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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 (15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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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정은 명나라의 무관으로, 묘족 반란 토벌, 버마 원정,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참전, 양응룡의 난 진압 등 다양한 군사적 활동을 수행했다. 그는 임진왜란에 부총병으로 참전하여 조선에 원군을 파견했고, 정유재란에서는 총병으로 활약했다. 만력 47년 사르후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청나라는 그의 충절을 기려 충장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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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 (1558년)
기본 정보
유정의 초상화
유정의 초상화
한자劉綎
병음Liú Tíng
생몰년1558년 ~ 1619년
자립(子立)
시호무양(武陽)
관직 및 직위
최종 관직총병(總兵)
봉작동지후(東止侯)
활동 시기
시대명나라
주요 활동임진왜란 참전, 사르후 전투 참전
가족 관계
아버지유현(劉顯)

2. 생애

유정은 유현의 아들로, 아버지의 직위를 물려받아 음서로 지휘사가 되었다. 만력 초기, 아버지를 따라 구사만(현재 사천성 서영 경계) 토벌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워 운남이동수비(雲南以東守備)로 승진했고, 이후 남경소교장좌영(南京小教場坐營)에 임명되었다. 유정은 120근짜리 칼을 사용해 '유대도(劉大刀)'라는 별명을 얻었다.[5]

만력 원년(1573년), 아버지를 따라 사천성 서주부(叙州府)에서 선봉장으로 참전하여 구사만(九絲蠻)의 추장을 토벌하는 등 군공을 세웠다. 만력 9년(1582년) 겨울, 아버지가 사망하자 사천의 가정(家丁)을 계승하여 군벌을 지휘하게 되었다.

만력 11년(1583년), 유정은 버마 왕 난다바인을 토벌하여 이름을 얻었다. 등자룡과 요관(姚關) 이남에서 버마군을 대파하였고, 맹양(孟養), 목방(木邦), 맹밀(孟密), 농천(隴川)의 토사(土司)를 회유하였다. 같은 해 유정은 등월유격(騰越游撃)으로서 등자룡 등과 함께 따웅우 왕조 군의 침입을 막았다.[1]

유정은 부총병(副總兵)으로 조선에 파견되어 임진왜란에 참전하였다. 만력 20년(1592년)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사천병을 중심으로 5,000명의 가정을 이끌고 조선에 원군으로 왔다.[1] 만력 21년(1593년) 4월 말 압록강을 건너 본대와 합류, 상주를 거쳐 대구에서 충주까지 진출하였다. 일본군이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라도를 위협하자, 유정은 삽천에 배치되어 방어하였다. 이후 평화 협상으로 전황이 교착되자, 명나라는 송응창과 이여송을 귀국시켰으나 유정 등은 조선에 주둔하며 일본군과 대치하였다. 만력 22년(1594년) 봄, 유정은 조선 승려 유정을 통해 가토 기요마사에게 별도로 협상을 진행하였다. 그 후 만력 22년(1594년) 7월 9일에 일시 귀국하였다.[1]

정유재란에서는 총병으로 승진하여 삼로 중 서로군의 대장으로 참전했다. 만력 26년(1598년) 순천왜성 전투에서 진린과 함께 순천성을 공격하였으나 패퇴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일본군 철군 명령에 따라 다시 순천왜성을 포위하였으나, 고니시 유키나가와 화의를 맺고 일족인 유천작을 인질로 보내 철군을 촉구하였다. 일본군 철군 후, 유정은 순천왜성을 접수하였다.

만력 27년(1599년) 사천성 보주에서 일어난 양응룡의 난 진압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만력 44년(1616년) 지방관 폭행 사건으로 파면되어 고향 남창으로 돌아갔다.[2]

1619년 명나라후금 군대가 격돌한 사르후 전투에서 유정은 우익남로군(右翼南路軍)을 이끌었다. 유정은 선전했지만 양호와의 불화로 동로(東路)로 파견되었고, 그의 군대는 깊숙이 침투하여 고립되었다.[6]

