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키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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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가키번은 미노국에 위치한 번으로, 센고쿠 시대에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사이토 도산과 오다 노부히데 간의 쟁탈전이 벌어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이시카와 야스미치를 초대 번주로 임명하여 오가키 번을 설립했다. 이후 여러 가문을 거쳐 1635년부터 도다 가문이 통치했으며, 도다 우지카네가 아마가사키 번에서 이주해오면서 번의 규모가 커졌다. 메이지 유신 시기에는 마지막 다이묘인 도다 우지타카가 천황 편에 서면서 메이지 정부로부터 영지를 받았지만, 폐번치현으로 오가키 현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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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가키번 - 오가키성
오가키성은 1500년에 축성되어 센고쿠 시대 쟁탈전을 겪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전략적 요충지였으나, 현재는 오가키 공원으로 조성되어 복원된 천수각과 함께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 오카베씨 - 기시와다번
기시와다번은 158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고이데 히데마사를 성주로 임명하며 시작되어 고이데 가문, 마쓰다이라 마쓰이 가문을 거쳐 오카베 가문이 다스렸고, 폐번치현 이후 오사카부에 편입된 번이다. - 오카베씨 - 오카베 나가모리
오카베 나가모리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걸쳐 활약한 무장이자 다이묘로, 주요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여러 지역을 다스리며 영지 경영에 힘썼다. - 미노국의 번 - 가노번
가노번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오쿠다이라 노부마사에게 주어져 성립되었으며, 나가이 가문이 통치했고, 일본 우산 생산이 성행했다. - 미노국의 번 - 이와키 다이라번
이와키다이라번은 에도 시대 무쓰국 하마도리 남부에 설치된 번으로, 도리이 씨, 나이토 씨, 이노우에 씨를 거쳐 안도 씨가 다스렸으나 보신 전쟁 패배로 소실되었다.
2. 역사
오가키는 미노 국에서 오미 국, 교토로 이어지는 길목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 센고쿠 시대부터 사이토 도산과 오다 노부히데 등 여러 세력 간의 각축장이었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를 거치며 우지이에 나오토모, 이케다 쓰네오키, 가토 미쓰야스, 이토 모리마사 등 여러 인물이 오가키 지역을 다스렸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오가키 성주였던 이토 모리마사는 이시다 미쓰나리가 이끄는 서군에 가담했으나, 전투 패배 후 영지를 몰수당했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01년 오가키 번을 공식적으로 설치하고, 이시카와 야스미치를 초대 번주로 임명했다. 이시카와 가문 이후 히사마쓰-마쓰다이라 가문, 오카베 씨 등이 잠시 번을 통치했다.[1]
1635년, 도다 우지카네가 아마가사키 번에서 오가키로 옮겨오면서 고쿠다카 10만 고쿠의 번주가 되었고, 이후 도다 가문은 메이지 유신 때까지 오가키 번을 세습 통치하게 된다.[1] 도다 가문 통치 시기에는 농지 개간, 치수 사업, 번 재정 및 군제 개혁 시도, 번교 설립 등 다양한 정책이 시행되었다. 또한 본가에서 분가하여 오가키 신덴 번이 세워지기도 했다. 마지막 번주 도다 우지타카는 보신 전쟁 초기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후 메이지 신정부 편에 서서 활동했으며, 1871년 폐번치현으로 오가키 번이 폐지되고 기후현에 통합될 때까지 번을 이끌었다.[1]
2. 1. 도다 가문 통치 이전
오가키는 미노 국에서 오미 국, 교토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 때문에 센고쿠 시대에는 사이토 도산과 오다 노부히데 사이에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했다.오다 노부나가가 세력을 잡은 후에는 서미노 삼인중의 한 사람인 우지이에 나오토모와 그의 아들 우지이에 나오마사가 이 지역을 다스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에는 이케다 쓰네오키, 도요토미 히데쓰구, 도요토미 히데나가, 가토 미쓰야스, 이치야나기 나오스에, 도요토미 히데카쓰 등 도요토미 정권의 주요 인물들이 차례로 성주를 맡았으며, 마지막으로 이토 모리마사에게 통치가 위임되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오가키 3만 고쿠 영지의 다이묘였던 이토 모리마사는 이시다 미쓰나리가 이끄는 서군에 가담했다. 오가키 성은 격전지 세키가하라와 매우 가까웠기 때문에, 서군의 이시다 미쓰나리와 동군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모두에게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거점이었다. 실제로 이에야스는 전투 직전 오가키 성 북서쪽 약 4km 지점인 오카야마에 진을 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토 모리마사는 결단력이 부족하여 동군을 공격할 기회를 놓쳤고, 미쓰나리 역시 세키가하라에서의 결전을 위해 오가키 성을 포기했다. 결국 이토 모리마사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한 후 영지를 몰수당했다(개역). 전투 후에는 이에야스의 가신인 마쓰다이라 야스시게가 잠시 오가키 성을 관리했다.
