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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센느 드 벨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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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귀스타브 뒤센 드 벨쿠르는 1857년 중국 주재 프랑스 공사관 서기관으로 임명되어 제2차 아편 전쟁에 참여했으며, 이후 일본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그는 1859년 초대 주일 프랑스 영사로 부임하여, 통역 지라르 신부와 함께 불일수호통상조약 체결을 위한 활동을 펼쳤다. 초기에는 강경한 외교 정책을 펼쳐 무력 사용을 지지했으나, 프랑스 정부의 반대로 인해 한계에 직면했고, 이후 막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며 요코하마 쇄항 담판 사절단 파견을 지원했다. 1864년 레옹 로슈에게 공사직을 넘기고 귀국 후 튀니스 총영사를 역임했으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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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센느 드 벨쿠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46세 당시의 뒤센느 드 벨쿠르, 1863년
46세 당시의 뒤센느 드 벨쿠르, 1863년
이름ギュスターヴ・デュシェーヌ・ド・ベルクール (ギュスターヴ・デュシェーヌ・ド・ベルクール)
프랑스어 이름Gustave Duchesne de Bellecourt (귀스타브 뒤센 드 벨쿠르)
직업외교관
출생지, 파리
사망지, 파리
경력
초대 주 프랑스 공사임기 시작: 1859년
임기 종료: 1864년
이전: 샤를 드 샤시롱 (영사)
이후: 레옹 로슈
주 튀니스 군후국 프랑스 공사임기 시작: 1864년
임기 종료: 1869년

2. 초기 생애 및 중국에서의 활동

1857년, 뒤센 드 벨쿠르는 장 밥티스트 루이 그로를 따라 중국에 파견된 프랑스 외교 사절단의 비서관을 맡았다.[26][2][14] 그는 당시 발발한 제2차 아편 전쟁(애로우 전쟁)에 참여하여 중국을 상대로 한 군사 작전에 관여하였다.[26][2][14] 이듬해인 1858년(안세이 5년)에는 그로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불일수호통상조약(프랑스-일본 우호 통상 조약) 체결을 위한 교섭에 참여하였다.[2][14]

3. 일본에서의 외교 활동

1857년, 뒤센느 드 벨쿠르는 장 밥티스트 루이 그로의 휘하에서 중국에 파견되어 프랑스 외교단의 비서관으로 활동하며 제2차 아편 전쟁(애로우 전쟁)에 참여했다.[26][14] 1858년(안세이 5년)에는 그로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불일수호통상조약(프랑스-일본 우호 통상 조약) 체결을 위한 교섭에 참여했다.

뒤센 드 벨쿠르가 1860년 불일수호통상조약 비준서를 ''쇼군''에게 전달하는 모습. 메르메-카숑 신부가 동행했다.


이듬해인 1859년(안세이 6년) 9월 6일, 뒤센느 드 벨쿠르는 다시 일본에 파견되어[27][3][13] 초대 주일본 프랑스 영사("주일본 프랑스 전권 공사")로 부임했다.[28][4][15] 이는 일본 최초의 프랑스 공식 대표였으며, 통역은 지라르 신부가 맡았다.[4] 그는 1850년대 후반부터 1860년대까지 디르크 데 흐라프 판 폴스브로크, 타운젠드 해리스, 러더퍼드 올콕, 막스 폰 브란트 등 다른 서구 열강의 외교관들과 함께 에도 막부 말기 혼란스러운 일본 정세 속에서 중요한 외교적 역할을 수행했다.[5] 이들은 때로는 협력했지만, 각국의 이해관계와 일본을 대하는 방식의 차이로 인해 갈등을 겪기도 했다.[5]

1861년(분큐 원년)에는 공사로 승진했으며,[30][17] 영국 공사 러더퍼드 올콕과 협력하며 에도 막부에 대해 때로는 강경한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30][17] 그는 나마무기 사건 등 여러 사건에 개입하며 초기에는 무력 사용을 지지하는 강경 노선을 보였으나,[31][8][19] 이는 프랑스 본국 정부의 정책 방향과 달라 비판을 받기도 했다.[32][8][19] 이후 점차 친(親)막부적인 입장으로 선회하여 요코하마 쇄항 담판 사절단 파견을 지원하는 등 변화된 모습을 보였다.[33][20]

