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그리트루이즈 도를레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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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르그리트 루이즈 도를레앙은 1645년 오를레앙 공 가스통과 로렌의 마르그리트 사이에서 태어난 프랑스 공주이다. 1661년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3세와 결혼했으나, 결혼 생활의 불화로 1675년 프랑스로 돌아와 1721년 사망했다. 그녀는 세 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인해 피렌체 궁정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남편과의 불화를 겪었다. 프랑스로 돌아온 후에도 사치스러운 생활과 여러 염문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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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즈 마들렌 도를레앙은 프랑스 공주이자 사보이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의 첫 번째 배우자로, 가스통 도를레앙 공작과 로렌의 마르그리트 사이에서 태어나 '발루아 양'으로 불렸으며 사촌인 사보이 공작과의 결혼으로 사보이 공작부인이 되었으나 후사 없이 갑작스레 사망하여 토리노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마르그리트루이즈 도를레앙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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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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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토스카나 대공비 |
전체 이름 | 마르게리트 루이즈 도를레앙 |
출생 장소 | 블루아 성, 블루아, 프랑스 |
사망 장소 | 15 플라스 데 보주, 파리, 프랑스 |
매장지 | 피크퓌스 묘지, 파리 |
가문 | 부르봉 |
결혼 및 계승 | |
자녀 | 페르디난도, 토스카나 대공세자 안나 마리아 루이자, 팔츠 선제후비 잔 가스토네, 토스카나 대공 |
계승 | 토스카나 대공비 |
가족 관계 | |
아버지 | 가스통 도를레앙 공작 |
어머니 | 마르그리트 드 로렌 |
2. 생애
1645년 오를레앙 공 가스통과 그의 두 번째 부인 로렌의 마르그리트 사이의 딸로 태어났다.[1] 프랑스식 이름은 마르그리트 루이즈 도를레앙(Marguerite Louise d'Orléans프랑스어)이다. 어린 시절 로렌 공작 샤를을 연인으로 두기도 했으나,[5][56] 1652년 쥘 마자랭 추기경의 주선으로 토스카나 대공국의 코시모 3세 데 메디치와 혼담이 오갔고, 1661년 결혼하여 토스카나 대공비가 되었다.[56]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명랑하고 활기 넘치는 성격이었지만 고집이 세고 이기적인 면모도 있었으며,[56] 자유분방한 프랑스 궁정 생활에 익숙했던 그녀에게 피렌체의 엄격한 궁정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특히 금욕적인 남편 코시모 3세와의 관계는 매우 좋지 않았다.[56] 시아버지 페르디난도 2세 데 메디치의 압력 속에서 후계자를 낳아야 하는 의무를 강요받기도 했으며,[56] 남편과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페르디난도, 안나 마리아 루이자 데 메디치, 잔 가스토네 데 메디치 세 명의 자녀를 낳았다.
