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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 데 마요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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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스 데 마요 봉기는 1808년 5월 2일,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 대항하여 마드리드 시민들이 일으킨 봉기이다. 프랑스가 스페인 왕족을 프랑스로 이동시키려 하자 시민들이 마드리드 왕궁 앞에서 봉기를 시작했고, 이는 시가전으로 번졌다. 프랑스군은 봉기를 잔혹하게 진압했지만, 이 사건은 스페인 전역으로 반프랑스 저항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도스 데 마요 봉기는 반도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으로, 현재 마드리드 자치 지역의 공휴일로 기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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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 데 마요 봉기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
"1808년 5월 2일: 맘루크의 돌격, 프란시스코 데 고야 작품 (1814년작)"
날짜1808년 5월 2일
장소스페인 마드리드
결과프랑스군의 승리
결과 상세봉기는 진압되었으나 스페인 전역으로 반란 확산
보복으로 대량 처형 발생 (1808년 5월 3일의 학살 배경)
반도 전쟁 발발
교전 세력
교전국 1프랑스 제국
교전국 2스페인
지휘관
프랑스조아생 뮈라
스페인페드로 벨라르데 이 산틸란
루이스 다오즈 데 토레스
병력 규모
프랑스알 수 없음
스페인알 수 없음
사상자
프랑스31명 사망, 부상 또는 포로, 150명 사망 또는 31명 사망, 114명 부상
스페인200명 사망, 부상 또는 포로, 200명 사망, 200명 부상, 300명 처형
반도 전쟁 캠페인 (1808년)
반도 전쟁: 스페인
반도 전쟁: 스페인
주요 전투
1808년 스페인 봉기 관련 전투1차 마드리드
톨레도
발데페냐스
브루크
알콜레아
카디스 항구
카베손
1차 사라고사
1차 지로나
발렌시아
메디나 데 리오세코
바일렌
2차 지로나
라 로마나 탈출

2. 배경

1808년 3월 23일, 나폴레옹 1세가 이끄는 프랑스 군대가 마드리드를 점령했다. 이보다 앞서 스페인에서는 아란후에스 소동이 일어나 국왕 카를로스 4세가 아들 페르디난드 7세에게 강제로 양위하게 되었다. 봉기가 일어났을 때, 카를로스 4세와 페르디난드 7세 부자는 모두 나폴레옹의 압력으로 프랑스 도시 바욘에 사실상 억류되어 있었다.

마드리드를 통치하던 프랑스 장군 조아생 뮈라는 카를로스 4세의 딸인 루카 공작부인 마리아 루이사와 아직 어린 막내아들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를 바욘으로 보내려 했다. 이 소식은 마드리드 시민들의 분노를 촉발했고, 이는 곧 대규모 봉기로 이어졌다. 이 봉기는 이후 나폴레옹이 자신의 형 조제프를 스페인 국왕으로 임명하려는 움직임과 맞물려, 프랑스의 지배에 맞서 스페인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움직임으로 발전하게 된다.

1808년 5월 2일: 페드로 벨라르데가 최후의 저항을 하고 있다.

2. 1. 사회적 측면

도스 데 마요 봉기는 전쟁 중 드물게 나타난 자발적인 민중 봉기 중 하나로, 정부 엘리트의 사전 계획이나 자금 지원, 지도 없이 시작되었다. 당시 스페인 군대와 국가 관료 내 일부 세력은 프랑스를 몰아내기 위한 군사 행동을 구상하고 있었지만, 짧은 기간 동안 뮈라마드리드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봉기에 연루된 최고위 군인 중 두 명인 다오이스와 벨라르데는 노동 계층의 이러한 자발적인 행동에 대해 미리 대비하지 못했다. 특히 28세의 포병 대위였던 벨라르데는 다른 지역에서의 비밀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스페인 수도인 마드리드를 직접 공격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봉기 당일 총소리를 듣고 자신의 군사적 판단과는 달리 전투에 합류했으며, 몬텔레온 포병 막사를 방어하던 중 사망했다.

