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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젠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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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젠지 사건은 막부 말기 일본에서 발생한 두 차례의 외국 공사관 습격 사건을 의미한다. 제1차 사건은 1861년, 미토 번 낭인들이 영국 공사 러더퍼드 올콕을 공격한 사건으로, 올콕은 부상을 입지 않았지만, 서기관과 영사가 부상당했다. 1862년에는 제2차 사건으로, 도젠지 경비를 맡던 마쓰모토 번의 무사가 영국 군인 2명을 살해했다. 이 사건들은 일본의 존왕양이 운동의 격렬함과 막부의 외교적 무능을 보여주며, 일본의 개항과 근대화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2. 제1차 도젠지 사건 (1861년)

분큐 원년(1861년) 5월 28일(7월 5일), 미토 번을 탈번한 존왕양이파 낭인 14명이 영국 공사 러더퍼드 올콕 등을 습격한 사건이다.

이들은 존왕양이를 주장하며, “오랑캐에 의해 신국 일본이 더럽혀졌다”고 격분하여 습격을 감행했다. 낭인들은 습격 취지서를 휴대하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존왕의 대의’를 실행한다는 취지가 적혀 있었다.

사건 이후, 막부는 낭인들을 격퇴한 경비 무사 48명에게 포상을 내렸고, 외국방 동심 사이토 다이노신은 영국 정부로부터 상을 받았다.[2]

도쿄 미나토의 도젠지


thumb에 게재된 그림인데, 이를 그린 찰스 워그먼도 사건을 겪었다.]]


2. 1. 배경

분큐 원년(1861년) 5월, 영국 공사 러더퍼드 올콕은 나가사키에서 에도로 향했다. 막부는 경비상의 문제를 이유로 해로 이동을 권고했으나, 올콕은 조약에 명시된 국내 여행 권한을 주장하며 육로를 통해 에도로 이동했다. 5월 27일, 올콕은 에도 다카나와의 도젠지에 설치된 영국 공사관에 도착했다. 이러한 올콕의 행동은 "신성한 일본 땅이 오랑캐(외국인)에게 더럽혀졌다"고 생각하던 존왕양이파 지사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1]

2. 2. 경과

분큐 원년(1861년) 5월 28일, 미토 번을 탈번하여 떠돌던 양이파 낭인 14명이 영국 공사 러더퍼드 올콕 일행을 습격한 사건이다.

1861년 5월, 영국 공사 올콕은 나가사키에서 에도로 향할 때 막부가 경비상의 문제로 해로 이동을 권했다. 그러나 올콕은 조약에서 정하는 국내 여행 권한을 강경하게 주장하며 육로로 에도를 여행했고, 5월 27일에 영국 공사관이 설치되어 있었던 에도 다카나와의 도젠지에 들어갔다. 이 행동에 대해 존왕양이파 지사들은 “오랑캐에 의해 신국 일본이 더럽혀졌다”고 격분했다.

5월 28일 오후 10시경, 미토번을 탈번한 양이파 낭인 아리가 한야 등 14명은 도젠지 영국 공사관에 침입해 올콕 공사 일행을 습격했다. 외국 봉행 휘하에서 공사관 경비를 서고 있던 하타모토, 고리야마 번사와 니시오 번사가 응전하며, 저택 안팎에서 양이파 낭인들과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경비병 2명, 낭인 3명이 사망했다. 올콕은 가까스로 피신했지만, 서기관 로렌스 올리펀트와 나가사키 주재 영사 조지 모리슨이 부상을 입고 귀국길에 올랐다.

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양이파 낭인들은 도주했다. 아리가 한야, 고보리 도라키치, 후루카와 가즈마노스케 3명은 현장에서 사망했고, 사카키마사키리 사부로는 체포되어 12월에 참수되었다. 도망간 낭인들은 시나가와의 여관 토라야(虎屋)에서 포위되었다. 나카무라 사다스케와 야마자키 노부유키스케는 할복했고, 이시이킨시로우는 사로잡혔다 (할복했으나 죽지 못해 잡힌 후 사망). 마에기 신파치로는 미처 대피하지 못하고 할복했다. 낭인들은 모두 습격 취지서를 휴대하고 있었으며, 거기에는 ‘존왕의 대의’를 실행한다는 취지가 적혀 있었다. 도주한 구로사와 고로와 다카하타 쇼지로는 사카시타 문 밖의 변에 참여하여 싸우다 죽었다. 오카미 도메지로는 서쪽 지방으로 도주하여 덴추구미의 변에 참여했다가 패주한 이후 잡혀 참수되었다. 다른 낭인들도 도망치다가 할복, 옥사 또는 참수되었다. 메이지 시대까지 살아남은 것은 습격에 참여하지 않고 도주했다가 체포된 이후 메이지 유신으로 특사로 풀려난 호리에 요시노스케 뿐이었다.[1]

2. 3. 결과

사건 이후 올콕은 에도 막부에 엄중히 항의했고, 영국 수병의 공사관 주둔을 승인받았으며, 일본 측 경비 병력을 증강하고, 배상금 10000USD를 지불받는 조건으로 사건은 해결을 보았다.[1] 이 교섭에 따라 시나가와 고텐야마에 건설 중이던 공사관은 다음 해 12월 다카스기 신사쿠 등에 의해 방화되었다 (영국 공사관 방화 사건).[2]

사건 이전, 올콕은 막부가 경비를 구실로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양이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저서에서 "경비병은 낭인과 싸우지 않았다"고 적고 있지만, 실제로는 경비병은 그 책임을 다했다.

