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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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는 그리스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1906년 소위로 임관하여 군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제1차 발칸 전쟁, 소아시아 전쟁 등에 참전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이탈리아와 독일군에 맞서 싸웠다. 1949년 그리스 내전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격퇴하는 데 기여하여 원수 칭호를 받았다. 1951년 정계에 진출하여 총리가 되었으며, 그리스 경제를 부흥시키고 키프로스 문제를 다루었으나, 건강 악화로 1955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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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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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 |
| 원어 이름 | Αλέξανδρος Παπάγος |
| 출생일 | 1883년 12월 9일 |
| 출생지 | 그리스 왕국 아테네 |
| 사망일 | 1955년 10월 4일 |
| 사망지 | 그리스 왕국 아테네 |
| 국적 | 그리스 왕국 |
| 정당 | 그리스 랠리 |
| 서명 | Alexandros-papagos-signature.svg |
| 가족 관계 | 게오르기오스 아베로프 (대외숙부) |
| 부모 | 레오니다스 파파고스 마리아 아베로프 |
| 군 복무 | |
| 복무 기간 | 1906년–1917년 1920년–1922년 1926년–1951년 |
| 최종 계급 | 육군 원수 |
| 지휘 | 그리스군 총사령관 그리스 국방참모본부 총장 그리스 육군참모본부 총장 |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발칸 전쟁 제1차 발칸 전쟁 비자니 전투 제2차 발칸 전쟁 그리스-터키 전쟁 (1919년-1922년) 제2차 세계 대전 그리스-이탈리아 전쟁 그리스 공방전 그리스 내전 |
| 수훈 내역 | 대영 제국 훈장 구세주 훈장 대십자장 성 게오르기오스 및 성 콘스탄티노스 훈장 대십자장 게오르기오스 1세 훈장 대십자장 피닉스 훈장 대십자장 용맹 십자 훈장 사령관 십자장 전쟁 십자 훈장 군사 공로 훈장 메달 밀리타이르 십자 무공 훈장 |
| 정치 경력 | |
| 직책 | 군사 담당 장관 국방부 장관 |
| 총리 직책 | 그리스 총리 |
| 임기 시작 | 1952년 11월 19일 |
| 임기 종료 | 1955년 10월 4일 |
| 군주 | 파블로스 |
| 전임자 | 디미트리오스 키우소풀로스 (임시) |
| 후임자 |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 |
| 학력 | 벨기에 왕립 군사 학교 |
2. 군 경력
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는 1906년 그리스 군대에 소위로 임관하였다. 1911년 중위로 진급한 파파고스는 제1차 발칸 전쟁 때 콘스탄티노스 1세 임금의 총참모부에서 하급 장교로 복무하였고, 1912년 11월부터 1913년 3월까지 마케도니아에서 싸웠으며, 얀니나 포위전(요안니나)에 참여하였다. 1913년 대위가 되어 참모직을 승계하였다. 발칸 전쟁 후 그는 제1기병연대와 제3군단 참모부에서 복무했다. 1916년 소령으로 진급한 그는 기병여단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확고한 왕당파였으며, 1917년 국가 분열로 인해 콘스탄티노스 임금이 폐위되자 다른 여러 장교들과 마찬가지로 군에서 해임되었다. 1920년에 콘스탄티노스가 복위되자 파파고스도 다시 소환되었다. 선거 승리에 따라 1920년 중령 계급으로 복귀하여, 다시 기병여단과 기병사단 참모장으로 복무하며 무스타파 케말의 터키 민족 운동에 대항하는 소아시아 전쟁에 참전했다.[2] 소아시아 작전에서 기병 여단 지휘관으로 참전했으나, 1922년 8월 그리스군의 참패와 그에 따른 군사 반란 발생 후 1923년에 정부가 무너지면서 다시 직위 해제되었다.
