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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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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제국은 중일 전쟁 중인 1940년, 중국 국민당에 대한 물자 수송을 막기 위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침공했다. 독일의 프랑스 점령으로 비시 정부가 수립되자 일본은 베트남 북부에 진출했고, 이후 남부까지 진출하며 영향력을 확대했다. 1945년, 일본은 프랑스군을 무장 해제하고 직접 통치를 시작했으나, 이는 베트남 민족주의 운동을 강화시켰다. 일본의 점령은 1945년 베트남 기근을 유발했고, 8월 혁명으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프랑스의 식민 지배 부활 시도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하는 배경이 되었다.

2. 역사적 배경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 제국중화민국 국민당 정부의 주요 보급로였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통한 물자 수송, 이른바 원조 루트 차단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특히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경유하는 루트(불인 루트)는 4개의 원조 루트 중에서 최대 규모였다.[3]

1938년부터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와 프랑스 정부에 국경 봉쇄 등을 요구하며 압박을 가했지만, 프랑스 측은 이를 거부했다.[4][5]

1940년 5월, 제2차 세계 대전 유럽 전선에서 독일프랑스를 침공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프랑스는 독일에 항복했고, 비시 정권이 수립되면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독일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독일은 비시 정권과 비밀 협상을 통해 일본의 베트남 진출을 허용했다.

한편,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구상 아래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장기적인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일본의 남방 정책에 있어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다.

2. 1. 중일전쟁과 원조 루트 차단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이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경유하는 루트(불인 루트)는 중화민국 장제스 정권의 주요 보급로(원조 루트)였다.[3] 일본은 영국이나 미국 등이 중국 국민당을 지원하는 것을 막고, 국민당의 물자 수송을 차단하기 위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침공을 계획하였다.[3]

1938년 10월,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에 국경 봉쇄와 시찰 기관 파견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4] 1939년 11월, 일본은 프랑스 정부와 재교섭을 했지만, 이 또한 거부당했다.[5] 같은 날, 일본군은 불인과 중국의 국경에 가까운 난닝을 공략하고, 하노이에 파견된 제21군 참모장 도바시 유이치 소장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 Georges Catroux|조르주 카트루프랑스어와 회담을 가졌으나, 인도차이나 정부는 일본의 국경 봉쇄 및 난닝의 일본군 보급 요구를 거부했다.[5]

이후 일본 육군은 뎬웨 철도에 대해 반복적으로 공습을 가했다. 1940년 2월 1일 공습에는 프랑스 시민 5명을 포함하여 40명이 사망했다.[6] 장제스 정권은 프랑스에 프랑스군 파견을 제안했지만,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6]

한편, 1940년 5월 10일, 제2차 세계 대전 유럽 전선에서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했다. 6월 22일, 프랑스는 독일과 휴전 협정을 체결했고, 7월 10일, 프랑스 의회는 필리프 페탱 원수에게 전권을 부여하여 프랑스 제3 공화국을 사실상 폐지했다. 프랑스 본토는 독일 점령 하에 들어갔지만, 프랑스 식민지는 비시에 있는 페탱 정부의 지시를 받았다.

2. 2. 프랑스 정세 변화

1940년 5월 10일, 독일프랑스를 침공하였다. 6월 22일, 프랑스는 독일과 휴전 협정을 체결했고(6월 25일부터 발효), 7월 10일, 프랑스 의회는 필리프 페탱 원수에게 전권을 부여하여 프랑스 제3 공화국을 사실상 폐지했다. 프랑스 본토의 상당 부분이 독일 점령 하에 들어갔지만, 프랑스 식민지는 비시에 있는 페탱 정부의 지시를 받았다.

페탱과 휴전에 대한 저항은 협정이 체결되기 전부터 시작되었으며, 샤를 드골의 1940년 6월 18일 호소가 있었다. 그 결과, 페탱에 반대하는 망명 정부인 자유 프랑스가 런던에서 결성되었다.[32][33]

2. 3. 대동아공영권과 남방 정책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우며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했다. 당시 일본 지도자들은 일본과 연결된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적, 정치적 연합체를 통해 서구 열강을 몰아내고, 서로 무역, 자원, 상품을 공유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34]

1940년대 초, 일본은 중일 전쟁을 치르면서 중국 국민당의 물자 수송로를 차단하기 위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북부에 진출할 필요성을 느꼈다. 마침 제2차 세계 대전 유럽 전선에서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면서, 인도차이나는 사실상 독일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독일은 프랑스의 비시 정권과 비밀리에 협상하여 일본의 베트남 진출을 허용하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일본의 남방 정책에 있어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다.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태국, 영국령 식민지,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군사적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요충지였기 때문이다.[38]