3. 제2차 도젠지 사건 (1862년)

1862년(분큐 2년) 5월 29일, 도젠지 경비를 맡고 있던 마쓰모토 번 번사 이토 군베에가 영국 군인 2명을 살해한 사건이다. 이토 군베에는 도젠지 경비로 인해 번이 많은 지출을 하고, 외국인 때문에 일본인끼리 서로 죽이는 것을 우려하여 영국 공사를 살해하고 번의 경비 책임을 면하려 했다. 이토는 밤중에 닐의 침실에 침입하려다 영국 군인 2명에게 발각되어 격투를 벌였고, 그들을 쓰러뜨렸지만 자신도 부상을 입고 할복했다.[1]

3. 1. 배경

1862년(분큐 2년) 5월 29일, 도젠지 경비를 맡았던 마쓰모토 번의 번사 이토 군베에가 영국 병사 2명을 살해한 1차 도젠지 사건 이후, 올콕은 막부에 의한 경호를 기대할 수 없다며 공사관을 요코하마로 이전했다. 그러나 올콕이 귀국한 사이, 공사 대리가 된 존 닐은 다시 도젠지로 공사관을 복귀시켰고, 오가키번, 기시와다번, 마쓰모토 번이 경호를 담당하게 되었다.[1]

마쓰모토 번은 도젠지 경비로 인해 과도한 비용 지출을 강요받고 있었고, 외국인들 때문에 일본인끼리 서로 죽이는 상황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1]

3. 2. 경과

1862년(분큐 2년) 5월 29일, 마쓰모토 번의 번사 이토 군베에는 영국 군인 2명을 살해했다. 1차 도젠지 사건 이후, 올콕은 막부의 경호를 신뢰할 수 없어 공사관을 요코하마로 이전했다. 그러나 올콕이 귀국한 사이, 대리 공사가 된 존 닐은 공사관을 다시 도젠지로 옮겼고, 오가키번, 기시와다번, 마쓰모토 번이 경비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토 군베에는 자신의 번이 도젠지 경비로 인해 많은 지출을 강요받고, 외국인 때문에 일본인끼리 서로 죽이는 것을 우려하여 영국 공사를 살해해 번의 경비 책임을 면하고자 했다. 이토는 한밤중에 닐의 침실에 침입하려 했으나, 영국 군인 2명에게 발각되어 격투를 벌였다. 그는 영국 군인들을 쓰러뜨렸지만, 자신도 부상을 입고 원두막으로 피신하여 할복했다.

막부는 경비 책임자를 처벌하고 마쓰다이라 미쓰노리에게 대기를 명령했으며, 영국과 배상금 지불 협상을 벌였지만 결정되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나마무기 사건이 발생했다. 막부는 다음 해인 1863년(분큐 3년) 4월, 나마무기 사건의 배상금과 함께 10000GBP를 지불하여 사건을 해결했다.

3. 3. 결과

막부는 경비 책임자를 처벌하고 마쓰모토 번주 마쓰다이라 미쓰노리에게 근신을 명했다.[1] 영국과의 배상금 협상은 난항을 겪던 중, 나마무기 사건이 발생했다.[1] 막부는 1863년 나마무기 사건 배상금과 함께 10000GBP를 추가 지불하여 사건을 해결했다.[1]

4. 사건의 영향 및 의의

도젠지 사건은 막부 말기 일본의 혼란스러운 정세와 서구 열강과의 갈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 사건은 존왕양이 운동이 격화되고 있음을 드러냈고, 막부의 외교적 무능함을 부각시켰다.[1]

이 사건으로 에도 막부는 영국에 10000USD를 지불해야 했다. 또한, 영국 공사관 경비를 강화하고 영국 수병의 주둔을 허용하는 등 외교적 양보를 해야 했다.[2] 이는 막부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존왕양이 운동을 더욱 가속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도젠지 사건은 이후 일본의 개항과 근대화 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사카시타 문 밖의 변과 영국 공사관 방화 사건 등 일련의 사건들과 함께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는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한국의 역사와 비교했을 때, 도젠지 사건은 비슷한 시기 서구 열강의 개항 압력에 직면했던 조선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된다.

참조

[1] 서적 日本電気事業発達史 電友社 1916
[2] 웹사이트 斎藤大之進(読み)さいとう だいのしん https://kotobank.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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