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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니크장 라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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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미니크 장 라레는 프랑스의 군의관으로,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활동하며 군진 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현대적인 야전 외과, 야전 병원, 육군 구급대 시스템을 도입하고, 부상자 분류 규칙인 트리아지 개념을 개발했다. 라레는 나폴레옹의 총애를 받았으며,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특히 부상병을 위한 헌신적인 의료 활동으로 존경받았다. 그는 이집트 원정, 러시아 원정 등 주요 전쟁에 참여했으며, 워털루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지만, 과거의 인연으로 풀려나 프랑스로 돌아갔다. 라레는 나폴레옹 사후에도 의료 활동을 지속했으며, 1842년 사망 후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92년 앵발리드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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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니크장 라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마리-길레민 브누아의 라레 남작 초상화
1804년 마리-길레민 브누아의 라레 초상화
출생1766년 7월 8일
출생지보데앙, 비고르
사망1842년 7월 25일 (76세)
사망지리옹, 프랑스
배우자마리-엘리자베트 라빌-르루
자녀펠릭스 이폴리트 라레, 이소르 라레
국적프랑스
분야외과 의사
모교해당사항 없음
지도 교수해당사항 없음
영향을 준 인물해당사항 없음
영향을 받은 인물해당사항 없음
서명해당사항 없음
군사 정보
복무 기간1792년-1815년
계급외과 의사 총감
참전프랑스 혁명 전쟁
나폴레옹 전쟁
전투/전쟁이탈리아 전역
이집트 원정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보로디노 전투
라이프치히 전투
워털루 전투
훈장레지옹 도뇌르 그랑 오피시에
생 루이 훈장
철관 훈장
추가 정보
업적외과 기술 개선, 야전 병원 개선
기타 정보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개인 외과 의사

2. 초기 생애와 경력

1789년 라레는 파리로 돌아와 앵발리드에서 장-니콜라 코르비사르, 자비에 비샤 및 라파엘 비앙브뉘 사바티에와 함께 일했다.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 당시 현장에 있었으며,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즉석에서 구급차를 만들었다.[1]

2. 1. 출생과 교육

도미니크장 라레는 보데앙에서 제화공인 장 라레와 필리핀 페레스 사이에서 태어난 세 자녀 중 둘째였다. 라레의 아버지는 그가 13세였던 1780년에 사망했다. 그 후 라레는 툴루즈에 있는 삼촌 알렉시스와 함께 살면서 처음으로 의술을 배웠다.[1]

8년간의 도제 생활을 거친 후,[1] 라레는 파리로 가서 Hôtel-Dieu de Paris의 수석 외과 의사인 피에르-조제프 데소 밑에서 공부했다. 삼촌이 소개장을 써주었지만 돈이 부족했던 라레는 툴루즈에서 파리까지 걸어갔다. 이후 라레는 브레스트로 가서 해군 외과 의사로 임명되어 강의를 시작했다. 1787년, 라레는 뉴펀들랜드 방어를 위해 배치된 배에 탑승했는데, 당시 21세가 채 안 된 나이로 프랑스 왕립 해군의 최연소 군의관이었다.[1] 미국에 머무는 동안 라레는 현지 환경에 관심을 가지고 현지 동식물, 기후 및 관습에 대한 관찰을 기록했으며, 이는 몇 년 후 그의 저서 '' Mémoires de chirurgie militaire et campagnes du baron D.J. Larrey''에 출판되었다.[1]

3. 혁명 전쟁

1794년 툴롱으로 보내져 외과 및 해부학 학교를 조직하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처음 만났다. 그는 화가 마리 엘리자베스 라빌-르루와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다. 라레는 아내에게 헌신적이었고,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종종 편지를 썼다. 1796년 잠시 발 드 그라스 의과대학에서 해부학 교수로 일했다.[1] 그 후, 툴롱에서 그의 명성을 들은 나폴레옹의 요청으로 이탈리아 혁명군의 수석 외과 의사로 임명되었다.

