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다이라 사다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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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다이라 사다나오는 이요 마쓰야마 번의 3대 번주이다. 1674년 마쓰야마 번주가 되었으며, 에치고 소동으로 유배된 마쓰다이라 미쓰나가를 마쓰야마 번에서 억류했다. 번정 개혁을 통해 재정난을 타개하고, 겐로쿠 아코 사건 당시 아코 낭사 10명을 맡아 처우 문제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이카이에 능숙했고, 문화 진흥에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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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모 다다토모는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 다이묘로, 데와 가미노야마 번주를 거쳐 이요 마쓰야마 번의 초대 번주가 되었으나, 후사 없이 사망하여 가모 가문은 단절되었다. - 마쓰야마번주 (이요국) - 마쓰다이라 사다나가 (1640년)
마쓰다이라 사다나가는 에도 시대 마쓰야마 번의 번주로, 형의 폐적 후 번주가 되어 민생 안정, 사찰 재건, 어시장 개설 등의 통치 활동을 펼쳤으나 짧은 재임 기간과 에도 거주로 기반이 약했다. - 1660년 출생 - 조지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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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진후는 조선 후기 문신으로, 인현왕후의 오빠이자 문과 급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충청도관찰사로 민생 안정에 힘썼으며, 소론의 탄핵으로 귀양을 갔다가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경종 묘정에 배향되고 충문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1720년 사망 - 숙종 (조선)
숙종은 1674년부터 1720년까지 재위하며 환국 정치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대동법 확대와 상평통보 발행으로 민생 안정에 기여했으며, 당쟁 격화와 외교적 성과를 보인 조선의 제19대 국왕이다.
마쓰다이라 사다나오 | |
---|---|
기본 정보 | |
씨족 | 구마쓰 마쓰다이라 가문 사다카쓰 계통 |
이름 | 마쓰다이라 사다나오 |
다른 이름 | 나베노스케 (어린 시절 이름), 사다나오 |
계명 | 대룡원전전사위습유겸은주자사관예희광문증대거사 |
관위 | 종오위하, 아와지노카미, 오키노카미, 종사위하, 시종 |
생몰 | 만지 3년 1월 19일 (1660년2월 29일) ~ 교호 5년 10월 25일 (1720년11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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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도쿠가와 이에쓰나 → 쓰나요시 → 이에노부 → 이에쓰구 → 요시무네 |
봉록 | 이요마쓰야마 번 번주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마쓰다이라 사다토키 |
어머니 | 영정원전 (히라오카 시게사다의 딸) |
양아버지 | 마쓰다이라 사다나가 |
양어머니 | 교고쿠 다카카쓰의 딸, 춘광원전 |
형제 | 사다나오, 사다노부, 사다마사 |
배우자 | 정실: 이나바 마사미치의 딸, 정심원 |
측실 | 광수원전, 무라카미 씨 |
자녀 | 사다나카, 나베노스케, 사다히데, 사다아키라 |
양녀 | 혜광원 |
2. 생애
이요 이마바리번 2대 번주 마쓰다이라 사다토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나베노스케였다. 1674년(엔포 2년), 이요 마쓰야마번주 마쓰다이라 사다나가의 양자가 되었고, 같은 해 사다나가가 사망하면서 마쓰야마 번주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 해에 종5위하 아와지노카미에 임명되었고, 3년 후에는 오키노카미로 전임, 종4위하로 승진했다.
1720년(교호 5년), 에도 마쓰야마 번저 미타 나카야시키에서 61세(만 6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법호는 다이류인덴젠시이 슈이 켄온슈 시시 간요 키코 몬쇼 다이거사이다. 유해는 미타 사이카이지에서 다비(화장)되었고, 유골은 마쓰야마 다이린지에 매장되었다. 셋째 아들 사다히데가 뒤를 이었다.
