하도록 만들었다. 하인리히 5세는 1106년에 공식적으로 왕위에 올랐고, 재기를 시도하던 하인리히 4세는 같은 해에 사망했다.

서임권 투쟁은 수십 년간 지속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교황은 독일 내 반란 세력을 지원하며 황제의 권력을 약화시키려 시도했고 점차 성공을 거두었다. 하인리히 4세의 통치 말기에는 왕국의 영토가 축소되고 권력이 쇠퇴했으며, 많은 제후들이 지속적으로 또는 산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하인리히 4세가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를 진정한 교황이라고 주장했던 것은 초기에는 일부 귀족들과 독일 주교들의 지지를 얻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지지는 점차 약화되었다. 독일 왕이 교황을 임명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점차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오토 왕조 시대의 제국 시스템은 하인리히 4세의 통치 아래 사실상 약화되었다.

5. 보름스 협약

하인리히 4세의 뒤를 이은 하인리히 5세는 독일 내에서의 세력 기반이 안정되지 않아 서임권 투쟁의 종결을 서둘렀다.[27] 몇 차례의 교섭이 이루어진 끝에, 최종적으로 1122년 보름스 협약이 체결되어 약 50년간 지속된 서임권 투쟁은 일단락되었다.[27] 이 협약은 성직 서임권은 교황이 가지지만, 교회의 토지나 재산 등 세속적인 권리는 왕(황제)이 수여한다는 타협안이었다.[27]

보름스 협약의 문구는 모호했고 일부 문제는 회피되었으며,[22] 황제는 여전히 분쟁이 있는 선거를 결정하는 등 독일 교회에 대한 어느 정도의 권한을 유지했다.[20][22] 그러나 황제는 이전 시대 왕들이 가졌던 신성한 권위를 상당 부분 잃었으며, 그의 권력은 돌이킬 수 없이 약화되었다.[20] 특히 이 협약을 통해 왕이나 황제조차 평신도이며 그의 권력은 적어도 도덕적으로 제한된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이는 왕권신수설에 큰 타격을 주었다.[22]

한편, 그레고리오 7세와 그 후임 교황들이 추진했던 개혁 중 성직자의 독신주의 확립은 가장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었다. 성직매매는 부분적으로 억제되었으나, 세속 군주의 서임권 개입을 완전히 배제하는 데는 제한적인 성공만을 거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름스 협약 이후 교회는 전반적으로 위상과 권력이 성장하는 결과를 맞이했다.[21]

5. 1. 교회의 중앙집권화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사망한 후 선출된 교황 빅토르 3세는 로마의 복잡한 정치 상황 때문에 교황으로서의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웠다. 빅토르 3세가 사망하고 1088년 3월에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새로운 교황으로 즉위했지만, 당시 로마는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가 장악하고 있어 들어갈 수 없었다. 우르바노 2세는 정통 교황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지키고 그리스도교 세계 전체에 대한 합법적인 교황 권위를 확립하는 것을 가장 시급한 과제로 여겼다.[83] 이를 위해 그는 북이탈리아와 프랑스 등지에서 공의회를 개최하며 적극적으로 활동했고, 이를 통해 대립교황을 점차 고립시켰다. 특히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십자군 원정을 호소한 것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그 영향력을 바탕으로 마침내 대립교황을 축출하고 로마에 입성할 수 있었다. 우르바노 2세는 재위 기간 동안 그레고리오 7세 시대의 개혁 정신을 이어받아 교회의 통치권을 강화하고 추기경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또한, 세속 국가의 왕실 조직을 참고하여 교황청 조직을 정비함으로써 교회의 중앙집권화 기초를 다졌다.[84]

5. 2. 하인리히 5세

1105년 12월 31일, 하인리히 4세는 아들 하인리히 5세에 의해 퇴위를 강요당했다. 하인리히 5세는 교황을 지지하며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었고, 아버지가 사망하기 전에 그의 대립교황들의 정통성을 부인하도록 만들었다.

하인리히 5세는 즉위 후 아버지의 정책을 답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신속한 조치를 취하려 했다. 그러나 독일에서 주교를 임명하자 교황 파스칼 2세는 이를 비판했다. 1111년, 하인리히 5세는 서임권 분쟁 해결과 황제 대관식을 위해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원정을 실시했다.[85] 당시 세력이 약했던 교황 파스칼 2세는 타협안, 즉 실패한 '''1111년 협약'''을 제안할 수밖에 없었다. 이 협약 초안은 황제가 서임권을 포기하는 대신, 독일 교회는 황제에게 토지와 세속적 권리를 양도하고 순수한 영적 교회로 남는다는 급진적인 내용이었다.[9][85] 이를 통해 하인리히 5세는 논쟁의 대상이었던 교회 소유 토지에 대한 왕국의 통제력을 강화하고, 교회는 세속적 간섭에서 벗어나 자율성을 확보하며, 하인리히 5세는 황제로 즉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대관식 도중 이 협약 내용이 발표되자, 이를 반대하는 주교와 귀족들이 폭동을 일으켰다.[85] 하인리히 5세는 교황과 추기경들을 체포하여 두 달 동안 투옥시킨 후, 황제의 서임권 행사를 인정하도록 강요하여 동의를 얻어냈다.[85][10] 대관식을 마치고 독일로 돌아갔으나, 로마에서는 강압에 의한 협정은 무효라는 선언과 함께 하인리히 5세에 대한 파문이 이어졌다(1112년).[85]