1798년 동방군의 수석 외과 의사로 이집트 원정에 참가했다. 알렉산드리아 서쪽에서 프랑스군이 하선할 때, 루이마리 조제프 막시밀리앙 카페렐리 뒤 팔가 장군이 밧줄에 나무 다리가 걸려 물에 빠졌으나 라레가 그를 구해냈다. 자파 포위전에서는 포로로 잡힌 이집트 연예인과 그의 애완 원숭이를 치료해주었는데, 원숭이는 붕대를 교체할 때마다 라레에게 달려와 안겼다. 아크레 포위전에서 라레는 부상을 입었다. 장바티스트 클레베르카이로에서 암살당하자 그의 시신을 미라화하여 프랑스로 운반했다. 그는 나폴레옹과 함께 돌아갈 기회를 얻었지만, 자신을 더 필요로 하는 군대에 남겠다고 정중히 거절했다.[6]

3. 1. 라인 군 복무와 비행 구급차 개발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중인 1792년, 라레는 프랑스 라인군에 합류했다.[1] 마인츠에서 사무엘 토마스 폰 죔메링을 만났다.[2] 이 기간 동안 라레는 현대적인 야전 외과, 야전 병원, 육군 구급대 시스템을 시작했다. 프랑스 기병 포병 부대의 전차 기동 속도를 보고, 부상자 수송을 위한 "비행 구급차"로 개조했다.[3][4] 운전병, 군의관, 들것 운반병 등 훈련된 인력으로 구급차를 운용했다.

메츠 전투 (1793)에서 라레는 야전 구급차의 가치를 입증했다. 자크 피에르 오리라르 드 빌망지 군수참모총장은 시제품 제작을 명령했고, 이후 모든 공화국 군대에 보급될 예정이었다. 정치인들은 이 소식을 듣고 최고의 디자인을 찾기 위한 전국적인 경쟁을 명령하여 인도를 2년 이상 지연시켰다.[5] 라레는 야전 병원의 기동성을 높이고 조직을 개선하여 현대 이동 육군 외과 병원 부대의 전신을 만들었다. 계급, 국적에 관계없이 부상 정도와 치료 긴급성에 따라 부상자를 치료하는 전쟁 부상자 분류 규칙을 세웠다. 적군 병사, 프랑스군, 동맹군 병사 모두 치료받았다. 라레는 개인적으로 용감했으며, 사격 아래에서 일했고, 부상병 구출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1793년 한 전투에서 드라군 호위를 이끌고, 프로이센군에게 귀중품을 빼앗길 뻔한 부상병 4명을 구출했다. 구급차에 실어 후송 후 수술하여 모두의 생명을 구했다.

3. 2. 트리아지 개념 도입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중인 1792년, 라레는 부상 정도와 치료의 긴급성에 따라 부상자를 치료하는 전쟁 부상자 분류 규칙을 세웠다.[3] 이는 계급이나 국적에 관계없이 적용되었으며, 적군 병사도 프랑스군과 동등하게 치료받았다.[4] 이러한 원칙은 현대 응급 의료의 핵심 개념인 트리아지(Triage)의 초기 형태로 볼 수 있다.

3. 3. 이탈리아 및 이집트 원정

혁명의 사상을 지지했던 라레는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중인 1792년, 프랑스 라인군에 합류했다.[1] 이 기간 동안 라레는 현대적인 야전 외과, 야전 병원, 그리고 육군 구급대 시스템을 시작했다. 프랑스 기병 포병 부대의 전차들이 전장을 가로질러 기동하는 속도를 본 라레는 이들을 부상자들의 신속한 수송을 위한 "비행 구급차"로 개조했다.[3][4] 그는 운전병, 군의관, 들것 운반병 등 훈련된 인력으로 구급차를 운용했다.

