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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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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는 기원전 1세기의 로마 정치가이자 장군으로, 명문 귀족 가문 출신이다. 그는 술라의 지휘 하에 동맹시 전쟁에 참전하여 군사 경력을 시작했으며, 재무관을 거쳐 집정관을 역임했다. 루쿨루스는 제3차 미트라다테스 전쟁에서 폰투스 왕 미트라다테스 6세를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하였으나, 병사들의 불복종으로 지휘권을 폼페이우스에게 넘겨주었다. 로마로 돌아온 후 정치에 환멸을 느껴 은퇴했으며, 사치스러운 생활과 미식으로 유명해져 그의 이름에서 유래된 "lucullan"이라는 단어는 호화로운 식사를 의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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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루쿨루스의 흉상 (에르미타주 미술관)
루쿨루스의 흉상 (에르미타주 미술관)
본명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로마자 표기Lūcius Licinius Lūcullus
출생기원전 118년
사망기원전 57/56년 (61 또는 62세)
국적로마
정치 경력
직책집정관 (기원전 74년)
군사 경력
복무 기간기원전 91년–66년
참전사회 전쟁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가족 관계
배우자클라우디아
세르빌리아
아버지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어머니카이킬리아 메텔라
관직 경력
트리부누스 밀리툼기원전 89년?
퀘스토르기원전 87년
프로퀘스토르그리스, 기원전 86년
소아시아, 기원전 85년-80년
레가투스술라 휘하, 기원전 86년-85년
아에딜리스 쿠룰리스기원전 79년
프라이토르기원전 78년
프로프라이토르북아프리카, 기원전 77년-76년
집정관킬리키아, 기원전 74년
프로콘술킬리키아, 기원전 73년-68년
소아시아, 기원전 73년-69년
비티니아, 폰토스, 기원전 73년-67년
이탈리아, 기원전 66년-63년
아우구르기원전 56년까지
전쟁 지휘
주요 전투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2. 가문 및 초기 생애

루쿨루스는 명문 리키니우스 씨족 출신으로, 투스쿨룸의 고대 귀족 가문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할아버지는 기원전 151년 집정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이며, 아버지는 기원전 104년 집정관을 역임한 동명이인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이다. 아버지 루키우스는 기원전 104년/3년 시칠리아 지휘(Second Servile War) 중 횡령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기원전 102년경 추방되었다.[5]

어머니 카이킬리아는 유력 귀족 가문인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가문 출신으로, 이 가문은 당대 로마 정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5] 외할아버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칼부스는 기원전 142년 집정관과 기원전 115년~14년 검열관을 역임했다. 외삼촌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는 기원전 109년 집정관과 기원전 102년 검열관을, 또 다른 외삼촌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달마티쿠스는 기원전 119년 집정관과 최고 대제사장을 역임했다. 사촌 카이킬리아 메텔라 달마티카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세 번째 아내였다.[5]

루쿨루스는 어린 시절부터 문학과 철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모두 능통했다. 기원전 89년 군사 트리부누스로 복무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플루타르코스재무관 이전에 동맹시 전쟁술라 휘하 장교로 복무했다고 기록한다.[6] 그는 그리스어로 전쟁사를 저술하기도 했다.[7]

외가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가문(Caecilii Metelli)의 계보
인물관계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고모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칼부스외할아버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외삼촌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사촌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달마티쿠스외삼촌
카이킬리아 메텔라 달마티카사촌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사촌의 남편
카이킬리아 메텔라 칼바어머니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본인


2. 1. 술라와의 관계

루쿨루스는 동맹시 전쟁 당시 술라의 부하로 참전하여 군사적 경력을 시작했다.[8] 기원전 88년 재무관으로 선출되었고, 술라의 로마 진군을 지지한 유일한 재무관이었다.[8] 같은 해 가을, 술라는 루쿨루스를 그리스로 먼저 보내 상황을 파악하게 했다. 루쿨루스는 그리스에서 미트리다테스의 침공을 막고 있던 퀸투스 브루티우스 수라를 대신했다.[9] 술라가 주력군과 함께 도착한 후, 루쿨루스는 다시 그의 재무관으로 복무했다. 그는 남부 그리스에서 미트리다테스와의 전쟁(기원전 87-86년) 중에 사용된 화폐를 주조했는데, 로마 관습에 따라 루쿨루스가 주조한 화폐에는 그의 이름이 새겨져 '루쿨레아'라고 불렸다.[10]