2. 1. 출생과 가독 상속
이요 이마바리번 2대 번주 마쓰다이라 사다토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생모는 측실 레이초인덴(히라오카 시게사다의 딸)이다. 어릴 적 이름은 나베노스케였다. 엔포 2년 (1674년), 종형에 해당하는 이요 마쓰야마번주 마쓰다이라 사다나가의 양자가 되었고, 같은 해 사다나가가 사망했기 때문에 마쓰야마 번주로 취임했다. 양모는 교고쿠 씨의 녀춘광원덴이다. 이 해에 종5위하 아와지노카미에 임명되었고, 3년 후에는 오키노카미로 전임, 종4위하로 승진했다.
2. 2. 에치고 중장 유배
덴와 원년(1681년) 6월 26일, 에치고 소동으로 가이에키된 전 에치고 다카다 번 영주 마쓰다이라 미쓰나가가 유배 처분을 받게 되어 마쓰야마 번이 그를 맡게 되었다.[2] 8월 1일 마쓰야마에 도착한 미쓰나가를 마쓰야마성 삼의 방에 유폐시켰다.[2] 이듬해 4월, 북의 방 유폐 저택으로 이주시켰다.[2] 미쓰나가의 억류는 조쿄 원년(1683년) 말, 그가 에도로 이송될 때까지 계속되었다.[2] 같은 해 11월 1일, 미쓰나가 사면을 명하는 막부의 봉서는 사다나오를 통해 미쓰나가가 수령했으며, 같은 달 25일에 미쓰나가는 마쓰야마를 떠나 에도로 향했다.[2] 미쓰나가는 합력미 3만 표를 하사받아 하타모토가 되었고, 노부토미 대에 쓰야마 번 10만 석의 준 국주 다이묘로 복귀했다.[2]2. 3. 번정 개혁
1687년(정향 4년), 번청(藩庁)을 마쓰야마성 니노마루(二ノ丸)에서 산노마루(三ノ丸)로 옮기고, 니노마루는 번청 별동(은거소)으로 삼았다. 1704년(호에이 원년), 쇼군가 세자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관위 승진을 위해 교토 어사로 임명되어 시종으로 승진하였다. 교토에서는 히가시야마 천황을 알현했다. 이듬해, 영내에서는 재정난으로 처음으로 번찰을 발행했다. 한편으로 지평 제도를 도입하여 농민 부담의 균질화를 꾀하고, 과세법을 케미법에서 조면법으로 개정함으로써 안정적인 연공 수입에 성공했다.2. 4. 겐로쿠 아코 사건
겐로쿠 15년(1703년) 1월 31일 아코 사건 당시, 마쓰다이라 사다나오는 아코 낭사 47명 중 오오이시 요시카네 등 10명을 맡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후 낭사들을 가혹하게 대우하여 비판받았으나, 최근에는 아코시와 교류도 이루어지고 있다.[7]2. 4. 1. 아코 낭사 처우 논란
겐로쿠 15년 12월 15일(1703년1월 31일)에 발생한 아코 사건과 관련하여, 사다나오는 아코 낭사 47명 중 오오이시 요시카네 등 10명을 맡도록 명령받았다.[1] 병상에 있던 사다나오는 에도성으로 출근할 수 없어 가신을 통해 이 명령을 받았다.겐로쿠 16년 1월 5일(1703년 2월 20일) 낭사들과 회견을 가졌다. 회견이 늦어진 것에 대한 사죄와 복수에 대한 칭찬을 보내며, "더욱 환영하고 싶지만, 막부의 위탁자이므로 그럴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일에 불편함이 없도록 하겠다. 용무가 있으면 거리낌 없이 가신에게 말해달라"고 말했다.[1] 그러나 야마모토 히로후미는 사다나오의 말은 "겉치레뿐인 위선(자신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겉모습)"에 지나지 않고, 본심과는 다르다고 분석했다.[1]