메츠 전투(1793)에서 라레는 야전 구급차의 가치를 성공적으로 입증했다. 자크 피에르 오리라르 드 빌망지 군수참모총장은 시제품 제작을 명령했고, 이후 구급차는 모든 공화국 군대에 보급될 예정이었다. 라레는 또한 야전 병원의 기동성을 높이고 조직을 개선하여 현대적인 이동 육군 외과 병원 부대의 전신을 만들었다. 그는 계급이나 국적에 관계없이 부상 정도와 의료 치료의 긴급성에 따라 부상자를 치료하는 전쟁 부상자 분류 규칙을 세웠다. 적군의 병사뿐만 아니라 프랑스군과 그 동맹군의 병사들도 치료받았다.

1794년 그는 툴롱으로 보내져 외과 및 해부학 학교를 조직하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처음 만났다. 그는 화가 마리 엘리자베스 라빌-르루와 결혼했다. 1796년 잠시 발 드 그라스 의과대학에서 해부학 교수로 일했다.[1] 그 후, 그는 툴롱에서 그의 명성을 들은 나폴레옹의 요청으로 이탈리아 혁명군의 수석 외과 의사로 임명되었다.

라레는 동방군의 수석 외과 의사로 임명되어 1798년 이집트 원정에 참가했다. 피라미드 전투 직후, 부상당한 맘루크 병사들은 라레가 프랑스 부상자와 똑같은 인간성과 존경심으로 그들을 치료하는 것에 놀랐다. 나폴레옹의 시리아 침공 직전, 라레는 열악한 환경에서 억류된 영국 포로들을 발견하고 피에르 루이 뒤파에게 그들의 처우를 개선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라레는 직접 나폴레옹에게 가서 그들의 상황을 알렸고, 장군은 그들이 프랑스에 직접적으로 대항하여 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을 영국군에게 돌려보내도록 허락했다. 아부키르 전투에서 승리한 후 그는 카이로에 육군 의사를 위한 의과대학을 설립했다.[6] 당시 그의 많은 환자들은 십자군 이후 유럽에서 알려진 질병인 안검염을 앓았으며, 라레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 질병을 연구하고 기록했다.[1] 그는 사막에서 이동이 어려운 말 대신 낙타의 등에 양쪽에 상자를 매달아 부상자를 운반하여 부상병 수송을 개선했다.[1] 그는 아크레 포위전에서 부상을 입었으며, 전투 전반에 걸쳐 두각을 나타내며 목에 총상을 입은 아리기 장군의 생명을 구했다. 장바티스트 클레베르카이로에서 시리아 학생에게 암살당했을 때, 라레는 그의 시신을 미라화했고, 이 시신은 나중에 프랑스로 운반되어 매장되었다. 원정은 알렉산드리아 항복으로 끝났고, 라레는 1801년 10월 프랑스로 돌아왔다.

4. 나폴레옹 전쟁

도미니크 장 라레는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 뛰어난 외과 의사로서 활약하며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귀국 후 나폴레옹의 신임을 얻었으며, 여러 전투에서 그의 용기와 헌신은 빛을 발했다. 아이라우 전투에서 병원이 적에게 함락될 위기에 처했을 때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환자들을 돌봤으며, 워털루 전투에서는 적군이었던 웰링턴 공작마저 감탄할 정도의 용기를 보여주었다.[7]

4. 1. 제국 근위대 수석 외과 의사

나폴레옹의 신임을 얻어 영사 및 제국 근위대의 수석 외과 의사가 되었고, 1807년 5월 12일에는 레지옹 도뇌르 사령관 훈장을 받았다.[7] 1805년부터 1807년까지 유럽 전역의 전쟁에서 명성을 떨쳤다. 아이라우 전투에서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병원이 함락될 위기에 처했으나, 침착하게 수술을 마치고 환자들과 함께 죽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프랑스 기병대의 돌격으로 위기를 넘겼고, 나폴레옹은 그의 칼을 라레에게 선물하며 "아이라우 전투에서 당신이 나에게 베푼 봉사에 대한 기념으로 받아들이시오."라고 말했다.

