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자유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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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덴마크 자유군단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의 지원을 받아 덴마크인으로 구성되어 소련에 대항하여 싸운 군사 부대였다. 1941년 독소전쟁 발발 후 독일의 요청으로 창설되었으며, 덴마크 정부의 공식적인 승인 여부를 두고 논란이 있다. 약 1,000명의 지원병으로 시작하여 동부 전선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여러 지휘관을 거쳐 1943년 5월 해산되었다. 자유군단 덴마크에는 약 6,000명의 덴마크인이 복무한 것으로 추정되며, 해산 후에는 제11SS 의용기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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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자유군단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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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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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덴마크어) | Frikorps Danmark |
명칭 (독일어) | Freikorps „Danmark“ |
존속 기간 | 1941년–1943년 |
국가 | 덴마크 |
소속 | [[파일:Flag Schutzstaffel.svg|23px]] 무장친위대 |
병과 | 보병 |
규모 | 총 6,000명 (1941년–1943년) |
지휘관 | |
주요 지휘관 | 해당사항 없음 |
2. 역사
2. 1. 창설 배경
1939년 덴마크는 나치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독일은 1940년 4월 9일, 영국 침략으로부터 덴마크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덴마크 점령을 단행하며 이 조약을 사실상 파기했다. 크리스티안 10세 국왕과 덴마크 정부는 독일의 공중 폭격을 우려하여, 명목상의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는 대가로 독일의 보호를 받아들이고 덴마크의 "평화적 점령"을 허용했다. 이후 덴마크는 독일을 외교적,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등 협력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독일 외교관 체실 폰 렌테-핑크(Cécil von Renthe-Fink)는 덴마크 국왕과 내각에 전권대사(Reichsbevollmächtigter)로 임명되어 덴마크 정부를 감독했다.1941년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독일은 덴마크에게 소련에 맞서 싸울 군사 부대를 창설해 달라고 요청했다. 1941년 6월 29일, 독일의 소련 침공 7일 후, 덴마크 나치당 신문인 ''파드레란데트''("조국")는 자유군단 덴마크의 창설을 선포했다. 덴마크 외무부 장관 에리크 스카베니우스는 독일 전권대사와 협정을 맺어, 이 군단에 합류하려는 덴마크 왕립 육군의 장교와 병사들에게 휴가를 주고 기존 계급을 유지하도록 허용했다. 덴마크 내각은 "홀베크 제5 포병 연대장 크리스티안 페데르 크리싱 중령이 덴마크 왕립 정부의 동의를 받아 자유군단 덴마크의 지휘를 맡았다"는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자유군단 덴마크는 1941년 무장친위대(Waffen-SS)가 창설한 "4개의 국가 군단" 중 하나였으며, 1941년에 모집된 초기 병력은 1,164명이었다.
자유군단 덴마크의 창설 과정에서 덴마크 정부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오늘날에도 논란이 있다. 일부에서는 이 군단이 히틀러를 위해 싸운 외국인 의용군 부대 중 유일하게 자국 정부의 공식적인 승인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반면 다른 이들은 덴마크 정부가 군단의 창설 자체를 주도한 것은 아니며, 단지 그 창설을 승인했을 뿐이라고 본다.
2. 2. 부대 운용

약 1,000명의 신병으로 구성된 자유 덴마크 군단은 1941년 7월 말, 훈련을 위해 함부르크의 랑겐호른 병영으로 보내졌다. 9월 15일까지 작전 수행이 가능하다고 판단되어 폴란드의 오빈스카로 파견되었다.
초대 사령관이었던 크리스티안 페데르 크리싱 중령은 나치즘에 대한 이념적 부적합성을 이유로 1942년 2월 해임되었다. 그는 이후 포병으로 전출되어 장군으로 군 경력을 마쳤다.
크리싱의 후임으로는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 폰 샬부르크가 임명되었다. 샬부르크는 반공주의자였으며 DNSAP의 당원이었다. 그는 러시아에서 자란 덴마크계 러시아 귀족으로, 1917년 러시아 혁명의 후유증을 직접 목격한 경험이 있었다.
1942년 5월 8일, 군단은 최전선으로 이동하여 일리멘 호 남쪽 데먄스크와 노브고로드 부근에서 전투를 벌였다. 샬부르크는 6월 2일 밤 전투 중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은 독일인 후임자 한스 알베르트 폰 레토우-보르벡 역시 며칠 만에 전사했다. 7월 11일, 덴마크 장교 크누드 뵈르게 마르틴센이 군단의 새로운 지휘관이 되었다.