3. 일본의 인도차이나 진주

1940년 당시 일본은 중국 국민당을 상대로 중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국민당이 점점 강력해지자 위협을 느낀 일본은 국민당의 물자 수송로를 막기 위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북부에 진출할 필요성을 느꼈다. 당시 제2차 세계 대전 유럽 전선에서는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면서 인도차이나는 사실상 독일의 영향권 아래 놓였다. 독일은 프랑스의 비시 정권이 임명한 장 드쿠 장군의 인도차이나 정부와 비밀리에 협상하여 일본의 베트남 진출을 허용하였다. 그리하여 1940년 일본은 베트남 북부에 진출하고 1941년에는 베트남 남부까지 진출하면서 인도차이나를 서서히 잠식해 나갔다.

1940년 6월 19일, 일본은 프랑스가 독일에 패배한 틈을 타 인도차이나 총독 조르주 카트루에게 사실상 최후통첩과 같은 요구를 전달했다. 이는 중국으로 가는 모든 보급로를 폐쇄하고 일본 검열팀의 입국을 허용하라는 내용이었다.[3] 카트루는 처음에는 일본에 경고했지만, 결국 6월 20일에 일본의 요구에 따랐다.[4] 6월 22일, 일본은 광저우만에 해군 기지 건설을 허용하고 중국과의 국경을 완전히 폐쇄하라는 두 번째 요구를 발표했다. 7월 3일에는 공군 기지 건설과 전투 병력 수송을 허용하라는 세 번째 요구를 제시했다.[3]

7월에 인도차이나에 도착한 장 데쿠 신임 총독은 프랑스 정부에 이 요구를 거부할 것을 촉구했다. 당시 중립국이었던 미국은 이미 프랑스에 항공기를 제공하기로 계약했고, 프랑스령 소말리아에서 지부티로 보낼 수 있는 4,000명의 세네갈 소총수도 있었다.[6]

1940년 8월 30일, 일본 외무대신 마쓰오카 요스케는 프랑스가 제출한 초안을 승인하여 일본군은 중일 전쟁 기간 동안 인도차이나에 주둔하고 통과할 수 있게 되었다.[7] 9월 3일, 모리스 마르탱 인도차이나군 최고 사령관과 이사쿠 니시하라 장군 간의 협상이 하노이에서 시작되었다.[7] 협상 과정에서 프랑스 정부는 독일 정부에 개입을 요청했지만, 독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데쿠와 마르탱은 미국 및 영국 영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7]

9월 6일, 난닝에 주둔한 일본 제22군의 보병 대대가 동당에 있는 프랑스 요새 근처의 인도차이나 국경을 침범했다. 9월 18일, 니시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고, 이에 데쿠는 인도차이나에 주둔할 일본군 병력 감축을 요구했다. 일본 육군 참모 본부는 25,000명의 병력을 요구했지만, 니시하라는 9월 21일에 그 숫자를 6,000명으로 줄였다.[8]

9월 22일, 마르탱과 니시하라는 홍강 북쪽 통킹에 6,000명의 일본군 주둔 등을 승인하는 협정에 서명했다.[9] 그러나 아키토 나카무라(제5사단 사령관) 중장은 협정 체결에도 불구하고 부대를 이끌고 동당 근처의 국경을 넘었다. 동당에서는 총격전이 벌어졌고, 이는 밤새 다른 국경 초소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랑선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일본 장갑차에 포위되어 9월 25일에 항복했다.[9] 9월 26일, 일본군은 하이퐁 남쪽의 동탁 공항에 상륙하여 항구로 진격했다. 같은 날 저녁, 일본은 하노이 외곽의 지아 람 비행장 등을 점령하고, 하이퐁 항구에 900명, 하노이에 600명의 병력을 주둔시켰다.

3. 1. 북부 인도차이나 진주 (1940년)

1940년 9월 22일부터 26일까지, 일본 제국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일환으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북부를 점령하고 중일 전쟁에서 중국 국민당의 원조 루트를 차단하였다.

당시 일본은 중국 국민당을 상대로 중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국민당이 강력해지자 위협을 느낀 일본은 국민당의 물자 수송로를 막기 위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북부에 진출할 필요성을 느꼈다. 당시 세계 2차 대전 유럽 전선에서는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면서 인도차이나는 사실상 독일의 영향권 아래 놓였다. 독일은 프랑스의 비시 정권이 임명한 장 드쿠 장군의 인도차이나 정부와 비밀리에 협상하여 일본의 베트남 진출을 허용하였다. 1940년 일본은 베트남 북부에 진출하고 1941년에는 베트남 남부까지 진출했다.

