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운젠드 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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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타운젠드 해리스는 19세기 미국의 외교관으로, 특히 일본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1804년 뉴욕에서 태어나 교육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1855년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에 의해 초대 주일 미국 총영사로 임명되었다. 해리스는 일본을 평화적으로 개항하고 미국의 무역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1858년 이이 나오스케와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여 일본의 개항을 이끌었다. 그는 또한 태국과의 통상 조약 체결에도 기여했다. 1862년 건강 문제로 귀국한 후 플로리다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묘소는 뉴욕 브루클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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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운젠드 해리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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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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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타운젠드 해리스 |
출생지 | 뉴욕주 워싱턴군 |
사망지 | 뉴욕주 뉴욕 |
직업 | 외교관 |
종교 | 성공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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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력 | |
직위 | [[파일:Flag of the United States (1859-1861).svg|border|25x20px]] 초대 주일본 미국 합중국 변리공사 |
임기 시작 | 1859년 11월 5일 |
임기 종료 | 1862년 4월 26일 |
대통령 | 제임스 뷰캐넌 에이브러햄 링컨 |
이후 | 로버트 프루인 |
2. 생애
1846년 뉴욕의 교육국장을 지냈으며, 1847년 현재 뉴욕시립대학교의 전신인 고등교육기관 프리 아카데미를 세웠으나 1848년에 물러났다. 그 후 몇 차례 일본으로 가고자 했으나, 매슈 페리 제독은 해리스가 군인 신분이 아니라는 이유로 동승을 거절했다. 1855년 프랭클린 피어스 대통령이 정치인들의 추천을 받아 해리스를 재일본 영사로 임명하였고, 시암과의 통상 조약 체결을 맡기도 했다.
1858년 이이 나오스케가 고메이 천황의 허락을 받지 않고 해리스와 만나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자, 해리스는 시모다를 떠나 에도의 한 사찰에 공사관을 두었다. 1862년 건강 문제로 귀국하면서 공사 자리를 로버트 프라인에게 물려주었다. 1876년 플로리다주로 이주하여 그 곳에서 숨을 거두었으며, 묘지는 뉴욕 브루클린 구의 그린우드에 있다.
- 미국에서는 1847년 설립된 뉴욕시의 "프리 아카데미"(현재의 뉴욕시립대학교 시티칼리지)의 설립자로 알려져 있다. 뉴욕시립대학교 시티칼리지 도서관에는 해리스가 일본 주재 당시 제작하게 했다고 하는 최초의 일본산 성조기를 비롯하여, 남긴 서신과 소지품 등이 전시, 보존되어 있다.
- 주일 영사 시절, 막부는 해리스의 에도 입성을 저지하기 위해 해리스와 휴스켄에게 시녀를 배치했다. 관리들은 해리스를 매수하려고 게이샤 오키치라는 여성을 파견했으나, 관리의 의도를 간파한 해리스는 크게 분노하여 오키치를 즉시 해고했다. 해리스가 생애 독신이었던 점 등으로 후세에 잘못된 소문이 더해져 쇼와 초기에는 "당인 오키치"라는 전설이 유포되어 소설과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 우유 애호가였다. 해리스가 건강을 잃었을 때 우유를 원했지만 쉽게 구할 수 없어 시녀로 고용되었던 오키치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겨우 시모다에 있는 농가에서 구해 대나무 통에 담아 운반하여 마시게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가격은 8합 8분에 1냥 3분 88문으로 매우 고가였으며, 당시 쌀가마 3가마에 해당했다고 한다. 우유를 공식적으로 매매하여 음용한 기록은 일본에서 이것이 처음이라고 하며, 이를 기념하여 규센지에는 "우유의 비"가 세워져 있다.
- 휴스켄 살해 사건 등 일본의 攘夷派(외국 배척파)의 외국인 습격 행위에 대해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네덜란드 4개국 대표는 에도 막부에 대해 공동으로 강력한 항의 행위를 했지만, 해리스는 이에 반대하여 항의 행위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 시모다에서는 시간이 나면 주변을 산책했다. 건강이 좋지 못하여 토혈 등 건강 악화에 시달렸지만, 협상 자리에 이르면 정력적으로 변하여 시모다 부교 등을 곤혹스럽게 했다. 길가의 꽃을 보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일도 잦았다.