3. 봉기의 시작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마드리드를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 원수 조아생 뮈라가 카를로스 4세의 딸과 막내아들인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인판테를 프랑스 바욘으로 보내려 한 데 있었다. 뮈라는 나폴레옹의 매제였으며, 훗날 나폴리의 왕이 되는 인물이다. 처음 마드리드 시 위원회는 뮈라의 요구를 거부했으나, 당시 바욘에 머물고 있던 페르난도 7세의 편지를 받고 결국 이를 수락하게 되었다.

1808년 5월 2일 아침, 마드리드 시민들이 마드리드 왕궁 앞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왕궁 안으로 들어가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왕자를 프랑스로 데려가려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상황이 심상치 않자 뮈라 원수는 근위대 척탄병 대대와 포병 부대를 왕궁으로 보냈다. 프랑스군은 운집한 군중을 향해 발포하였고, 이 발포는 마드리드 시민들의 분노를 폭발시켜 봉기가 도시 전역으로 번지는 계기가 되었다.

3. 1. 시가전 전개

5월 2일, 마드리드의 왕궁 앞에 군중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인판테 왕자를 프랑스로 보내려는 움직임을 막기 위해 왕궁 안으로 들어가려 시도했다. 이에 프랑스 사령관 뮈라 원수는 근위대 척탄병 대대와 포병 부대를 왕궁으로 보냈다. 포병 부대가 모인 군중에게 발포하면서 봉기는 마드리드 전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페드로 베라르데의 마지막 모습. 몽텔레온 포병 부대 막사 방어전.


마드리드 시내 곳곳에서는 제대로 무장하지 못한 시민들이 프랑스군과 직접 맞서 싸우는 시가전이 벌어졌다. 뮈라는 즉시 주력 부대를 도심으로 투입하여 태양문 광장(Puerta del Sol)과 톨레도 문Puerta del Toledoes 부근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뮈라 원수는 도시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행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프랑스군은 점차 도시의 통제권을 되찾았으나, 이 과정에서 수백 명의 마드리드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스페인 화가 고야의 그림 ''마멜루크의 돌격''은 당시의 치열했던 시가전, 특히 터번을 쓰고 시미타를 휘두르는 근위대 마멜루크와 마드리드 시민들의 싸움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당시 마드리드에 주둔하고 있던 스페인 군대는 대부분 명령에 따라 병영에 머물러 있었다. 유일하게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에 참여한 부대는 몬텔레온 병영의 포병 부대였다. 이 부대를 이끈 두 장교, 루이스 다오이스 데 토레스와 페드로 베라르데 이 산틸란은 시민들과 함께 싸우다 프랑스군의 공격으로 전사했으며, 오늘날까지 봉기의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4. 봉기의 진압과 영향

초기 봉기를 진압한 프랑스군은 잔혹한 방식으로 시민들을 억압하려 하였다. 뮈라 원수는 5월 2일 저녁, 그루시 장군을 위원장으로 하는 군사위원회를 설치했다. 이 위원회는 무기를 소지한 채 체포된 모든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뮈라는 같은 날 성명을 통해 "잘못된 길에 들어서 반란을 일으키고 살해자가 된 마드리드 시민들이여 그대들로 인해 프랑스군의 피가 흘렀다. 이것은 복수를 부르게 되었다. 모든 무기를 들고 봉기에 참여하다 체포된 이들은 모두 사형에 처할 것이다."라고 발표했다.[4]

모든 공공 집회는 금지되었고, 시민들은 소유한 모든 무기를 당국에 반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다음 날인 5월 3일, 프랑스군에 체포된 수백 명의 시민들이 처형되었다. 이 참혹한 장면은 화가 고야의 유명한 그림인 1808년 5월 3일에 담겨 있다. 당시 프랑스군은 시민들이 다양한 즉석 무기로 저항했기 때문에, 가위나 부엌칼 같은 일상 도구를 소지한 장인들까지도 즉결 처분했다. 소수의 프랑스어를 구사할 줄 아는 마드리드 시민만이 처형인들에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애원하여 처형을 피할 수 있었다.

마드리드에 세워진 ''5월 2일'' 기념비


한편, 5월 2일 마드리드 인근 마을인 모스톨레스까지 프랑스군의 잔혹한 진압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해군성 장관이자 최고 전쟁 위원회 검사였던 후안 페레스 비야밀은 마을 시장인 안드레스 토레혼과 시몬 에르난데스를 설득하여, 모든 스페인인들에게 프랑스 침략군에 맞서 봉기할 것을 촉구하는 선전 포고에 서명하도록 했다. 이 선언은 "모스톨레스 시장들의 포고령"(es) 또는 "독립 포고령"(es)으로 알려져 있다.