독불 휴전 협정 성립 후, 비시 프랑스조르주 카트루 총독을 해임하고 장 드쿠 제독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카트루가 했던 일본과의 교섭은 철회되지 않았고, 일본의 마쓰오카 요스케 외무 대신과 아르센-앙리 대사 사이에서 일본과 프랑스의 협력에 대해 협의가 시작되었다. 8월 말, 마쓰오카·앙리 협정이 체결되어 극동에서의 일본과 프랑스의 이익을 상호 존중하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대한 일본군의 진주를 인정하며, 프랑스 측이 가능한 한의 원조를 제공하고, 일본과 불령 인도차이나와의 경제 관계 강화를 합의했다.

대본영에서는 불령 인도차이나 감시단장 니시하라 잇사쿠에게 교섭과 조정을 일임했다. 진주는 평화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전제로 하였고, 참모 본부 제1부장 도미나가 쿄지 소장도 현지로 갔다. 8월 30일, 드쿠 총독과 회담했지만, 드쿠는 교섭 시작을 거부했다. 이후에도 드쿠는 일본군의 진주를 늦추기 위해 여러 이유를 대며 교섭을 지연시켰다.

프랑스 측의 성의 없는 태도에 분개한 도미나가는 무력 진주를 준비하게 했다. 9월 3일, 도미나가는 드쿠에게 최후 통첩을 보냈고, 프랑스 측은 굴복하여 현지 협정안을 제시했다. 9월 4일, 현지 사령관과 니시하라 간에 니시하라·마르탱 협정이 조인되었다.

그 후에도 드쿠와 마르탱은 여전히 일본군 진주를 늦추려 했다. 9월 6일, 모리모토 타쿠지 중좌가 이끄는 모리모토 대대가 월경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프랑스 측은 이 사건을 진주 지연에 이용하려 했다.

9월 14일, "불령 인도차이나 진주에 따르는 육해군 중앙 협정"이 내려졌지만, 이 중앙 협정은 평화 진주를 원칙으로 하면서도 프랑스군이 저항하면 정부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무력 진주로 전환해도 좋다고 결정되어 있었다.

9월 17일, 도미나가는 니시하라와 프랑스군 사령부를 방문하여 마르탱과 면담하고, 불령 인도차이나에 진주하는 병력을 25,000명으로 늘리고, 진주하는 비행장도 3곳에서 5곳으로 늘린다는 제시를 했다. 마르탱은 난색을 표하며 다음날인 18일에 답변했다. 그 내용은 비행장 진주 5곳 등 일부는 수락했지만, 25,000명의 진주는 단호히 거부했다. 니시하라는 참모 본부에 협정 내용을 타진했고, 참모 본부는 마르탱의 답변을 승낙하여 9월 22일에 니시하라·마르탱 협정이 재체결되었지만, 제5사단의 진격 개시 6시간 전이었다.

도미나가는 자신이 제시한 조건대로 협정이 체결되지 않은 것에 분개하여 니시하라와 참모 본부를 비난하는 듯한 전문을 보냈지만, 그대로 현지를 떠났다. 남지나 방면군도 제5사단의 진격 개시를 막으려는 의사가 없었고, 참모 본부로부터 "육로 진주 중지"라는 전문이 왔지만, 정식적인 대본영 육군부 명령(대륙명)이 아니라고 하여 적극적인 진격 중지 움직임을 취하지 않았다. 나카무라 아키토 제5사단장도 니시하라의 "협정 성립" 통보를 무시하고 9월 23일 새벽에 진격을 시작했다. 결국 무력 진주가 시작되었다.

제5사단의 무단 월경 보고를 받은 사와다 참모 본부 차장은 새벽 3시에 진격 중지 대륙명을 내렸지만, 이미 격전이 시작되었고 현지군의 국지적인 교전의 자유는 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5사단은 이 "국지"를 확대 해석하여 더욱 진격했다. 9월 23일 11시, 동당 요새가 일본군에 함락되었다. 제5사단은 랑선도 점령했다. 드쿠 총독은 9월 25일에 정전시켰다. 그 후 하노이 등 중요 거점에 진주한 일본군은 홍강 이북 불령 인도차이나 국내의 비행장과 항만의 이용권을 획득하고, 원조 루트나 중국에 대한 공격에 이용했다.