1601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가키 번을 정식으로 설치하고, 이시카와 야스미치를 초대 번주로 임명하며 5만 코쿠의 영지를 주었다. 이시카와 가문은 오사카 전투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1616년 분고 국의 히타 번으로 옮겨갔다. 이후 오가키 번은 1616년부터 1624년까지 히사마쓰-마쓰다이라 가문의 분가가 다스렸고, 1624년부터 1633년까지는 오카베 씨가, 1633년부터 1635년까지는 다시 히사마쓰-마쓰다이라 가문의 다른 분가가 통치했다.[1]
2. 2. 도다 가문 통치 시대
1635년, 도다 우지카네가 세쓰 국의 아마가사키 번에서 오가키로 옮겨오면서 도다 가문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이때 번의 고쿠다카는 10만 석으로 증가했다. 도다 가문은 이후 메이지 유신 때까지 오가키 번을 다스렸다.[1]초대 번주인 도다 우지카네는 새로운 농지 개간, 관개 및 홍수 예방 사업, 식림 사업 등을 추진하고 가신들에 대한 보상 체계를 개혁하는 등 번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오가키 성을 정비하고 유지했다. 제3대 번주 도다 우지사다 대에는 동생인 도다 우지시게에게 3천 석의 새로운 영지를 주어 기존의 7천 석과 합쳐 1만 석의 오가키 신덴 번을 세우게 했다. 이 분가 영지 역시 메이지 유신까지 이어졌다. 제6대 번주 도다 우지히데는 재정 개혁을 시도했으나, 1766년 농민 봉기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제7대 번주 도다 우지노리는 도쿠가와 이에나리 쇼군 시대에 로주를 지냈는데, 이때는 러시아의 일본 북방 해역 진출이 늘어나던 시기였다. 제8대 번주 도다 우지쓰네는 1840년에 번 학교인 "치도칸"(致道館)을 설립하여 교육 진흥에 힘썼다. 제9대 번주 도다 우지마사는 1856년에 번의 군사 제도를 개혁했다. 제10대 번주 도다 우지아키라는 추가적인 개혁을 추진하려 했으나 안세이 대숙청의 여파로 좌절되었다. 마지막 번주인 도다 우지타카는 보신 전쟁 초기 도바-후시미 전투 이후 조정의 적으로 규정되었으나, 이후 천황 측으로 입장을 바꾸어 도산도를 따라 다른 번들에 항복을 권유하는 조정의 사신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공로로 메이지 정부로부터 3만 석의 영지를 추가로 받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폐번치현 정책에 따라 오가키 번은 오가키 현이 되었고, 이후 새롭게 설치된 기후현에 통합되었다.[1]
2. 3. 메이지 유신 이후
마지막 번주인 도다 우지타카는 보신 전쟁 중 도바-후시미 전투 이후 "조적"(朝敵, 천황의 적)으로 몰리는 위기에 처했다.[1] 그러나 이후 메이지 신정부 측으로 편을 바꾸는 데 성공하였고, 도산도를 따라 다른 번들에 메이지 신정부의 사절로 파견되어 항복을 권유하는 역할을 맡았다.[1] 이러한 활동으로 메이지 정부로부터 3만 고쿠의 영지를 추가로 받기도 했다.[1] 하지만 1871년 폐번치현이 단행되면서 오가키 번은 폐지되고 오가키 현이 되었다가, 곧이어 새롭게 설치된 기후현에 통합되었다.[1]3. 역대 번주
3. 1. 이시카와 가문 (1600년 ~ 1616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시카와 야스미치를 오가키번의 초대 번주로 임명하여 5만 석의 영지를 주었다. 야스미치는 1601년(게이초 6년) 2월에 가즈사 국 나루토에서 오가키로 들어왔으며, 후다이 다이묘였다.[1]그러나 1607년(게이초 12년) 7월, 야스미치가 아버지 이시카와 이에나리보다 먼저 사망하자, 이에나리가 다시 가문을 계승하여 2대 번주가 되었다.[1] 1609년(게이초 14년) 10월, 이에나리가 사망하자 양자로 들어온 이시카와 다다후사가 가문을 이어 3대 번주가 되었다.[1] 다다후사가 번주로 있던 시기에 오가키성에 총호리(성을 둘러싼 해자)를 파는 공사를 진행했다. 그는 오사카 전투에서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1616년(겐나 2년) 9월 26일, 분고 국의 히타번으로 이봉되었다.[1]
3. 2. 히사마쓰 마쓰다이라 가문 (1616년 ~ 1624년)
겐나 2년(1616년) 9월 26일, 이시카와 다다후사가 오사카 전투에서의 공을 인정받아 분고 국 히타번으로 이봉되었다. 이틀 뒤인 9월 28일, 시모사 국 세키야도번의 번주였던 마쓰다이라 다다요시(히사마쓰 마쓰다이라 씨)가 오가키번으로 옮겨와 2만 석[1]의 고쿠다카로 번주가 되었다.다다요시는 약 8년간 오가키번을 다스렸으나, 간에이 원년(1624년) 5월 18일에 사망하였다. 그의 뒤를 아들인 松平憲良|마쓰다이라 노리나가일본어가 이었으나, 당시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같은 해 9월 시나노 국 고모로번으로 이봉되었다.[1] 이로써 야스모토 계통 히사마쓰 마쓰다이라 가문의 오가키번 통치는 막을 내렸다.
