룩셈부르크 공녀 안토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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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룩셈부르크 공녀 안토니아는 룩셈부르크 대공 기욤 4세의 딸로, 바이에른 왕세자 루프레히트의 두 번째 부인이었다. 그녀는 1939년 나치 독일 체제에 반대하여 망명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어 고초를 겪었다. 전쟁 후 스위스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강제 수용소에서의 경험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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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 공녀 안토니아 | |
---|---|
기본 정보 | |
![]() | |
전체 이름 | Antoinette Roberte Sophie Wilhelmine |
출생일 | 1899년 10월 7일 |
출생지 | 독일 바이에른, 레응그리스의 슐로스 호헨부르크 |
사망일 | 1954년 7월 31일 |
사망지 | 스위스 그라우뷘덴주 렌저하이데 |
배우자 | 루프레히트 바이에른 왕세자 (1921년 결혼) |
자녀 | 하인리히 공자 이르밍가르트 왕녀 에디타 공녀 힐다 공녀 가브리엘 공녀, 크로이 여공작 조피 공녀, 아렌베르크 여공작 |
가문 |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 |
아버지 | 기욤 4세 룩셈부르크 대공 |
어머니 | 마리아 아나 드 포르투갈 |
신분 | |
작위 | 바이에른 왕세자빈 |
2. 가족 관계
안토니아는 룩셈부르크 대공 기욤 4세와 포르투갈의 마리 안 사이의 넷째 딸로 호엔부르크 성에서 태어났다. 두 언니인 마리 아델라이드와 샤를로트는 룩셈부르크의 여대공이었다. 안토니아는 가족들로부터 "토니(Toni프랑스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1918년 8월 26일, 안토니아는 바이에른 왕세자 루프레히트와 약혼했다.[1] 당시 루프레히트는 독일 제국 원수였고, 독일군 제6군의 사령관으로서 로렌 전투에서 독일에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룩셈부르크는 독일에 점령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결혼은 룩셈부르크 대공가와 독일 제국 왕족 사이의 긴밀한 관계에 대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안토니아와 루프레히트는 1921년 4월 7일 호엔부르크 성에서 결혼했다.
2. 1. 가계
룩셈부르크의 안토니아 공녀 가계도 | ||
---|---|---|
1대 | 2대 | 3대 |
룩셈부르크 대공 빌럼 4세 | 포르투갈의 마리아 안나 인판타 | 룩셈부르크 공녀 안토니아 |
룩셈부르크 대공 아돌프 | 안할트데사우의 아델하이트-마리 공주 | 룩셈부르크 대공 빌럼 4세 |
포르투갈의 미겔 1세 | 뢰벤슈타인의 아델라이드 공주 | 포르투갈의 마리아 안나 인판타 |
나사우 공작 빌헬름 |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의 루이제 공주 | 룩셈부르크 대공 아돌프 |
안할트데사우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공자 | 헤센카셀의 마리 루이제 샤를로테 공주 | 안할트데사우의 아델하이트-마리 공주 |
포르투갈과 브라질의 주앙 6세 | 스페인의 카를로타 호아키나 인판타 | 포르투갈의 미겔 1세 |
뢰벤슈타인의 콘스탄틴 상속친왕 | 호엔로에랑엔부르크의 아그네스 공주 | 뢰벤슈타인의 아델라이드 공주 |
2. 2. 혼인과 자녀
안토니아는 바이에른 왕세자 루프레히트의 두 번째 부인이 되었다. 두 사람은 1918년 8월 26일에 약혼했다.[1] 당시 루프레히트는 제국 독일군의 ''야전원수''였으며, 로렌 전투에서 독일 제6군을 성공적으로 지휘했다.룩셈부르크는 독일에 점령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결혼은 룩셈부르크 대공가와 독일 제국 왕족 사이의 긴밀한 관계에 대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이미 마리 아델라이드 대공녀에게 가해지던 압박을 더했고, 그녀는 1919년 1월 10일에 퇴위해야만 했다.[2] 언니의 퇴위와 바이에른 왕국이 공화국으로 전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1921년 4월 7일 호엔부르크 성에서 결혼했다.