도미나가는 니시하라와 마르탱이 협정을 맺어 평화롭게 진행될 수도 있었던 진주에 불만을 품고 무력 진주를 선동하는 듯한 행동을 하여 남지나 방면군과 제5사단의 독단 월경을 초래했다. 도미나가는 경질되었고, 현지에서 무력 진주를 지휘한 군 사령관 안도와 나카무라 사단장도 처분되어 예비역이 되었다.

3. 1. 1. 프랑스와의 협상 과정

1940년 6월 19일, 일본은 프랑스가 독일에 패배하고 휴전 협정이 임박한 상황을 틈타 인도차이나 총독 조르주 카트루에게 중국으로 가는 모든 보급로를 폐쇄하고 이사쿠 니시하라 장군 휘하의 40명으로 구성된 일본 검열팀의 입국을 허용하라는 요구를 전달했다. 이는 사실상 최후통첩과 같았다.[3] 카트루는 처음에는 일본의 요구가 주권 침해라고 경고했지만, 일본 육군과 해군 부대가 위협적인 위치로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와 프랑스 정부가 식민지를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결국 6월 20일에 일본의 요구에 따랐다.[3][4]

6월 22일, 일본은 광저우만에 해군 기지 건설을 허용하고 7월 7일까지 중국과의 국경을 완전히 폐쇄하라는 두 번째 요구를 했다. 니시하라 이사쿠는 6월 29일 하노이에 도착하여 7월 3일, 공군 기지 건설과 인도차이나를 통과하는 전투 병력 수송을 허용하라는 세 번째 요구를 제시했다.[3][6]

7월에 인도차이나에 도착한 새 총독 장 데쿠는 프랑스 정부에 일본의 요구를 거부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인도차이나가 일본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비시 프랑스 정부의 식민 참모부장 쥘-앙투안 뷔레르 장군도 저항을 권고했다. 당시 중립국이었던 미국은 이미 프랑스에 항공기를 제공하기로 계약했고, 필요할 경우 프랑스령 소말리아에서 지부티로 보낼 수 있는 4,000명의 세네갈 소총수도 있었다.[6] 데쿠는 인도차이나에서 32,000명의 정규군과 17,000명의 보조군을 지휘했지만, 이들은 모두 장비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4]

1940년 8월 30일, 일본 외무대신 마쓰오카 요스케는 프랑스 외무대신 폴 보두앵이 제출한 초안을 승인했다. 이 초안에 따라 일본군은 중일 전쟁 기간 동안 인도차이나에 주둔하고 통과할 수 있었다.[7] 양국 정부는 인도차이나 주둔 군 대표에게 세부 사항을 마련하도록 지시했고, 모리스 마르탱 인도차이나군 최고 사령관과 니시하라 장군 간의 협상은 9월 3일 하노이에서 시작되었다.[7]

협상 과정에서 프랑스 정부는 동맹국의 요구를 중재하도록 독일 정부에 개입을 요청했지만, 독일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데쿠와 마르탱은 독자적으로 하노이에 있는 미국 및 영국 영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심지어 일본의 인도차이나 공격에 대한 공동 방어에 대해 중국 정부와도 협의했다.[7]

9월 6일, 난닝에 주둔한 일본 제22군의 보병 대대가 동당에 있는 프랑스 요새 근처의 인도차이나 국경을 침범했다. 제22군은 일본 중국 주둔군의 일부였으며, 그 장교들은 1931년 만주 사변을 기억하며, 상사에게 더 공격적인 정책을 채택하도록 강요하려고 했다. 동당 사건 이후, 데쿠는 협상을 중단했다. 9월 18일, 니시하라는 프랑스 측에 최후통첩을 보내 9월 22일 22:00(현지 시간)에 일본군이 인도차이나에 진입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데쿠는 인도차이나에 주둔할 일본군 병력 감축을 요구했다. 일본 육군 참모 본부는 일본 중국 주둔군의 지원을 받아 인도차이나에 25,000명의 병력을 요구했지만, 니시하라는 대본영의 지원을 받아 9월 21일에 그 숫자를 6,000명으로 줄였다.[8]

9월 22일 일본 최후통첩 만료 7시간 30분 전, 마르탱과 니시하라는 홍강 북쪽 통킹에 6,000명의 일본군 주둔, 통킹 내 4개의 비행장 사용, 윈난으로 통킹을 통해 최대 25,000명의 병력 이동, 제22군 1개 사단의 하이퐁을 통한 통킹 통과 및 중국 내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을 승인하는 협정에 서명했다.[9] 대본영 정부 연락 간담회에서는 미국과 영국의 무력 반발이 크게 논의되었다. 통수부는 미국과 영국의 무력 반발이 없을 것이라고 예측했다.[67] 마쓰오카 외상은 대영미 전쟁의 발발을 경고했다.