파문으로 인해 하인리히 5세의 서임권 행사는 순탄치 않았고, 아버지 시대와 마찬가지로 독일 내에서 반란이 발생했다. 그는 독일 내 반란을 수습한 후 1117년 다시 이탈리아 원정길에 올랐다. 새로운 교황 젤라시오 2세를 로마에서 추방하고 대립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를 옹립하며 서임권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독일 내 상황이 점차 황제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 귀족들은 황제에게 교황과의 원만한 합의를 압박했고, 결국 입지가 좁아진 하인리히 5세는 교황 갈리스토 2세가 보름스로 보낸 사절단과 새로운 협상을 벌여 1122년 보름스 협약을 맺게 되었다.[27][85]

보름스 협약은 수십 년간 지속된 서임권 투쟁을 일단락짓는 타협안이었다. 주요 내용은 성직 서임권은 교황이 가지되, 주교에게 토지나 재산 등 세속적인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황제가 한다는 것이었다.[27][8] 이 협약으로 하인리히 5세는 파문에서 벗어나 합법적인 황제로 다시 인정받았다.[8] 그러나 황제는 이전 오토 왕조 시대만큼 교회에 대한 통제력을 갖지 못했으며, 그의 권력은 돌이킬 수 없이 약화되었다.[8][20] 반면 교회는 이 투쟁을 통해 위상과 권력을 더욱 강화하게 되었다.[21]

하인리히 5세는 보름스 협약 체결 3년 후인 1125년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그는 조카인 슈바벤 공작 슈바벤의 프리드리히 2세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독일 제후들과 성직자들은 로타르 3세를 새로운 왕으로 선출했다. 이로 인해 슈타우펜 가문(호엔슈타우펜 가문)과 로타르 3세 지지 세력 사이에 오랜 내전이 시작되어, 결국 호엔슈타우펜 왕조 프리드리히 1세의 집권으로 이어졌다.[11]

5. 3. 보름스 협약

1122년 9월 23일, 교황청에서 파견된 3명의 추기경과 황제 하인리히 5세는 3주간의 협상 끝에 독일 보름스에서 타협안에 합의했다.[86][27] 이 협약을 보름스 협약( Concordatum Wormatiensela )이라고 부르며,[15] 약 50년간 지속된 서임권 투쟁을 일단락지었다.[90] 교황 측에서는 이를 '칼릭스티눔 조약'이라고도 불렀는데, '정교 조약'이라는 용어 자체는 1434년 니콜라우스 쿠자누스가 사용하기 전까지는 쓰이지 않았다.[16] 현대적 의미의 정교 조약은 교황청과 국가 간의 관계를 정의하는 국제 협약을 의미하며, 이는 제1차 십자군 이후인 1098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협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독일 내 주교수도원장은 교회법에 따라 성직자들이 선출한다.[87]
  • 선출된 성직자는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황제로부터 봉신으로서 영지와 같은 세속적 권력을 받는다.[87]
  • 종교적 권능과 교구에 대한 인정은 교황으로부터 받는다.[87]
  • 후보자가 여러 명일 경우, 황제가 최종 결정권을 가질 수 있다.[87] 또한 황제는 마음에 들지 않는 후보에게 세속적 권력(신서) 부여를 거부할 권한을 가져, 여전히 주교 선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88]
  • 선거에는 황제나 대리인이 입회할 수 있으나, 부르고뉴와 교황령에서의 선거는 예외였다.[89]


이 협약으로 황제가 일방적으로 성직자를 임명하던 방식은 폐지되었고, 지나치게 부적절한 인물을 임명하기는 어려워졌다. 선출 과정에 문제가 있을 경우 교황에게 탄원할 수 있게 되어 성직 임명의 기준이 이전보다 향상되었다고 평가받는다.[89]

그러나 보름스 협약은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기보다는 타협의 성격이 강했으며, 교황과 황제 양측 모두를 완전히 만족시키지는 못했다.[90] 협약의 문구는 모호한 부분이 있었고, 일부 문제는 회피되었다.[2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협약은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황제가 신의 대리인으로서 성직을 부여한다는 신성정치적 성격은 상실되었고,[91] 왕이나 황제도 평신도이며 그 권력은 도덕적으로 제한된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는 왕권신수설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22] 결과적으로 황제의 권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특히 북부 이탈리아에 대한 영향력이 줄어들었다.[91]