4. 1. 봉기의 의의

마드리드에 있는 ''5월 2일의 영웅들'' 기념비.


프랑스군은 봉기를 신속하게 진압하면 스페인 민중에게 본보기가 되어 스페인 전역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히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봉기는 오히려 프랑스군에 저항하는 이들에게 큰 힘을 실어주었고, 이후 몇 주 만에 저항은 스페인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5월 2일 봉기는 반도 전쟁 중 몇 안 되는 자발적인 민중 봉기 중 하나였다. 이는 정부 엘리트의 사전 계획, 자금 지원 또는 지도 없이 시작되었다. 당시 스페인 군대와 관료 내부 일부 세력은 프랑스를 몰아내기 위한 군사 행동을 구상하고 있었지만, 마드리드를 장악한 뮈라의 군대는 단기적으로는 공략하기 어렵다고 여겨졌다. 봉기에 참여한 최고위 군 지휘관인 다오이스와 벨라르데조차 민중들의 행동을 예상하지 못했다. 28세의 포병 대위였던 벨라르데는 다른 지역에서의 비밀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수도 마드리드에서의 직접적인 봉기는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총성을 듣고 그는 자신의 군사적 판단과 달리 전투에 합류했고, 몬텔레온 포병 막사를 방어하다가 전사했다.

5월 2일 봉기는 나폴레옹의 형제인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국왕으로 세우려는 시도와 맞물려 프랑스 통치에 대한 전면적인 반란을 촉발했다. 프랑스 점령군은 봉기를 빠르게 진압하여 자신들의 통제력을 과시하려 했지만, 이 사건은 오히려 스페인 민중의 저항 의지를 더욱 불태우는 계기가 되었다.

이 봉기와 뒤이은 반란으로 시작된 반도 전쟁은 때때로 프랑스 혁명 시기의 방데 반란과 비교되기도 한다. 두 사건 모두 반혁명적인 성격을 띤 봉기였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페인의 반란은 몇 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지닌다. 첫째, 방데 반란이 농촌 지역 농민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것과 달리, 스페인 반란은 도시 인구에서 시작되었다. 둘째,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스페인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셋째, 민중의 지지를 받는 국왕을 복위시키려는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봉기는 계급 간의 연대에 기반했는데, 특히 노동 계급은 귀족과 성직자 역시 군대에 징집되어 함께 싸워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며 연대의 의지를 보였다.[1]

5. 봉기 이후

5월 2일 봉기는 프랑스 통치에 저항하는 봉기가 이베리아 반도 전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발데페냐스 전투 등이 그 시작이었다.

프랑스의 포르투갈 침공은 1807년 리스본 점령으로 시작되었으나, 5월 2일 봉기는 포르투갈에서도 파드롱스 데 테이셰이라 전투와 같은 반란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의 개입은 웰링턴이 지휘한 롤리사 전투로 시작되었다.

스페인의 정규군은 엘 브루흐 전투를 기점으로 저항에 나섰다.

나폴레옹은 소르노자 전투를 시작으로 스페인 침공을 개시했다.

6. 기념

5월 2일은 마드리드 지역의 공휴일이다. 과거 몽텔레온 포병대 막사가 있던 자리는 현재 5월 2일 광장으로 조성되었다. 광장 주변 지역은 봉기의 영웅 중 한 명인 마누엘라 말라사냐를 기리기 위해 말라사냐라고 불린다. 마누엘라 말라사냐는 봉기 이후 프랑스 군에 의해 처형된 인물이다. 봉기의 영웅들을 기리는 여러 기념물이 도시 곳곳에 세워졌으며, 대표적으로 스페인을 위해 죽은 자 기념비가 있다.

참조

[1] 서적 Napoleon’s Cursed War: Spanish Popular Resistance in the Peninsular War, 1808-14 Verso Books 2023
[2] 서적
[3] 서적
[4] 서적 Modern Spain: A Documentary History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20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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