결국 순탄치 않은 결혼 생활 끝에 1675년 세 자녀를 토스카나에 남겨두고 홀로 프랑스로 돌아왔다. 이후 파리의 수도원에서 생활하다 1721년 사망했다.[48]
2. 1. 프랑스에서의 유년 시절 (1645년~1661년)
1645년 7월 28일[1] 블루아 성에서 오를레앙 공작 가스통 드 프랑스와 그의 두 번째 부인 로렌의 마르그리트 사이의 장녀로 태어났다. 프랑스식 이름은 마르그리트 루이즈 도를레앙( Marguerite Louise d'Orléans프랑스어 )이다. 그녀에게는 후에 기즈 공작 부인이자 사보이 공작 부인이 된 엘리자베트 마르그리트 등 네 명의 동생이 있었다.마르그리트 루이즈는 아버지가 프롱드 실패 후 물러나 지내던 블루아의 궁정에서 기본적인 교육을 받았다.[1] 이복 언니인 몽팡시에 공작 부인(''라 그랑드 마드모아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그녀의 살롱에 매일 참석하며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2] 성격은 명랑하고 활기가 넘쳤으나, 고집이 세고 이기적인 면모도 있었다고 전해진다.[56] 자유분방한 궁정 생활에 익숙했다.[56]
1652년 쥘 마자랭 추기경의 주선으로 토스카나 대공국과의 혼담이 처음 제기되었다.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사보이아 공작 샤를 에마뉘엘 2세와의 혼담이 마담 드 쇼아지의 방해로 무산되었다고 여겼으며[3] (훗날 샤를 에마뉘엘 2세는 그녀의 여동생 프랑수아즈 마들렌 도를레앙과 결혼했다), 이후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데 메디치로부터 혼담이 다시 들어오자 이복 언니에게 이를 성사시켜 달라고 부탁했다.[4]

처음에는 결혼 소식에 기뻐했지만, 이내 마음이 바뀌었다.[4] 그녀는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용인되기 어려웠던 행동으로 궁정을 놀라게 했는데, 사촌인 로렌의 샤를과 단둘이 외출하는 등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였고, 샤를은 곧 그녀의 연인이 되었다.[5][56] 1661년 4월 19일 대리 결혼식이 거행되었으나 그녀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고, 이는 루이 14세의 각료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결혼 축하 인사를 위해 방문한 외교관들을 만나는 대신 사냥을 가려다 몽팡시에 공작 부인에게 제지당하기도 했다.[6] 같은 해, 코시모 3세 데 메디치와 정식으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고 토스카나로 떠났다.[56]
2. 2. 토스카나 대공비 시절 (1661년~1675년)
1652년 쥘 마자랭 추기경의 주선으로 토스카나 대공국과 혼담이 진행되어 1661년 코시모 3세 데 메디치와 결혼했다. 당시 페르디난도 2세 대공의 동생이자 신랑의 삼촌인 마티아스 데 메디치가 9척의 갤리선 함대(토스카나 3척, 제노바 공화국 대여 3척, 교황령 대여 3척)를 이끌고 마르그리트 루이즈를 토스카나로 데려왔다. 의전 규례를 어기고 그녀의 옛 연인으로 알려진 로렌 공작 샤를이 마르세유에서 그녀를 배웅하기도 했다.[56] 일행은 1661년 6월 12일 토스카나에 도착하여 리보르노에서 하선했으며, 성대한 의식을 거쳐 6월 20일 피렌체에 공식 입성했다.[7] 결혼 축하 행사는 피렌체 역사상 가장 호화로운 구경거리였으며, 300대 이상의 마차가 행렬을 이루었다.[8] 시아버지 페르디난도 2세는 결혼 선물로 "작은 비둘기 알 크기"의 진주를 그녀에게 선물했다.[8]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명랑하고 활기가 넘쳤으나 고집이 세고 이기적인 면모도 지녔다.[56] 자유분방한 프랑스 궁정 생활에 익숙했던 그녀에게 피렌체 궁정은 답답하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금욕적인 성품으로 육체적 관계를 꺼렸던 남편 코시모 3세와의 사이는 매우 좋지 않았다.[56] 하노버 선제후 소피아에 따르면, 부부는 일주일에 한 번만 잠자리를 함께 했다고 전해진다.[9] 결혼한 지 이틀 만에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코시모에게 토스카나 왕관 보석을 요구했으나, 코시모는 자신에게 줄 권한이 없다고 답했다.[10] 그녀는 어렵게 손에 넣은 보석을 토스카나 밖으로 밀반출하려다 시아버지 페르디난도 2세에게 발각되어 저지당하기도 했다.[10] 이 사건 이후 남편에 대한 그녀의 무관심은 증오로 변했으며, 마르세유에서 헤어져야 했던 로렌 공작 샤를에 대한 지속적인 애정이 이를 더욱 심화시켰다.[11] 한번은 코시모에게 자신의 방에서 나가지 않으면 병을 깨서 그의 머리를 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8]
시아버지 페르디난도 2세는 며느리가 데리고 온 프랑스인 수행원들을 추방하고 압력을 가하며 공국의 후계자를 생산하는 의무를 다하도록 강요했다.[56]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남편과의 동침을 거부했으며, 임신 사실을 알게 되자 유산을 시도하기도 했다.[57] 그녀가 코시모 3세와의 잠자리를 거부하자 루이 14세는 그녀에게 올바른 처신을 종용해야 했으며, 코시모 3세는 부부 관계 개선을 위해 잠시 떨어져 있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여 여러 차례 외국을 여행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코시모 3세와의 사이에서 세 명의 자녀를 낳았다.
