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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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어부라는 후한 시대의 흉노 지도자이다. 187년, 그는 아버지 강거선우의 명으로 한나라를 지원하여 유주목 유우에게 속했으나, 흉노인들의 반란으로 강거선우가 살해되자 선우로 즉위했다. 그러나 흉노 내부의 분열로 인해 수복골도후가 선우로 옹립되었고, 어부라는 한나라 내지에서 세력을 유지했다. 이후 여러 세력과 연합하여 조조, 원소 등과 대립했으며, 헌제를 호위하는 등 복잡한 행보를 보이다가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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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조는 후한 말 동탁의 부하로 시작하여 이각, 곽사와 함께 조정을 장악했으나, 이각의 시기로 암살당한 무장이며, 삼국지연의에도 등장한다. - 195년 사망 - 이몽 (후한)
후한 말 동탁을 섬긴 무장 이몽은 반동탁 연합군 토벌에 가담하고 동탁 사후 이각, 곽사와 함께 장안을 공격하여 왕윤 정권을 무너뜨렸으나, 195년 무군중랑장 재직 중 이각에게 살해당했다.
어부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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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어부라 |
한자 표기 | 於夫羅 |
로마자 표기 | Yufuluo |
다른 표기 | 지지시축후 (持至尸逐侯) |
작위 | 선우 |
가계 | |
아버지 | 강거 |
자녀 | 유표 |
재위 | |
즉위 | 188년 |
퇴위 | 195년 |
선대 선우 | 강거 |
후대 선우 | 호주천 |
2. 생애
187년 한나라 황제 영제가 장순과 선비족 토벌을 위해 흉노의 군사를 조달했을 때, 아버지 강거선우의 명령으로 좌현왕으로써 군대를 지휘해 한나라를 돕고, 유주로 가서 유주목 유우에게 속했다. 그러나 흉노에 이득이 없는 전쟁에 동원된 것에 반감을 품은 흉노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188년 강거선우를 죽이자 그 뒤를 이어 즉위했다. 강거선우를 살해한 국인(國人)들은 어부라를 따르지 않고 수복골도후를 선우로 옹립했다. 수복씨는 흉노의 왕후 씨족으로, 이런 수복씨가 선우로 옹립된 것은 흉노 최초로 연제씨가 아닌 다른 씨족이 선우가 된 것이다. 이는 당시 흉노 내에서 선우 씨족인 연제씨의 권위가 떨어지고 실력을 갖춘 자가 선우를 일컫는 시대가 왔음을 의미한다.
이석에서 밀려난 어부라는 낙양으로 가 영제에게 호소했으나 실패했고, 한나라도 내부 혼란으로 어부라를 돕지 못했다. 따라서 이석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한나라 내지에서 세력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영제가 죽자, 황건적의 일파인 백파적(白波賊)과 합세해 태원, 하내 등지를 습격하였다. 이후 수복골도후가 죽어 선우 자리가 비어 있던 이석의 선우정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국인들에게서 거부당해 하동군 평양현에 머물렀다.
초평 원년(190년),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장양과 함께 원소에 속하여 장수에 주둔했다. 후에(191년 7월 이후), 장양을 인질로 잡아 원소에 대해 반역하지만, 원소가 파견한 국의에게 추격을 받아 업남에서 격파당하고, 여양으로 피신한 후 경지의 군세를 격파하여 세력을 회복했다.
192년에는 흑산적(黑山賊)을 토벌한 조조와 싸워 대패한다. 다음 193년 봄에 원술이 진류에 진출했을 때에는 흑산적과 함께 원술을 지원했지만, 조조에게 패배하였다. 195년, 양봉, 호재, 한섬 등이 헌제를 호위하다가 이각, 곽사의 추격을 받자, 이들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패배를 겪기도 했으나 결국 장안에서 낙양까지 호송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서 조조와 관계를 맺는 기회를 얻었지만, 얼마 못 가 죽어 별무소용이었다.
2. 1. 즉위와 흉노 내부의 분열
187년에 한나라 황제 영제가 장순과 선비족의 토벌을 위해 흉노의 군사를 조달했을 때에, 아버지 강거선우의 명령으로 좌현왕으로써 군대를 지휘해 한을 도와, 유주로 가서 유주목 유우에게 속했다. 그러나 흉노에 이득이 없는 전쟁에 동원된 것에 반감을 품은 흉노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188년에 강거선우를 죽이니 그 뒤를 이어 즉위했다. 강거선우를 살해한 국인(國人)들은 어부라를 따르지 않고 수복골도후(須卜骨都侯)를 선우로 옹립했다. 수복씨는 흉노의 왕후 씨족으로, 이런 수복씨가 선우로 옹립된 것은 흉노 최초로 연제씨가 아닌 다른 씨족이 선우가 된 것이다. 이는 당시 흉노 내에서 선우 씨족인 연제씨의 권위가 떨어지고 실력을 갖춘 자가 선우를 일컫는 시대가 왔음을 의미한다.이석에서 밀려난 어부라는 낙양으로 가 영제에게 호소했으나 실패했고, 한나라도 내부 혼란으로 어부라를 돕지 못했다. 따라서 이석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한나라 내지에서 세력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영제가 죽자, 황건적의 일파인 백파적(白波賊)과 합세해 태원, 하내 등지를 습격하였다. 이후 수복골도후가 죽어 선우 자리가 비어 있던 이석의 선우정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국인들에게서 거부당해 하동군 평양현에 머물렀다.