3. 3. 오카베 가문 (1624년 ~ 1632년)
간에이 원년(1624년) 12월 20일, 마쓰다이라 노리나가가 시나노 국 고모로번으로 옮겨간 후, 탄바 국 후쿠치야마번에서 오카베 나가모리가 5만 고쿠다카의 후다이 다이묘로서 오가키 번에 들어왔다.[1]간에이 9년(1632년) 11월, 나가모리가 사망하자 아들인 오카베 노부카쓰가 번주 자리를 계승했다.[1] 그러나 약 반년 뒤인 간에이 10년(1633년) 3월 19일, 노부카쓰는 하리마 국 타쓰노번으로 이봉되었다.[1] 이로써 오카베 가문은 1624년부터 1633년까지 약 9년간 오가키 번을 통치하였다.
3. 4. 히사마쓰 마쓰다이라 가문 (1633년 ~ 1635년)
1633년 3월 23일(간에이 10년), 야마시로 국 요도번에서 마쓰다이라 사다쓰나가 6만 석의 영지를 받아 오가키번으로 들어왔다. 그는 히사마쓰 마쓰다이라 가문의 사다카쓰 계통 출신으로, 이전에 오가키번을 다스렸던 마쓰다이라 다다요시와는 사촌 관계였다. 사다쓰나의 관위는 엣추노카미( 越中守|엣추노카미일본어 )였으며, 위계는 종4위하( 従四位下|주시고이노게일본어 )였다. 그는 오가키번을 약 2년간 통치한 후, 1635년 7월 28일(간에이 12년)에 이세 국 구와나번으로 이봉되었다.3. 5. 도다 가문 (1635년 ~ 1871년)
1635년 (간에이 12년), 셋쓰국 아마가사키번에서 도다 우지카네戸田氏鉄일본어가 10만 석으로 오가키번에 들어오면서, 이후 메이지 유신까지 도다 가문의 통치가 이어졌다.[1] 도다 가문은 후다이 다이묘였다.초대 번주인 도다 우지카네는 1637년 (간에이 14년) 시마바라의 난에서 전공을 세웠다. 또한 번 통치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지방지행제를 폐지하고 봉록제를 도입했으며, 새로운 논밭 개발(신덴 개발), 치수 및 산림 관리, 가신단 편성에 힘썼다. 우지카네는 오가키성을 정비하여 메이지 시대까지 이어지는 모습을 갖추었으며, 유학 서적을 직접 저술하는 등 문화 발전에도 기여했다.
제2대 번주 도다 우지노부戸田氏信일본어는 1655년 (메이레키 원년), 동생인 토다 우지쓰네戸田氏常일본어, 토다 우지요시戸田氏好일본어 등에게 각각 4000석, 토다 우지토시戸田氏利일본어에게 5000석을 신전으로 분여했다.
제3대 번주 도다 우지아키戸田氏西일본어는 1674년 (엔포 2년) 2월, 동생인 토다 우지히로戸田氏宥일본어에게 신전 2000석을 분여했다. 그는 1680년(엔포 8년)부터 '엔포의 오히마'(延宝の御暇)라 불리는 번정 개혁을 시도했으나, 1684년(조쿄 원년) 6월 사망하면서 개혁은 실패로 끝났다.