- 페르디난도 (1663년생)
- 안나 마리아 루이사 데 메디치 (1667년생)
- 잔 가스토네 (1671년생)
마르그리트 루이즈의 파격적인 행동은 시댁 식구들과의 관계 악화로 이어졌다. 그녀는 시어머니인 비토리아 델라 로베레와 궁정 내 서열 문제로 다투었고, 시아버지 페르디난도 2세와는 과도한 지출 문제로 갈등을 빚었다.[12] 그녀의 씀씀이는 시아버지와의 갈등을 유발했을 뿐 아니라, 밤낮으로 두 명의 남자 시종이 그녀의 방을 드나드는 등 자유분방한 행동으로 인해 피렌체 주민들에게도 인기를 잃었다.[12]
로렌 공작 샤를 4세가 피티 궁전을 방문하여 메디치 가문의 환대를 받은 후, 마르그리트 루이즈가 샤를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 때문에 페르디난도 2세와 코시모 3세는 그녀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다.[13]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루이 14세에게 개입을 요청했으나 실패했다.[13] 이후 그녀의 프랑스인 수행원들이 해고되자, 마르그리트 루이즈와 페르디난도 대공은 각자 루이 14세에게 탄원서를 보냈다.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부당한 대우를 호소했고, 대공은 그녀의 행동을 제지해 달라고 요청했다.[14]
양측을 달래기 위해 루이 14세는 "생 메므 백작(Comte de Saint-Mesme)"을 파견했다.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백작에게 프랑스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백작은 이에 동조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는 프랑스 궁정의 많은 이들도 마찬가지 생각이었기에, 결국 그는 뚜렷한 해결책 없이 돌아가 페르디난도 2세와 루이 14세 모두를 실망시켰다.[15][16][17] 이후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가능한 모든 기회를 이용해 코시모를 모욕하며 상황을 악화시켰다. 예를 들어, 메디치 가문이 자신을 독살하려 한다고 주장하며 프랑스인 요리사만 고용하겠다고 고집했고, 교황 대사 앞에서 코시모를 "불쌍한 마부"라고 부르기도 했다.[16]
몇 차례 더 프랑스의 중재 시도가 실패한 후, 1664년 9월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피티 궁전의 자신의 거처를 떠나 돌아오기를 거부했다. 이에 코시모는 그녀를 빌라 디 라페기로 이주시켰다.[16] 그곳에서 그녀는 40명의 병사에게 감시당했으며, 코시모가 임명한 6명의 시종이 프랑스로 도망칠 것을 우려하여 그녀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18] 이듬해 그녀는 태도를 바꿔 메디치 가문과 화해했지만, 1667년 둘째 딸 안나 마리아 루이사 데 메디치가 태어난 후 화해는 다시 깨졌다.[19]
결국 순조롭지 않은 결혼 생활 끝에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1675년 6월 12일, 세 자녀를 토스카나에 남겨둔 채 홀로 프랑스로 돌아갔다.
