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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기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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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기선우는 기원전 58년부터 기원전 56년까지 흉노를 통치했던 선우이다. 그는 악연거제선우가 호한야선우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후, 우현왕과 도융기의 옹립을 받아 선우가 되었다. 도기선우는 호한야선우를 공격하여 세력을 확장했지만, 이후 흉노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여러 선우가 난립하는 혼란을 겪었다. 기원전 57년에는 다섯 명의 선우가 병립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도기선우는 호한야선우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자살했다. 그의 사후, 흉노는 호한야선우에게 일시적으로 통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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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기선우 - [인물]에 관한 문서
도기선우
작위
대립 탱리고도선우재위: 기원전 58년 - 기원전 56년
일축왕재위: 기원전 60년 - 기원전 58년
개인 정보
박서당
가문연제씨
친인척사촌 동생 악연구제선우, 윤진선우

2. 생애

기원전 58년 호한야선우에게 목숨을 위협받던 좌대저거 도륭기와 우현왕은 일축왕 박서당을 옹립하여 도기선우로 삼고, 수만 명의 병사로 동쪽의 호한야선우를 공격하여 호한야선우 군을 패주 시켰다. 도기선우는 장남 도도오서를 좌곡려왕, 막내아들 고모루두를 우곡려왕으로 삼아 선우정(수도)에 머물게 했다.[1]

기원전 57년 가을, 전 일축왕 선현선의 형 우욱건왕과 오자도위에게 각각 2만 기병을 주어 동방에 주둔시켜 호한야선우에 대비하게 했다. 이때 호걸왕과 유리당호의 참언에 넘어가 우현왕 부자를 죽였고, 나중에 진상을 알고 유리당호를 죽였다. 호걸왕은 의심 끝에 달아나 호걸선우로 자립했고, 우욱건왕도 거리선우로 자립, 오자도위도 오자선우로 자립하여 호한야선우까지 무려 다섯 명의 선우가 난립하게 되었다.[1]

도기선우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거리선우를 공격하고, 도륭기에게 오자선우를 치게 하여 오자선우와 거리선우는 패주하여 서북쪽의 호걸선우와 연합하여 4만 군세를 이루었다. 호걸선우와 오자선우는 선우 칭호를 버리고 거리선우를 떠받들었다. 도기선우는 좌대장과 도위에게 4만 기를 주어 호한야선우에 대비하게 하고, 자신은 4만 기를 거느리고 거리선우를 무찔렀다. 거리선우는 달아났고, 도기선우는 서남쪽으로 가 흡돈에 머물렀다.

기원전 56년, 호한야선우의 동생 우록리왕의 공격으로 1만여 명을 잃자, 6만 명을 거느리고 천 리를 가서 호한야선우의 4만 군과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여 자살했다.[1]

2. 1. 초기 생애와 일축왕 즉위

악연구제선우가 서자 악연구제선우와 사이가 멀고 정통성이 있는 일축왕 선현전이 기원전 60년에 한나라로 투항해, 그를 대신해 악연구제선우에게서 일축왕으로 임명되었다.[1]

악연구제선우가 기원전 58년 호한야선우와 싸우다 동생 우현왕에게 버림받고 자결했는데, 이에 홀로 선우가 된 호한야선우가 우현왕을 암살하려 했기에 우현왕과 도륭기에게 옹립돼 도기선우라 일컬었다.[1] 그리고 수만 명의 군사로 동쪽의 호한야선우를 쳐 패주시키고, 장자 도도오서를 좌록리왕, 막내아들 고무루두를 우록리왕으로 삼아 선우정을 맡아 남게 했다.[1]

2. 2. 도기선우 즉위와 권력 투쟁

악연구제선우 때, 정통성이 있는 일축왕 선현전기원전 60년에 한나라로 투항하자, 악연구제선우는 그를 대신해 사촌 형인 박서당을 일축왕으로 임명했다.[1]

기원전 58년 악연구제선우가 호한야선우와 싸우다 동생 우현왕에게 버림받고 자결했다. 이에 호한야선우가 우현왕을 암살하려 했기에 우현왕과 도륭기는 박서당을 옹립하여 도기선우라 칭했다.[1] 도기선우는 수만 명의 군사로 동쪽의 호한야선우를 쳐 패주시키고, 장자 도도오서를 좌록리왕, 막내아들 고무루두를 우록리왕으로 삼아 선우정(수도)을 맡게 했다.[1]

