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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송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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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두송은 명나라 시기의 무관으로, 요동총병관을 역임했다. 그는 용감하고 뛰어난 무예 실력을 갖췄지만, 무모하고 거친 성격으로 인해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초기에는 닝샤 수비, 옌쑤이 참장 등을 거치며 서북 지역에서 활약했고, 이후 요동총병관으로 임명되어 후금과의 대립에 참여했다.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사했으며, 사후 소보좌도독에 추증되었다.

2. 생애

두송은 얼굴이 검고 전투 시에 금도(金刀)를 휘둘러 '두흑자(杜黑子)'라는 별명으로 불렸다.[1] 용맹했지만 무모하고 거친 성격으로, 전투에 앞장섰으나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승려가 되겠다고 소리치기도 했다.[1]

만력 36년(1608) 여름, 이성량의 뒤를 이어 요동총병관이 되었다. 이전 전투에서 패배한 후 자살하려 했으나 조정에 의해 강제로 귀향 조치되었다.[1] 이후 다시 총병관으로 기용되어 건주여진 누르하치 토벌에 참여했다.[1]

만력 47년(1619), 양호는 4로로 군대를 편성하여 허투알라를 공격했고, 두송은 중로좌익 산해관총병을 맡았다.[1] 양호는 심양에서 전쟁을 지휘했고, 두송은 공을 세우기 위해 급히 진군하다가 사르후(오늘날 요녕성 무순시 동쪽 혼하 남쪽)에서 복병을 만났다.[1] 두송은 라임부에게 사살되었고, 명군은 혼란에 빠져 몰살되었다.[1] 누르하치는 사르후 전투에서 승리한 후 팔기 주력군을 이끌고 명 북로군을 격파했다.[1] 양호는 두송과 마림 군대의 패배 소식을 듣고 이여백유정을 불렀으나, 유정은 전사했고 이여백은 후퇴했다.[1] 사르후 전투 이후 명 조정은 두송의 경솔한 진군을 질책했다.[1]

천계 연간(1621-1628)에 소보좌도독에 추증되었고, 천호 세습과 사당 건립 및 제사가 허락되었다.[1]

2. 1. 초기 활동과 서북 지역에서의 활약

두송은 담력과 지략을 갖추고 용감하며 굳건한 인물이었다. 처음에는 사졸로 종군하여 공을 세워 닝샤 수비가 되었다. 만력 22년(1594년), 오르도스 부의 보쇼크트·지논이 장춘정을 공략하고 하마관에 침입했을 때, 두송은 유격장군으로 진급하고 옌쑤이 참장으로 전임되었다. 마귀가 보쇼크트·지논의 본거지를 급습하자, 두송은 우군을 이끌고 칭핑바오로 진출하여 많은 적을 사로잡아 죽였으며, 옌쑤이 부총병으로 진급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본관 그대로 닝샤 동로 부총병으로 전임되었다.

두송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성격으로, 사소한 일에 분노하여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기도 했으나, 부하에게 붙잡혀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산 부총병으로 재기했다.

만력 33년(1605년), 서도독첨사에 발탁되어 이여장(이여송, 이여백의 아우)을 대신하여 옌쑤이에 주둔했다. 만력 34년(1606년), 오르도스 부가 안변보, 회원보를 침범하자, 두송은 이를 격파했다. 기주진으로 전출되었다. 만력 36년(1608년) 여름, 이성량을 대신하여 요동에 주둔했다. 12월, 연산역에서 적을 격파했다.

타안위의 장앙의 아들인 뢰윤달이 종부의 맹금과 함께 기주진의 하류구에 잠입하여 약탈하고 떠났다. 또한 뢰윤달은 황태극과 결탁하여 희봉구를 침범하려 했다. 두송은 총독 왕상건의 지시를 받아 몰래 황태극의 장막을 습격하고, 기주진을 습격한 자들을 연행했다. 그대로 영원 중좌소에서 야간에 하류토까지 달려가 공토의 부족 140여 명을 살해했다. 두송은 대승을 아뢰고 후한 포상을 요구했다. 부사 마증은 공토가 명에 내속되어 학살의 필요성이 없다고 보고했다. 두송과 마증은 서로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상대의 죄를 폭로했다. 두송은 분노하여 더욱더 포상을 요구했고, 만력제는 이를 주었다.

만력 37년(1609년), 공토는 죄 없이 동족을 살해당한 것에 분노하여 소달청이 봉기, 5000기로 대승보를 함락시키고 수장인 경상인을 붙잡아 오체분시했다. 깊숙이 소능하까지 침입하여 상가를 불태우고 약탈했다. 유격 우수지가 산구에서 공토와 조우하여 대패, 1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우수지도 중상을 입었다. 두송은 대능하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굳이 구원하지 않았다. 요동의 명나라 사람들은 두송을 책망했고, 조정에서는 두송이 금주 변방 10리에 머물렀고 변방 밖으로 출정하지 않았으며, 두송의 공적으로 여겨지는 것은 변방 안을 지키는 부족 사람들을 붙잡아 죽인 것이고 전투에서 참수한 것이 아니라고까지 말했다. 두송은 더욱 분노하여 여러 신하들이 마증에게 아첨하여 자신의 기이한 공을 훼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두송은 스스로 병사를 이끌고 변방 밖으로 나가 적의 근거지를 급습하여 전의 치욕을 씻으려 했으나, 얻은 것은 5명의 수급에 그쳤고 병사와 말의 대부분을 대능하에서 잃었다. 두송은 더욱 분개하여 여러 번 자살을 시도하고 무기와 병기를 불태웠으며, 변방의 군사에 대해 일절 묻지 않았다. 병부는 그 경위를 아뢰어 두송을 향리에 돌려보냈고, 왕위를 대신 요동에 파견했다.