3. 1. 2. 니시하라-마르탱 협정

1940년 9월 22일, 모리스 마르탱 인도차이나군 최고 사령관과 이사쿠 니시하라 장군 사이에 협정이 체결되었다.[9] 이 협정으로 일본군은 홍강 북쪽 통킹에 6,000명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통킹 내 4개 비행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9] 또한 최대 25,000명의 병력이 통킹을 통과하여 윈난으로 이동하고, 제22군 1개 사단이 하이퐁을 통해 통킹을 통과하여 중국 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이 허용되었다.[9]

협상 과정에서 프랑스 정부는 독일 정부에 중재를 요청했지만, 독일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7] 장 데쿠 총독과 마르탱은 독자적으로 하노이에 있는 미국 및 영국 영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심지어 일본의 인도차이나 공격에 대한 공동 방어에 대해 중국 정부와도 협의했다.[7]

9월 18일, 니시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내 9월 22일 22:00(현지 시간)에 일본군이 프랑스 측의 합의 여부와 관계없이 인도차이나에 진입할 것이라고 경고했다.[8] 이에 데쿠는 인도차이나에 주둔할 일본군 병력 감축을 요구했고, 일본 육군 참모 본부는 25,000명의 병력을 요구했다.[8] 니시하라는 대본영의 지원을 받아 9월 21일에 그 숫자를 6,000명으로 줄였다.[8] 마르탱과 니시하라는 협정 체결 7시간 30분 전에 위와 같은 내용의 협정에 서명했다.[9]

3. 1. 3. 랑선 전투와 일본군의 무단 진격

1940년 9월 22일, 일본군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당국 사이에 협정이 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독단적으로 국경을 넘어 프랑스군과 교전을 벌였다.[9] 나카무라 아키토 중장이 이끄는 일본군 부대는 동당 근처의 국경을 넘어 진격했고, 동당과 랑선 등지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9]

랑선에서는 프랑스군이 일본군 장갑차에 포위되어 9월 25일에 항복했다.[9]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일본군이 155mm 포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포의 포미를 강에 버리라고 명령했다.[9] 이는 1884년~1885년 청불 전쟁 당시 프랑스군이 장비 노획을 막기 위해 강에 물건을 버렸던 굴욕적인 랑선 철수를 연상시키는 사건이었다.[9]

9월 26일 저녁, 일본군은 하노이 외곽의 지아 람 비행장, 윈난 국경의 라오까이 철도 조차장, 하노이에서 랑선으로 가는 철도상의 푸랑트엉을 점령하고, 하이퐁 항구에 900명, 하노이에 600명의 병력을 주둔시켰다.[9] 이로써 일본군은 북부 인도차이나를 장악하게 되었다.

3. 2.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 (1941년)

1940년 일본이 베트남 북부에 진출한 데 이어, 1941년에는 베트남 남부까지 진출했다.[32]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유럽 전선에서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한 후, 독일이 비시 정권을 통해 일본의 베트남 진출을 허용한 결과였다.

일본은 타이 왕국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간의 국경 분쟁에 개입하여 중재 역할을 맡았다.[33] 1941년 5월 9일 체결된 도쿄 조약을 통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 지역(캄보디아라오스)을 타이에게 할양하도록 했다.

일본 육해군 수뇌부는 자원 획득을 위해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를 주장했다.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이를 통해 중일 전쟁에서 중국 국민당에 대한 강력한 원조 루트 차단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1941년 7월 2일 어전 회의에서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가 정식으로 결정되었다. 일본군은 7월 28일에 진주를 개시하여 평화적으로 완료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군사적 팽창은 미국, 영국 등 연합국의 경제 제재를 초래하는 요인이 되었다.

