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 드 쿠르트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로베르 드 쿠르트네는 1221년부터 1228년까지 라틴 제국의 황제였다. 그는 프랑스 귀족 출신으로, 형인 필리프가 황제 계승을 포기하자 황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동안 에피루스 전제공 테오도로스 1세에게 테살로니키를 빼앗기고, 니케아 제국의 요한네스 3세 두카스 바타체스와의 전투에서 패배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니케아 제국과의 화해를 위해 에우도키아 라스카리나와 결혼하려 했으나 무산되었고, 부르고뉴 출신 여성과 결혼했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추방당했다. 1228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는 길에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십자군 기독교인 - 교황 인노첸시오 4세
인노첸시오 4세는 1243년부터 1254년까지 재위한 교황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 대립하여 리옹 공의회를 소집하고 그를 파문했으며, 몽골 제국에 사절을 파견하고 탈무드에 대한 정책을 변경했다. - 십자군 기독교인 - 보두앵 2세 드 쿠르트네
보두앵 2세 드 쿠르트네는 라틴 제국의 마지막 황제로서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재정적 어려움 속에서 서유럽의 지원을 얻으려 했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후 망명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재탈환에 실패하고 사망했으며, 그의 무능한 통치는 제국 멸망의 원인으로 평가받는다. - 쿠르트네 카페가 - 피에르 2세 드 쿠르트네
피에르 2세 드 쿠르트네는 쿠르트네 가문의 일원으로 제3차 십자군과 알비 십자군에 참여했고, 라틴 제국 황위 계승자로 지명되었으나 콘스탄티노플로 향하던 중 포로로 잡혀 사망했으며, 그의 아내와 아들들이 제국을 통치했다. - 쿠르트네 카페가 - 욜랑드 드 에노
욜랑드 드 에노는 나뮈르 후작위를 물려받았고, 남편이 라틴 제국 황제가 되기 전 섭정으로서 제국을 통치하며, 외교적 노력을 통해 라틴 제국의 안정을 위해 기여했다. - 1228년 사망 - 무토 스케요리
무토 스케요리는 가마쿠라 시대의 무장으로, 이치노타니 전투에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투항하여 가신이 되었으며, 오슈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규슈로 파견되어 다자이후의 쇼니, 진제이부교를 역임하고 히젠 등 여러 지역의 슈고를 겸했으며, 쓰시마 해적 행위에 대해 사죄하고 그의 자손들은 쇼니 씨로 번성했다. - 1228년 사망 - 이사벨 2세 (예루살렘)
1212년 안드리아에서 태어나 며칠 만에 예루살렘 여왕이 된 이사벨 2세는 여왕 마리아 몬페라토와 브리엔의 장의 외동딸로, 프리드리히 2세와의 결혼을 통해 십자군 참전을 위한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다 아들 콘라트 4세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로베르 드 쿠르트네 | |
---|---|
기본 정보 | |
칭호 | 라틴 황제 |
재위 기간 | 1221년 3월 25일~1228년 |
이전 통치자 | 욜란다 |
다음 통치자 | 보두앵 2세 |
대관식 | 1221년 3월 25일 |
사망 년도 | 1228년 |
사망 장소 | 모레아, 아카이아 공국 |
배우자 | 뇌유빌 여인 |
가문 | 쿠르트네 가문 |
아버지 | 피에르 2세 드 쿠르트네 |
어머니 | 욜란다 드 플랑드르 |
2. 즉위 전 생애
피에르 2세 드 쿠르트네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프랑스에 알려지자, 장남 나뮈르 백작 필리프는 라틴 황제위 계승을 포기하고 동생 로베르를 지지했다.[1] 로베르는 라틴 제국으로 가는 도중 헝가리에 머물며 처남 언드라시 2세의 환대를 받았고, 빌라르 드 오네쿠르도 동행했을 가능성이 있다. 로베르는 언드라시 2세와 에피루스 전제군주국의 테오도로스 1세 콤네노스 두카스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으며, 불가리아 국경까지 동행했다.