3. 군사 경력

루쿨루스는 기원전 88년 술라의 퀘스토르(재무관)로 선출되어 제1차 미트라다테스 전쟁에 참전했다.[8] 술라가 로마로 진군할 때 그와 함께한 유일한 장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8] 그리스에서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막고 있던 퀸투스 브루티우스 수라를 대신하여[9]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에 대항하여 전쟁(기원전 87-86년)을 치르는 동안 사용된 화폐를 주조했는데, 이 화폐는 '루쿨레아'라고 불렸다.[10]

술라는 루쿨루스에게 동부 지중해 연안의 로마 동맹국들로부터 함대를 모으는 임무를 맡겼다.[11] 루쿨루스는 키레네, 이집트, 키프로스, 로도스 등을 방문하여 함선을 확보했다. 특히 로도스 함대는 해군력과 선원들의 해상 기술로 유명하여 큰 도움이 되었다. 로도스 근해에서 루쿨루스의 함대는 미트라다테스의 함대를 격파했고, 이후 크니도스와 코스를 확보하고 키오스에서 미트라다테스 군대를 몰아냈으며 사모스를 공격했다.[12] 렉톤 곶에서 또 다른 승리를 거두었고, 테네도스 해전에서 미트라다테스의 제독 네오프톨레무스를 물리쳤다.[12] 이후 술라가 에게 해를 건너 아시아로 가는 것을 도왔다. 평화 협정 후 루쿨루스는 아시아에 남아 반란에 대한 술라의 징벌적 금전적 벌금을 징수했지만, 그 부담을 줄이려고 노력했다.[13]

기원전 80년, 루쿨루스는 로마로 돌아와 기원전 79년에 그의 형인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쿨루스와 함께 쿠루레 에딜로 선출되어 화려한 경기를 주최했다.[16] 프라이토르를 거쳐 로마 아프리카 총독직을 맡아 "가장 정의로운 방식으로 아프리카를 통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18]

기원전 74년 집정관에 선출된 루쿨루스는 킬리키아 속주 총독으로 임명되어 미트라다테스 6세와의 전쟁(제3차 미트라다테스 전쟁)을 지휘하게 되었다.[25] 소아시아에서 함대를 징발하여 적의 해군을 토벌하고, 내륙으로 진군하여 미트라다테스를 폰투스로 몰아냈다. 카비라 전투에서 미트라다테스 6세를 격파하고 아르메니아로 도망치게 만들었다.[28][13] 기원전 69년에는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수도인 티그라노케르타를 함락시켰고,[30][31] 기원전 68년 아르탁사타 전투에서 승리했다.[29] 그러나 휘하 부대의 참전 거부로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고, 미트라다테스는 조금씩 영토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결국 루쿨루스는 로마에서 자신의 지휘권을 폼페이우스에게 넘길 것을 요구받았고, 기원전 66년 폼페이우스에게 지휘권을 넘겨주었다.[13]

3. 1. 제1차 미트라다테스 전쟁

기원전 88년 겨울, 술라는 자신의 친구인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와 함께 집정관으로 선출된 후, 루쿨루스를 퀘스토르(재무관)로 선출했다. 루쿨루스는 술라가 로마로 진군했을 때 그와 함께 한 유일한 장교였을 가능성이 높다.[8]

같은 해 가을, 술라는 루쿨루스를 그리스로 먼저 보내 상황을 파악하도록 했다. 루쿨루스는 그리스에 도착하여 북부 그리스에서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막고 있던 퀸투스 브루티우스 수라를 대신했다.[9]