다이샨이 지휘하는 팔기(八旗) 철기(鐵騎) 정예가 유정의 동로군과 격전을 벌였다. 유정은 양팔에 상처를 입고 얼굴 절반이 베어져 나갔는데도 수십 명을 찔러 죽이고 전사하였으며, 동로군도 전멸하였다.[6] 3월 4일, 홍타이지와 부장 훌한(フルハン)의 삼면 포위를 받아 동남로군은 궤멸되었고, 유정 또한 향년 62세로 전사했다. 조금 늦게 도착한 강홍립의 조선군은 공격으로 고립된 후 후금군에 항복했다.[3]

에서는 그에게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6][4]

2. 1. 초기 생애와 묘족 반란 토벌

유현의 아들이었으며, 아버지의 관직을 물려받아 음서로 지휘사(指揮使)가 되었다. 만력 초기, 아버지를 따라 구사만(현재 사천성 서영 경계) 토벌에 참여하여 선봉에서 병사들을 이끌고 성벽에 올라 수령 아대(阿大)를 체포하는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운남이동수비(雲南以東守備)로 승진하였고, 이후 남경소교장좌영(南京小教場坐營)에 임명되었다. 유정은 120근짜리 칼을 사용해 '유대도(劉大刀)'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연(燕, 하북성)과 조(趙, 산서성)에서 데려온 20여 명의 첩을 두었는데, 이들은 모두 말을 잘 타고 탄환을 잘 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유정이 출순할 때면 이 첩들은 무장하고 작은 가죽신을 신은 채 준마를 타고 앞장서서 길을 인도했으며, 네 명의 역사(力士)가 유정의 칼걸이를 들고 그 뒤를 따랐고, 유정은 이들 뒤에서 따라갔다고 한다.[5]

만력 원년(1573년), 아버지를 따라 사천성(四川省) 서주부(叙州府)에서 선봉장으로 참전하여 구사만(九絲蠻)의 추장을 토벌하는 등 군공을 세웠다. 만력 9년(1582년) 겨울, 아버지가 사망하자 사천의 가정(家丁)을 계승하여 군벌을 지휘하게 되었다.

2. 2. 버마 원정 참전

만력(萬曆) 11년(1583), 유정은 버마 왕 난다바인(南達勃因, 망응리(莽應里))을 토벌하여 이름을 얻었다. 등자룡(鄧子龍)과 요관(姚關) 이남에서 버마군을 대파하였고, 맹양(孟養), 목방(木邦), 맹밀(孟密), 농천(隴川)의 토사(土司)를 회유하였다. 따웅우 왕조를 바인나운(莽応龍)으로부터 계승한 난다바인은 한족 악봉(岳鳳)의 도움을 받아 명나라 운남 지방에 침입하였는데, 같은 해 유정은 등월유격(騰越游撃)으로서 등자룡 등과 함께 따웅우 군의 침입을 막았다.[1]

2. 3.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참전

유정은 부총병(副總兵)으로 조선에 파견되어 임진왜란에 참전하였다. 만력 20년(1592년)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사천병을 중심으로 5,000명의 가정을 이끌고 조선에 원군으로 왔다.[1] 만력 21년(1593년) 4월 말에 압록강을 건너 본대와 합류하였다. 일본군이 이미 한성에서 남쪽으로 후퇴했기 때문에, 유정, 사대수(査大受), 조승훈 등은 상주의 조령을 거쳐 대구에서 충주까지 진출하였다. 일본군이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활발하게 작전을 펼쳐 전라도를 위협하자, 총병 이여송은 남원에 이평호(李平胡), 사대수(査大受)를, 함양에 조승훈(祖承訓), 이녕(李寧)을, 삽천에 유정을 배치하여 방어하게 하였다. 그 후 전황은 평화 협상으로 인해 교착되었다. 9월에 명나라는 송응창과 이여송을 귀국시켰으나, 부총병 유정, 유격 오유충(吳惟忠) 등 7600명을 조선에 주둔시켰고, 유정의 군대는 조선 육수군도 지휘하에 두고 일본군과 대치하였다. 만력 22년(1594년) 봄, 명나라 측 심유경-소서행장 라인과는 별도로 유정은 조선 승려 유정을 통해 가토 기요마사에게 별도로 협상을 진행하였다. 그 후 유정이 일시 귀국한 것은 만력 22년(1594년) 7월 9일이었다.[1] 송응창의 귀국으로 조선 군무 경략이 고양겸(顧養謙)이 되자 두 사람은 앞뒤로 귀국하였다.