2. 1. 라틴 제국 황제 계승
프랑스에 피에르 2세 드 쿠르트네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장남 나뮈르 백작 필리프는 라틴 황제위 계승을 포기하고 동생 로베르를 지지했다.[1] 로베르는 라틴 제국으로 가는 길에 1220년 가을부터 1221년 초까지 헝가리에서 처남 언드라시 2세의 환대를 받았다. 빌라르 드 오네쿠르도 로베르를 수행했을 가능성이 있다. 로베르와 언드라시 2세는 에피루스 전제군주국 테오도로스 1세 콤네노스 두카스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 언드라시 2세와 그의 계승자 벨라는 불가리아 국경까지 로베르와 동행했고, 그곳에서 로베르는 언드라시 2세의 딸 안나 마리아와 불가리아 황제 이반 아센 2세의 결혼을 중매했다.1221년 3월 25일, 로베르는 라틴 황제로 즉위했지만 1224년에 테살로니키를 에피루스 전제공 테오도로스 1세에게 빼앗겼다.[1] 교황 호노리우스 3세는 가톨릭 라틴 제국의 상황을 우려하여 테살로니키 방어를 위한 십자군 소집을 호소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1] 같은 해, 로베르는 포이메논 전투에서 니케아 제국의 요한네스 3세 두카스 바타체스에게 패배했다.
이 패배 이후, 로베르는 니케아 제국 황제가 된 요한네스 3세 두카스 바타체스와 화해해야 했다. 로베르는 이전 황제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와 안나 앙겔리나의 딸 에우도키아 라스카리나와 결혼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게오르기오스 아크로폴리테스에 따르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마누엘 1세가 종교적인 이유로 이 결혼을 중단시켰다고 한다. 로베르의 누이 마리는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와 결혼했기 때문에, 로베르는 이미 테오도로스 1세의 처남이었지만 사위가 될 수는 없었다. 결국, 로베르는 에우도키아와의 약혼을 파기하고 부르고뉴 출신 약혼녀였던 누빌 가문의 딸과 결혼했다. 그 부르고뉴인은 음모를 꾸며 로베르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쫓아냈다. 로베르는 교황의 지원을 받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려 했지만, 1228년 초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는 길에 모레아스에서 사망했다.[1]
3. 라틴 제국 황제 재위
피에르 2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프랑스에 알려지자, 그의 장남 나뮈르 백작 필리프는 라틴 황제위 계승을 포기하고 동생 로베르를 지지했다.[1] 로베르는 라틴 제국으로 가는 도중 1220년 가을부터 1221년 초까지 헝가리에 머물며 처남 언드라시 2세의 환대를 받았다.[1] 빌라르 드 오네쿠르도 로베르를 수행했을 가능성이 있다.[1] 로베르와 언드라시 2세는 에피루스 전제군주국의 테오도로스 1세 콤네노스 두카스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1] 언드라시 2세와 그의 계승자 벨라는 불가리아 국경까지 로베르와 동행했고, 그곳에서 로베르는 언드라시 2세의 딸 안나 마리아와 불가리아 황제 이반 아센 2세의 결혼을 중매했다.
1221년 3월 25일, 로베르는 라틴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1224년, 테살로니키를 에피루스 전제공 테오도로스 1세에게 빼앗겼다. 교황 호노리우스 3세는 가톨릭 라틴 제국의 상황을 우려하여 테살로니키 방어를 위한 십자군 소집을 호소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같은 해, 로베르는 포이메논 전투에서 니케아 제국의 요한네스 3세 두카스 바타체스에게 패배했다.
이 패배 이후, 로베르는 니케아 제국 황제가 된 요한네스 3세 두카스 바타체스와 화해해야 했다. 로베르는 이전 황제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와 안나 앙겔리나의 딸 에우도키아 라스카리나와 결혼하기로 약속했지만, 총대주교 마누엘 1세가 종교적인 이유로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결국 로베르는 에우도키아와 파혼하고 부르고뉴 출신 약혼녀였던 누빌 가문의 딸과 결혼했다. 그러나 그 부르고뉴인은 음모를 꾸며 로베르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쫓아냈다. 로베르는 교황의 지원을 받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려 했지만, 1228년 초 모레아스에서 사망했다.[1]
3. 1. 헝가리와의 관계
피에르 2세 드 쿠르트네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프랑스에 알려지자, 그의 장남인 나뮈르 백작 필리프는 라틴 황제위 계승을 포기하고 동생 로베르를 지지했다. 로베르는 라틴 제국으로 가는 길에 1220년 가을부터 1221년 초까지 헝가리에 머물며 처남 언드라시 2세의 환대를 받았다.[1] 빌라르 드 오네쿠르도 로베르를 수행했을 가능성이 있다. 로베르와 언드라시 2세는 에피루스 전제군주국의 테오도로스 1세 콤네노스 두카스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 언드라시 2세와 그의 계승자 벨라는 불가리아 국경까지 로베르와 동행했고, 그곳에서 로베르는 언드라시 2세의 딸 안나 마리아와 불가리아 황제 이반 아센 2세의 결혼을 중매했다.3. 2. 에페이로스와의 갈등