1926년 대령 계급으로 복귀했고,[2] 1927년에 다시 소환되어 소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제1기병사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2] 1930년 소장으로 진급했고,[1] 1931년에는 헬레닉 육군 총참모부 부총장에 임명되었다.[2] 1933~35년 그는 기병 감찰관을 역임한 후 제1군단과 제3군단 사령관을 지냈다. 1934년에는 군단장이 되었고, 1935년 중장으로 진급했다.[2]
2. 1. 초기 군 경력 (1906년 ~ 1935년)
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는 1906년 그리스 군대에 소위로 임관하였다. 1911년 중위로 진급한 파파고스는 제1차 발칸 전쟁 때 콘스탄티노스 1세 임금의 총참모부에서 하급 장교로 복무하였고, 1912년 11월부터 1913년 3월까지 마케도니아에서 싸웠으며, 얀니나 포위전(요안니나)에 참여하였다. 1913년 대위가 되어 참모직을 승계하였다. 발칸 전쟁 후 그는 제1기병연대와 제3군단 참모부에서 복무했다. 1916년 소령으로 진급한 그는 기병여단 참모장에 임명되었다.그는 확고한 왕당파였으며, 1917년 국가 분열로 인해 콘스탄티노스 임금이 폐위되자 다른 여러 장교들과 마찬가지로 군에서 해임되었다. 1920년에 콘스탄티노스가 복위되자 파파고스도 다시 소환되었다. 선거 승리에 따라 1920년 중령 계급으로 복귀하여, 다시 기병여단과 기병사단 참모장으로 복무하며 무스타파 케말의 터키 민족 운동에 대항하는 소아시아 전쟁에 참전했다.[2] 소아시아 작전에서 기병 여단 지휘관으로 참전했으나, 1922년 8월 그리스군의 참패와 그에 따른 군사 반란 발생 후 1923년에 정부가 무너지면서 다시 직위 해제되었다.
1926년 대령 계급으로 복귀했고,[2] 1927년에 다시 소환되어 소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제1기병사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2] 1930년 소장으로 진급했고,[1] 1931년에는 헬레닉 육군 총참모부 부총장에 임명되었다.[2] 1933~35년 그는 기병 감찰관을 역임한 후 제1군단과 제3군단 사령관을 지냈다. 1934년에는 군단장이 되었고, 1935년 중장으로 진급했다.[2]
2. 2. 왕정 복고와 메탁사스 독재 정권 (1935년 ~ 1940년)
요르요스 2세의 왕정 복고에 중요한 역할을 한 파파고스는 요르요스 콘딜리스, 콘스탄티노스 데메르치스, 요안니스 메탁사스 정부에서 전쟁 장관을 역임했다.[2] 1935년 10월 10일, 해군 및 공군 참모총장과 함께 파나이스 찰다리스 정부를 전복하고 왕정 복고를 선포하는데 일조했다.[2] 11월 30일 콘딜리스가 사임할 때까지 군사부 장관직을 유지했고,[3] 1935년 12월 13일 콘스탄티노스 데메르치스 내각에서 1936년 3월 5일까지 다시 같은 자리에 임명되었다.[4]1936년 3월 5일 육군 감찰총장으로 임명되어 7월 31일까지 재직했고, 8월 1일 육군참모총장으로 승진했다.[2] 그는 육군참모총장 직책을 이용하여 1936년 8월 4일 군대를 동원, 요안니스 메탁사스의 독재 정권 수립을 지원했다. 육군 수장이자 왕궁의 인물로서, 파파고스는 메탁사스 독재 정권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으며,[2] 1940년 장교 정년을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직책을 유지할 수 있도록 특별법이 통과되었다. 참모총장으로서 그는 다가오는 제2차 세계 대전을 대비하여 육군의 재편성과 재장비에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2. 3. 제2차 세계 대전 (1940년 ~ 1945년)
1940년 9월 그리스-이탈리아 전쟁이 발발하자, 파파고스는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알바니아 국경에서 對이탈리아 작전을 지휘하였다.[2] 10월 28일 이탈리아의 공격으로, 파파고스의 군대는 11월 8일에 진격을 중단하고 11월 18일과 12월 13일에 이탈리아군을 알바니아로 몰아내었다.[2] 그리스 군대의 승리로 파파고스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2] 1941년 3월 9~16일에 이탈리아의 두 번째 반격 역시 격퇴되었다.[2]그러나 파파고스는 그리스 군대 대부분을 알바니아에 주둔시켜야 했으며, 독일의 간섭이 가까워지는 가운데 동북쪽 국경을 강화하기 위하여 점차 철수하도록 명령하길 꺼렸다. 1941년 4월 6일에 독일의 침공 이후 마케도니아의 그리스군은 독일의 공격에 격렬히 저항하였으나 우회 공격을 받았으며, 파파고스는 이들 군대의 항복을 승인했다. 이피로스의 군대가 항복한 직후 4월 23일에 그리스 정부는 크레타로 도피해야 했다.

