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고 바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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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고 바르카는 기원전 6세기 카르타고 지도자이자 카르타고 제국 건설자로, 마고 왕조를 창시했다. 그는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이자 한니발의 부하로,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이탈리아 반도와 이베리아 반도에서 활약했다. 그는 이탈리아 침공을 시도했으나 부상으로 사망했으며, 카르타고의 농업 전문가이기도 했다. 발레아레스 제도의 마온 항구와 마요네즈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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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카 가 - 한니발
한니발은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를 상대로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이탈리아 반도를 15년간 지배했으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패배하고 망명 생활을 하다 자살했다. - 바르카 가 - 하밀카르 바르카
하밀카르 바르카는 고대 카르타고의 군사 지휘관으로, 제1차 포에니 전쟁 말기에 시칠리아에서 로마군과 대치하며 게릴라전을 펼쳤고, 이후 히스파니아에서 세력을 확장하다가 카르타헤나 건설 중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한니발이 로마와의 전쟁을 이어받았다. - 기원전 203년 사망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로마의 장군이자 정치가로서, 한니발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는 '파비우스 전략'으로 "로마의 방패"라 불리며, 그의 전략적 사고는 후대에 영향을 미쳤다. - 기원전 203년 사망 - 여선왕
여선왕은 여씨 가문의 시조로 추정되며, 그의 후손으로는 여택, 여치 등이 있고, 특히 딸 여치는 유방의 황후가 되어 여씨 천하를 만들려 했으나 실패했다.
마고 바르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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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기본 정보 | |
이름 | 마고 바르카 |
로마자 표기 | Mago Barca |
카르타고어 | 𐤌𐤂𐤍 𐤁𐤓𐤒 |
카르타고어 음역 | Magon Barqa |
그리스어 | Μάγων |
생애 | |
활동 시기 | 제2차 포에니 전쟁 |
역할 | 카르타고 군인 |
가문 | 바르카 가문 |
2. 기원전 6세기 카르타고의 지도자
마고는 기원전 6세기 후반 카르타고의 사실상 지도자이자 카르타고 제국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마고 왕조를 창시하여 그의 일족이 3대 이상 카르타고를 통치하는 기반을 마련했다.[1]
마고(Mago)는 카르타고 엘리트 계층에서 흔히 사용되던 남성 이름으로, "신이 보낸"이라는 뜻을 가졌다.[1] 코그노멘(별칭)인 는 "번개" 또는 "빛나는"을 의미하며, 아랍어 이름 바르크(Barq)와 히브리어 이름 바락과 어원이 같다.[1] 이 별칭은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에게 사용되었으며, 세 아들을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1]
3.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 마고 바르카
'''마고 바르카'''(기원전 243년 - 기원전 203년)는 카르타고의 장군으로, 하밀카르 바르카의 막내아들이자 한니발의 동생이다.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칸나에 전투 승리 후, 한니발은 마고를 브루티움 (이탈리아 남부)으로 보내 여러 마을을 정복하고 카르타고 편으로 만들었다. 이후 마고는 카르타고로 가서 한니발에게 증원을 요청했다. 원로원은 4,000명의 누미디아 기병, 40마리의 코끼리, 500talent를 이탈리아로 보내기로 결정했고, 마고는 스페인에서 20,000명의 보병과 4,000명의 기병을 추가로 모집하도록 지시받았다. 그러나 데르토사 전투 패배 소식이 전해지자 마고와 그의 군대는 히스파니아 (이베리아 반도)로 보내졌다.
3. 1.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활약
마고는 트레비아 전투에서 로마군을 매복 공격하여 승리에 기여했다.[2] 칸나에 전투에서는 카르타고 군의 중앙을 지휘하며 전투의 승리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2]
칸나에 전투 이후, 마고는 브루티움 (이탈리아 남부)에서 여러 도시를 정복하고 카르타고의 세력을 확장했다.[2]
3. 2.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활약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명목상 이베리아 반도(로마의 히스파니아)에 주둔한 모든 카르타고 군대를 지휘했지만, 마고는 독립적인 지휘권을 부여받았다.[3] 마고와 하스드루발 바르카 형제는 하스드루발 기스코의 지원을 받아 기원전 215년부터 212년까지 스키피오 형제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의 지휘 아래 로마군과 전투를 벌였다. 마고는 기원전 214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를 기병 매복 공격하여 아크라 레우케 근처에서 로마군 2,000명을 죽였으며, 히스파니아 부족들이 카르타고에 충성하도록 유지하는 데에도 기여했다.[3]
기원전 211년, 스키피오 형제가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하면서 카르타고 군대는 분산되었다.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10,000명의 병력과 함께 가데스(현대 카디스) 근처에, 마고는 다른 10,000명의 병력과 함께 카스툴로 근처에,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15,000명의 병사와 함께 암토르기스 근처에 있었다.[3]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세 카르타고 군대의 협력으로 스키피오 형제를 격파하고 그들을 죽였으며, 히스파니아의 로마군 대부분을 파괴했다. 그러나 전투 후 협력이 부족하여 로마 생존자 약 8,000명이 에브로강 북쪽으로 도주했고, 기원전 210년에는 이탈리아에서 온 20,000명의 병력으로 보강되었다.[3]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기원전 209년에 카르타헤나를 점령했다. 마고와 그의 군대는 당시 카르타헤나에서 3일 행군 거리에 있었다.[3] 카르타고군은 기지를 가데스로 옮겼다.