1809년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는 장 란 원수의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했다. 나폴레옹은 "만약 군대가 감사를 표하기 위해 기념비를 세운다면, 라레를 기리는 것이 마땅하다"라며 그를 남작으로 봉했다. 1811년 파리에서 마취제를 사용하기 전 유방 절제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외과 팀을 공동으로 이끌었다.[8]

러시아 원정에서 대육군의 모든 의료 작전을 총괄했으며, 보로디노 전투에서 놀라운 활약을 펼쳤다. 베레지나 강을 건너는 동안 병사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병사들은 "라레 씨! 우리를 구원하신 분을 구하십시오"라고 외치며 그를 안전하게 이동시켰다.

1813년 하나우 전투에서 레브소멘 대령의 팔과 다리를 절단하는 라레


1813년과 1814년 전역에 참여했다. 나폴레옹이 엘바 섬으로 유배될 때 동행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1815년 나폴레옹에게 합류했고, 워털루 전투에서 그의 용감한 행동은 웰링턴 공작의 주목을 받았다. 웰링턴은 "용감한 사람이 부상병을 수집할 시간을 주기 위해" 그를 향해 사격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전투 후 프로이센군에게 포로로 잡혔으나, 과거 인연이 있던 독일인 외과 의사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블뤼허 원수는 그를 존경심으로 대했고, 사면받은 후 프랑스로 돌아갔다. 나폴레옹은 유언에서 라레에게 10만 프랑의 유산을 남기고 "내가 아는 가장 고결한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4. 2. 주요 전투 참전과 인도주의적 활약

도미니크 장 라레는 나폴레옹의 영사 및 제국 근위대의 수석 외과 의사였으며, 1807년 5월 12일 레지옹 도뇌르 사령관이 되었다.[7] 1805년부터 1807년까지 유럽 전역의 전쟁에서 명성을 더했다. 아이라우 전투에서는 프랑스 기병대의 도움으로 병원을 지켜냈고, 나폴레옹은 그의 공헌을 인정하여 자신의 칼을 선물했다. 1809년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는 장 란 원수의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했다. 나폴레옹은 "만약 군대가 감사를 표하기 위해 기념비를 세운다면, 라레를 기리는 것이 마땅하다"라며 그를 남작으로 봉했다.

1811년, 라레는 파리에서 마취제를 사용하기 전 유방 절제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외과 팀을 공동으로 이끌었다.[8] 러시아 원정에서는 대육군의 모든 의료 작전을 총괄했으며, 보로디노에서 많은 사상자를 치료하며 활약했다. 베레지나 강을 건너는 동안에는 병사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1813년과 1814년 전역에서 복무한 후, 라레는 엘바 섬으로 유배된 나폴레옹과 동행하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1815년 나폴레옹에게 다시 합류한 그는 워털루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웠고, 웰링턴 공작은 그의 용기와 헌신에 경의를 표하며 사격을 중지하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전투 후 프로이센군에게 포로로 잡혔으나, 과거 인연이 있던 독일 외과의사와 블뤼허 원수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나폴레옹은 유언에서 라레에게 10만 프랑을 남기며 "내가 아는 가장 고결한 사람"이라고 칭송했다.

4. 3. 러시아 원정과 베레지나 전투

도미니크 장 라레는 나폴레옹에게 좋은 평가를 받아 영사 및 제국 근위대의 수석 외과 의사가 되었고, 1807년 5월 12일에는 레지옹 도뇌르 사령관 훈장을 받았다.[7] 1805년부터 1807년까지 유럽 전역의 전쟁에서 명성을 더했다. 아이라우 전투에서는 프랑스 좌익에 대한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병원이 함락될 뻔했으나, 침착하게 수술을 마치고 환자들과 함께 죽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프랑스 기병대의 돌격으로 병원은 안전하게 지켜졌다. 전투 후 나폴레옹은 라레에게 자신의 칼을 선물하며 "아이라우 전투에서 당신이 나에게 베푼 봉사에 대한 기념으로 받아들이시오."라고 말했다.