- 1856년 시모다 거류지에서 일본 화폐와 미국 화폐의 환율에 대해 막부 측과 협상을 벌였다. 해리스는 금화와 은화 모두 "동질 동량의 원칙"에 따라 Seated Liberty dollar영어는 같은 질량에 해당하는 일분은 3개와 교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막부 측은 1달러 은화의 지금 가치가 환전 방식에 따라 은 16묭에 해당하므로 일분은 1개라고 주장하며 대립했다. 최종적으로 해리스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일본에서 1달러 은화를 일분은 3개로 환전하고 그것을 금화로 환전한 후 해외로 반출하여 팔면 폭리를 얻을 수 있게 되어 단기간에 많은 양의 오반이 일본 외로 유출되었다. 해리스 자신도 오반을 사재기하여 상하이 등에서 매각하여 이윤을 챙겼다. 그 후 막부에 대책을 조언하여 만엔 오반으로 개주조함으로써 혼란은 종식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엄청난 금이 일본에서 유출되었다(막말의 통화 문제 참조).
- 해리스와 같은 시기에 일본에서 생활한 상인 프랜시스 홀은 자신의 일기에서 해리스가 거류지 미국인들 사이에서 얼마나 싫어졌는지에 대해 적고, 저속한 소문까지 적었다.[32]
- 아편에 대해 미국 측에서 금지하도록 제안했는데, 이는 영국의 아편 무역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33]
2. 1. 초기 생애와 교육 활동 (1804년 ~ 1848년)
1804년 10월 3일 뉴욕주 워싱턴 군 선데이힐(현재의 허드슨폴스)에서 태어났다.[1] 웨일스계 가문 출신으로,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정규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했지만 독학으로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를 익혔다.[1]1846년 뉴욕시 교육위원회에 합류하여 1848년까지 위원장을 역임했다.[1] 1847년 뉴욕시 노동자들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뉴욕시 자유 아카데미를 설립했는데,[1] 이는 훗날 뉴욕시립대학교로 발전하였다. 해리스의 이름을 딴 타운젠드 해리스 고등학교는 자유 아카데미의 중등 교육 과정에서 별개의 기관으로 설립되었다가 1942년 폐교되었으나, 1984년 인문학 분야의 공립 자율학교로 재건되었다.[2]
2. 2. 무역업 종사와 아시아 진출 (1849년 ~ 1855년)
1849년, 가업 경영이 악화되자 해리스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화물선의 권리를 매입하여 무역업을 시작하였다.[18] 청나라, 뉴질랜드, 인도, 마닐라 등 태평양을 중심으로 여러 지역을 항해하며, 이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던 동양에 정착하였다.[18] 1853년, 매슈 페리가 이끄는 미 해군 동인도 함대가 일본에 대한 제1차 원정을 수행 중 청나라에 체류하고 있었는데, 상하이에 있던 해리스는 페리에게 일본 동행을 희망하였으나, 군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허가를 받지 못했다.[18]해리스는 국무장관 등 정계 인사들의 힘을 빌려 정부에 로비를 했고, 1854년 3월, 타이완 관련 보고서인 「타이완 사정 신언서」를 제출했다.[18] 같은 해 4월에는 닝보의 영사로 임명되었다.[18]
2. 3. 시암(태국)과의 조약 체결 (1856년)
해리스는 일본 주재 신임 자리로 가는 것을 간절히 원했지만, 먼저 방콕으로 가서 1833년 미-시암 친선통상조약(로버츠 조약)을 갱신했다. 영어를 구사하고 서구 지향적인 핑클라오 2대왕(프라 핀 클라오)을 공식 알현한 해리스는 미국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3]미국은 동쪽에 어떤 영토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원하지도 않습니다. 미국의 정부 형태는 식민지를 소유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미국은 어떤 동양 세력에게도 질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주고받는 이익을 가져다주는 평화로운 통상 관계야말로 대통령이 시암과 수립하고자 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제 임무의 목표입니다.
