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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호 (한국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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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영호는 항일 무장 투쟁에 참여하여 동북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했으며, 소련으로 들어가 제88특별여단에서 복무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북한으로 귀국하여 조선인민군 창설에 참여했고, 한국 전쟁에 제3사단장으로 참전하여 동두천 방향으로 남침했으나, 유엔군의 반격으로 사단이 괴멸되었다. 이후 민족보위성 부상, 해군 사령관, 중화인민공화국 대사 등을 역임했으며, 1970년경 군부 강경파로 숙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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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호 (한국 전쟁)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리영호
한자 표기李永鎬, 李英鎬
가타카나 표기리・ヨンホ
히라가나 표기り えいこう
로마자 표기Lee Yong-Ho
한글 출생 이름해당 정보 없음
한자 출생 이름해당 정보 없음
히라가나 출생 이름해당 정보 없음
가타카나 출생 이름해당 정보 없음
로마자 출생 이름해당 정보 없음
조선글 표기리영호
군인 정보
이름리영호 (李永鎬)
생애1909년? ~ 몰년 미상
출생지대한제국 경상도
사망지해당 정보 없음
복무동북항일연군
소련군
조선인민군
국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복무 기간해당 정보 없음
최종 계급조선인민군 대장
근무해당 정보 없음
지휘조선인민군 제3사단
조선인민군 제7군단
주요 참전 전투/전쟁한국 전쟁
서훈 내역해당 정보 없음
기타 이력해당 정보 없음

2. 항일 무장 투쟁 및 소련군 복무 시기

리영호는 1936년 2월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2사 교통원으로 항일 무장 투쟁을 시작하였다.[1] 1938년 동북항일연군 제7군 2사 7단 정치위원이 되었고, 1940년 3월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제2지대 제2대대 정치위원이 되었다.[1]

1940년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소련으로 건너간 리영호는 하바로프스크 근처 북야영(北野營, A야영)에서 열린 당 간부 회의에서 당 임시위원회 홍보위원을 맡았다.[1] 1942년 제88특별여단 제3대대 5중대 부중대장 겸 소위로 배속되어 군사 훈련과 소규모 부대 정찰 활동을 했다.[1]

2. 1. 항일 무장 투쟁

1936년 2월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2사 교통원이 되었다.[1] 1938년 항일유격대 동북항일연군 제7군 2사 7단 정치위원이 되었고, 1940년 3월에는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제2지대 제2대대 정치위원이 되었다.[1]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소련으로 들어가, 같은 해 12월 당 간부 회의가 열린 하바로프스크 근처 북야영(北野營, A야영)에 배속되어 당 임시위원회 홍보위원을 하였다.[1] 1942년 제88특별여단 제3대대 5중대 부중대장·소위로 배속되어 군정 훈련과 소부대 정찰 활동을 했다.[1]

2. 2. 소련군 복무

1940년 3월, 리영호는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제2지대 제2대대 정치위원이었다.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소련으로 들어갔고, 같은 해 12월 당 간부 회의가 열린 하바로프스크 근처 북야영(北野營, A야영)에 배속되어 당 임시위원회 홍보 위원을 맡았다.[1] 1942년에는 제88특별여단 제3대대 5중대 부중대장 겸 소위로 배속되어 군정 훈련과 소부대 정찰 활동을 했다.[1]

3. 북한 정권 수립 초기 활동

리영호는 1909년 경상도(경상북도인지 경상남도인지는 불명)에서 태어났다. 1936년 2월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2사 교통원으로 활동했고, 1938년 동북항일연군 제7군 제2사 제7단 정치위원, 1940년 3월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제2지대 제2대대 정치위원을 역임했다.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소련으로 건너가 하바로프스크 근처 북야영(北野營, A야영)에서 당 임시위원회 홍보 위원을 맡았다.[1] 1942년에는 제88특별여단 제3대대 5중대 부중대장 겸 소위로 군정훈련과 소부대 정찰활동을 했다.[1]

3. 1. 조선인민군 창설 참여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귀국하여 조선인민군 창설에 참가했다. 1946년, 보안간부훈련소 제3소장이 되었다.[1] 이후 보안간부훈련소가 사단으로 개편되면서 제2사단 제6연대장이 되었다.[1] 1947년, 이권무가 소련군 고문과 충돌하여 병사로 강등되었을 때 제1사단 제1연대장을 역임했다.[1] 1948년, 제3사단장이 되었다.[1] 제3사단은 당시 인민군 최정예 사단이었으며 국경개전과 대전 전투, 부산 주변 전투에 참가했다. 제3사단장으로서의 공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웅 칭호와 1급 국기훈장을 수여받았다.[1]

3. 2. 한국전쟁 참전

1948년 8월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거쳐 조선인민군 제6연대장을 역임했고, 1950년 제3사단장에 취임했다. 한국 전쟁 개전 당시 동두천 방향으로 남침하였다.[1] 제3사단은 당시 조선인민군 최정예 사단이었으며 국경 개전, 대전 전투, 부산 교두보 전투에 참가했다. 그러나 유엔군의 저항으로 병력을 소모하고 1950년 9월 유엔군의 반격 작전으로 제3사단은 괴멸되었고, 이후 리영호는 제7군단장 등을 역임했다.

4. 한국전쟁 이후의 활동

한국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 제3사단장으로서 동두천 방향으로 남침하여, 대전 전투, 부산 교두보 전투 등에 참전하였다.[1] 그러나 유엔군의 반격으로 사단이 괴멸되었고, 이후 제7군단장 등을 역임했다.[1]

4. 1. 군 고위직 역임

1953년 민족보위성 부상, 1954년 해군 사령관에 취임했다.[1] 1954년 3월 조선인민대표단 부단장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했다.[1] 1956년 4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제3차 당대회)이 되었다.[1] 1957년 5월 주 중화인민공화국 대사, 1959년 12월 조선인민군 중장, 1961년 9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제4차 당대회)을 역임했다.[1]

1962년 4월 중화인민공화국 대사를 사임했다.[1] 5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행정부장, 10월 최고인민회의 제3기 대의원에 당선되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1] 1965년 조선인민군 대장, 1967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1]

4. 2. 정치 활동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었다.[1] 1953년 민족보위성 부상, 1954년 해군 사령관에 취임하였다. 같은 해 3월 조선인민대표단 부단장으로 중국을 방문하였다. 1956년 4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제3차 당대회)이 되었다. 1957년 5월 주 중화인민공화국 대사, 1959년 12월 조선인민군 중장을 역임했다. 1961년 9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제4차 당대회)을 역임했다.

1962년 4월 주 중화인민공화국 대사를 사임했다. 5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행정부장, 10월 최고인민회의 제3기 대의원에 당선되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1965년 조선인민군 대장을 거쳐, 1967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군부 강경파였기 때문에 1970년경에 숙청되었다.

4. 3. 숙청

리영호는 군부 강경파였기 때문에 1970년경에 숙청되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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