1809년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는 장 란 원수의 다리 절단 수술을 했다. 나폴레옹은 "만약 군대가 감사를 표하기 위해 기념비를 세운다면, 라레를 기리는 것이 마땅하다"라며 1809년 바그람 현장에서 그를 남작으로 봉했다. 1811년, 라레는 파리에서 마취제를 사용하기 전 유방 절제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외과 팀을 공동으로 이끌었다.[8]

라레는 러시아 원정에서 대육군의 모든 의료 작전을 총괄했다. 보로디노에서는 엄청난 사상자 규모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활약을 펼쳤다. 겨울 퇴각에서도 살아남았으며, 베레지나 강을 건너는 동안에는 병사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다리가 부서지기 시작하여 수천 명이 동쪽 강둑에 갇힐 위험에 처했을 때, 병사들은 "라레 씨! 우리를 구원하신 분을 구하십시오!"라고 외치며 라레를 들어 올려 반대편 강둑으로 안전하게 이동시켰다. 병사들은 아프고 부상당한 병사들의 안녕에 대한 라레의 헌신에 보답하려 했던 것이다.

4. 4. 워털루 전투와 포로 생활

라레는 1815년 워털루 전투에 참전하여 용감하게 싸웠고, 이 모습은 웰링턴 공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웰링턴 공작은 병사들에게 "용감한 사람이 부상병을 수집할 시간을 주기 위해" 라레를 향해 사격하지 말라고 명령하며, "더 이상 우리 시대가 아닌 시대의 용기와 헌신"에 경의를 표했다.[7]

전투가 끝날 무렵, 라레는 부상을 입고 의식을 잃었다. 의식을 되찾은 후 프랑스 국경으로 탈출하려 했으나, 프로이센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라레는 즉결 처형될 위기에 처했으나, 과거 베를린에서 그의 강의를 들었던 독일인 외과 의사가 그를 알아보고 목숨을 구걸했다.

이후 라레는 뷜로 장군에게 보내져 새 옷을 받고 손이 풀린 채 건강을 회복했다. 블뤼허 원수에게 보내졌는데, 라레는 과거 드레스덴 근처에서 부상당해 프랑스군에게 포로로 잡혔던 블뤼허의 아들을 치료해준 적이 있었다. 블뤼허는 라레를 존경심으로 대했고, 프랑스군이 처음에 라레가 워털루 전장에서 사망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아내에게 라레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라레는 사면을 받고 블뤼허의 저녁 식사에 명예 손님으로 초대되었으며, 돈과 옷을 받고 프랑스로 귀환했다.[7]

5. 나폴레옹 사후 활동과 사망

1842년 라레는 아들과 함께 건강 검진을 위해 알제로 갔지만, 돌아오는 길에 폐렴에 걸려 7월 25일 리옹에서 사망했다.[1] 그의 시신은 파리로 옮겨져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유해는 1992년 12월 앵발리드로 이장되어 나폴레옹의 묘 근처에 다시 안치되었다.[10]

5. 1. 왕정 복고 시대의 활동

제국 이후, 라레의 뛰어난 명성은 그에게 미국, 러시아, 브라질 등 여러 국가에서 기회를 얻게 해주었지만, 그는 프랑스에 남기로 결정했다. 그는 남은 생애를 저술 활동에 헌신했지만, 나폴레옹의 사후에는 루이 18세의 왕실 근위대 수석 외과 의사로 군대에서 새로운 의학 경력을 시작했다. 1826년에는 영국을 방문하여 영국 외과 의사들의 환대를 받았다. 1829년에는 프랑스 학사원에 임명되었다. 1년 후에는 미국 철학회의 회원이 되었다.[9] 1830년 7월 혁명이 파리에서 발발했을 때, 라레는 그곳에 있었으며 부상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새로운 프랑스 국왕인 루이 필리프 1세는 그를 앵발리드의 자문 외과 의사이자 의료 책임자로 임명했다.