3. 2. 1. 미국의 경제 제재와 태평양 전쟁 발발

1941년 7월 28일 일본군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남부에 진주하자, 미국은 이를 침략 행위로 간주하고 강력한 경제 제재를 단행했다. 8월 1일, 미국은 "모든 침략국"에 대한 석유 수출 금지를 발표했는데, 이는 사실상 일본을 겨냥한 조치였다.[88] 영국과 네덜란드도 이에 동참하여 일본에 대한 경제적 압박을 강화했다.[36]

당시 일본은 석유의 대부분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제재는 일본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일본 정부와 군부는 미국의 제재가 없을 것이라고 예측했으나, 이는 큰 오판이었다.[88] 일본 해군 내에서는 석유 부족으로 인해 미국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다.[88]

미국은 일본의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를 일미 교섭 중단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했다. 코델 헐 국무장관은 일본이 무력 사용을 중단해야만 협상이 재개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91] 10월 2일에는 중국 대륙 및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의 일본군 철수를 요구하는 헐 4원칙을 제시했다.[93]

이후에도 양국 간의 협상은 진전되지 못했고, 1941년 11월 26일 미국은 이른바 헐 노트를 통해 일본에 최후통첩을 전달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의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가 협상 결렬의 원인이라고 비난했다.[97]

결국 일본은 미국의 경제 제재에 굴복하지 않고, 1941년 12월 8일 영국과 미국에 선전 포고를 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3. 3. 타이-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분쟁 (1940-1941)

1940년(쇼와 15년) 11월 25일부터 타이 왕국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간의 국경 분쟁(타이-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분쟁)이 발발했다.[32] 육상 전투에서는 타이 측이 우세했지만, 해상 전투에서는 프랑스 측이 승리했다. 일본은 개입을 시도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불인(仏印)) 주변의 일본군에 의해 "대불인 위력 시위 작전"이 실시되었다.[33]

타이와 프랑스는 제3국에 중재를 요청했지만, 미국이나 독일은 이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일본이 중재 역할을 맡게 되었다. 1941년 5월 9일에 체결된 도쿄 조약에서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캄보디아라오스의 일부 지역을 타이에게 할양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는 영토·권익의 보전을 규정한 마쓰오카-앙리 협정에 반하는 내용이었지만, 프랑스는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4.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통치 (1940-1945)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중일 전쟁에서 중국 국민당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북부를 침공했다. 당시 프랑스는 독일에 항복한 상황이었고, 비시 정권은 일본의 베트남 진출을 허용했다. 1940년 일본은 베트남 북부에 진출했고, 1941년에는 남부까지 세력을 확장하며 인도차이나 전체를 서서히 잠식해 나갔다.[1]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데다 군사력도 약했고, 본국마저 독일에 패배하여 독자적으로 식민지를 유지하기 어려웠다.[2] 많은 식민지가 자유 프랑스 지지로 돌아섰지만, 비시 정부와 식민지 정부는 일본과 협력하는 길을 택했다. 일본은 식민지 정부를 존속시키는 정책을 유지했고, 1941년 11월 대본영 정부 연락 회의에서도 이를 재확인했다.[4] 이는 '대동아 전쟁'의 명분인 '대동아 해방'과는 모순되었지만, 일본 육군은 '인종 전쟁 회피'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5]

이러한 협력 관계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에게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독립 운동가들에게 일본군의 등장은 새로운 지배자의 출현이었고, 현대 베트남에서는 이를 "하나의 목에 두 개의 족쇄"(một cổ hai tròngvi)라고 표현한다.[3]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에도 일본은 비시 정권의 식민 통치를 인정하며 군사적 협력을 이어갔다. 정보 교환, 기뢰 제거 작업 등에서 협력했지만,[6] 프랑스군의 무장은 제한되었다.[7] 일본군은 사이공(현 호찌민시)의 방송국을 이용해 선전 방송을 하기도 했다.[7]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는 일본군 주둔 경비를 부담했는데, 1940년 10월부터 4년 반 동안 7억 2370만 8000 피아스터를 지불했다. 이는 당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의 경상 지출과 맞먹는 액수였다.[8]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단일 경작 경제 체제로, 수출입의 절반 이상을 본국에 의존했다.[9] 그러나 전쟁으로 본국과의 교역이 끊기고, 영국이 무역을 금지하면서 경제 위기가 발생했다.[10] 이때 일본이 주요 무역 상대가 되었고, 일본은 수입액의 상당 부분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의 무역으로 충당했다.[10]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대일 무역에서 큰 흑자를 기록했지만,[11] 미국의 통상 공격으로 물자 수송이 어려워졌다.[10]