초평 원년(190년),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장양과 함께 원소에 속하여, 장수(漳水)에 주둔한다. 후(191년 7월 이후), 장양을 인질로 잡아 원소에 대해 반역하지만, 원소가 파견한 국의에게 추격을 받아 업남에서 격파당하고, 여양에 피한 후에 경지의 군세를 무찔러 세력을 만회했다.
192년에는 흑산적(黑山賊)을 토벌한 조조와 싸워 대패한다. 다음 193년 봄에 원술이 진류에 진출했을 때에는 흑산적과 함께 원술을 지원했지만, 조조에게 패배하였다. 195년, 양봉·호재·한섬 등이 헌제를 호위하다가 이각·곽사의 추격을 받자, 이들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패배를 겪기도 했으나 결국 장안에서 낙양까지 호송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서 조조와 관계를 맺는 기회를 얻었지만, 얼마 못 가 죽어 별무소용이었다.
2. 2. 한나라 망명과 용병 생활
187년, 한나라 황제 영제가 장순과 선비족 토벌을 위해 흉노에 군사를 요청하자, 아버지 강거선우의 명으로 좌현왕으로서 군대를 지휘해 한나라를 돕고 유주로 가서 유주목 유우에게 속했다. 그러나 흉노에 이득이 없는 전쟁 동원에 반감을 품은 흉노인들이 188년에 반란을 일으켜 강거선우를 살해했고, 어부라가 그 뒤를 이었다. 강거선우를 살해한 국인(國人)들은 어부라를 따르지 않고 수복골도후를 선우로 옹립했다. 수복씨는 흉노의 왕후 씨족으로, 연제씨가 아닌 다른 씨족이 선우로 옹립된 것은 흉노 최초였다. 이는 당시 흉노 내에서 선우 씨족인 연제씨의 권위가 약화되고 실력자가 선우를 일컫는 시대가 왔음을 의미한다.이석에서 밀려난 어부라는 낙양으로 가 영제에게 호소했으나 실패했고, 한나라도 내부 혼란으로 어부라를 돕지 못했다. 결국 이석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한나라 내지에서 세력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영제 사후, 황건적 일파인 백파적(白波賊)과 연합하여 태원, 하내 등지를 습격했다. 이후 수복골도후가 죽어 선우 자리가 비어 있던 이석의 선우정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국인들에게 거부당해 하동군 평양현에 머물렀다.
190년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장양과 함께 원소에 속하여 장수에 주둔했다. 191년 7월 이후, 장양을 인질로 잡아 원소에게 반역하지만, 원소가 파견한 국의에게 추격을 받아 업남에서 격파당하고, 여양으로 피신한 후 경지의 군세를 격파하여 세력을 회복했다.
192년에는 흑산적(黑山賊)을 토벌한 조조와 싸워 크게 패했다. 다음 해인 193년 봄, 원술이 진류에 진출했을 때 흑산적과 함께 원술을 지원했지만, 조조에게 패배했다. 195년, 양봉, 호재, 한섬 등이 헌제를 호위하다 이각, 곽사에게 추격당하자, 이들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패배를 겪기도 했으나 결국 장안에서 낙양까지 호송하는 데 성공했다.
2. 3. 죽음과 이후
어부라는 187년 한나라 황제 영제가 장순과 선비족 토벌을 위해 흉노 군사를 동원했을 때, 아버지 강거선우의 명령으로 좌현왕으로써 군대를 지휘해 한을 돕고 유주목 유우에게 속했다. 그러나 흉노에 이득이 없는 전쟁에 동원된 것에 반감을 품은 흉노인들이 188년 반란을 일으켜 강거선우를 죽이자 그 뒤를 이어 즉위했다. 강거선우를 살해한 국인(國人)들은 어부라를 따르지 않고 수복골도후(須卜骨都侯)를 선우로 옹립했는데, 수복씨가 선우로 옹립된 것은 흉노 최초로 연제씨가 아닌 다른 씨족이 선우가 된 것으로, 당시 흉노 내에서 선우 씨족인 연제씨의 권위가 떨어지고 실력을 갖춘 자가 선우를 일컫는 시대가 왔음을 의미한다.이석에서 밀려난 어부라는 낙양으로 가 영제에게 호소했으나 실패했고, 한나라도 내부 혼란으로 어부라를 돕지 못했다. 따라서 이석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한나라 내지에서 세력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영제가 죽자, 황건적의 일파인 백파적(白波賊)과 합세해 태원, 하내 등지를 습격하였다. 이후 수복골도후가 죽어 선우 자리가 비어 있던 이석의 선우정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국인들에게서 거부당해 하동군 평양현에 머물렀다.
초평 원년(190년),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장양과 함께 원소에 속하여, 장수(漳水)에 주둔했다. 후에(191년 7월 이후), 장양을 인질로 잡아 원소에 대해 반역하지만, 원소가 파견한 국의에게 추격을 받아 업남에서 격파당하고, 여양에 피한 후에 경지의 군세를 무찔러 세력을 만회했다.
192년에는 흑산적(黑山賊)을 토벌한 조조와 싸워 대패한다. 다음 193년 봄에 원술이 진류에 진출했을 때에는 흑산적과 함께 원술을 지원했지만, 조조에게 패배하였다. 195년, 양봉·호재·한섬 등이 헌제를 호위하다가 이각·곽사의 추격을 받자, 이들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패배를 겪기도 했으나 결국 장안에서 낙양까지 호송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서 조조와 관계를 맺는 기회를 얻었지만, 얼마 못 가 죽어 별무소용이었다.
3. 평가
3. 1. 긍정적 평가
3. 2. 부정적 평가
4. 가족 관계
- 형제: 호추취안
- 아들: 유포
5. 더 보기
- 삼국지』(무제기, 이공손도사장의 전)
- 후한서』(남흉노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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