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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레티아 가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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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크레티아 가필드는 미국의 영부인이자 제임스 A. 가필드 대통령의 부인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독서를 즐겼고, 정규 교육을 받았으며, 남편의 정치 활동을 지지하며 그의 기록과 유산을 보존하는 데 힘썼다. 영부인 시절에는 백악관 가구 연구에 관심을 가졌으나, 남편의 암살 사건으로 짧은 임기를 보냈다. 남편 사후에는 그의 기념관을 조성하고, 진보적인 정치 운동에 참여했으며, 1918년 사망하여 남편과 함께 레이크뷰 묘지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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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레티아 가필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루크레티아 가필드
루크레티아 가필드, 1880년경
직함미국 대통령 영부인
재임 시작1881년 3월 4일
재임 종료1881년 9월 19일
이전루시 웨브 헤이스
이후메리 아서 매켈로이
출생명루크레티아 루돌프
출생일1832년 4월 19일
출생지미국 오하이오주 개럿츠빌
사망일1918년 3월 13일
사망지미국 캘리포니아주 사우스패서디나
안장지제임스 A. 가필드 기념관
배우자제임스 A. 가필드(1858년 결혼, 1881년 사망)
자녀7명 (할, 제임스, 에이브럼 포함)
교육기오가 신학교
하이럼 칼리지 (BA)
루크레티아 가필드 서명

2. 어린 시절과 교육

루크레티아 "크리트" 루돌프는 1832년 4월 19일 오하이오주 개럿츠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목수 제불론 루돌프, 어머니는 아라벨라 메이슨 루돌프였으며, 4명의 자녀 중 첫째였다.[1] 그녀는 그리스도의 제자회 신자로 성장했다.[2] 어린 시절부터 호흡기 문제로 건강이 좋지 않아 병상에 누워 지내는 시간이 많았고, 이로 인해 독서를 즐기게 되었다.[1][3] 그녀의 가족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내성적인 분위기였다.[4]

당시 많은 소녀들처럼 루크레티아는 어머니에게 청소와 요리 등 가사 기술을 배웠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는 딸에게 정규 교육을 시키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당시 흔치 않은 선택이었다. 그녀는 마을의 문법 학교에 다녔다.[4] 이후 오하이오주 체스터 타운십에 있는 지오가 신학교에 진학했으며, 이곳에서 훗날 남편이 되는 제임스 A. 가필드와 같은 시기에 공부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웨스턴 리저브 절충주의 연구소(현재 하이럼 칼리지)의 공동 설립자였고, 루크레티아는 1850년부터 이 학교에 다녔다.[1] 학교에서 그녀는 문학에 대한 열정을 키워 문학 그룹을 만들고 학교 잡지에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제임스 가필드 역시 이 학교에서 학생이자 교사로 있었으며, 루크레티아를 가르치기도 했다.[4] 루돌프는 여성이 사회에서 스스로의 업적을 이루고 직장에서 남성과 동등한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대학 졸업 후에는 이러한 신념을 더 이상 표명하지 않았다.[2][3] 그녀는 대학 졸업 후 교사가 되어 클리블랜드와 오하이오주 라벤나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5]

3. 결혼과 가정생활

루크레티아는 1851년 웨스턴 리저브 절충 학술 연구소에서 동급생 제임스 A. 가필드를 만나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11] 제임스가 1853년 윌리엄스 대학교로 옮겨간 후에도 서신을 통해 관계를 이어갔다.[12] 루크레티아는 1854년 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되었으며, 두 사람은 1858년 11월에 결혼했다.[13] 루크레티아는 매우 내성적인 성격이었기에, 남편 가필드는 그녀가 더 사교적이 되기를 바라며 초조해하기도 했다.[12]

워싱턴 D.C.에서는 부부가 함께 지적인 교류를 나누기도 했다.[11][13]

루크레티아는 남편의 정치 활동이나 갑작스러운 주목을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1880년 대통령 선거 출마도 반대했다.[1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지적인 면모를 바탕으로 남편이 가장 신뢰하는 조언자 중 한 명이 되었다. 때로는 남편의 요청으로 뉴욕에 파견되어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미세스 그린필드"라는 가명을 사용하기도 했다.[12]

3. 1. 어두운 시기 (Years of darkness)