1864년(겐지 원년), 뒤센느 드 벨쿠르는 후임자인 레옹 로슈에게 주일 공사직을 인계했다.[34][9][10][20] 그의 활동은 후임자인 로슈가 막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프랑스가 막부 정책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35][36][21][22]

일본에서의 임무를 마친 뒤센느 드 벨쿠르는 총영사로 튀니스에 파견되었으며,[37][23] 일본에서의 외교적 공로를 인정받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다.[38][24]

3. 1. 일본 주재 초기 활동과 사건

1859년 9월 6일, 뒤센 드 벨쿠르는 일본에 도착하여[27][13] 초대 주일본 프랑스 영사가 되었다.[28][15] 이는 1858년 장 밥티스트 루이 그로와 함께 불일수호통상조약 협상을 위해 일본을 방문한 이후의 일이다. 그의 통역은 지라르 신부가 맡았다.[4] 벨쿠르는 1850년대 후반과 1860년대에 디르크 데 흐라프 판 폴스브로크, 타운젠드 해리스, 러더퍼드 올콕, 막스 폰 브란트 등 다른 서방 외교관들과 함께 일본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국가적 이해관계로 인해 갈등하기도 했다.[5]

1860년(만엔 원년), 프랑스 총영사관으로 사용하던 에도의 사이카이지(済海寺, 제해사) 앞에서 벨쿠르의 하인이 습격당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29][6][16]

불일수호통상조약의 비준서를 쇼군에게 전달하기 위해 에도성으로 향하는 뒤센 드 벨쿠르 일행, 1860년 2월 4일


1861년(분큐 원년)에는 공사로 승진했다.[30][17] 그는 에도 막부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취하며 영국 공사 러더퍼드 올콕과 보조를 맞추었다.[30][17] 미국 공사관 통역관이었던 헨리 휴스켄이 살해당하는 사건(헨리 휴스켄 살해 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항의하기 위해 올콕과 함께 공사관을 에도에서 요코하마로 일시 이전하기도 했다.[30][17]

1863년(분큐 3년)에는 영국인이 사쓰마 번 무사에게 살해된 나마무기 사건(生麦事件)의 해결을 위한 협상에 관여했다.[7][18] 중국에서의 서구 열강의 개입 사례(제2차 아편 전쟁 등)를 경험한 벨쿠르는 일본과의 외교에서도 무력 사용을 적극 지지하는 입장이었다.[31] 그는 1863년 7월 20일 뱅자맹 조레스 제독이 이끈 프랑스 해군의 시모노세키 포격과 같은 해 8월 어거스터스 레오폴드 쿠퍼 제독이 이끈 영국 해군의 가고시마 포격을 모두 지지했다.[31][8][19]

1863년 7월 2일, 나마무기 사건 배상 협상을 위한 프랑스 군함 세미라미스호에서의 영국-프랑스 회의. 앞: 프랑스 통역 브레크만, 막부 통역. 이쪽 방향 (왼쪽부터): 3명의 가나가와 봉행, 프랑스 공사 귀스타브 뒤센 드 벨쿠르, 와카도시요리 사카이 타다아키라, 영국 해군 쿠퍼 제독, 프랑스 해군 조레스 제독, 영국 대리 공사 존 닐.


그러나 벨쿠르의 이러한 호전적인 태도는 프랑스 본국 정부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당시 프랑스는 다른 지역에서의 군사적 문제로 인해 일본과의 추가적인 마찰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32][8][19] 나마무기 사건 협상 이후, 벨쿠르는 점차 친(親)막부적인 입장으로 바뀌었다. 1863년 가을, 막부가 요코하마 항구의 쇄항(폐쇄)을 제안했을 때 다른 국가 공사들은 반대했지만, 벨쿠르만이 이해를 보이며 요코하마 쇄항 담판 사절단의 프랑스 파견을 지원하기도 했다.[33][20]

3. 2. 강경 외교 정책과 그 한계

1863년 뒤센 드 벨쿠르는 나마무기 사건의 배상 협상에 참여했다.[7][18] 그는 중국에서 서구 열강의 군사적 개입을 경험한 바 있어, 일본과의 외교에서도 필요하다면 무력을 사용하는 것에 적극 찬성하는 입장이었다.[31][8][19] 이러한 입장에 따라, 그는 1863년 7월 20일 뱅자맹 조레스가 이끄는 프랑스 해군의 시모노세키 포대 공격과 같은 해 8월 어거스터스 레오폴드 쿠퍼가 이끄는 영국 해군의 가고시마 포격 등 서구 열강의 군사 행동을 모두 지지했다.[31][8][19]