기원전 208년, 바에쿨라 전투 이후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이탈리아로 떠났다. 마고는 그의 군대를 이끌고 타구스 강과 두에로 강 사이 지역으로 이동하여 스페인 용병을 모집했다.[3] 그들은 라루스가 이끄는 칸타브리인들을 포함한 많은 수의 스페인 전사들을 모았지만, 군대를 두 개의 진영으로 나누고 경계를 늦추었다. 그들의 군대는 기원전 207년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에게 기습을 받아 흩어졌다. 하노는 포로로 잡혔지만, 마고는 수천 명의 생존자를 이끌고 가데스로 가서 하스드루발 기스코와 합류했다.[3] 카르타고군은 군대를 여러 도시에 분산시키고 새로운 용병 모집에 집중했다.
마고는 새로운 군대를 공동 지휘하며 그의 기병대를 이끌고 로마군을 습격했다. 아프리카누스 스키피오는 기병대를 진영 밖에 숨겨두는 선견지명을 발휘하여 이 습격을 격파했다.[3]
기원전 206년 일리파 전투에서 패배한 후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아프리카로 돌아갔고 마고는 그의 군대 잔당과 함께 가데스로 후퇴했다.[3] 그는 카르타헤나를 공격했지만 심각한 손실을 입고 격퇴되었다. 돌아온 그는 가데스 문이 닫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반역죄로 도시 행정관들을 십자가에 매단 후 발레아레스 제도로 항해했다.[3]
3. 3. 이탈리아로의 원정과 최후
기원전 205년 초여름, 마고는 1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해상으로 이탈리아 침략을 감행했다. 30척의 카르타고 오단노선 함선의 호위를 받으며 메노르카 섬에서 리구리아로 항해하여 제노바를 점령했다.[4] 그는 산악 부족과 전쟁을 벌이고 병력을 모으면서 거의 3년 동안 북부 이탈리아를 장악했다.[4] 로마군은 그를 감시하고 북부 이탈리아를 지키기 위해 7개 군단을 투입했지만, 결정적인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기원전 204년, 마고는 카르타고에서 보병 6,000명과 기병을 증원받았다. 로마군은 전투를 거부하고 마고를 봉쇄하여 그가 한니발에게 합류하는 것을 막았다.[4]
마침내 로마군은 알프스 이남 갈리아에서 그와 교전을 벌였다. 인수브리아 전투는 로마의 결정적이지 않은 승리로 끝났지만, 마고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4] 전투 직후, 그는 한니발과 함께 카르타고로 소환되어 방어에 힘쓰게 되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하스드루발 기스코, 봄일카르의 아들 하노의 군대를 격파하고,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었던 시팍스를 아프리카에서 생포했기 때문이다. 마고와 그의 군대는 기원전 202년에 포에니 함대의 호위를 받으며 이탈리아를 떠났고, 아프리카로 향하는 동안 로마 해군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카르타고에 도착하기 전에 지중해에서 부상으로 사망했다.[4]
4. 한니발의 부하
마고는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한니발의 부하로서 주요 전투에 참가했으며, 한니발에게 신뢰받아 종종 군의 한 부분을 맡았다.[2]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에서 우익의 카르타고 병사를 지휘하여, 좌익의 한니발과 함께 로마군을 포위하는 데 기여했다. 기원전 202년 자마 전투에서는 용병으로 구성된 보병 전열의 첫 번째 열을 지휘했다. 자마에서의 패배로 전사했다고도 전해진다.
5. 카르타고의 농업 전문가
마고는 페니키아인과 베르베르인에게 전해지는 북아프리카의 전통적인 농업 지식을 28권의 저서로 정리했다. 원본은 소실되었지만,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번역된 일부가 남아 있다.
6. 유산
마온 항구는 발레아레스 제도에 있으며, 마고 바르카가 건설했다고 전해진다. 이 항구는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마온 항구에서 유래한 달걀 소스는 도시 이름을 따서 마요네즈라고 불리며, 오늘날 전 세계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참조
[1]
서적
Hannibal
[2]
서적
Ab Urbe Condita
[3]
서적
Livy: Ab Urbe Condita, vol. VIII, bk. xxviii
https://archive.org/[...]
Loeb Classical Edn
[4]
서적
Hannib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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