약혼 당시의 제임스 A. 가필드와 루크레티아 루돌프


루크레티아 루돌프는 1858년 11월 11일 자신의 집에서 제임스 A. 가필드와 결혼했다. 결혼 전 두 사람은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는데, 결혼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감과 함께 루크레티아는 교사라는 직업을 통해 얻은 독립성을 잃을까 걱정했기 때문이다.[1][6] 결혼 후 신혼여행 없이 바로 하숙집으로 이사했다.[3]

결혼 후 몇 년 동안 루크레티아 가필드의 삶은 크게 변하지 않았고, 그녀는 계속 교사로 일했다.[6] 남편 제임스는 목사, 주의 입법자, 그리고 미국 남북 전쟁 중 연방군 장교로 활동하며 집에 거의 들어오지 못했다. 결혼 후 첫 5년 동안 부부가 함께 보낸 시간은 20주도 채 되지 않았고,[1][4] 제임스는 공개적으로 결혼에 대한 후회와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6] 루크레티아는 독립적인 생활을 유지하며 자신의 사회생활을 이어갔고 남편 없이 여행하기도 했다.[1]

특히 1860년 첫 아이 엘리자가 태어난 후 남편이 보여준 무관심에 루크레티아는 상처를 받았다.[4] 제임스가 1861년 전쟁에 참전하자 루크레티아는 부모의 집으로 돌아갔다.[1] 부부는 나중에 이 시기를 "어둠의 세월(Years of darkness)"이라고 회상했다.[2]

3. 2. 관계 회복과 의회 진출

가필드 가족


첫째 딸의 사망 직후, 남편 제임스 가필드는 미국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워싱턴 D.C.로 이주했다. 루크레티아는 오하이오에 남았고, 남편의 부재로 다시 외로움을 느꼈다.[4] 제임스는 워싱턴에서 편집 작가 루시아 캘훈과 관계를 맺었으며, 이 사실을 아내에게 고백했다.[4] 관계의 구체적인 정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3] 제임스는 루크레티아의 요청에 따라 뉴욕으로 가서 자신이 보낸 편지를 회수하여 파기했다.[4] 이후 부부는 결혼 생활을 회복하기로 결심했고, 관계는 개선되기 시작했다.[2][3]

루크레티아는 1864년 초부터 워싱턴 D.C.의 남편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두 아이를 더 낳았는데, 1865년 워싱턴 체류 중 셋째 아이인 제임스를, 1867년에는 넷째 아이 메리를 낳았다.[1]

1869년, 가필드 가족은 워싱턴 D.C.에 영구적으로 정착하기로 결정하고 수도에 집을 지었다. 이는 그들이 소유한 첫 집이었으며, 루크레티아와 제임스가 장기간 함께 거주한 첫 번째 시기이기도 했다.[1] 워싱턴에 거주하며 세 명의 아이를 더 낳았는데, 1870년 어빈, 1872년 에이브럼, 1874년 에드워드였다.[1] 그들의 집에는 하인, 유모, 그리고 제임스의 어머니도 함께 살았다.[3] 그러나 막내아들 에드워드는 1876년에 사망했다. 같은 해, 부부는 오하이오에 농장을 구입하여 매년 여름을 보낼 수 있는 별도의 집을 마련했다.[4]

루크레티아는 여성이 가정적인 삶에 충실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에 동의하면서도, 때때로 그러한 역할에 불만을 느끼기도 했다.[1] 그녀는 남편의 의정 활동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으며, 워싱턴 사교 행사도 거의 주최하거나 참석하지 않았다.[6] 대신 남편에게 조언을 제공하고,[3] 미국 국회의사당을 방문하여 남편의 의회 연설을 지켜보는 것으로 내조했다.[4] 부부는 워싱턴 D.C.에서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지적인 교류를 나누었으며, 루크레티아는 때때로 남편과 함께 문학 모임에 참여하기도 했다.[11][13]

4. 영부인 시절

2011년 영부인 10달러 주화 뒷면에 묘사된 가필드


미국 영부인이 된 루크레티아는 백악관의 역사적 가치를 되살리는 데 관심을 가졌으나, 1881년 5월 말라리아에 걸려 계획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녀가 뉴저지주에서 요양하던 중인 1881년 7월 2일, 남편 제임스 A. 가필드 대통령이 찰스 J. 기토에게 피격당하는 사건(가필드 대통령 암살 사건)이 발생했다. 루크레티아는 급히 워싱턴으로 돌아와 3개월간 투병하는 남편을 헌신적으로 간호했으나[13], 대통령은 결국 9월 19일 사망했다[12]. 남편을 잃은 슬픔 속에서도 보여준 그녀의 강인함은 많은 미국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13], 이후 루크레티아는 가족과 함께 오하이오주에 있는 농장으로 돌아갔다[13].