4. 1. 비시 정부와의 협력 관계

일본 제국중일 전쟁에서 중국 국민당의 물자 수송로를 차단하기 위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북부 진출을 추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유럽 전선에서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면서, 인도차이나는 독일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독일은 프랑스 비시 정권이 임명한 장 드꾸 장군의 인도차이나 정부와 비밀 협상을 통해 일본의 베트남 진출을 허용했다.[1] 1940년 일본은 베트남 북부에, 1941년에는 남부에 진출하며 점차 인도차이나를 잠식해 나갔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는 프랑스와 적대 관계였던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바오다이 황제도 일본군 주둔을 승인하여, 일본은 1945년 패망 때까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와 협력했다.[2] 일본은 식민지 정부를 존속시키는 방침을 취했고, 이는 1941년 11월 6일 대륙지 제991호 및 11월 15일 대본영 정부 연락 회의 결정에서도 확인되었다.[4] 이러한 협력 관계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에게 경제적으로 유리한 측면도 있었다.[5]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에도 일본은 비시 정권의 식민지 통치를 인정하고, 군사적으로는 일불(日佛) 공동 경비 체제를 유지했다. 양군은 정보 교환 및 기뢰 제거 작업 등에서 협력했다.[6] 다만, 프랑스군의 일본 공격을 막기 위해 프랑스 주둔군의 군비는 제한되었고, 주요 해군 함정의 무장이 해제되었다.[7] 일본군은 프랑스 측 허가를 받아 사이공(현재 호찌민시)의 방송국을 이용해 자바와 인도에 대한 모략 방송을 실시했다.[7]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는 일본군의 주둔 경비도 부담했다. 1940년 10월부터 4년 반 동안 7억 2370만 8000 피아스터가 지불되었는데, 이는 당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 경상 지출과 맞먹는 액수였다.[8] 이 자금으로 일본군은 인도차이나에서 군표를 발행할 필요가 없었다.[8]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단일 경작 경제 체제였고, 수출입의 절반 이상을 본국에 의존했다.[9] 그러나 전쟁 발발로 본국과의 교역이 끊기고, 영국이 인근 식민지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의 무역을 금지하면서 경제 위기가 닥쳤다.[10] 이때 일본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가장 중요한 무역 상대가 되었다. 전쟁 중 일본은 수입액의 절반, 많을 때는 60%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의 무역으로 충당했다.[10] 이로 인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대일 무역은 큰 흑자를 기록했다.[11] 그러나 미국의 통상 공격이 거세지면서 인도차이나로부터 일본으로 물자를 운반하는 것은 매우 어려워졌다.[10]

4. 2. 경제 수탈과 베트남 민중의 고통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단일 경작 경제 구조로 만들고, 본국과의 무역을 차단하여 경제 위기를 초래했다.[1] 초기에는 일본과의 무역으로 인도차이나 경제가 흑자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미국의 통상 공격이 강화되면서 물자 수송이 어려워졌다.[1]

일본은 인도차이나의 자원을 수탈하고 군표를 남발하여 경제를 파탄시켰다. 베트남은 "하나의 목에 두 개의 족쇄"라는 말처럼, 프랑스와 일본의 이중 지배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1]

4. 2. 1. 1945년 베트남 기근

1945년, 일본 제국의 가혹한 경제 수탈과 통치는 베트남 대기근을 불러온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1]

4. 3. 베트남 민족주의 운동의 성장

일본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점령은 베트남 민족주의 운동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고 비시 정권이 들어서면서 인도차이나는 사실상 독일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고, 일본은 이 틈을 타 베트남에 진출했다. 이는 베트남인들에게 "하나의 목에 두 개의 족쇄"(một cổ hai tròngvi[3])와 같은 상황으로 인식되었다.

1945년 8월 17일에는 베트남 8월 혁명이 발생했고, 일본이 항복 문서에 조인9월 2일에는 응우옌 왕조가 무너지고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민(베트남 독립동맹회)은 베트남 민주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다.[3] 그러나 프랑스는 식민지 지배를 다시 시작하려 했고, 결국 1946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베트남은 기나긴 '인도차이나 전쟁'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5. 일본의 쿠데타와 직접 통치 (1945년)

1945년 3월, 일본은 프랑스 식민 통치를 종식시키고 인도차이나를 직접 통치하기 위해 쿠데타(명호 작전)를 일으켰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는 프랑스와 적대 관계인 일본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일본은 군국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인도차이나 정치에 간섭하기 시작했고, 대동아 공영권을 주장하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네덜란드령 동인도 등 동아시아와 태평양 제도들을 빼앗았다.[1]