마쓰야마 번에서는 의사를 죄인으로 취급하고 엄격하게 대응했다는 기록이 마쓰다이라 가문에 많이 남아 있다.[1] 호송은 엄중했고, 번사들은 쇠사슬을 착용하고 구족도 휴대했다.[1] "철포까지 준비하여 경비"하고 감시조, 불침번을 두었다.[1] "불조심"을 이유로 담배, 술, 목욕, 난방 기구(숯불 등)도 금지했다.[1] 처분도 결정되지 않은 시점부터 전원의 할복에 있어서의 개착인까지 결정해 버렸다.[1] 당일에는 "이른 아침부터 할복자에게 찬물을 쓰게 하고, 모두 기침하는 모습으로 할복을 근심하여 엎드려 절한다"고 기록되어 있다.[1] 할복 시에는 "할복자의 뒤에 총을 든 사람 1명"과 철포 족경을 대기시켜, 작은 와키자시를 든 의사가 날뛸 때에 대비했다.[1]
특히 오오이시 요시카네에게는 개착인 하가 세이다유가 "할복자가 작은 와키자시를 들어 배에 대기[2] 전에 목을 친다", "왼손으로 땋은 머리(다보사)를 잡고 떨어진 목을 들어올려[3], 목격자에게 보인다" 등 무례한 취급을 했다는 기술이 있다.[4] 하가가 공을 세운 듯 오오이시의 떨어진 목을 휘둘렀기 때문에 피가 튀었다고 여겨지는 "주세이 매"가 센가쿠지에 현존한다.[5] 미야자와 세이이치는 하가가 평소 무술 훈련만 하는 고무사 타입이며, 위탁과 할복에 천재일우의 활약 기회라고 잔뜩 힘을 줘 기합이 들어갔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5]
할복 후 마쓰다이라 가신 미우라 시치로베는 의사의 유체와 소지품을 번에서 마음대로 처분하려 했지만, 로주 아키모토 타카토모로부터 "센가쿠지로 보내도록" 지시받았다.[1] 오토구미 가시라가 족경을 이끌고 센가쿠지에 장례를 치렀다.[1] 또한 사다나오는 개착한 자에게 의류, 칼 등을 검토할 것을 지시하고 금전을 주었다.[1]
이러한 일들은 "호소카와의 물(미즈노 타다유키) 흐름은 맑지만, 다만 대해(모리 카이노카미)의 바다(마쓰다이라 오키노카미)만이 탁하다" (당시의 광가)[6]라고 비판받았다.[1]
2. 5. 문화 진흥
문화적인 면에서 하이카이에 능숙하여 그 흥륭에 공헌했다. 오야마 이키를 초빙하여 마쓰야마 미사케 신사의 신주로 삼았다. 이키는 마쓰야마에서 호에이 7년(1710년) 『일본서기』의 주석서 『일본서기 미사케 강기』 전 55권을 완성했다. 다이호지와 사이린지의 수복도 실시했다.3. 유품
4. 계보
처 | 이름 및 비고 |
---|---|
정실 | 정심원 - 이노우에 마사미치의 딸 |
측실 | 호시노 씨 (화광원) |
측실 | 와타나베 씨 (광수원) |
측실 | 오하라 씨 |
측실 | 무라카미 씨 |
자녀 | 이름 및 비고 |
장남 | 사다나카 (1687년 - 1691년, 요절) |
차남 | 냄비노스케 (1696년 - 1698년, 요절) |
삼남 | 사다히데 (1696년 - 1733년) |
장녀 | 무쓰 (1699년 - 1700년, 요절) |
오남 | 젠자부로 (1703년 - 1709년, 요절) |
사남 | 사다아키 (1700년 - 1747년) |
양자 | 이름 및 비고 |
양녀 | 혜광원 ( ? - 1720년) - 교고쿠 타카카네의 딸, 묘소는 에히메현 마쓰야마시의 호케지의 교고쿠가 묘소 |
참조
[1]
서적
これが本当の「忠臣蔵」 赤穂浪士討ち入り事件の真相
2012
[2]
문서
[3]
문서
[4]
문서
波賀清太夫覚書
久松松平家文書
[5]
서적
赤穂浪士 紡ぎ出される忠臣蔵
1999
[6]
기타
アル書ニ載ス。此時御預リ四家ノ優劣ヲ詠ゼシ歌
[7]
뉴스
松山市の紙芝居「赤穂浪士松山藩外伝」、上仮屋の「赤穂かきまつり」でも披露
赤穂民報
[8]
문서
松平定直の子・松平定英は父の遺物として襲封の際に将軍家に献上した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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