기원전 57년 가을, 도기선우는 선현전의 형 우욱건왕과 오자도위에게 2만 기를 주어 동방에서 호한야선우를 막게 했다.[1] 그런데 호걸왕과[1] 유리당호의 참언에 넘어가 우현왕 부자를 죽였고, 나중에 진상을 알고 유리당호를 죽였다. 이에 호걸왕이 의심 끝에 달아나 호걸선우로 자립, 우욱건왕도 거리선우로 자립, 오자도위도 오자선우로 자립해 호한야까지 무려 다섯 명의 선우가 난립했다.[1]

도기선우는 직접 거리선우를 치고 도륭기에게 오자선우를 치게 하니, 둘 다 패주해 서북의 호걸선우와 연합해 4만 군세를 이루었다.[1] 호걸선우와 오자선우는 선우 칭호를 버리고 거리선우를 떠받들었다.[1] 이에 도기선우는 좌대장과 도위에게 4만 기를 주어 호한야선우에 대비하게 하고 4만 기를 거느리고 거리선우를 무찔렀다.[1] 거리선우가 달아나니 도기선우는 서남으로 가 흡돈에 머물렀다.[1]

기원전 56년, 호한야선우의 동생 우록리왕의 공격으로 도기선우는 호한야 군 만여 명을 잃었다.[1] 이에 6만 명을 거느리고 천 리를 가서 호한야선우의 4만 군과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여 자살했다.[1] 이후 도륭기와 우록리왕 고무루두는 한나라로 망명했고,[1] 거리선우는 호한야에게 투항하여 일시적으로 흉노의 혼란기는 끝나게 된다.[1]

2. 3. 5선우 난립과 내분

기원전 58년, 호한야선우에게 목숨을 위협받던 좌대저거 도륭기와 우현왕은 일축왕 박서당을 옹립하여 도기선우로 삼고, 수만 명의 병사로 동쪽의 호한야선우를 공격했다. 호한야선우는 패주했고, 도기선우는 장남 도도오서를 좌곡려왕, 막내아들 고모루두를 우곡려왕으로 삼아 선우정(수도)에 머물게 했다.[1]

기원전 57년 가을, 도기선우는 전 일축왕 선현선의 형 우욱건왕과 오자도위에게 각각 2만 기병을 주어 동방에 주둔시켜 호한야선우에 대비하게 했다. 이때 호걸왕(呼揭王)과 유리당호의 참언에 넘어가 우현왕 부자를 죽였고, 나중에 진상을 알고 유리당호를 죽였다. 호걸왕은 의심 끝에 달아나 호걸선우로 자립했고, 우욱건왕도 거리선우로 자립, 오자도위도 오자선우로 자립했다. 이로써 호한야선우까지 포함하여 무려 다섯 명의 선우가 난립하게 되었다.[1]

도기선우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거리선우를 공격하고, 도륭기에게 오자선우를 치게 했다. 오자선우와 거리선우는 패주하여 서북쪽의 호걸선우와 연합하여 4만 군세를 이루었다. 호걸선우와 오자선우는 선우 칭호를 버리고 거리선우를 떠받들었다. 도기선우는 좌대장과 도위에게 4만 기를 주어 호한야선우에 대비하게 하고, 자신은 4만 기를 거느리고 거리선우를 무찔렀다. 거리선우는 달아났고, 도기선우는 서남쪽으로 가 흡돈에 머물렀다.

기원전 56년, 호한야선우의 동생 우록리왕의 공격으로 1만여 명을 잃었다. 도기선우는 6만 명을 거느리고 천 리를 가서 호한야선우의 4만 군과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여 자살했다. 도륭기와 우록리왕 고무루두는 한나라로 망명했고, 거리선우는 호한야에게 투항하여 흉노의 혼란기는 일시적으로 끝나게 되었다.

2. 4. 최후

기원전 56년, 호한야선우의 동생 우록리왕의 공격으로 만여 명의 군사를 잃었다. 이에 6만 명을 거느리고 천 리를 가서 호한야선우의 4만 군과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여 자살했다.[1] 도륭기와 우록리왕 고모루두는 한나라로 망명했고, 거리선우는 호한야에게 투항하여 일시적으로 흉노의 혼란기는 끝나게 된다.

3. 5선우 시대

기원전 57년, 흉노에 내분이 발생하여 여러 선우가 난립하면서 무려 5명의 선우가 병립하는 시대였다.[1]

선우 이름재위 기간
호한야 선우기원전 58년 - 기원전 31년
도기 선우기원전 58년 - 기원전 56년
호계 선우기원전 57년
차려 선우기원전 57년 - 기원전 56년
오적 선우기원전 57년, 기원전 56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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