술라가 주력군과 함께 도착했을 때, 루쿨루스는 다시 그의 재무관으로 복무했다. 그는 남부 그리스에서 미트라다테스 6세에 대항하여 전쟁(기원전 87-86년)을 치르는 동안 사용된 화폐를 주조했는데, 로마의 관습에 따라 루쿨루스가 주조한 화폐에는 그의 이름이 새겨져 '루쿨레아'라고 불렸다.[10]

로마군이 아테네를 성공적으로 포위 공격한 후, 술라는 폰투스 군과의 후속 작전과 미트라다테스의 해상 통제권을 막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는 루쿨루스를 동부 지중해 연안의 로마 동맹국들로부터 가능한 한 많은 함대를 모으도록 파견했다. 루쿨루스는 먼저 중요하지만 혼란스러웠던 키레네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로 향했다.[11]

기원전 87-86년 중반 겨울, 루쿨루스는 피레우스에서 그리스 요트 3척과 로도스 경량 이중노선 3척으로 출발하여, 폰투스 함대와 해적 동맹의 세력을 피해 속도를 이용하고 최악의 항해 조건을 활용하려 했다.[12] 그는 처음에 크레타에 상륙하여 도시들을 로마 편으로 끌어들였다고 한다.[12] 거기서 그는 키레네로 건너갔는데, 이곳은 거의 7년간 지속된 격렬한 내전 이후 극심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루쿨루스의 도착은 기원전 94년 로마 공화국에 최초로 행정적으로 편입시킨 프로콘술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가 떠난 이후 처음으로 로마가 공식적으로 개입하면서 이 끔찍한 분쟁에 종지부를 찍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 다음 그는 이집트로 항해하여 프톨레마이오스 9세 소테르 2세 왕으로부터 함선을 확보하려고 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는 환영을 받았지만,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로마와 폰투스 사이에서 안전한 길을 선택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루쿨루스는 키프로스로 항해했고, 길리키아 해적을 피해 로도스(로마의 해군 동맹국)로 갔다. 로도스 사람들은 그에게 추가 함선을 제공했다. 로도스는 해군력과 선원들의 해상 기술로 유명했고, 로도스 함대는 매우 환영받는 지원군이 되었다. 로도스 근해에서 루쿨루스의 함대는 미트라다테스의 함대를 격파했다. 그런 다음 그는 크니도스와 코스를 확보하고 키오스에서 미트라다테스 군대를 몰아냈으며 사모스를 공격했다. 거기서 그는 북쪽으로 진격했다. 루쿨루스는 렉톤 곶에서 또 다른 승리를 거두었다. 렉톤에서 루쿨루스는 미트라다테스 함대가 매복해 있던 테네도스로 항해했다.

테네도스 해전에서 루쿨루스가 미트라다테스의 제독 네오프톨레무스를 물리친 후, 그는 술라가 에게 해를 건너 아시아로 가는 것을 도왔다. 평화가 협정된 후, 루쿨루스는 아시아에 남아 반란에 대한 술라의 징벌적 금전적 벌금을 징수했다. 그러나 루쿨루스는 이러한 부과로 인해 발생한 부담을 줄이려고 노력했다.[13]

3. 2. 제2차 미트라다테스 전쟁

루쿨루스는 기원전 80년에 로마로 돌아와 기원전 79년에 그의 형인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쿨루스와 함께 쿠루레 에딜로 선출되어 화려한 경기를 주최했다.[16]

루쿨루스는 프라이토르로 1년간 로마에서 근무한 후 로마 아프리카 총독직을 맡았다. 이 아프리카 총독직은 술라 이후 시대에 이 속주에서 일반적인 2년 임기였을 가능성이 높다. 루쿨루스는 "''가장 정의로운 방식으로 아프리카를 통치했다''"고 평가받는다.[18] 이는 루쿨루스가 관례적인 순서대로 일반적인 공직을 수행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부분이며, 필헬레네로서의 명성을 고려할 때, 그는 그리스인이 아닌 피지배 민족에게 보여준 존중을 보여준다.