4. 1. 백악관 안주인



루크레티아 가필드는 1881년 3월 4일 남편 제임스 A. 가필드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영부인이 되었다.[4] 영부인으로서의 접대 책임은 국회의원 부인이었을 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컸으며, 그녀는 당시 국무장관 블레인의 부인 해리엇에게 조언을 구했다.[1][3] 그녀는 저명한 작가와 예술가들을 만나는 데 관심을 가졌고, 백악관에 초대하고 싶은 인물들의 목록을 가지고 있었다.[7] 가필드는 사회적 활동보다는 역할의 정치적 측면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남편인 대통령은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워싱턴의 소식을 그녀에게 계속해서 전해주었다.[7] 그녀는 성 평등을 믿었지만, 여성 참정권 운동은 지지하지 않았는데, 여성들이 평등을 이루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한 교육을 아직 충분히 받지 못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7]

그녀의 전임자였던 루시 웹 헤이즈와 달리, 가필드는 금주 운동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이지 않았고, 백악관 행사에서 술을 제공하는 것을 다시 시작했다.[4] 이는 다소 정치적인 결정이었는데, 금주 운동 지지자들은 주로 공화당 지지 세력이었지만, 술을 금지하는 것은 워싱턴의 저명인사들과 외국 외교관들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3] 그녀는 금지령을 다시 시행하라고 요구하는 금주 운동 지지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백악관의 술 문제는 과도한 관심을 받는 금주 운동의 작은 측면일 뿐이라고 판단했다.[7]

가필드는 영부인이 된 후 백악관을 개조하고 이를 위한 자금 지원을 의회에 요청하는 책임을 맡았다.[3] 그녀는 백악관의 역사와 가구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으며, 이를 위해 자주 미국 의회 도서관을 방문했다.[7] 영부인으로 재임하는 동안 단 한 번의 인터뷰에 응했는데, 이 인터뷰에서 그녀는 정치와 블레인에 대한 지지를 솔직하게 이야기했다.[7]

그러나 1881년 5월, 그녀는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백악관 개조 및 연구 프로젝트가 중단되었다. 그녀가 뉴저지주의 해변 휴양지에서 요양 중이던 1881년 7월 2일, 찰스 J. 기토가 워싱턴 D.C.의 기차역에서 남편 제임스 가필드 대통령에게 총격을 가하는 사건(가필드 대통령 암살 사건)이 발생했다. 루크레티아는 소식을 듣고 특별 열차를 타고 급히 워싱턴으로 돌아왔다.[13] 제임스 가필드는 생존을 위해 3개월 동안 투병했으며, 루크레티아는 헌신적으로 간호했지만 결국 9월 19일 사망했다.[12] 미망인이 된 그녀의 슬픔, 남편에 대한 헌신, 그리고 불굴의 정신은 많은 미국 국민으로부터 존경과 동정을 받았다.[13] 남편이 사망한 후, 가필드 유족은 오하이오주에 있는 농장으로 돌아갔다.[13]

4. 2. 제임스 A. 가필드 암살 사건



남편 제임스 A. 가필드의 임종을 지키는 루크레티아 가필드를 묘사한 그림


미국 영부인으로 취임한 지 불과 두 달 만인 1881년 5월, 루크레티아 가필드는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심각한 말라리아에 걸렸다.[4][13] 남편 제임스 A. 가필드 대통령은 아내를 직접 간호하기 위해 많은 업무를 중단할 정도였다.[3][7] 6월이 되자 루크레티아의 건강은 회복되기 시작했고, 대통령은 그녀가 요양할 수 있도록 뉴저지주 롱브랜치에 별장을 마련했다.[2][4]