피에르 2세 드 쿠르트네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프랑스에 전해지자, 장남 나뮈르 백작 필리프는 라틴 황제위 계승을 포기하고 동생 로베르를 지지했다.[1] 로베르는 라틴 제국으로 가는 길에 1220년 가을부터 1221년 초까지 헝가리에서 처남 언드라시 2세의 환대를 받았다.[1] 빌라르 드 오네쿠르도 로베르를 수행했을 가능성이 있다.[1] 로베르와 언드라시 2세는 에피루스 전제군주국 테오도로스 1세 콤네노스 두카스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1] 언드라시 2세와 그의 계승자 벨라는 불가리아 국경까지 로베르와 동행했고, 로베르는 그곳에서 언드라시 2세의 딸 안나 마리아와 불가리아 황제 이반 아센 2세의 결혼을 중매했다.1221년 3월 25일에 라틴 황제로 즉위했지만, 1224년에 테살로니키를 에피루스 전제공 테오도로스 1세에게 빼앗겼다. 교황 호노리우스 3세는 가톨릭 라틴 제국의 상황을 우려하여 테살로니키 방어를 위한 십자군 소집을 호소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같은 해, 로베르는 포이메논 전투에서 니케아 제국의 요한네스 3세 두카스 바타체스에게 패배했다.
3. 3. 니케아 제국과의 전쟁
피에르 2세 드 쿠르트네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프랑스에 전해지자, 그의 장남 나뮈르 백작 필리프는 라틴 황제위 계승을 포기하고 동생 로베르를 지지했다.[1] 로베르는 라틴 제국으로 가는 길에 1220년 가을부터 1221년 초까지 헝가리에서 처남 언드라시 2세의 환대를 받았다. 빌라르 드 오네쿠르도 로베르를 수행했을 가능성이 있다. 로베르와 언드라시 2세는 에피루스 전제군주국의 테오도로스 1세 콤네노스 두카스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 언드라시 2세와 그의 계승자 벨라는 불가리아 국경까지 로베르와 동행했고, 그곳에서 로베르는 언드라시 2세의 딸 안나 마리아와 불가리아 황제 이반 아센 2세의 결혼을 중매했다.로베르는 1221년 3월 25일에 라틴 황제로 즉위했지만, 1224년에 테살로니키를 에피루스 전제공 테오도로스 1세에게 빼앗겼다.[1] 교황 호노리우스 3세는 가톨릭 라틴 제국의 상황을 우려하여 테살로니키 방어를 위한 십자군 소집을 호소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1] 같은 해, 로베르는 포이메논 전투에서 니케아 제국의 요한네스 3세 두카스 바타체스에게 패배했다.
이 패배 이후 로베르는 니케아 제국 황제가 된 요한네스 3세 두카스 바타체스와 화해할 수밖에 없었다. 로베르는 이전 황제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와 안나 앙겔리나의 딸 에우도키아 라스카리나와 결혼하기로 약속했다. 이미 로베르는 이전에 에우도키아와 약혼했었다. 최종적으로 협상이 실패한 배경은 불분명하지만, George Akropolites|게오르기오스 아크로폴리테스영어에 따르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마누엘 1세가 종교적인 이유로 중단시켰다고 한다. 로베르의 누이 마리는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와 결혼했었다. 따라서 로베르는 이미 테오도로스 1세의 처남이었지만, 사위가 될 수는 없었다. 어쨌든, 로베르는 곧 에우도키아와의 약혼을 해소하고 어느 부르고뉴 출신 약혼자였던 누빌 가문의 딸과 결혼했다. 그 부르고뉴인은 음모를 꾸며 로베르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쫓아냈다. 로베르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오도록 설득하는 교황의 지원을 받기 위해 로마로 도망쳤지만, 1228년 초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는 길에 모레아스에서 사망했다.[1]
3. 4. 니케아 제국과의 협상과 파혼
피에르 2세 드 쿠르트네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프랑스에 전해지자, 그의 장남 나뮈르 백작 필리프는 라틴 황제위 계승을 포기하고 동생 로베르를 지지했다.[1] 로베르는 1220년 가을부터 1221년 초까지 헝가리에 머물며 처남 언드라시 2세의 환대를 받았다. 이때 빌라르 드 오네쿠르도 로베르를 수행했을 가능성이 있다. 로베르와 언드라시 2세는 에피루스 전제군주국의 테오도로스 1세 콤네노스 두카스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 언드라시 2세와 그의 계승자 벨라는 불가리아 국경까지 로베르와 동행했고, 그곳에서 로베르는 언드라시 2세의 딸 안나 마리아와 불가리아 황제 이반 아센 2세의 결혼을 중매했다.1221년 3월 25일, 로베르는 라틴 황제로 즉위했지만, 1224년에 테살로니키를 에피루스 전제공 테오도로스 1세에게 빼앗겼다.[1] 교황 호노리우스 3세는 가톨릭 라틴 제국의 상황을 우려하여 테살로니키 방어를 위한 십자군 소집을 호소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1] 같은 해, 로베르는 포이메논 전투에서 니케아 제국의 요한네스 3세 두카스 바타체스에게 패배했다.