제4대 번주 토다 우지사다戸田氏定일본어는 1688년(조쿄 5년) 7월, 동생인 토다 우지나리戸田氏成일본어에게 신전 3000석을 분여했고, 우지나리는 양아버지 우지토시의 지행을 합쳐 1만 석을 영유하는 다이묘가 되어 오가키 번의 지번인 오가키 신덴번이 입번되었다. 1701년(겐로쿠 14년) 3월, 우지사다의 종형인 아코번주 아사노 나가노리가 에도성에서 기라 요시히사에게 칼부림을 일으킨 사건(아코 사건)이 발생했다. 나가노리의 할복 소식을 들은 에도의 상인과 낭인들이 아코 번 저택에 몰래 들어가거나 난입하여 폭동을 일으키는 자들이 잇따랐고, 인원은 4, 50명에 달했다. 오가키 번에서도 단속과 경호를 위한 인원이 파견되었다. 우지사다는 연좌로 인해 로주의 명령으로 5월까지 출사를 정지당했다.
제6대 번주 토다 우지히데戸田氏英일본어는 1747년(엔쿄 4년)부터 '엔쿄의 나가오히마'(延享の長御暇)라는 번정 개혁을 추진했으나, 연공 증징을 실시했기 때문에 1766년(메이와 3년)에 백성들의 잇키가 일어나 실패했다.
제7대 번주 토다 우지노리戸田氏教일본어는 고즈케국 다테바야시번주 마쓰다이라 다케치카松平武元일본어의 친자였고, 그 인연으로 로주로 발탁되어 막정에 참여했다.
제8대 번주 토다 우지쓰네戸田氏庸일본어는 1840년(덴포 11년), 번교인 치도칸(致道館, 후의 게이토칸(敬教堂))을 창설했다.
제9대 번주 토다 우지마사戸田氏正일본어는 성대(城代)인 오하라 텟신小原鉄心일본어과 함께 번정 개혁을 실시했고, 1856년(안세이 3년)에는 군제 개혁도 실시했다. 제10대 번주 토다 우지아키라戸田氏彬일본어도 번정 개혁을 실시했지만, 안세이 대옥으로 좌절되었다.
제11대 번주 토다 우지타카戸田氏共일본어는 제2차 조슈 정벌에 참가했고, 1866년(게이오 2년)부터 번정 개혁을 단행했다. 1868년(게이오 4년) 1월의 도바·후시미 전투에서는 오가키군과 신정부군이 싸워, 조적으로 지정되었다 (번주의 입경 금지). 그러나 신정부에 소환된 가신 오하라 텟신은 즉시 오가키로 귀국하여 선대 번주인 우지마사와 함께 우지토모와 사쿠보 파를 설득하여 존왕파로 번론을 통일하고 사죄했으며, 보신 전쟁에서는 신정부군에 가담하여 도산도 군의 선봉을 맡았다. 그 결과, 1868년(메이지 원년) 8월에는 도바·후시미 전투와 관련하여 같은 해 4월에 받은 처분이 해제되었고, 1869년(메이지 2년) 6월에 신정부로부터 상전록 3만 석을 하사받았다. 직후의 판적봉환으로 우지토모는 오가키 번 지사로 임명되었다. 1871년(메이지 4년) 7월, 폐번치현으로 오가키 번은 폐번이 되었고, 오가키 현을 거쳐 기후현에 편입되었다.
1884년(메이지 17년)에 화족령이 공포되자, 우지토모는 백작으로 서임되었다. 우지토모는 1936년(쇼와 11년)까지 생존하여 장수를 누렸다. 또한, 가로인 오하라 가는 텟신의 메이지 유신의 활동이 공적으로 인정되어 1900년(메이지 33년)에 남작으로 서임되었다.