키케로는 항상 속주 행정 책임을 회피했고, 폼페이우스는 정상적인 경력의 모든 측면을 거부하고 군사 지휘권만을 추구하며 평화로운 속주에서의 임무를 거부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루쿨루스는 관대하고 정의로운 성격을 보여주면서도 정치적 전통주의를 보여주었다.

루쿨루스가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후 기원전 76년 또는 기원전 75년에 두 가지 주목할 만한 일이 있었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막내딸 클라우디아와의 결혼과, 마리우스의 언덕 꼭대기 빌라를 미세눔 곶에서 매입한 것이다.

술라는 그의 회고록을 루쿨루스에게 헌정했고, 죽을 때 그의 아들 파우스투스와 딸 파우스타의 후견인으로 그를 임명했는데, 폼페이우스보다 루쿨루스를 더 선호했다.[19]

3. 3. 제3차 미트라다테스 전쟁

기원전 74년 집정관에 선출되었고, 킬리키아 속주 총독으로 임명되어 미트라다테스 6세와의 전쟁을 지휘하게 되었다.[25] 그는 소아시아에 도착하여 이오니아 지방의 그리스 도시들에서 함대를 징발하여 적의 해군을 토벌하고, 내륙으로 진군하여 미트라다테스를 폰투스로 몰아냈다. 초기에는 폰투스의 강력한 기병 때문에 소극적인 전술을 폈으나, 몇 번의 작은 전투에서 승리한 후 카비라 전투에서 미트라다테스 6세를 격파하고 아르메니아로 도망치게 만들었다.[28][13]

기원전 69년, 루쿨루스는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수도인 티그라노케르타를 함락시켰다.[30][31] 기원전 68년 아르탁사타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휘하 부대의 참전 거부로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였다.[29] 그 사이 미트라다테스는 조금씩 영토를 회복하기 시작했고, 루쿨루스는 로마에서 자신의 지휘권을 폼페이우스에게 넘길 것을 요구받고 기원전 66년 폼페이우스에게 지휘권을 넘겨주었다.[13]

3. 4. 폼페이우스와의 갈등

로마에서 루쿨루스의 지휘권을 폼페이우스에게 넘기라는 요구가 거세졌다. 기원전 66년, 폼페이우스에게 지휘권을 넘겨주었다.[26]

4. 정치적 은퇴와 말년

로마로 돌아온 루쿨루스는 반대자들 때문에 기원전 63년에야 개선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32] 정치에 환멸을 느낀 그는 은퇴하여 죽을 때까지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35] 플루타르코스는 루쿨루스가 공적인 일을 그만두고 제대로 통제될 수 없을 정도로 병들었다고 보았거나, 영광에 만족했고, 많은 투쟁과 노고의 불행한 결과가 그에게 안락과 사치의 삶으로 돌아갈 자격을 준다고 느꼈다고 기록했다.[35]

루쿨루스는 동방 전쟁 중 얻은 막대한 재산으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며 여러 곳에 호화로운 별장을 소유했다. 나폴리 근처 별장에는 낚시 연못과 바다로 인공적으로 확장된 부분이 있었다.[37] 폼페이우스는 루쿨루스를 "크세르크세스가 토가를 입은 모습"이라고 자주 언급했다고 플리니우스와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는 전한다.[38][39]

루쿨루스는 동방 전쟁에서 가져온 막대한 재물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다. 영어에서 'lucullan' 이라는 단어는 '사치스러운'이라는 뜻의 형용사인데, 바로 그의 이름에서 나왔다.[41] 그는 루쿨루스의 정원, 나폴리 근처의 거대한 루쿨루스의 별장, 투스쿨룸 근처의 유명한 별장, 미세눔 곶의 별장,[36] 나폴리 만의 니시다 섬의 별장 등 여러 곳에 호화로운 별장을 소유했다. 네아폴리스 근처의 별장에는 낚시 연못과 바다로 인공적으로 확장된 부분이 있었다.[37]

