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주 (19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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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영주(1920년)는 일제강점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김일성의 동생으로, 모스크바 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로동당에서 활동하며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70년대 남북 적십자 회담과 7.4 남북 공동 성명에 참여했으나, 김정일의 후계자 지명 이후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부총리로 강등되었다. 이후 숙청설이 돌았으나 복권되어 국가 부주석을 지냈고, 2021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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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주 (1920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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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이름 | 김영주 |
원어 이름 | 김영주 |
로마자 표기 | Gim Yeongju |
한자 표기 | 金英柱 |
출생일 | 1920년 |
출생지 | 평안남도 대동군 (일제강점기) |
사망일 | 2021년 12월 14일 (101세) |
사망지 | 평양, 북한 |
국적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정당 | 조선로동당 |
부모 | 김형직(아버지), 강반석(어머니) |
형제자매 | 김일성(형), 김철주(형) |
친척 | 김정일(조카), 리명산(사위) |
자녀 | 2명 (친자녀) 및 2명 (입양 자녀) |
학력 | 모스크바 대학교 |
직위 | |
명예직 |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 부위원장 |
임기 시작 | 1998년 9월 |
임기 종료 | 2021년 12월 |
겸직 대통령 | 김영남 ,최룡해 |
부주석 | 부주석 |
부주석 임기 시작 | 1993년 12월 |
부주석 임기 종료 | 1997년 10월 |
겸직 부주석 | 박성철, 리종옥, 김병식 |
부총리 | 부총리 |
부총리 임기 시작 | 1974년 |
총리 | 김일 |
부총리 임기 종료 | 1975년 |
조직지도부 부장 | 조직지도부 부장 |
조직지도부 부장 임기 시작 | 1959년 |
조직지도부 부장 임기 종료 | 1974년 |
최고 지도자 | 김일성 |
이전 조직지도부 부장 | 박용빈 |
다음 조직지도부 부장 | 김정일 |
기타 정보 | |
군 복무 | 조선인민군 육군 |
군 복무 시작 | 1947년 |
군 복무 종료 | 1982년 |
군 계급 | 조선인민군 육군 상장 |
훈장 | 김정일 훈장(2012) |
경력 | 일본 제국 육군 관동군 통역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 조선로동당 중앙정치국 위원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조선로동당 명예고문위원 김일성 국가장의위원회 위원 조선로동당 명예대표고문위원 |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3, 4, 5, 9, 10, 11, 12기 |
종교 | 무종교 |
2. 생애
김영주는 김형직과 강반석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로,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출생했다.[1][2] 그의 형은 김일성이다.[1] 김영주가 세 살 때 가족은 남부 만주로 이주했다.[3]
1945년 모스크바국립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4] 철학에도 관심을 가졌다.[5] 조선로동당에 입당하여 당 내에서 빠르게 승진, 1954년부터 1960년대까지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에서 간부(1954년), 부부장(1957년), 부장(1960년)을 역임했다.[4] 1961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1966년에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조직비서로 승진했다.[4]
1967년, 김영주는 형 김일성에게 "단일사상체계 확립을 위한 10개 강령"을 제안했다.[6] 1972년에는 북한을 대표하여 남한의 박정희 정부와 비밀 협상을 벌여 7·4 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7]
1970년 조선로동당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을 때, 김영주는 김일성의 후계자로 널리 여겨졌다.[8] 그러나 김일성은 아들 김정일을 후계자로 준비하며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5] 김영주는 마르크스주의 관점을 지지했고, 김일성 주위의 개인숭배를 좋아하지 않았다.[5] 1974년 2월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이후, 김정일은 왕위 계승자 지위를 얻었고 김영주는 부총리로 강등되었다.[5]