1855년 보링 조약의 최종 조인으로 해리스는 약 한 달간 지체되었지만, 그것을 1856년 해리스 조약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사소한 점들만 협상하면 되었다.[3]
'친선, 통상 및 항해 조약'으로 재명명된 이 수정 조약은 로버츠 조약에 명시된 것 외에 미국인들에게 치외법권을 부여했다. 통역으로 활동했던 미국 선교사 스티븐 매튜는 시암의 초대 미국 초기 미국 영사로 임명되었다.[4][5][6]
3. 일본에서의 활동
1858년 이이 나오스케는 고메이 천황의 허락 없이 해리스와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20] 해리스는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결단력과 막부 관리들의 협력을 얻어 조약 서명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20] 이 조약으로 미국과 일본 간의 무역이 확보되고 일본 경제와 정치에 서구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길이 열렸다.[6] 뷰캐넌 대통령은 해리스를 초대 주일 공사로 임명했고,[20] 1859년 7월 7일 에도 모토아자부 젠푸쿠지에 공사관을 설치했다.[21]
1859년 4월 하순, 해리스는 나가사키를 방문하여 존 G. 월시를 나가사키 미국 영사로 임명하고, 미국 성공회 선교를 지원했다.[22][23][24]
1860년부터 1862년까지 해리스는 하코다테 부임 당시 해리스 습격 미수 사건과 양이 사상에 따른 외국인 습격 및 방화, 고메이 천황의 조약 칙허 문제 등을 이유로 개항 연기 활동을 펼쳤다.[26] 1861년 헨리 휴스켄 살해 사건 이후, 해리스는 개항 연기에 대한 확신을 굳혔고, 막부와 협상하여 보상 합의를 이끌어낸 후 올콕에게 5년간의 개항 연기 자유 재량을 얻었다는 것을 통지했다.[29]
1862년 건강 문제와 미국 남북 전쟁 발발 등의 이유로 사임하고 귀국했으며, 공사 자리는 로버트 프라인에게 물려주었다.[12] 일본 고위 외교관 모리야마는 해리스에게 "당신은 친구 이상이었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은인이자 스승이었습니다. 당신의 정신과 기억은 일본 역사에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라고 편지를 썼다.[12] 해리스는 일본에서의 경험에 대해 "모든 사람들은 깨끗하고 잘 먹은 것 같았습니다… 잘 차려 입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본 적 없는 단순함과 정직의 황금 시대와 같습니다."라고 썼다.[13]
3. 1. 초대 주일 총영사 임명과 시모다 영사관 개설 (1855년 ~ 1857년)
1855년 프랭클린 피어스 대통령은 해리스를 초대 주일 미국 총영사로 임명했다.[7] 해리스는 일본을 평화적으로 개항시키고, 외국의 전제적 개입을 막아 미국의 동양에서의 무역 권익을 확보하는 것을 목적으로 일본과 통상 조약 체결 전권을 위임받았다. 또한, 샴과 통상 조약 체결도 명령받았다.[18]해리스는 통역 겸 서기관으로 네덜란드어에 능통한 헨리 휴스켄을 고용하고, 1856년 8월 21일(안세이 3년 7월 21일) 일본에 도착하여[19] 이즈 시모다에 입항했다. 당시 일본은 통역 부족 등의 문제로 시모다 부교(奉行) 이노우에 기요나오가 입항을 거부하기도 했지만, 협상 끝에 정식 허가를 받고 시모다 옥천사에 영사관을 설치했다.[19] 당시 일본은 하나의 지도자 아래 통일된 국가가 아니었고, 서로 질투하는 봉건 영지들로 정치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14]
해리스는 대통령 친서 제출을 위해 에도(江戶) 출부(出府)를 희망했지만, 막부(幕府)에서는 미토번의 도쿠가와 나리아키라 등 攘夷론자들이 반대하여 에도 출부는 보류되었다. 시모다에서는 땔감과 물 제공, 환율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화친조약 개정을 위한 협상이 진행되어, 1857년 6월 17일(안세이 4년 5월 26일) 시모다 협정이 체결되었다.[19] 이 무렵 해리스는 건강이 악화되어 막부에 간호사를 요청했고, 막부는 해리스를 회유하기 위해 게이샤 사이토 키치를 보내 3개월간 간병하게 했다(→카라토 오키치).[19]
3. 2. 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과 주일 공사 승진 (1858년 ~ 1859년)
1858년 이이 나오스케는 고메이 천황의 허락 없이 해리스와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20] 해리스는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결단력과 막부 관리들의 협력을 얻어 조약 서명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20] 뷰캐넌 대통령은 해리스를 초대 주일 공사로 임명했고,[20] 1859년 7월 7일(안세이 6년 6월 8일) 에도 모토아자부 젠푸쿠지에 공사관을 설치했다.[21]
3. 3. 나가사키 방문과 선교 지원 (1859년)