플루타르코스는 루쿨루스가 생애 말년에 정신을 잃었고, 나이가 들면서 간헐적으로 광기의 징후를 보였다고 전한다. 그는 루쿨루스의 형 마르쿠스가 그의 장례식을 주관했고, 그의 묘는 투스쿨룸에 있는 그의 별장 근처에 위치해 있다고 기록했다.[47]

4. 1. 개선식과 정치적 좌절

로마로 돌아온 루쿨루스는 반대자들 때문에 기원전 63년에야 개선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32] 정치에 환멸을 느낀 그는 은퇴하여 죽을 때까지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35]

그의 부재 중 폼페이우스술라의 유언과는 달리 술라의 자녀들에 대한 통제권을 부당하게 장악했고, 폼페이우스의 측근이자 세습 정치 동맹자인 가이우스 멤미우스가 루쿨루스의 개선식 요구에 대한 반대를 조직했다.[32] 멤미우스는 ''루쿨루스의 아시아 개선식에 관하여''라는 연설을 적어도 네 번 했고,[33] 폼페이우스파에 의해 불러일으켜진 루쿨루스에 대한 적대감은 개선식을 거행하는 데 필요한 법률 (''쿠리아투스 법'')의 통과를 3년 동안 지연시킬 정도로 효과적이었다. 이 기간 동안 루쿨루스는 포메리움(pomerium) 외부에 거주해야 했는데, 이는 포럼을 중심으로 한 일상적인 정치 참여를 제한했다.

키케로의 친구로서 일부 문제에 개입하기는 했지만,[34] 정치 생활로 완전히 복귀하는 대신 대부분 사치스러운 여가 생활에 전념했다. 플루타르크에 따르면, 루쿨루스는 공적인 일을 그만두고 제대로 통제될 수 없을 정도로 병들었다고 보았거나, 영광에 만족했고, 많은 투쟁과 노고의 불행한 결과가 그에게 안락과 사치의 삶으로 돌아갈 자격을 준다고 느꼈다고 한다.[35]

루쿨루스는 동방 전쟁 중에 축적한 막대한 재산을 사용하여 사치스러운 삶을 살았고, 여러 곳에 호화로운 별장을 소유했다. 나폴리 근처의 별장에는 낚시 연못과 바다로 인공적으로 확장된 부분이 있었다.[37] 플리니우스와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는 폼페이우스가 루쿨루스를 "크세르크세스가 토가를 입은 모습"이라고 자주 언급했다고 한다.[38][39]

마침내 기원전 63년 카토와 키케로의 정치적 책략 덕분에 부분적으로 개선식을 거행했다.[40] 그의 개선식은 주로 그가 전역 중에 맞서 싸웠던 적들의 무기를 사용하여 플라미니우스 경기장을 장식했기 때문에 기억되었다.[40]

4. 2. 사치스러운 생활과 미식

그는 동방 전쟁에서 가져온 막대한 재물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다. 영어에서 'lucullan' 이라는 단어는 '사치스러운'이라는 뜻의 형용사인데, 바로 그의 이름에서 나왔다.[41] 그는 루쿨루스의 정원, 나폴리 근처의 거대한 루쿨루스의 별장, 투스쿨룸 근처의 유명한 별장, 미세눔 곶의 별장,[36] 나폴리 만의 니시다 섬의 별장 등 여러 곳에 호화로운 별장을 소유했다. 네아폴리스 근처의 별장에는 낚시 연못과 바다로 인공적으로 확장된 부분이 있었다.[37]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는 폼페이우스가 루쿨루스를 "크세르크세스가 토가를 입은 모습"이라고 자주 언급했다고 한다.[38][39]

루쿨루스 저택에서의 여름 만찬 (귀스타브 불랑제(Gustave Boulanger)의 그림, 1877년)


루쿨루스는 연회로 매우 유명해져서 "루쿨루스식(Lucullan)"이라는 단어는 "풍성한", "호화로운", "미식가의"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41]