한편, 대통령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찰스 J. 기토는 이때 대통령을 저격하려 했으나, 눈에 띄게 아픈 루크레티아의 모습 때문에 망설였다.[2] 그러나 몇 주 후인 1881년 7월 2일, 기토는 워싱턴 D.C.의 한 기차역에서 결국 제임스 A. 가필드 대통령에게 총격을 가했다 (제임스 A. 가필드 암살 사건).[2][7][13] 총알은 즉시 치명상을 입히지는 않았고, 대통령은 데이비드 G. 스와임을 보내 뉴저지에서 요양 중이던 루크레티아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1][4] 루크레티아는 부상당한 남편을 만나기 위해 즉시 준비된 특별 열차를 타고 워싱턴으로 향했다.[3][13]

이후 3개월 동안 제임스 가필드 대통령은 생존을 위해 투병했고, 루크레티아는 헌신적으로 남편의 곁을 지켰다.[12] 그녀는 미국 최초의 여성 의사 중 한 명인 자신의 주치의 수잔 앤 에드슨이 대통령 치료팀에 합류하도록 주장하기도 했다.[4] 남편의 임종을 지키는 루크레티아의 모습은 당시 미국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그녀의 슬픔과 남편에 대한 헌신, 그리고 강인한 모습은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과 동정을 받았다.[6][7][13] 그러나 제임스 A. 가필드 대통령은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1881년 9월 19일 사망했다.[1][12] 남편 사후, 루크레티아는 오하이오주에 있는 농장으로 돌아갔다.[13]

5. 남편 사후 활동

가필드(가운데, 앉아 있음)가 자녀와 손주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모습, 1906년


가필드는 남편의 공적인 장례식을 주관했고, 클리블랜드의 레이크 뷰 묘지에 남편의 묘를 조성했다.[3] 과부로서 재정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누렸다. 의회에서 지급한 연간 5000USD의 연금 외에도, 사이러스 W. 필드가 그녀와 자녀들을 위해 조직한 기부 운동을 통해 30만달러[2][7]에서 36만달러[1][3]에 달하는 상당한 금액을 모금했다. 이러한 재산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계속해서 검소하게 생활했다.[7]

이후 몇 년간 가필드는 남편의 대통령 기록과 유산을 보존하는 데 힘썼다. 역사학자 테오도르 클라크 스미스와 협력하여 남편의 서류를 정리하고, 대통령직에 대한 자신의 기억을 기록했으며,[1] 남편의 정치 활동 기록 보존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했다.[11][13] 1885년에는 남편의 모든 책과 대통령 문서를 보관하기 위해 오하이오주 멘토의 자택 부지에 도서관 건물 증축을 감독했다. 이는 최초의 대통령 도서관으로 여겨진다.[4]

노년기에 가필드는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에 겨울 별장을 마련하여[3] 지역 사회의 저명인사가 되었고, 최초의 로즈 퍼레이드에도 참석했다.[7]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패서디나 적십자 전쟁 위원회에서 매일 자원봉사를 했다.[7]

루크레시아는 이후에도 정치에 관심을 가졌으며, 미국-스페인 전쟁제1차 세계 대전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강력히 지지했다.[12] 테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진보주의 정책을 지지했으며,[7] 1916년에는 민주당 소속의 우드로 윌슨을 대통령으로 지지했다.[7] 사망한 남편이 공화당 소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말년에 민주당으로 정치적 입장을 바꾸었다.[12]

가필드는 1918년 3월 19일,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의 겨울 별장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1] (일부 자료에서는 3월 14일로 기록되기도 한다.[11][12][13]) 그녀의 유해는 레이크 뷰 묘지 내 가필드 기념관 지하에 남편과 나란히 안장되었다.[14]

가필드 기념관 지하에 안치된 두 개의 관. 오른쪽이 루크레시아의 관

6. 죽음과 유산

제임스 A. 가필드 국립 역사 유적지 내 가필드 자택의 뒷면 모습


루크레티아 가필드는 역대 영부인 중 애나 해리슨에 이어 두 번째로 짧은 임기를 보냈다.[3] 임기는 짧았지만, 그녀는 전임자인 루시 헤이스보다 역사학자들로부터 더 많은 주목을 받았다.[4] 임기가 짧아 영부인으로서 직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기회는 제한적이었으나,[3] 남편의 문서를 미국 의회 도서관에 보존한 그녀의 노력은 에디스 윌슨과 낸시 레이건 같은 후대의 영부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4] 루크레티아 가필드의 개인 서류 역시 미국 의회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3] 그녀는 영부인들 중 두 번째로 고등 교육을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4]