군단은 1942년 8월부터 10월까지 덴마크로 귀국했으나, 점령군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민간인들로부터 많은 적대감을 샀다. 11월 13일, 군단은 라트비아의 옐가바로 재배치되었다. 처음에는 파르티잔 활동을 진압하기 위해 배치되었지만, 이후 최전선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12월에는 독일의 제1 SS 보병 여단과 함께 벨리키예 루키 전투에서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자유 덴마크 군단은 1943년 4월 최전선에서 철수하여 뉘른베르크 인근 바이에른의 그라펜뵈르 훈련장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1943년 5월 6일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 해산된 군단의 병력 대부분은 제11 SS 의용 기갑척탄병 사단 노르트란트에 편입되어 SS-기갑척탄병 연대 24 "덴마크" (SS-Panzergrenadier-Regiment 24 "Danmark"|SS-판처그레나디어-레기멘트 24 "단마르크"deu)로 재편성되었다.
2. 3. 해체 이후
자유군단 덴마크에는 약 6,000명의 덴마크인이 복무한 것으로 추정된다.1998년 연구에 따르면, 자유군단 덴마크의 평균적인 신병은 덴마크 나치당의 당원이었거나 덴마크 내 독일 소수 민족의 구성원이었으며, 사회적으로 매우 광범위하게 모집되었다. 덴마크 역사가 보 리데고르는 "국민과 군단 사이의 관계는 얼어붙은 듯 차가웠고, 휴가를 나온 군단병들은 군단 자원병들을 대량으로 경멸하는 시민들과 수없이 싸움을 벌였다"고 언급한다. 리데고르는 1941년 다음과 같은 수치를 제시한다. 독일군 복무를 신청하여 승인된 덴마크 시민은 6,000명이었으며, 이 중 1,500명이 덴마크 내 독일 소수 민족에 속했다. 처음 적극적인 복무를 자원한 12,000명 이상의 덴마크인 중 절반은 현역 복무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3. 주요 지휘관
순서 | 사진 | 계급 | 이름 | 재임 시작 | 재임 종료 | 비고 |
---|---|---|---|---|---|---|
1 | -- | SS-상급돌격대지도자 | 크리스티안 페데르 크뤼싱 | 1941년 7월 19일 | 1942년 2월 23일 | |
대행 | -- | SS-최상급돌격지도자 | 크누드 뵈르게 마르틴센 | 1942년 2월 23일 | 1942년 2월 27일 | 사령관 대행 |
2 | -- | SS-상급돌격대지도자 |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 폰 샬부르크 | 1942년 3월 1일 | 1942년 6월 2일 | 재임 중 사망 |
대행 | -- | SS-돌격대지도자 | 크누드 뵈르게 마르틴센 | 1942년 6월 2일 | 1942년 6월 9일 | 사령관 대행 |
3 | -- | SS-상급돌격대지도자 | 한스알베르트 폰 레토우보르베크 | 1942년 6월 9일 | 1942년 6월 11일 | 재임 중 사망 |
4 | -- | SS-돌격대지도자 | 크누드 뵈르게 마르틴센 | 1942년 6월 11일 | 1943년 3월 21일 | |
대행 | ![]() | SS-돌격대지도자 | 포울 네르고르야콥센 | 1943년 3월 21일 | 1943년 5월 20일 | 사령관 대행 |
3. 1. 크리스티안 페데르 크리싱
크리스티안 페데르 크뤼싱은 덴마크 왕립 육군 출신으로, 덴마크 자유군단의 초대 지휘관을 맡았다.3. 2.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 폰 샬부르크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 폰 샬부르크는 덴마크계 러시아 귀족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강한 반공주의 성향을 가졌으며, 덴마크 자유군단의 지휘관을 맡았다. 1942년 6월 동부 전선에서 전투 중 사망했다.3. 3. 크누드 뵈르게 마르틴센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 폰 샬부르크 사망 이후, 덴마크 자유군단의 지휘관을 맡았다. 또한 샬부르크 군단을 창설하여 반나치 인사에 대한 테러 활동을 주도했다.3. 4. 한스알베르트 폰 레토우보르베크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 폰 샬부르크의 후임으로 잠시 덴마크 자유군단을 지휘했으나, 곧 전사했다.3. 5. 포울 네르고르야콥센
포울 네르고르야콥센 Poul Neergaard-Jacobsendan은 덴마크 자유군단의 마지막 지휘관 대행이었다. 그는 군단 해체 직전에 잠시 동안 이 직책을 맡았다.4. 논란
(내용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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