어느 날, 키케로와 폼페이우스는 루쿨루스의 저녁 식사에 초대받았지만, 루쿨루스가 혼자 먹는 식사가 어떤지 궁금하여 그에게 손님을 위한 식사 준비와 관련하여 노예들과 소통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루쿨루스는 그들을 따돌리고 폼페이우스와 키케로로 하여금 자신이 식사할 방을 지정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자신의 하인들이 각 식당에 대한 특정 서비스 세부 사항에 대해 미리 교육받았다는 것을 알고 아폴로 방에서 식사를 하도록 명령했다. 아폴로 방에서의 저녁 식사에 배정된 표준 금액은 무려 50000드라크마였기 때문에,[42] 키케로와 폼페이우스는 얼마 후 예상치 못한 매우 호화로운 식사를 하게 되었다.

다른 경우에는, 그의 집사가 그날 저녁 손님이 없다는 것을 듣고, 특별히 인상적이지 않은 한 가지 요리만 차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루쿨루스는 그를 나무라며 "뭐야, 오늘 루쿨루스가 루쿨루스와 함께 식사한다는 것을 몰랐느냐?"라고 말했다고 한다.[43]

루쿨루스가 미식에 기여한 다른 것들 중에는, 그는 로마에 앵두(일종의 체리), 살구를 가져왔고, 대규모 양식 시설을 개발했으며, 계절에 관계없이 미식 목적으로 지빠귀를 제공할 수 있는 로마 유일의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비육장을 가지고 있었다. 키케로는 한때 루쿨루스를 '피시나리우스'(Piscinarius) 즉, 어류 애호가라고 불렀다.[44]

루쿨루스와 관련된 다양한 식용 식물 중에는, 그의 이름을 딴 "루쿨루스"라는 품종의 채소 근대(''Beta vulgaris'')가 있다.

4. 3. 문화 활동

루쿨루스는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능통했으며, 어린 시절부터 문학과 철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아르키아스와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철학자인 아스칼론의 안티오쿠스와 평생 친구로 지냈다.[45]

기원전 86년 여름, 알렉산드리아 왕궁에 머물던 루쿨루스는 기원전 1세기 플라톤 학원에서 발생한 소위 소소스 사건이라는 대규모 분열을 목격했다. 그의 친구이자 동료인 아스칼론의 안티오쿠스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학원장 라리사의 필로의 저서를 입수했는데, 그 내용이 극단적인 회의론적 입장을 취하고 있어 안티오쿠스는 자신의 오랜 스승이 저술했다는 사실에 의심을 품을 정도였다. 그러나 필로의 최근 제자들, 특히 티레의 헤라클레이토스는 그 책의 진위를 확신시켰다. 안티오쿠스와 헤라클레이토스는 루쿨루스 앞에서 그 책을 장황하게 분석했고, 그 후 몇 주 동안 로마 일행이 남쪽에서 왕의 도착을 기다리는 동안 안티오쿠스는 필로를 향한 강력한 비판 논문인 ''소소스''를 저술했는데, 이는 필로의 소위 "회의적 학원"과의 결별을 알리는 것이었고, 결국 구 학원이라고 불리는 더 보수적인 별도의 학파의 시작을 알렸다.[45]

그는 투스쿨룸(Tusculum) 별장에 전리품으로 얻은 서적을 소장한 대규모 개인 서재를 마련했고, 후대에 마르쿠스 투리우스 키케로와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소 카토) 등도 이용했다.

4. 4. 죽음

플루타르코스는 루쿨루스가 생애 말년에 정신을 잃었고, 나이가 들면서 간헐적으로 광기의 징후를 보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는 그러한 광기가 실제로는 사랑의 묘약을 복용한 결과인지, 아니면 다른 설명 가능한 원인 때문인지에 대해 다소 모호한 태도를 보인다. 그는 루쿨루스의 급격한 정신적 쇠퇴(그리고 공적인 일에서의 은퇴)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인민당과 같은 정적들의 권력 상승에 대비한 자기 보호를 위해 편리하게 가장한 것일 수도 있다고 암시한다. 당시 정치적 이해관계는 종종 생사가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다.[46] 루쿨루스의 형 마르쿠스가 그의 장례식을 주관했다.