2. 3. 프랑스 귀국과 사망 (1675년~1721년)
1674년 12월 26일, 남편 코시모 3세는 마르그리트 루이즈의 계속된 요구에 굴복하여 프랑스 귀국을 허락하는 계약에 서명했다. 이 계약에 따라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연금 80,000 리브르를 받는 대신, 파리 몽마르트르에 있는 생 피에르 수도원에 거주해야 했고 프랑스 공주로서의 권리를 포기해야 했다.[31] 1675년 7월 12일,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빌라 포조 아 카이아노의 가구와 비품을 챙겨 리보르노를 떠나 프랑스로 향했다. 그녀는 "자신의 정당한 임금 없이 출발할" 의도가 없다고 말했다.[32] 그녀의 갑작스러운 출국 소식에 피렌체 사람들은 "큰 불쾌감"을 느꼈으며, 귀족들은 코시모 3세가 그녀를 사실상 쫓아낸 것이라고 비난하며 동정했다.[33]몽마르트르 수도원에 도착한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처음에는 자선 사업을 후원하고 "경건한 태도"를 보였으나, 곧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짙은 루주를 바르고 밝은 노란색 가발을 착용했으며, 로비니 백작과 불륜 관계를 맺고 이후 룩셈부르크 연대 소속 군인 두 명과도 관계를 가졌다.[34][35] 루이 14세는 계약 조항에 따라 그녀가 수도원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했지만, 궁정 출입은 허락했고 그녀는 그곳에서 고액의 도박을 즐겼다.[36] 초라한 수행원과 짧은 방문 때문에 베르사유 궁정에서 "보헤미안"이라는 평판을 얻었고, "신분이 미천한 사람들"과 어울린다는 비판도 받았다.[35] 토스카나 특사 곤디는 프랑스 궁정에 그녀의 행동에 대해 여러 차례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37] 몽마르트르의 수도원장 프랑수아즈 르네 드 로렌은 루이 14세가 마르그리트 루이즈의 마부와의 불륜에 대해 묻자 "침묵의 음모만이 그녀의 타락과 과잉에 대한 유일한 해독제"라고 답하기도 했다.[37]
한편, 코시모 3세는 프랑스 주재 토스카나 특사를 통해 마르그리트 루이즈의 모든 행동을 보고받았고, 불쾌한 행동이 있을 때마다 루이 14세에게 항의 편지를 보냈다.[38] 처음에는 코시모 3세에게 동정적이었던 루이 14세도 그의 끊임없는 항의에 지쳐 "코시모가 자신의 아내를 프랑스로 은퇴시키는 데 동의했으므로, 그녀의 행동에 간섭할 권리를 사실상 포기한 것"이라고 응수하며 더 이상 개입하지 않았다.[39] 이후 코시모 3세도 아내의 행동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40]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자신을 지지하며 서신을 주고받던 아들 페르디난도 대공에게서 남편의 병환 소식을 듣고, 남편이 죽으면 즉시 피렌체로 돌아가 "모든 위선자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것"이라고 공언했으나, 코시모 3세는 그녀보다 2년을 더 살았다.[40][41]
1688년, 빚에 시달리던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코시모 3세에게 20,000 크라운을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코시모 3세가 거절하자 아들 페르디난도 대공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들은 아버지를 거스를까 두려워 도울 수 없다고 했다.[42] 결국 코시모 3세가 그녀의 빚을 갚아주었으며, 1696년에는 친척으로부터 거액의 유산을 상속받아 재정적으로 안정되었다.[43][44]
몽마르트르의 새로운 수도원장 마담 다르쿠르는 마르그리트 루이즈의 행동에 대해 코시모 3세와 루이 14세에게 자주 불평했다.[44] 이에 격분한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도끼와 권총으로 수도원장을 살해하겠다고 협박하고 수도원 내에서 자신을 따르는 파벌을 만들었다.[45] 이러한 갈등 속에서 코시모 3세는 루이 14세의 허가를 받아 마르그리트 루이즈가 생망데에 있는 다른 수도원으로 옮기는 것을 허락했다. 단, 코시모 3세가 선택한 시종의 감시를 받는다는 조건이었다.[46] 마르그리트 루이즈가 처음에 이를 거부하자 연금 지급이 중단되었으나, 루이 14세가 개입하여 그녀가 조건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한 후에야 연금이 재개되었다.[46]