휴전 기간에도 조선에 머물렀고, 정유재란에서는 총병으로 승진하여 삼로 중 서로군의 대장으로 참전했다. 만력 26년(1598년) 순천왜성 전투에서 수군을 이끈 진린과 함께 수륙에서 순천성을 공격하였으나 많은 피해를 입고 패퇴하였다. 삼로 중 동로군도 제2차 울산성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격퇴되었고, 중로군은 사천 전투에서 대패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함에 따라 고니시 유키나가 등 일본군에게 철군 명령이 전달되자, 다시 순천왜성을 포위하였으나, 수성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유정은 화의를 맺고, 유정은 일족인 유천작을 일본군에게 인질로 보내 철군을 촉구하였다. 일본군이 철군한 후, 유정은 무인의 순천왜성을 접수하였다.

2. 4. 양응룡의 난 진압

만력 27년(1599년) 사천성 보주에서 일어난 양응룡의 난 진압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만력 44년(1616년) 지방관 폭행 사건으로 파면되어 고향 남창으로 돌아갔다.[2]

2. 5. 사르후 전투와 전사

1619년 명나라후금 군대가 격돌한 사르후 전투에서, 양호는 병력을 넷으로 나누어 진군시켰다. 네 총병관(總兵官)은 허투알라로 진격했는데, 산해관총병 두송, 요동총병 이여백, 개원총병 마림, 그리고 요양총병 유정이었다. 유정은 우익남로군(右翼南路軍)을 이끌었다. 유정은 선전했지만 양호와의 불화로 동로(東路)로 파견되었고, 그의 군대는 깊숙이 침투하여 고립되었다.[6]

서로(西路) 주력 산해관총병 두송은 복병을 만나 참패하여 전군이 몰살당했다. 이어 북로(北路) 마림도 패하여 개원으로 도주하였다. 두 군대가 패배한 소식을 들은 양호는 유정과 이여백 군대를 급히 불렀다. 이때 유정은 300리까지 진군하여 심하(深河)에 이르렀고, 잇달아 세 채(寨)를 무너뜨리고 동악로로 들어갔다. 누르하치는 두송군의 사자로 위장한 병사를 보내 유정을 속여 아부달리강까지 진격시켰다. 유정은 일렬로 진군하였다.[6]

다이샨이 지휘하는 팔기(八旗) 철기(鐵騎) 정예가 유정의 동로군과 격전을 벌였다. 유정은 양팔에 상처를 입고 얼굴 절반이 베어져 나갔는데도 수십 명을 찔러 죽이고 전사하였으며, 동로군도 전멸하였다.[6] 3월 4일, 홍타이지와 부장 훌한(フルハン)의 삼면 포위를 받아 동남로군은 궤멸되었고, 유정 또한 향년 62세로 전사했다. 조금 늦게 도착한 강홍립의 조선군은 공격으로 고립된 후 후금군에 항복했다.[3]

에서는 그에게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6][4]

3. 기타

유정은 120근의 칼을 말 위에서 휘두르며 돌격했기에 "유대도(劉大刀)"라는 별명이 붙었다.[1] 유정은 '가정(家丁)'이라 불리는 사병 집단을 운영했으며, 전투 지역에서 전력이 될 만한 자는 자신의 부하로 편입시켜 전력으로 삼았다.[1] 부하 중에는 출신지인 사천(四川) 사람이 많았지만, 그 외에도 국내 전역과 적지인 미얀마(ビルマ)일본의 이민족 출신자를 포함하여 항상 약 2,000명의 가정이 따랐다.[1] 분로·경장의 역(文禄・慶長の役)에서 항복한 일본군(항왜)을 자신의 부하로 삼아 鉄砲|뎃포일본어 부대를 조직하여 양응룡의 난(楊応龍の乱)에 투입, 전과를 올렸다.[1]

4. 관련 작품

참조

[1] 문서 曹国慶2002
[2] 문서 久芳崇2007
[3] 서적 陸戦史集5 明と清の大決戦(中国古戦史) 陸戦史研究普及会 1967
[4] 서적 情史類略
[5] 서적 정사유략(情史類略)
[6] 서적 흠정승조순절제신록(欽定勝朝殉節諸臣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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