그의 묘는 투스쿨룸에 있는 그의 별장 근처에 위치해 있다.[47]

5. 유산

루쿨루스는 로마로 돌아와서도 반대자들 때문에 기원전 63년에 와서야 개선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정치에 환멸을 느낀 그는 은퇴하여 죽을 때까지 정치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51]

그는 동방 전쟁에서 가져온 재물로 매우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으며, 여러 곳에 대저택을 소유했다. 영어에서 'lucullan'(사치스러운)이라는 형용사는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1563년 네덜란드에서 그려진 악명 높은 부자 시리즈. 왼쪽에서 두 번째가 부유하고 대식가였던 로마의 정무관 루쿨루스


은퇴 후 루쿨루스는 공화정 시대 최고로 일컬어지는 호화 저택을 여러 곳에 지었고, 중근동에서 가져온 방대한 미술품과 서적을 진열했다. 플루타르코스의 「루쿨루스전」에 따르면, 그는 '토가를 걸친 크세르크세스 1세'라고 불릴 정도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또한 식용 체리와 살구를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가져온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루쿨루스는 유럽에서 미식가의 대명사로 여겨지며, 오늘날에도 호화로운 식사를 "루쿨루스식"이라고 한다. 그는 양질의 재료를 확보하기 위해 해수를 끌어들인 연못에서 물고기를 기르고, 새와 소를 사육했으며, 채소와 과일, 치즈를 자가 농원에서 생산했다. 또한 식사하는 방의 장식, 식사 중의 음악과 시문, 나누는 대화, 그리고 이에 어울리는 손님 선별 등에 까다로웠다고 전해진다.[51]

어느 날, 루쿨루스가 혼자 식사한다고 하자 시종은 평소보다 간단한 식사를 준비했다. 그러자 루쿨루스는 "오늘 루쿨루스가 루쿨루스와 함께 식사하는 것을 모르는가?"라며 그에 걸맞는 호화로운 식사를 준비하지 않은 것을 꾸짖었다는 일화가 있다.[51]

평소 루쿨루스의 미식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던 철학자 마르쿠스 투리우스 키케로와 폼페이우스는 호화로운 식사는 연회용이고 혼자일 때는 소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리에서 루쿨루스를 만난 두 사람은 갑작스러운 방문을 청하며 "특별한 준비는 필요 없고, 평소 먹는 것으로 괜찮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루쿨루스가 하인에게 손님용 식사를 지시하지 못하도록 했지만, 루쿨루스는 "식사하는 방만큼은 지시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인은 루쿨루스에게서 "오늘은 아폴론의 방에서 식사한다"는 말만 듣고 저택으로 달려갔다. 세 사람이 루쿨루스의 저택에 도착하자 호화로운 요리가 연이어 나왔고, 두 사람은 크게 놀랐다. 사실 "오늘은 아폴론의 방에서 식사한다"는 것은 은어였고, 루쿨루스 저택에서는 식사하는 방에 따라 식사의 비용과 내용이 정해져 있었다. 아폴론의 방은 가장 호화로운 식사를 하는 방이었고, 서민 연봉이 5천 드라크마이던 시대에 이 방에서의 식사는 한 번에 5만 드라크마였다고 한다.

또한 투스쿨룸(Tusculum)(영문)의 별장에 전리품으로 얻은 서적을 소장한 대규모 개인 서재를 마련했고, 후대에 마르쿠스 투리우스 키케로와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소 카토) 등도 이용했다.

6. 한국과의 관계

루쿨루스는 한국과 직접 관련된 기록은 없다. 하지만 그의 군사 활동은 로마의 동방 진출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는 간접적으로 고대 동아시아 세계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그의 미식과 관련된 이야기는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의 이름은 호화로움과 미식을 상징하는 단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는 식용 체리와 살구를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가져온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으며,[51] 유럽에서 미식가의 대명사로 여겨진다. 현재도 호화로운 식사를 "루쿨루스식"이라고 한다.