생망데 수도원으로 옮긴 후, 노년의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이전보다 절제된 삶을 살았다. 그녀는 자신이 "영적 매춘굴"이라고 불렀던 수녀원의 개혁에 힘썼고, 규율을 어지럽히는 수녀들을 내쫓는 등 질서를 바로잡으려 노력했다. 이로 인해 피렌체와의 갈등도 줄어들었다.[46] 그러나 1712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왼쪽 팔이 마비되는 등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47] 잠시 회복했으나 이듬해 다시 뇌졸중을 겪었고, 특히 사이가 좋았던 아들 페르디난도 대공이 사망하자 큰 충격을 받아 다시 쓰러져 일시적으로 시력과 언어 능력에 장애를 겪었다.[47] 말년에는 프랑스 섭정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의 허락을 받아 파리 보주 광장 15번지에 집을 구입하여 그곳에서 지냈다.[47] 그녀는 섭정의 어머니인 팔라티네이트의 엘리자베스 샬롯과 서신을 교환하고 자선 활동에 참여하며 마지막 생을 보냈다.[47]
마르그리트 루이즈 도를레앙은 1721년 9월 17일 파리에서 사망했으며, 피크푸스 묘지에 묻혔다.[48][49]
3. 유산
코시모 3세와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름 | 직위 | 생몰년 | 배우자 | 자녀 유무 |
---|---|---|---|---|
페르디난도 데 메디치 | 토스카나 대공자 | 1663–1713 | 비올란테 베아트리체 바이에른 공작부인 | 없음 |
안나 마리아 루이사 데 메디치 | 팔라티네 선제후비 | 1667–1743 | 요한 빌헬름, 팔츠 선제후 | 없음 |
잔 가스토네 데 메디치 | 토스카나 대공 | 1671–1737 | 작센-라우엔부르크의 안나 마리아 프란치스카 | 없음 |
4. 가계도
- 1. '''마르그리트 루이즈 도를레앙'''
- 2. 가스통 도를레앙
- 3. 로렌의 마르그리트
- 4. 앙리 4세
- 5. 마리 드 메디치
- 6. 프랑수아 2세 드 로렌 공작
- 7. 잘름의 크리스틴
- 8. 나바라의 앙투안
- 9. 나바라의 잔 3세
- 10.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50]
- 11. 오스트리아의 요안나[50]
- 12. 샤를 3세 드 로렌 공작[51]
- 13. 발루아의 클로드[51]
- 14. 잘름-브란덴부르크 백작 파울[52]
- 15. 마리 르 버너 드 틸리에르[52]
- 16. 방돔 공작 샤를
- 17. 알랑송의 프랑수아즈
- 18. 나바라의 앙리 2세
- 19. 앙굴렘의 마르그리트
- 20. 코시모 1세 데 메디치[53]
- 21. 톨레도의 엘레오노르[53]
- 22.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54]
- 23.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안나[54]
- 24. 프랑수아 1세 드 로렌 공작[51]
- 25. 덴마크의 크리스티나[51]
- 26. 앙리 2세 (프랑스)
- 27. 카트린 드 메디치
- 28. 잘름-바덴바일러 백작 요한 7세[55]
- 29. 루이즈 드 스타인빌[55]
- 30. 타네기 르 버너, 틸리에르 백작[52]
- 31. 마들렌 엘리에 드 퐁파두르[5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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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Habsburg, Johanna von Oesterreich (Tochter des Kaisers Ferdinand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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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Histoire ecclesiastique et civile du Duche de Luxembourg et Comte de Chi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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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heval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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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권력과 광기
말글빛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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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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