라레의 아들, 펠릭스 이폴리트 라레 (1808–1895) 역시 군의관이 되었다.


라레의 저술은 여전히 외과 및 의학 지식의 귀중한 자료로 여겨지며 모든 현대 언어로 번역되었다. 1800년에서 1840년 사이에 최소 28권의 책이나 논문이 출판되었다. 그의 아들 이폴리트(1808년 출생)는 나폴레옹 3세 황제의 주치의였다.[11]

5. 2. 사망과 유해 이장

제국 이후, 라레는 뛰어난 명성 덕분에 미국, 러시아, 브라질 등 여러 국가로부터 제안을 받았지만, 프랑스에 남기로 결정했다. 그는 남은 생애를 저술 활동에 헌신했지만, 나폴레옹 사후에는 루이 18세의 왕실 근위대 수석 외과 의사로 군대에서 새로운 의학 경력을 시작했다. 1829년에는 프랑스 학사원에 임명되었다. 1년 후에는 미국 철학회의 회원이 되었다.[9] 1830년 7월 혁명이 파리에서 발발했을 때, 라레는 부상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루이 필리프 1세는 그를 앵발리드의 자문 외과 의사이자 의료 책임자로 임명했다.

1842년 라레는 아들과 함께 건강 검진을 위해 알제로 갔지만, 돌아오는 길에 폐렴에 걸려 7월 25일 리옹에서 사망했다.[1] 그의 시신은 파리로 옮겨져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유해는 1992년 12월 앵발리드로 이장되어 나폴레옹의 묘 근처에 다시 안치되었다.[10]

6. 유산과 영향

도미니크장 라레는 나폴레옹 전쟁 동안 부상병 치료와 군 의료 시스템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현대 군 의료의 선구자로 여겨진다. 그의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그의 이름을 딴 상이 제정되기도 하였다.

6. 1. NATO 도미니크-장 라레 상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의 최고 의료 훈장이다. NATO의 최고 의료 기관인 NATO 군 의료 최고 책임자 위원회(COMEDS)가 매년 수여하며, 이 위원회는 NATO 및 파트너 국가의 군 의무감(Surgeon General)들로 구성된다. 이 상은 NATO 다국적성 및/또는 상호 운용성에 대한 중요하고 지속적인 기여, 또는 의료 지원이나 의료 개발 분야의 NATO 임무에서 의료 서비스 제공 개선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수여된다.

7. 저서

참조

[1] 웹사이트 Dominique Larrey, chirurgien militaire https://gallica.bnf.[...] 2021-05-03
[2] 서적 Memoir of Baron Larrey, Surgeon-in-chief of the Grande Armée, from the French https://books.google[...] H. Renshaw 1861
[3] 웹사이트 The Revolutionary Flying Ambulance of Napoleon's Surgeon http://www.acep.org/[...]
[4] 서적 Military Medicine and the Hidden Costs of War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24
[5] 간행물 Between Flesh and Steel: A History of Military Medicine from the Middle Ages to the War in Afghanistan https://books.google[...] Potomac Books, Inc. 2017-10-07
[6] 서적 A influência da medicina da França na formação da medicina da Bahia, Brasil https://fmb.ufba.br/[...] Federal University of Bahia 2021-05-04
[7] 서적 Memoir of Baron Larrey, Surgeon-in-chief of the Grande Armée, from the French https://books.google[...] H. Renshaw 1861
[8] 문서 June K. Burton, p.18–21
[9] 웹사이트 APS Member History https://search.amphi[...] 2021-04-08
[10] 웹사이트 Le transfert des cendres du Baron Larrey du Père-Lachaise aux Invalides 14-15 décembre 1992 http://www.biusante.[...] 2016-11-30
[11] 문서 Joseph Hamel, Historical Account of the Introduction of the Galvanic and Electro-Magnetic Telegraph (1859), page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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