이미 10세기 초 귀족들이 투표로 황제를 선출하게 되면서 약화되기 시작한 황제권은 서임권 투쟁의 결과로 더욱 약화되었다.[91] 이는 독일 지역의 분권화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지방 영주들은 더욱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독일 지역은 프랑스, 잉글랜드 등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중앙집권적인 통일 국가를 형성하게 된다.[91][23] 프랑스, 잉글랜드, 스페인 등 다른 기독교 국가에서는 왕이 교회의 권위를 바탕으로 자신의 권력을 확립하고 귀족 세력을 통제할 수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20]

서임권 투쟁과 보름스 협약은 정치적인 영향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영향도 남겼다. 오랜 분쟁은 독일 지식인 사회의 에너지를 소진시켰고, 이로 인해 독일은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서 일어난 철학, 법학, 문학, 예술의 발전에 뒤처지게 되었다. 11세기 중반까지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였던 독일 수도원들의 위상이 약화되었고, 유럽의 다른 지역들보다 대학 설립도 늦어졌다 (최초의 독일 대학인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는 1386년 설립).[24]

한편, 그레고리 7세와 그 후임 교황들이 추진했던 개혁 중 성직자 독신주의는 가장 성공적이었고, 성직매매는 부분적으로 억제되었다. 세속 군주의 서임권 개입에 대해서는 제한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나, 보름스 협약 이후 교회는 전반적으로 위상과 권력이 성장했다.[21]

6. 잉글랜드의 서임권 논쟁

잉글랜드 왕국에서도 서임권을 둘러싼 군주와 교황 간의 분쟁이 비슷한 시기에 있었다. 정복자 윌리엄은 자신의 정복 행위와 왕권에 대해 교황 알렉산데르 2세의 축복을 받았으나, 이후 교황이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을 근거로 봉토에 대한 충성 서약을 요구했을 때는 이를 거부했다.[12] 평신도에 의한 서임 금지령은 윌리엄 휘하 주교와 수도원장들의 충성심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잉글랜드의 헨리 1세 시대에는 웨스트민스터와 로마 사이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이 논쟁으로 캔터베리 대주교 캔터베리의 안셀름은 중재를 포기하고 수도원으로 은퇴하기도 했다. 헨리 1세의 주요 조언자 중 한 명인 멜랑의 로버트가 파문당하기도 했으나, 국왕 자신에 대한 파문 위협은 실행되지 않았다. 이는 당시 교황청이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4세와의 투쟁에서 잉글랜드의 지원이 필요했고, 계획 중이던 십자군 원정에도 잉글랜드의 협조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헨리 1세는 요크 대주교에게 왕권의 신성함과 관련된 전통을 수집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역사가 노먼 캔터는 이 결과물인 '요크의 익명 작가' 논문이 중세 초기 정치 이론 연구에는 흥미롭지만, 행정 및 법률 관료제를 중시했던 앵글로-노르만 군주의 현실적인 시각과는 거리가 있다고 평가했다.

결국 1107년 런던 협약을 통해 타협이 이루어졌다. 이는 이후 보름스 협약의 모델이 되었다. 헨리 1세는 고위 성직자를 임명할 때 영적 직무를 상징하는 반지와 목장(牧杖)을 수여하는 권리를 포기했다. 대신 교회는 주교가 서임식에서 봉건적 신종서약(commendatiola)을 한 뒤, 국왕에게 직접 "세속 재산"(주교직에 부속된 토지 재산)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도록 하는 관행을 인정했다. 이는 다른 세속 봉신들과 동일한 절차였다.[12] 잉글랜드에서는 노르만 정복 이후 왕권이 강했기 때문에, 프랑스와 달리 봉건제 하에서도 지방 영주들의 권력이 크게 분산되지 않았다.

헨리 1세는 점차 수도원 출신 학자 대신 세속적인 성직자들을 재무부에 등용했으며, 이들에게 주교나 수도원장 직위를 수여하기도 했다. 또한 교회 토지에서 병력을 동원하는 기존 방식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군역세(scutage) 제도를 확대했다. 독일의 경우와 달리, 잉글랜드의 헨리 1세는 서임권 투쟁을 통해 왕의 세속적 권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이 갈등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잠재되어 있다가, 잉글랜드의 헨리 2세 치하의 토머스 베켓 사건, 1217년의 대헌장, 양도금지법, 그리고 잉글랜드의 헨리 7세 시대의 용익권(uses) 관련 분쟁 등을 거쳐 잉글랜드의 헨리 8세 시대에 이르러 잉글랜드 종교개혁으로 이어지게 된다.[13][14]

참조

[1] 간행물 How the Pope Got His Political Muscle
[2] 논문 Sia fatta la mia volontà
[3] 논문 Women at Canossa. The Role of Elite Women in the Reconciliation between Pope Gregory VII and Henry IV of Germany (January 1077) https://storicame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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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서적 The Civilization of the Middle 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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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웹사이트 How the world's first concordat came about (documents and commentary) http://www.concordat[...]
[13] 서적 The English Church in the Eleventh and Twelfth Centuries Adam & Charles Black
[14] 서적 The Struggle for Mastery: The Penguin History of Britain Penguin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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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서적 서양 중세사 집문당 1989-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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