5. 1. 베트남 제국 수립

바오다이 황제는 일본의 진주를 수락했고, 일본은 1945년 패망할 때까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와 협력하였다. 비시 정권이 몰락한 이후, 베트남에서는 반프랑스 쿠데타가 일어나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을 주장하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식민지배하려 했다.[1]

5. 2. 8월 혁명과 베트남 민주 공화국 선포

바오다이 황제는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와 협력하면서 일본의 진주를 수락하였다.[1] 비시 정권이 몰락한 이후, 베트남에서는 반프랑스 쿠데타가 일어나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1]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는 국력이 크게 약화되어 베트남을 독립시켰고, 국제 정세에 따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4개의 나라로 분리되었다.[1]

6. 역사적 유산과 영향

일본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침공과 점령은 베트남 역사에 복잡하고도 깊은 영향을 남겼다. 1940년 10월, 일본은 랑선 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하고 점령지에서 철수했지만,[10] 이는 일시적인 조치였다.

1940년 12월, 프랑스와 일본은 프랑스의 군사 및 행정 주권을 인정하는 동시에 일본군이 인도차이나에서 연합국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협정을 체결했다.[2] 그러나 일본은 영국과 미국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여 즉각적인 병력 배치를 주저했다. 1941년 6월, 독일의 소련 침공 이후, 일본은 남진론을 통해 미국과의 문제를 해결하고 석유 금수 조치를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 1941년 7월 28일, 약 14만 명의 일본군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남부를 침공했다.

일본의 점령은 베트남인들에게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은 아시아 강국으로서 서구 열강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지만, 동시에 가혹한 통치와 1945년 베트남 기근을 야기하여 고통을 안겨주기도 했다.[11][12] 쯔엉 찐과 같은 베트남 지도자들은 일본군이 베트민을 탄압하고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고 비판했다.[13]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일본은 프랑스 당국이 연합군을 지원할 것을 우려하여 1945년 봄에 프랑스 당국을 몰아내고 인도차이나를 직접 통제했다. 이 과정에서 베트민8월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 독립 선언을 발표했다. 일본의 인도차이나 점령은 결과적으로 베트민의 성장을 촉진했고, 이는 1946년 프랑스에 대항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이어졌다.[14]

6. 1.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배경

1940년 일본 제국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침공하여 점령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는 일본과 협력 관계를 유지했고, 바오다이 황제도 일본의 진주를 수락했다.[2] 일본은 1945년 패망할 때까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와 협력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을 주장하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포함한 동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을 점령했다. 1940년 12월 9일, 프랑스와 일본은 군대와 행정 업무에 대한 주권을 확인하는 협정을 체결했다.[2]

일본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점령에 대한 베트남의 시각은 복잡했다. 일본 점령은 베트남인들이 서방 세력에 대한 반란을 생각하게 했지만, 동시에 전쟁 중의 일본 점령은 가혹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1945년 베트남 기근에 기여했다.[11][12]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일본은 프랑스 당국이 연합군을 지원할 것을 우려하여 1945년 봄에 프랑스 당국을 몰아내고 직접 통제했다. 베트민8월 혁명을 통해 통제권을 잡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 독립 선언을 발표했다. 일본의 인도차이나 점령은 베트민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으며, 이는 1946년 프랑스 통치에 대항하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발발에 기여했다.[14]

6. 2. 베트남 민족주의 강화

바오다이 황제가 일본의 진주를 수락하면서,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와 일본은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일본의 점령은 베트남인들이 서방 세력에 대한 반란을 생각하게 하는 한편, 가혹한 통치와 1945년 베트남 기근에 대한 책임으로 비판받기도 했다.[11][12]

쯔엉 찐은 일본군이 프랑스군을 제거하는 데 도움을 준 후 해방자로 대우받았다는 주장을 비난하며, 일본군이 베트민 저항군을 공격하고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고 주장했다.[13] 그는 일본군이 베트민에게 게릴라 공격 중단과 협력을 유도했지만, 베트민은 이를 거부했고, 일본군은 베트민 기지를 파괴하기 위해 공세를 펼쳤다고 밝혔다. 쯔엉 찐은 일본군이 가는 곳마다 집을 불태우고, 선량한 시민을 살해하고, 여성을 강간하고, 재산을 훔쳤다고 폭로했다.[13]

1945년 봄, 일본은 프랑스 당국을 몰아내고 인도차이나를 직접 통제했다. 이 시기, 베트민8월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 독립 선언을 발표했다. 일본의 인도차이나 점령은 베트민을 강화시켰고, 이는 1946년 프랑스 통치에 대항하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발발의 한 원인이 되었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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