이 패배 이후, 로베르는 니케아 제국 황제가 된 요한네스 3세 두카스 바타체스와 화해할 수밖에 없었다. 로베르는 이전 황제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와 안나 앙겔리나의 딸 에우도키아 라스카리나와 결혼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전에 이미 로베르는 에우도키아와 약혼했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협상이 실패하였다. 협상이 결렬된 배경은 불분명하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마누엘 1세가 종교적인 이유로 중단시켰다고 한다. 로베르의 누이 마리는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와 결혼했었다. 따라서 로베르는 이미 테오도로스 1세의 처남이었지만, 사위가 될 수는 없었다. 결국, 로베르는 에우도키아와의 약혼을 해소하고 부르고뉴 출신 약혼자였던 누빌 가문의 딸과 결혼했다. 그러나 그 부르고뉴인은 음모를 꾸며 로베르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쫓아냈다. 로베르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오도록 설득하는 교황의 지원을 받기 위해 로마로 도망쳤지만, 1228년 초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는 길에 모레아스에서 사망했다.[1]
3. 5.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의 추방과 죽음
피에르 2세 드 쿠르트네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프랑스에 전해지자, 그의 장남 나뮈르 백작 필리프는 라틴 황제위 계승을 포기하고 동생 로베르를 지지했다.[1] 로베르는 라틴 제국으로 가는 도중 1220년 가을부터 1221년 초까지 헝가리에 머물며 처남 언드라시 2세의 환대를 받았다. 빌라르 드 오네쿠르도 로베르를 수행했을 가능성이 있다. 로베르와 언드라시 2세는 에피루스 전제군주국의 테오도로스 1세 콤네노스 두카스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 언드라시 2세와 그의 계승자 벨라는 불가리아 국경까지 로베르와 동행했다. 그곳에서 로베르는 언드라시 2세의 딸 안나 마리아와 불가리아 황제 이반 아센 2세의 결혼을 중매했다.1221년 3월 25일에 라틴 황제로 즉위했지만, 1224년에 테살로니키를 에피루스 전제공 테오도로스 1세에게 빼앗겼다.[1] 교황 호노리우스 3세는 가톨릭 라틴 제국의 상황을 우려하여 테살로니키 방어를 위한 십자군 소집을 호소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1] 같은 해, 로베르는 포이메논 전투에서 니케아 제국의 요한네스 3세 두카스 바타체스에게 패배했다.
이 패배 이후 로베르는 니케아 제국 황제가 된 요한네스 3세 두카스 바타체스와 화해할 수밖에 없었다. 로베르는 이전 황제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와 안나 앙겔리나의 딸 에우도키아 라스카리나와 결혼하기로 약속했다. 이미 로베르는 이전에 에우도키아와 약혼했었다. 최종적으로 협상이 실패한 배경은 불분명하지만, 아크로폴리테스에 따르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마누엘 1세가 종교적인 이유로 중단시켰다고 한다. 로베르의 마리는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와 결혼했었다. 따라서 로베르는 이미 테오도로스 1세의 처남이었지만, 사위가 될 수는 없었다. 어쨌든, 로베르는 곧 에우도키아와의 약혼을 해소하고 어느 부르고뉴 출신 약혼자였던 누빌 가문의 딸과 결혼했다. 그 부르고뉴인은 음모를 꾸며 로베르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쫓아냈다. 로베르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오도록 설득하는 교황의 지원을 받기 위해 로마로 도망쳤지만, 1228년 초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는 길에 모레아스에서 사망했다.[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