파파고스는 점령하에 있던 그리스에 남았다가 1943년 7월에 다른 장군들과 함께 체포되어 독일의 수용소로 끌려갔다.[2] 1945년 4월 말에 파파고스는 SS가 수용자들을 버리고 떠난 다하우 강제 수용소의 140여명의 저명한 수용자들과 함께 티롤로 이송되었다.[5] 그는 1945년 5월 5일 미국 제5군 덕분에 석방되었다.[5]
2. 4. 그리스 내전 (1946년 ~ 1949년)
1945년 그리스로 돌아온 파파고스는 군대에 임관하여 1947년에 정식 장군 계급에 올랐다. 1949년 1월 29일, 그는 그리스 내전에서 공산주의자들을 격퇴하기 위해 다시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2] 그는 그해 2월~10월 사이에 그라모스-비치 전투에서 네이팜탄을 장착한 전투기 등 미국의 광범위한 지원을 받았으며, 그리스 특수부대 산악강습중대(LOK)를 널리 운용하여 공산주의 그리스 민주군에 대한 최종 승리를 이끌었다.[2]그리스 레지스탕스에서 활동했고 그리스를 잘 알고 있던 영국군 장교 크리스토퍼 우드하우스는 그의 전임자 디미트리오스 기아치스 중장이 해임되기 전에 "사실상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생각했지만, 파파고스의 임명은 파파고스가 그의 고위직과 명성을 통해 "그리스 고위 지휘부와 수개월 동안 서로 대립해 온 연합군 군사 임무 모두에 자신의 계획과 희망을 부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유익했다고 여겼다. 그는 또한 파파고스를 "후방 지원 계획과 정확한 계산에 있어 완벽한 최고의 참모 장교이자 전쟁의 정치와 외교의 달인"이라고 평가했지만, "전투에서 고위 지휘 경험이 거의 없었고", 아테네에서 지휘하는 경향이 있으며, 전선을 방문하는 일조차 드물었다고 덧붙였다. 파파고스의 무관심한 지도 스타일은 가장 중요한 부하 사령관 중 한 명인 충동적인 트라시불로스 차칼로토스 중장과의 충돌을 야기했다.
이러한 공적으로 파파고스는 1949년 10월 28일에 원수 직함을 얻었으며, 현재까지 그리스 군대에서 원수 직함을 얻은 사람은 파파고스 뿐이다.[2]
3. 정계 진출
1951년 5월, 파파고스는 정계에 진출하기 위해 군에서 물러났다. 그는 샤를 드 골의 프랑스 국민연대를 본받아 그리스 집결(Ελληνικός Συναγερμός)을 창당하였으며,[1] 9월 선거에서 36.53%의 득표율을 기록하였는데, 이는 그의 인기와 확고하고 강한 지도자라는 이미지, 그리고 내전에서 공산당을 무찌른 공적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 정도의 득표율로는 정부를 구성할 수 없었다. 1952년 11월 선거에서 파파고스의 당은 49%의 득표율로 의회 300석 가운데 239석을 획득하였다.

대중과 미국의 지지를 등에 업은 파파고스는 권위있는 인물이었으나, 이는 그리스 궁정과 마찰을 빚게 되었다. 파파고스 정부는 그리스를 근대화하고 (젊고 정력적인 공공사업부 장관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가 이때 처음으로 두각을 드러냄) 10년간의 전쟁으로 황폐화된 그리스 경제를 복구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내전의 후유증이 여전한데도 국내 사회 총화를 복원하는 데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 반대파의 비판을 받았다.
파파고스 정부는 키프로스 문제를 주요 사안으로 다루었는데, 키프로스의 그리스인 대다수는 그리스와의 '병합'(에노시스)을 주장하고 있었다. 아테네 거리 시위에 대응하여 파파고스는 1954년 8월 그리스의 국제 연합 대사가 국제 연합 총회에 키프로스 문제를 상정하도록 명령하였는데, 이는 그리스가 영국과 대립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1955년 키프로스 민족 전사단(EOKA)의 무장 투쟁이 시작될 때, 파파고스는 건강이 악화되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키프로스 분쟁은 그리스-터키 관계를 악화시켰고, 9월에 일어난 이스탄불 학살로 관계는 더욱 나빠졌다.