이후 김영주는 한동안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감췄다가, 1993년 김일성에 의해 평양으로 소환되어 북한 부주석을 역임했다.[9][10] 1998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 부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9][10] 2012년에는 김정일훈장을 수여받았으며, 김일성훈장과 공화국 영웅 칭호도 받았다.[12] 그는 2021년 12월 15일, 101세의 나이로 평양에서 사망했다.[13][14][15][16]
2. 1. 초기 생애 및 활동 (1920-1945)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김형직과 강반석 부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1][2] 김영주가 세 살 때, 그의 가족은 남부 만주로 이주했다.[3]김영주는 관동군의 통역으로 일했다.[18] 1937년 6월 4일 보천보 전투가 발생하자, 만주국 조선인 치안관계자는 "습격 사건의 주모자 김일성은, 본명은 김성주(金成柱)이며, 관동군의 통역으로 일하고 있는 김영주의 친형이다."라는 증언을 얻었다. 이후 김영주는 일본 제국 육군의 협력을 요청받아, 김일성의 조모 이보익과 함께 김일성에게 일본 제국 육군에 투항하도록 호소했다.[20]
2. 2. 광복 이후 정치 활동 (1945-1975)
1945년 모스크바 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로동당에 입당했다.[4] 당 내에서 빠르게 승진하여 1954년부터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 책임 간부, 1957년 부부장, 1960년 부장을 역임했다.[4] 1966년에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조직비서로 승진했다.[4]1967년, 김영주는 형 김일성에게 "단일사상체계 확립을 위한 10개 강령"을 제안했다.[6]
1970년대에는 남북 관계에서 북측을 대표하는 인물로 활동했다.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 남북조절위원회의 북측 대표였고, 7.4 남북공동성명에는 이후락과 함께 서명하고 이를 동시 발표했다.[7] 이후 정무원 부총리에 선임되었고, 1974년에는 남북조절위평양측공동위원장과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장직을 겸직했다.
1970년 조선로동당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을 때, 김영주는 김일성의 후계자로 널리 여겨졌다.[8] 그러나 김일성은 자신의 아들 김정일을 후계자로 준비하기 시작했고,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5] 김영주는 마르크스주의 관점을 지지했고, 김일성 주위의 개인숭배를 좋아하지 않았다.[5]
1974년 2월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이후, 김정일은 왕위 계승자 지위를 얻었고 김영주는 부총리로 강등되었다.[5] 1975년부터 1993년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에 임명될 때까지 오랫동안 공식 석상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숙청되어 자강도로 옮겨가 은둔 생활을 했다는 설이 있다.
2. 3. 권력 투쟁과 숙청 (1975-1993)
1975년부터 1993년 김영주가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에 임명될 때까지 오랫동안 공식 석상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 사이 숙청되어 자강도로 옮겨가 은둔 생활을 했다는 설이 있다.[1][2]1970년 조선로동당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을 때, 김영주는 김일성의 후계자로 널리 여겨졌다.[8] 그러나 동시에 김일성은 자신의 아들 김정일을 후계자로 준비하기 시작했고,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5] 당시 조선로동당은 사상적으로 김일성의 ''주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는데, 김정일은 이 과정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반면, 소련에서 유학한 김영주는 보다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 관점을 지지했고, 형 주위에 형성된 광범위한 김일성 주위의 개인숭배를 좋아하지 않았다.[5] 이것은 김정일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김영주는 점점 소외되었고, 그의 핵심 동지인 김도만(선전부장)과 박용국(국제연락부장)이 제거되었으며, 마침내 김일성의 공격을 받았다.[5] 1974년 2월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이후, 김정일은 왕위 계승자의 지위를 얻었고 김영주는 부총리로 강등되었다.[5]