그러나 뒤센 드 벨쿠르의 이러한 호전적인 외교 노선은 프랑스 본국 정부의 비판에 직면했다. 당시 프랑스는 세계 다른 지역에서 중요한 군사적 현안들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과의 추가적인 군사적 마찰이나 분쟁은 피하고자 했던 것이다.[32][8][19] 이로 인해 그의 강경 외교 정책은 실행에 한계를 맞게 되었다.

3. 3. 친막부 성향으로의 변화와 요코하마 쇄항 담판 사절단 지원

나마무기 사건(혹은 생맥 사건)의 협상 이후 뒤센느 드 벨쿠르는 점차 친막부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33][20] 1863년 가을, 막부가 요코하마의 쇄항(鎖港)을 제안했을 때 다른 국가 공사들은 이를 거부했지만, 뒤센느 드 벨쿠르는 막부의 입장을 이해하고 요코하마 쇄항 담판 사절단의 파견을 지원했다.[33][20]

1864년(겐지 원년) 뒤센느 드 벨쿠르는 후임자인 레옹 로슈에게 임무를 인계했다.[34][20] 레옹 로슈는 뒤센느 드 벨쿠르의 이러한 친막부적 태도에 영향을 받아 막부와 긴밀한 관계를 구축했으며, 이는 프랑스가 막부의 정책에 더욱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계기가 되었다.[35][36][21][22] 레옹 로슈는 프랑스 정부에 뒤센느 드 벨쿠르의 유임을 탄원하기도 했다.[34][20]

4. 일본 이후의 활동 및 평가

1864년 (겐지 원년) 뒤센 드 벨쿠르는 주일 공사 임무를 후임인 레옹 로슈에게 넘겨주었다. 로슈는 프랑스 정부에 뒤센 드 벨쿠르의 유임을 탄원할 정도였다.[20] 이후 뒤센 드 벨쿠르는 튀니스 총영사로 파견되어 외교관 경력을 이어갔다.[23]

그는 일본에서의 활동 등 공적을 인정받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훈했다.[24] 저서로는 La colonie de Saïgon : les agrandissements de la France dans le Bassin du Mekong|사이공 식민지: 메콩 강 유역에서 프랑스의 확장프랑스어이 있다. Google Books 링크

참조

[1] 서적 French Policy in Japan https://books.google[...]
[2] 간행물 Correspondence relative to the Earl of Elgin's special missions to China https://books.google[...]
[3] 서적 https://books.google[...]
[4] 논문
[5] 서적 Consuls and the Institutions of Global Capitalism, 1783–1914 https://books.google[...]
[6] 서적
[7] 서적
[8] 서적 https://books.google[...]
[9] 서적
[10] 간행물 Papers relating to the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https://books.google[...]
[11] 서적 https://books.google[...]
[12] 웹사이트 Base de données Mérimée ministère de la Culture et de la Communication http://www.patrimoin[...] 2008-04-08
[13] 서적
[14] 간행물 Correspondence relative to the Earl of Elgin's special missions to China https://books.google[...]
[15] 논문
[16] 서적
[17] 서적
[18] 서적
[19] 서적
[20] 서적
[21] 서적
[22] 간행물 Papers relating to the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https://books.google[...]
[23] 서적 https://books.google[...]
[24] 웹사이트 Base de données Mérimée ministère de la Culture et de la Communication http://www.patrimoin[...]
[25] 서적
[26] 간행물 Correspondence relative to the Earl of Elgin's special missions to China http://books.google.[...]
[27] 서적
[28] 논문
[29] 서적
[30] 서적
[31] 서적
[32] 서적
[33] 서적
[34] 서적
[35] 서적
[36] 간행물 Papers relating to the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http://books.google.[...] United States. Dept. of State
[37] 서적 http://books.google.[...]
[38] 웹사이트 Base de données Mérimée ministère de la Culture et de la Communication http://www.patrimoin[...] 2008-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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