남편 제임스 A. 가필드 대통령 사후에도 루크레티아는 정치에 계속 관여하며 진보적인 사회 운동에 참여했다. 남편은 공화당 소속이었으나, 루크레티아는 말년에 민주당으로 정치적 입장을 바꾸었다.[12] 그녀는 미국-스페인 전쟁제1차 세계 대전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강력하게 지지했으며,[12] 남편의 정치 활동 기록을 보존하는 데에도 적극적으로 힘썼다.[11][13]

루크레티아 가필드는 1918년 3월 14일에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1][12][13] 그녀의 유해는 레이크뷰 묘지 내 가필드 기념관 지하에 남편 제임스 A. 가필드 대통령과 나란히 안치되었다.[14]

7. 자녀



첫째 딸은 태어난 직후 사망했고, 1876년에는 두 살이었던 막내 아들 역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 사이에 태어난 다섯 명의 자녀들은 모두 건강하게 성장했다.[13] 이 다섯 자녀는 어머니 루크레티아 가필드가 사망한 후에도 20년 이상 장수했다.

이름생몰년주요 경력 및 특징
해리 어거스터스 가필드1863–1942변호사, 교육자, 공무원
제임스 루돌프 가필드1865–1950변호사, 공무원
몰리 가필드 스탠리 브라운1867–1947사립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아버지 제임스 A. 가필드 대통령의 비서를 지낸 인물과 결혼했다.
어빈 맥도웰 가필드1870–1951변호사
에이브럼 가필드1872–1958건축가


참조

[1] 서적 First Ladies: A Biographical Dictionary https://archive.org/[...] Facts on File
[2] 서적 Presidential Wives https://archive.org/[...] Oxford University Press
[3] 서적 American First Ladies: Their Lives and Their Legacy https://archive.org/[...] Garland Publishing
[4] 서적 A Companion to First Ladies https://books.google[...] John Wiley & Sons
[5] 서적 From Classroom to White House: The Presidents and First Ladies as Students and Teachers https://books.google[...] McFarland
[6] 서적 First Ladies: From Martha Washington to Michelle Obama https://archive.org/[...] Oxford University Press
[7] 서적 First Ladies: The Saga of the Presidents' Wives and Their Power, 1789–1961 https://archive.org/[...] William Morrow and Company
[8] 웹사이트 Eleanor Roosevelt Retains Top Spot as America's Best First Lady Michelle Obama Enters Study as 5th, Hillary Clinton Drops to 6th Clinton Seen First Lady Most as Presidential Material; Laura Bush, Pat Nixon, Mamie Eisenhower, Bess Truman Could Have Done More in Office Eleanor & FDR Top Power Couple; Mary Drags Lincolns Down in the Ratings https://scri.siena.e[...] Siena Research Institute 2014-02-15
[9] 웹사이트 Ranking America's First Ladies Eleanor Roosevelt Still #1 Abigail Adams Regains 2nd Place Hillary moves from 5 th to 4 th; Jackie Kennedy from 4th to 3rd Mary Todd Lincoln Remains in 36th https://scri.siena.e[...] Siena Research Institute 2008-12-18
[10] 웹사이트 Siena College Research Institute/C-SPAN Study of the First Ladies of the United States 2014 FirstLadies2014_Full Rankings.xls https://scri.siena.e[...] Sienna College Research Institute/C-SPAN 2014
[11] 웹사이트 Lucretia Rudolph Garfield http://www.whitehous[...] whiteHouse.gov 2014-02-23
[12] 웹사이트 Lucretia Rudolph http://www.ohiohisto[...] Ohio History Central 2014-02-23
[13] 웹사이트 LUCRETIA GARFIELD http://www.whitehous[...] The White House Historical Association 2014-02-23
[14] 웹사이트 James A. Garfield Monument http://www.lakeviewc[...] The Lake View Cemetery 2014-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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