1859년 4월 하순, 해리스는 나가사키를 방문하여 존 G. 월시를 나가사키 미국 영사로 임명했다. 월시는 히로마바(広馬場)의 일본인 거주 지역에 최초의 나가사키 미국 영사관을 설립했다.[22]해리스는 미국 성공회의 열렬한 신자이자 뉴욕 시립대학교 시티 칼리지를 설립한 교육자로서, 일본에서 미국 성공회가 학교를 설립하는 것을 권고하고 지원했다. 개신교 최초의 미국 성공회 선교사인 존 리긴스는 1859년 5월 2일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해리스의 지원 아래 오카베 스루가노카미 나가토시의 요청으로 성공회 나가사키 사숙(릿쿄 대학의 기원)을 설립하고, 같은 해 6월 25일에 도착한 채닝 윌리엄스와 함께 영어 교육을 시작했다. 해리스는 나가사키에서도 미국의 활동 거점 구축, 정비, 선교 사업 지원을 추진하여, 일본과 미국 간의 외교 기반을 다져나갔다.[23][24]
3. 4. 개항 연기 활동과 귀국 (1860년 ~ 1862년)
1860년 8월 1일, 해리스는 미국 국무장관 루이스 캐스에게 1862년 1월 1일로 예정된 에도(江戶) 개항을 1년 연기할 것을 제안했다.[26] 하코다테 부임 당시 해리스 습격 미수 사건이 발생했고, 그 이후에도 양이 사상에 따른 외국인 습격과 방화가 잇따랐으며, 고메이 천황의 조약 칙허가 아직 막부로부터 나오지 않아 당시 막정 하에서의 개항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0월 31일(만연(萬延) 원년 9월 18일), 해리스는 로주(老中) 안도 신마사와 회담하여 너무 성급한 개항 연기를 희망했는데, 이는 막부의 의향과도 일치했다.1861년 1월 14일(만연 원년 12월 4일)에는 헨리 휴스켄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해리스는 개항 연기에 대한 확신을 굳혔을 것으로 보인다. 5월 2일(분큐(文久) 원년 3월 23일), 쇼군 이에모치 명의로 "7년간의 양도(両都)·양항(両港)의 개항 연기를 요구하는 직서(直書)"가 각국 공사에게 전달되자, 해리스는 휴스켄의 후임인 안톤 포트만에게 번역을 맡겨 5월 8일(분큐 원년 3월 29일) 자로 급격한 인플레이션[28]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과 함께 미국 본국에 보고했다.
1861년 8월 1일(분큐 원년 6월 25일) 자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과 윌리엄 수어드 국무장관으로부터 이에모치에게 보내는 서한이 해리스에게 도착했지만, 그 내용은 휴스켄 살해에 대한 보상까지 개항 연기를 포함한 일체의 양보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해리스는 막부의 정신(正信)과 구세 히로주와 협상하여 보상 합의를 이끌어낸 후, 11월 27일에 올콕(オールコック)에게 5년간[29]의 개항 연기의 자유 재량을 얻었다는 것을 통지하고, 12월 6일 이에모치를 만나 링컨의 친서를 직접 전달했으며, 12월 14일(분큐 원년 11월 13일)에 막부로부터 보상이 실행되었다. 12월 28일, 정신에게는 영국을 제외한 각국의 자국민에게도 개항 연기를 통지했다는 것을 서한으로 보고했다. 이것은 예정되어 있던 개항 불과 3일 전이었다. 이후 분큐 견오 사절과 영국 사이에 런던 각서(1861년 6월 6일), 파리 각서(같은 해 10월 2일) 등 각국 모두 개항 연기에 동의하고 있다.
1862년, 해리스는 건강 문제와 미국 남북 전쟁 발발 등의 이유로 사임하고 귀국했으며, 공사 자리는 로버트 프라인에게 물려주었다.[12]
4. 귀국 후 활동과 사망 (1862년 ~ 1878년)
1862년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 의사를 밝히고 5년 9개월간의 일본 체류를 마쳤다.[20] 사임 이유로는 건강 악화, 공화당 출신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당선, 미국 남북 전쟁으로 인한 고향 걱정 등이 언급된다.[20]
귀국 후 1867년 의회에서 해리스에 대한 생활 보조금 지급을 결정했다.[20] 이후 주로 동물 보호 단체 회원 등으로 활동했으며, 1876년 휴양지인 플로리다주로 이주했다.[20] 1878년 2월 25일,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생애 독신이었기 때문에 조카가 법정 상속인이 되었다.[20]
묘소는 뉴욕주 브루클린구의 그린우드 묘지이다.[20] 묘비에는 그의 공적과 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의 성공을 기념하는 문구가 새겨져 있으며, 일본에서 선물한 돌 등롱이 세워져 있고, 벚나무도 심어져 있다.[20][12]
5. 유산과 평가
해리스는 1876년 플로리다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묘지는 뉴욕 브루클린 구의 그린우드 묘지(Green-Wood Cemetery)에 있다.[14]