김정일은 김일성의 후계자로 결정된 직후인 1974년 2월 19일부터 20일간 계속된 강습회 자리에서 자신의 삼촌인 김영주를 "반당분자"라고 칭하며, "김영주 동지는 병을 핑계로 우리 당의 조직 지도 사업을 태만히 하여 조직을 엉망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김영주 동지가 당에 미친 해독을 제거해야 합니다."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북한 사회를 후세까지 규제하게 되는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을 제정하여 아버지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를 강화하고, "말단에서 중앙에 이르는 모든 조직에 새로운 당 사업 기풍을 확립하기 위해, 사상 투쟁을 무자비하게 전개해야 합니다."라고 선언했다.[23] 김영주는 부총리 직은 1977년 12월까지 수행했지만, 1974년 2월 제5기 당중앙위원회 제8차 총회에서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결정되자, 이듬해 7월 3일 남북공동성명 발표 3주년 성명을 마지막으로 실각하여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감췄다. 실각 후 그는 자강도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19]
1993년 7월 26일, 김영주는 조국해방전쟁(조선전쟁) 승전기념탑 준공식에 참석하여 18년 만에 공식 석상에 복귀했다.[24] 12월 8일, 제6기 당중앙위원회 제21차 총회에서 당 정치국원으로 임명되었고,[24] 이어 12월 11일, 제9기 최고인민회의 제6차 회의에서 국가부주석으로 선출되었다.[25]
2. 4. 복권과 생애 후반 (1993-2021)
1993년 김영주는 다시 복귀하여 그해 말 국가부주석으로 선출되었고, 김일성(1994), 오진우(1995), 이종옥(1999) 등이 사망했을 때 국가장의위원회 장의위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24]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하여 주석직이 공석이 되었고, 1998년 헌법 개정으로 국가주석제가 폐지되자 김영주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이 되었다.[25]김일성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당시부터 김정일의 개입 의혹이 제기되었다.[26] 만약 이와 유사한 사실이라면, 김영주를 포함한 정치국원급 간부들은 김일성의 급사 진상을 알고 있었고, 김정일은 결정적인 약점을 쥐고 있었음을 의미한다.[26] 당시 중국에서는 "북한 내부에서 국가주석을 김정일 이외의 인물에게 맡겨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는 내용의 보도가 반복되었고, 김일성 급사 후에도 중국 공산당은 김정일 위원장과 회담을 갖고 "중국은 김 주석의 유지를 지킨다"는 점과 "북한이 경제개혁·개방 정책을 도입하는 것을 지지한다"는 점을 강조했다.[27]
2003년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에 선출되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을 맡았다. 2009년에는 최고인민회의 제12기 대의원 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으로 유임되었다. 다만, 2010년 9월에는 당 정치국 위원과 중앙위 위원에서 해임되었다. 2012년 2월에 김정일훈장을 수여 받았다.[31][32]
2011년 7월 국영 언론에서 동정이 전해졌고, 같은 해 12월에는 조카인 김정일의 유해를 조문하는 모습이 조선중앙텔레비전에서 방송되었다. 그 후 다시 동정 보도가 끊겼으나, 2014년 3월 10일 평양방송이 전날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3기 대의원 선거에서 투표했다고 보도하여 건재가 확인되었다. 또한 이 선거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그러나 2019년 3월에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4기 대의원 선거에서는 추천자 명단에 이름이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다.[28] 김영주는 1967년부터 52년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직을 유지했고, 2014년 제13기 대의원 선거에서는 제22호 선거구에서 출마했으나, 2019년 제14기 대의원 선거에서는 양형섭의 선거구가 되었다.[28]
2021년 12월 15일에 공식적으로 보도를 했지만 14일 고인의 영전에 화환을 보냈으며 2021년 12월 13일, 10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3] 김일성의 형제 중 가장 장수했고, 마지막까지 생존한 인물이었다.
3. 평가
김영주는 초기에는 김일성의 후계자로 여겨졌으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했다는 평가를 받는다.[5] 1970년 조선로동당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김일성의 후계자로 널리 알려졌지만, 김일성이 자신의 아들 김정일을 후계자로 내세우면서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5]
김영주는 소련에서 유학하며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반면, 김정일은 김일성의 주체 사상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5] 이러한 사상적 차이는 김정일에게 유리하게 작용했으며, 김영주는 점차 권력에서 소외되었다.[5] 결국 1974년 2월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김정일이 후계자로 확정되었고, 김영주는 부총리로 강등되었다.[5]
1993년 김일성의 부름을 받아 다시 북한 부주석으로 복귀했지만, 이는 실질적인 권한이 없는 상징적인 직책이었다.[9][10]
4. 가족 관계
5. 김영주를 다룬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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