1955년 1월, 파파고스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투옥의 결과로 위장 문제를 겪기 시작했다. 그는 병세가 악화되어 1955년 10월 4일에 폐출혈로 사망했다.[10] 국방부가 있는 아테네 교외 지역 파파구는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11]
3. 1. 1951년 총선과 1952년 총리 취임
1951년 5월, 파파고스는 정계에 입문하기 위해 육군을 사퇴하고 샤를 드 골의 프랑스 국민 결집을 모델로 그리스 집결(Ελληνικός Συναγερμός)을 창당했다.[1] 같은 해 9월에 있었던 총선에서 36.53%의 득표율을 기록하여 승리했지만, 과반수 확보에는 실패하여 정부를 구성할 수 없었다.[1]1952년 11월에 있었던 총선에서 파파고스의 당은 49%의 득표율을 기록, 의회 300석 중 239석을 얻는 압승을 거두었다. 그 결과 파파고스는 총리에 취임했다. 대중과 미국의 지지를 받은 파파고스는 권위적인 인물이었으며, 이는 왕궁과 마찰을 빚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파파고스 정부는 그리스를 근대화하고, 10년간의 전쟁으로 황폐해진 그리스 경제를 복구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젊고 유능한 공공사업부 장관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가 이때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내전의 후유증이 여전한 상황에서 사회 통합을 복원하는 데에는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 비판을 받았다.
3. 2. 총리 재임 (1952년 ~ 1955년)
파파고스 정부는 그리스를 근대화하고 10년간의 전쟁으로 황폐화된 그리스 경제를 복구하는 데 성공하였다. 특히, 젊고 정력적인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를 공공사업부 장관으로 등용하여 경제 발전에 힘썼다. 그러나 내전의 후유증이 여전한데도 국내 사회 총화를 복원하는 데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 반대파의 비판을 받았다.
파파고스 정부의 주요 사안 가운데는 키프로스 문제가 있었다. 전부터 키프로스의 그리스인 대다수가 키프로스가 그리스에 '병합'(에노시스)되길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테네의 거리에서 열린 시위에 대응하여 파파고스는 1954년 8월에 그리스의 UN 대사가 UN 총회에 키프로스 문제를 상정하도록 명령하였는데, 이는 그리스가 영국과 대립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1955년에 키프로스 민족 전사단(EOKA)의 무장 투쟁이 시작될 때 파파고스는 건강이 악화되어 행동하길 꺼리는 상황이었다. 키프로스 분쟁은 그리스-터키 관계를 악화시켰으며, 9월에 일어난 이스탄불 학살로 더욱 나빠졌다.
1955년 1월, 파파고스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투옥의 결과로 위장 문제를 겪기 시작했고, 병세가 악화되어 1955년 10월 4일에 폐출혈로 사망했다. 국방부가 위치한 아테네 교외인 파파구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4. 유산 및 평가
참조
[1]
웹사이트
Alexandros Papagos {{!}} Greek statesman
https://www.britanni[...]
2019-01-13
[2]
서적
Hellenic Army History Directorate
[3]
웹사이트
http://www.ggk.gov.g[...]
General Secretariat of the Government
2014-03-21
[4]
웹사이트
http://www.ggk.gov.g[...]
General Secretariat of the Government
2014-03-21
[5]
웹사이트
Die Befreiung der Sonder- und Sippenhäftlinge in Südtirol
http://www.mythosels[...]
2006
[6]
뉴스
KING HONOURS GENERAL PAPAGOS
http://nla.gov.au/nl[...]
British Official Wireless
[7]
뉴스
http://nla.gov.au/nl[...]
Australian Newspapers
[8]
웹사이트
DOCUMENTS RELATING TO NEW ZEALAND'S PARTICIPATION IN THE SECOND WORLD WAR 1939–45: VOLUME I335 — THE SECRETARY OF STATE FOR DOMINION AFFAIRS2 TO THE PRIME MINISTER OF NEW ZEALAND
https://nzetc.victor[...]
[9]
신문
GBE for Gen. Papagos
The Times
1945-08-06
[10]
뉴스
Greece Faces New Crisis as Premier Dies
https://www.newspape[...]
2016-01-05
[11]
웹사이트
Ιστορική αναδρομή Δήμου Παπάγου - Χολαργού - Δήμος Παπάγου Χολαργού
https://www.dpapxol.[...]
[12]
기타
[1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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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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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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