윌리엄 엘리엇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는 1874년 뉴욕에서 해리스를 만나 일본인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을 받았고, 해리스가 특사로 5년간 일본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의 정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14] 그리피스는 1895년 해리스의 일기를 출판했고,[15] 이 책은 일본어로 번역되어 키도 오카모토(Kido Okamoto)가 쓴 해리스를 소재로 한 희곡의 기반이 되었으며, 1919년 일본에서 상연되어 성공을 거두었다.[14]
미요시 마사오(Masao Miyoshi)는 그의 저서에서 해리스가 일본 대사로 있으면서 겪었던 제한적인 생활 방식이 "일본 개방의 선구자를 평생 뉴욕시에 머무는 은둔자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16]
1986년 일본은 해리스에 대한 일본 국민의 지속적인 존경과 애정을 기념하여 개조된 묘지를 선물했다.[12] 1925년 미국의 사업가 헨리 울프(Henry Wolff)는 시부사와 에이이치에게 협력을 요청하여 해리스의 기념비 건립을 기획했고, 시부사와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1927년 9월에 기념비가 시즈오카현 시모다시 옥천사 경내에 세워졌다.[30][31]
5. 1. 일본인에 대한 평가
해리스는 일본인일본어을 "희망봉 이후 가장 뛰어난 민족"이라고 평가했으며,[13] 시모다 마을에 대해서도 "집도 깨끗하고 햇볕이 잘 들고 기분이 좋다. 세계 어느 곳의 노동자 사회와 비교해도 시모다보다 더 나은 생활을 하는 곳은 없을 것이다."라고 칭찬했다.[13] 그러나 목욕탕의 혼욕 풍습은 엄격한 해리스에게는 참을 수 없는 것이어서 "이런 저속한 짓을 하는지 판단하기 어렵다."라고 언급했다.[13]5. 2. 대중문화에서의 등장
작품명 | 연도 | 방송사/제작사 | 배우 |
---|---|---|---|
건국사 존왕양이 | 1927년 | ||
흑선 | 1958년 | 존 웨인 | |
바바리안과 게이샤 | 1958년 | 존 웨인 | |
꽃의 생애 | 1963년 | NHK | 구메 아키라 |
꽃의 생애 | 1974년 | NHK | 제임스 캐롤 |
필살! 직업인 와이드 대로 살해 | 1987년 | 오오츠키 울프 | |
꽃의 생애 이이 대로와 사쿠라다몬 | 1988년 | 존 워드 | |
신선조! | 2004년 | NHK | 마티 키너트 |
꽃 타오르다 | 2015년 | NHK | 리 롱쇼 |
사이고돈 (NHK 대하드라마) | 2018년 | NHK | 블레이크 크로포드 |
햇살 나무 | |||
개그만화 일기 「해리스 임팩트」 |
-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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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amzn.asia/d/iVFl0tR 『요마전설 제9권』](양귀비, 2024년, [https://temma-books.com/ TEMMA BOOKS]) ISBN 9784911105146
5. 3. 논란
막부와의 화폐 환율 협상 과정에서 해리스는 금화와 은화 모두 "동질 동량의 원칙"을 주장하며 1달러 은화를 일분은 3개와 교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막부는 1달러 은화의 지금 가치가 은 16묭에 해당하므로 일분은 1개라고 주장하며 대립했다. 결국 해리스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일본에서 1달러 은화를 일분은 3개로 환전하고 금화로 환전 후 해외로 반출하여 팔면 폭리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단기간에 많은 양의 오반이 일본 외로 유출되었으며, 해리스 자신도 오반을 사재기하여 상하이 등에서 매각하여 이윤을 챙겼다는 의혹을 받았다.[32] 이후 막부가 만엔 오반으로 개주조함으로써 혼란은 종식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엄청난 금이 일본에서 유출되었다.1856년(안세이 3년), 주일 영사 시절, 막부는 해리스의 에도 입성을 저지하기 위해 해리스와 휴스켄에게 시녀를 배치했다. 관리들은 해리스를 매수하려고 게이샤 오키치라는 여성을 파견했다. 관리의 의도를 간파한 해리스는 크게 분노하여 오키치를 즉시 해고했다. 해리스가 생애 독신이었던 점 등이 와전되어 쇼와 초기에는 "당인 오키치"라는 전설이 유포되어 소설과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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米国議会はまだ長崎の領事を任命しておらず、ハリスのウォルシュの選任は必要に迫られてのことだった。ウォルシュは実際には、商人の代理領事といった立場で、無給で領事として務める傍ら、個人の商業を営むことも許されていた。彼の主な職務は領事裁判官としての任務と、アメリカ政府の様々な公文書を管理することであ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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