4. 지번
- 오가키 신덴 번
- 노무라번
대부분의 번 체제와 마찬가지로, 오가키번은 정기적인 토지대장 조사와 예상 농업 생산량을 바탕으로 할당된 ''고쿠다카''를 제공하도록 계산된 여러 개의 불연속적인 영토로 구성되었다.[2][3]
5. 가로 (도다 가문)
- '''오오타카 킨에몬가'''(大高金右衛門家)
- * 오오타카 이치도(大高一度) - 코신(孝親, 지행 2000석) → 키요히로(清度, 코신의 동생) - 시게히로(重度) → 아리히로(在度, 와다 요시토모의 아들, 양자) - 코도(故度) - 미치히로(道度) - 슈도(集度) - 교도(喬度, 문무관 총재·군사 총재·가로) - 코이치로(幸一郎)
- '''토다 지부자에몬가'''(戸田治部左衛門家)
- * 토다 나가시게(戸田永重, 시부야 야헤에, 전 나오에 카게아키의 수호역) → 나오나가(直永, 토다 마사나가의 아들, 양자, 지행 1200석) - 나오시게(直茂) - 나오카타(直方, 지행 1400석) → 나오요시(直美, 나오카타의 동생, 양자) - 나오오키(直興) - 나오즈미(直澄) → 나오유키(直之, 토다 세이테츠의 셋째 아들, 양자, 지행 1000석) → 나오야스(直安, 나오즈미의 아들, 양자) - 나오타카(直喬, 지행 1400석) - 나오야스(鋭之助, 모리타 아키오의 외조부)
- '''토다 누이도노가'''(戸田縫殿家)
- * 토다 우지키요(戸田氏清, 토다 우지노부의 아홉째 아들) - 노부하루(信晴, 지행 2000석) 방국(方局) - 노부타츠(信辰) - 노부치카(信周) - 노부토시(信敏) - 노부히로(信博) → 노부오키(信起, 토다 우지마사의 아들, 양자)
- '''토다 곤다이후가'''(戸田権大夫家)
- * 토다 도시테츠(戸田利鉄, 토다 우지테츠의 일곱째 아들, 지행 1300석) - 도시타다(利胤, 료스이) - 테츠토시(鉄敏, 지행 1000석) 치테츠(知鉄) → 세이테츠(精鉄, 토다 마사사다의 아들, 양자) - 야스테츠(安鉄) - 아키테츠(章鉄) - 칸테츠(寛鉄, 산야, 지행 2300석)
- '''토다 고로자에몬가'''(戸田五郎左衛門家)
- * 토다 우지요리(戸田氏頼, 토다 우지테츠의 넷째 아들, 지행 1300석) - 시게하루(重春) - 요리오(頼雄, 지행 1000석) - 테루요리(輝頼) - 카게요리(景頼) - 요시요리(義頼) - 요리큐(頼及) - 주조(主税) → 고로에몬(五郎右衛門, 토다 산야의 둘째 아들, 양자)
- '''오바라 씨'''(小原氏, 오가키번 내 750석·중신) - 메이지 유신 후 남작 서임.
- * 오바라 타다토요(小原忠豊, 100석) - 타다아키(忠顕, 성대 750석) - 타다치카(忠珍) → 타다토키(忠辰, 토다 기에몬 요시토요의 둘째 아들, 양자) - 노우(能右, 850석) → 노우레이(能令, 토다 기에몬 요시야스의 넷째 아들, 양자, 500석) - 타다유키(忠行) - 타다히로(忠寛, 텟신) → 타다미치(忠迪, 양자)
6. 막말의 영지
대부분의 한 체제와 마찬가지로, 오가키번은 정기적인 토지대장 조사와 예상 농업 생산량을 바탕으로 할당된 ''고쿠다카''를 제공하도록 계산된 여러 개의 불연속적인 영토로 구성되었다.[2][3]
'''미노국 내 영지 목록'''
{| class="wikitable"
|+ 모토스군 (31개 마을)
|-
! 마을 이름 !! 석고 (石)
|-
| 야마구치 마을(山口村) || 315.929993
|-
| 간카이 마을(神海村) || 118.362000
|-
| 사하라 마을(佐原村) || 86.407997
|-
| 키쿠라 마을(木倉村) || 94.953003
|-
| 가와우치 마을(川内村) || 249.253006
|-
| 오쿠 마을(奥村) || 118.150002
|-
| 가네하라 마을(金原村) || 92.379997
|-
| 히라노 마을(平野村) || 28.770000
|-
| 이타쇼 마을(板所村) || 202.024994
|-
| 이치바 마을(市場村) || 61.212002
|-
| 간쇼 마을(神所村) || 104.875999
|-
| 나카무라(中村) || 80.514999
|-
| 고에소쓰 마을(越卒村) || 146.854996
|-
| 가도와키 마을(門脇村) || 61.092999
|-
| 나가미네 마을(長嶺村) || 130.626007
|-
| 텐고도 마을(天神戸村) || 121.806
참조
[1]
서적
江戸五百藩-ご当地藩のすべてがわかる
Chuokoron-Shinsha
2020
[2]
서적
The Bakufu in Japanese History
https://books.google[...]
1987
[3]
서적
Warlords, Artists, & Commoners: Japan in the Six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1987
[4]
문서
赤穂浪士の実像
[5]
서적
戊辰戦争と「朝敵」藩-敗者の維新史-
八木書店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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