안토니아와 루프레히트는 슬하에 1남 5녀, 여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
바이에른의 하인리히 프란츠 빌헬름 공자 | 1922년 3월 28일 | 1958년 2월 14일 | 안 마리 드 뤼스트라크 (1951년 7월 31일 결혼) |
바이에른의 이르밍가르트 마리 요제파 공주 | 1923년 5월 29일 | 2010년 10월 23일 |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공자 (1950년 7월 20일 결혼) |
바이에른의 에디타 마리 가브리엘 안나 공주 | 1924년 9월 16일 | 2013년 5월 4일 | 티토 토마소 마리아 브루네티 (1946년 11월 12일 결혼) 구스타프 크리스티안 쉬메르트 교수 (1959년 12월 29일 재혼) |
바이에른의 힐데 힐데가르트 마리 가브리엘 공주 | 1926년 3월 24일 | 2002년 5월 5일 | 후안 브래드스톡 로켓 드 로아이자 (1949년 2월 12일 결혼) |
바이에른의 가브리엘 아델군데 마리 테레지아 안토니아 공주 | 1927년 5월 10일 | 2019년 4월 19일 | 카를 엠마누엘 폰 크로이 공작 (1953년 6월 17일 결혼) |
바이에른의 소피 마리 테레제 공주 | 1935년 | - | 제12대 아렌베르크 공작 장 (1955년 1월 18일 결혼) |
안토니아 공녀는 나치에 반대하여 저항 음모와 연루되었기 때문에, 1939년 가족들과 함께 이탈리아 왕국과 헝가리 왕국으로 피신해야 했다.[3] 1944년 나치가 헝가리를 점령하면서 남편 루프레히트를 체포하려 했고, 가족 전체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나치의 정책에 따라 히틀러는 안토니아와 자녀들을 직접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3.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활동
수감 중 장티푸스에 걸려 인스브루크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던 안토니아는[3] 이후 작센하우젠 강제 수용소, 플로센부르크 강제 수용소, 다하우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3] 1945년 미군에 의해 다하우 수용소가 해방되면서 자유를 되찾았지만, 수용소 생활 동안의 영양실조와 고문 등으로 건강이 악화되었다.[3]
3. 1. 반나치 활동과 망명
안토니아와 루프레히트는 나치 독일 체제에 반대했고, 1939년 부부는 이탈리아로 망명했으며, 안토니아와 아이들은 헝가리로 피신했다.[3] 1944년 나치 독일이 헝가리를 점령하자 이탈리아에 남은 루프레히트는 체포를 면했지만, 안토니아와 아이들은 구금되어 작센하우젠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3] 1945년 4월 초, 모자는 다하우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석방되었지만, 강제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안토니아의 건강을 심하게 훼손했다.[3] 안토니아는 석방된 지 9년 후인 1954년, 스위스의 렌체르하이드에서 사망했다.[3]
3. 2. 강제 수용소 수감과 석방
1939년 안토니아 공녀의 가족들은 이탈리아 왕국과 헝가리 왕국으로 도망쳐야 했다.[3] 5년 후, 나치는 헝가리를 점령했고, 이탈리아에서 은신해 있던 남편 루프레히트를 체포하려 했다. 나치는 가족 중 한 명이 범죄 혐의로 기소되면 가족 전체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정책을 가지고 있었다. 히틀러는 안토니아 공녀와 자녀들을 직접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영국 외무부의 보고서에 따르면 루프레히트는 조지 6세에게 "총통은 정신 이상자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고 한다.[3]
수감 기간 동안 안토니아는 장티푸스에 걸려 인스브루크의 병원에 입원했다.[3] 건강을 회복한 안토니아는 성인 자녀들이 수감되어 있던 작센하우젠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소련군이 제3제국에 가까워지자, 그들은 플로센부르크 강제 수용소와 마지막으로 다하우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3] 1945년 미국 육군은 다하우 수용소를 해방시켰다.
수용소에 있는 동안 안토니아는 남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라는 나치의 반복적인 고문을 받았지만, 이를 거부했다. 안토니아 공녀는 제2차 세계 대전을 무사히 넘겼지만, 장티푸스, 영양실조, 고문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었다. 해방 직후, 그녀는 요양을 위해 룩셈부르크로 돌아갔다. 같은 달에 해방되었지만, 수감 생활은 안토니아의 건강을 크게 손상시켰다.[3]
4. 전후 생애와 사망
1945년 미군에 의해 다하우 강제 수용소가 해방되면서 안토니아 공녀는 자유를 되찾았다. 그러나 수용소 생활 동안 장티푸스, 영양실조와 나치의 고문으로 인해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었다.[3] 해방 직후, 요양을 위해 룩셈부르크로 돌아갔다.[3]
안토니아 공녀는 수용소에서의 경험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다.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에서 시간을 보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에 대한 공식적인 보고서는 없다.[3] 다시는 독일 땅을 밟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남은 생을 이탈리아와 스위스에서 보냈다.[3] 1954년 7월 31일, 독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킨 채 스위스의 렌체르하이드에서 사망했다. 남편 루프레히트 공은 1년 남짓 지난 1955년 8월에 사망했다.
참조
[1]
서적
Thewes
2003
[2]
서적
Thewes
2003
[3]
뉴스
Royal sisters during WWII – from exile to the concentration camps
https://today.rtl.lu[...]
202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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