7. 평가

루쿨루스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보였지만, 지나친 사치와 병사들과의 소통 부족으로 정치적, 군사적 경력에 오점을 남겼다. 동방에서 가져온 재물로 여러 곳에 대저택을 소유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는데, 영어에서 'lucullan'(사치스럽다는 뜻의 형용사)이라는 단어는 바로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1]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폰투스 왕 미트리다테스 6세와 아르메니아 왕 티그라네스 2세를 상대로 카비라 전투(기원전 72년), 티그라노케르타 전투(기원전 69년), 아르타크사타 전투(기원전 68년)에서 승리하는 등 군사적 업적을 세웠다.[1] 그러나 아시아에서 로마군 유지를 약탈에 의존하고 병사들에게 냉담하게 대했기 때문에 불만을 품은 병사들과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의 활동으로 명성과 군 내 권위가 약해졌다.[1] 결국 군 지휘권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에게 넘어갔고, 기원전 63년에야 개선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1]

정치에 환멸을 느낀 루쿨루스는 은퇴 후 호화로운 생활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1] 그의 삶은 성공과 좌절, 화려함과 쓸쓸함이 공존하는 복합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권력 투쟁의 허무함과 인간적 욕망의 양면성을 드러내는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참조

[1] 서적 Jahrbuch der Oesterreichisches Archiv I. American Journal of Archaeology 1908
[2] 서적 (Unspecified) 1973
[3] 서적 Acad.Pr
[4] 서적 (Unspecified) 1972
[5] 서적 Lucullus
[6] 서적 (Unspecified) 1952
[7] 학술지 Plutarch's characterization of Lucullus https://www.jstor.or[...] 1992
[8] 서적 Waiting for Sulla 1962
[9] 서적 Lucullus, Sulla: A Dictator Reconsidered, Mithridates the Great
[10] 서적 Lucullus, Life of Lucullus
[11] 서적 Lucullus
[12] 서적 Lucullus
[13] 서적 Life of Lucullus
[14] 서적 Lucullus, Life and Campaigns of a Roman Conqueror
[15] 서적 Lucullus, Life and Campaigns of a Roman Conqueror
[16] 서적 Lucullus, (Unspecified)
[17] 서적 Acad.Prior II
[18] 서적 Liber de viris illustribus
[19] 서적 Life of Lucullus
[20] 서적 Life of Lucullus
[21] 서적 Lucullus, Pompey the Great, Athenaeum 65 1987
[22] 서적 Lucullus
[23] 서적 Lucullus
[24] 서적 Prostitutes and Matrons in the Roman World https://books.google[...]
[25] 서적 Life of Lucullus
[26] 서적 Lucullus, Mithridatica
[27] 서적 Life of Lucullus
[28] 서적 Mithridatica, Life of Lucullus
[29] 서적 (Unspecified)
[30] 서적 Camillus, Lucullus
[31] 문서 Roman calendar
[32] 문서 (Unspecified)
[33] 서적 Aeneid
[34] 서적 Life of Lucullus
[35] 서적 Life of Lucullus
[36] 서적 Tacitus Annals 6.50
[37] 서적 Life of Lucullus
[38] 서적 Natural History: Book IX
[39] 웹사이트 Roman History Book II https://penelope.uch[...]
[40] 서적 Life of Lucullus
[41] 사전 lucullan 2024-10-14
[42] 서적 Life of Lucullus
[43] 서적 Life of Lucullus
[44] 서적 Rubicon
[45] 서적 Acad.Pr.
[46] 서적 Life of Lucullus
[47] 간행물 The Villa and Tomb of Lucullus at Tusculum 1942-07-01 #Jul-Sep으로 추정
[48] 서적 From Asculum to Actium: The Municipalization of Italy from the Social War to Augustus OUP Oxford
[49] 서적 Life of Lucullus
[50] 서적 Servilia and her Family
[51] 서적 Life of Lucull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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