2. 2. 요동 총병관 시절과 후금과의 대립

두송은 얼굴이 검고 전투 시에 금도(金刀)를 휘두르는 모습 때문에 '두흑자(杜黑子)'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용맹했지만 무모하고 거친 성격으로, 전투에서 앞장서 싸웠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승려가 되겠다고 소리치기도 했다. 만력(萬曆) 36년(1608) 여름, 이성량(李成梁)의 뒤를 이어 요동총병관(遼東總兵官)이 되었다. 이전 전투에서 패배한 후 자살하려 했으나 조정에 의해 강제로 귀향 조치되었다. 이후 다시 총병관으로 기용되어 건주여진(建州女眞) 누르하치(Nurhaci, 努爾哈赤) 토벌에 참여했다.

만력(萬曆) 47년(1619), 양호(楊鎬)는 4로(四路)로 군대를 편성하여 허투알라(Hetu Ala, 赫圖阿拉)를 공격했다. 두송은 중로좌익(中路左翼) 산해관총병(山海關總兵)을 맡았다. 양호는 심양(瀋陽)에서 전쟁을 지휘했고, 두송은 공을 세우기 위해 급히 진군하다가 사르후(Sarhū, 薩爾滸, 오늘날 요녕성 무순시 동쪽 혼하 남쪽)에서 복병을 만났다. 두송은 라임부(Laimbu, 賴慕布)에게 사살되었고, 명군은 혼란에 빠져 몰살되었다. 누르하치는 사르후 전투에서 승리한 후 팔기(八旗) 주력군을 이끌고 명 북로군을 격파했다. 양호는 두송과 마림(馬林) 군대의 패배 소식을 듣고 이여백(李如柏)과 유정(劉鋌)을 불렀으나, 유정은 전사했고 이여백은 후퇴했다. 사르후 전투 이후 명 조정은 두송의 경솔한 진군을 질책했다.[1]

천계(天啓) 연간(1621-1628)에 소보좌도독(少保左都督)에 추증되었고, 천호(千戶) 세습과 사당 건립 및 제사가 허락되었다.[1]

2. 3. 사르후 전투와 죽음

두송은 얼굴이 검고 전투 시 금도(金刀)를 휘둘러 '두흑자(杜黑子)'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용맹했으나 무모하고 급한 성격으로, 전투에 앞장섰다. 만력(萬曆) 36년(1608) 이성량(李成梁)의 뒤를 이어 요동총병관(遼東總兵官)이 되었다가, 이전 전투 패배로 자살하려다 귀향 조치되었다. 이후 다시 총병관으로 기용되어 건주여진(建州女眞) 누르하치(Nurhaci, 努爾哈赤) 토벌에 참여했다.

만력 47년(1619), 양호(楊鎬)는 군대를 4로(四路)로 편성하여 허투알라(Hetu Ala, 赫圖阿拉)를 공격했다. 이때 두송은 중로좌익(中路左翼) 산해관총병(山海關總兵)을 맡았다. 다른 지휘관은 중로우익(中路右翼) 요동총병(遼東總兵) 이여백(李如柏), 북로(北路) 개원총병(開原總兵) 마림(馬林), 남로(南路) 요양총병(遼陽總兵) 유정(劉鋌)이었다. 양호는 심양(瀋陽)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두송은 공을 서둘러 눈을 밟으며 진군, 음력 4월 14일 소자하(蘇子河)가 후너허(Hunehe, 渾河)로 합류하는 지점에서 도하했다. 사르후(Sarhū, 薩爾滸, 오늘날 요녕성遼寧省 무순시撫順市 동쪽 혼하渾河 남쪽)에서 복병을 만나, 두송은 절벽 아래에서 누르하치의 아들 버일러(貝勒) 라임부(Laimbu, 賴慕布)에게 사살되었다. 이로 인해 명군은 혼란에 빠져 몰살당했다.

15일, 누르하치는 팔기(八旗) 주력군으로 명 북로군을 격파, 마림은 개원(開原)으로 도주했다. 양호는 두송과 마림 군대의 패배 소식을 듣고 이여백과 유정을 불렀으나, 유정은 적진 깊숙이 들어가 전사했다. 이여백은 철병 명령을 받고 후퇴했다. 사르후 전투 이후 명 조정은 두송의 경솔한 진군을 패배의 원인으로 보았다.

천계(天啓) 연간(1621-1628) 두송은 소보좌도독(少保左都督)에 추증되었고, 세습 천호(千戶)와 사당 제사가 허락되었다.[1]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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