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조지프 새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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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이클 조지프 새비지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으로 뉴질랜드로 이주하여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뉴질랜드 노동당 창당에 기여하고, 1935년 총선에서 노동당을 승리로 이끌어 총리직에 올랐다. 새비지 정부는 사회 보장 제도를 도입하고, 방송을 국영화하는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을 결정하고, 1940년 사망할 때까지 뉴질랜드의 정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뉴질랜드 복지 국가의 설계자로 평가받으며, "모든 사람의 삼촌"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존경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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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질랜드의 제1차 세계 대전 반전 운동가 - 피터 프레이저 (1884년)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뉴질랜드 노동당 정치인이자 제24대 총리(1940-1949)인 피터 프레이저는 사회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노동 운동에 참여, 뉴질랜드 노동당 창당, 사회 개혁, 복지 시스템 구축,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뉴질랜드 이끌었으며 국제연합 설립에 기여했다.
마이클 조지프 새비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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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마이클 조지프 새비지 |
원어 이름 | Michael Joseph Savage |
존칭 접두사 | 각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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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72년 3월 23일 |
출생지 | 오스트레일리아 빅토리아주 타통 |
사망일 | 1940년 3월 27일 |
사망지 | 뉴질랜드 웰링턴 |
안장 장소 | 오클랜드 와이테마타 항 바스티온 포인트 |
정당 | 뉴질랜드 노동당(1916–40) 사회민주당 (뉴질랜드) (1913–16) 뉴질랜드 사회주의당 (1907–13) |
직업 | 노동조합원 정치인 |
정치 경력 | |
대수 | 23대 |
재임 시작 | 1935년 12월 6일 |
재임 종료 | 1940년 3월 27일 |
군주 | 조지 5세 에드워드 8세 조지 6세 |
총독 | 조지 몽크턴아룬델 |
전임 총리 | 조지 포브스 |
후임 총리 | 피터 프레이저 |
노동당 대표 대수 | 3대 |
재임 시작 | 1933년 10월 12일 |
재임 종료 | 1940년 3월 27일 |
부대표 | 피터 프레이저 |
전임 노동당 대표 | 해리 홀랜드 |
후임 노동당 대표 | 피터 프레이저 |
야당 대표 대수 | 12대 |
야당 대표 재임 시작 | 1933년 10월 12일 |
야당 대표 재임 종료 | 1935년 12월 6일 |
전임 야당 대표 | 해리 홀랜드 |
후임 야당 대표 | 조지 포브스 |
지역구 의원 | 오클랜드 서부 |
의회 | 뉴질랜드 |
의원 임기 시작 | 1919년 12월 17일 |
의원 임기 종료 | 1940년 3월 27일 |
전임 의원 | 찰스 풀 |
후임 의원 | 피터 카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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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
2. 초기 생애
마이클 조지프 새비지는 어린 시절 아일랜드 기근을 피해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한 아일랜드 이민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학업과 노동을 병행하며 성장했고, 노동 운동과 급진적 정치 이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뉴질랜드로 이주하여 노동 조합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2. 1. 오스트레일리아 시절
마이클 새비지는 오스트레일리아 빅토리아주 타통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일랜드 이민자 부모의 여덟 자녀 중 막내였다. 그의 아버지 리처드 새비지는 던드럼 출신이었고, 어머니 조안나 새비지(Johanna Savage, née Hayes)는 리머릭 출신이었다. 두 사람 모두 1850년대에 아일랜드 기근을 피해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했다. 어머니가 그가 다섯 살 때 돌아가신 후, 누나 로즈에게서 로마 가톨릭 신앙으로 교육받았다. 그는 아버지 농장이 있던 타운인 로세이의 주립학교에 5년 동안 다녔다. 1886년부터 1893년까지, 14세였던 새비지는 베넬라의 포도주와 증류주 가게에서 일했다. 이 당시 새비지는 베넬라 칼리지에서 야간 수업도 들었다. 키는 작았지만 엄청난 체력을 지녔던 새비지는 권투와 역도 선수로 이름을 날렸으며, 춤과 여러 다른 스포츠도 즐겼다.1891년 새비지는 누나 로즈와 가장 친했던 형 조를 잃는 큰 슬픔을 겪었다. 그는 조의 이름을 따서 그때부터 마이클 조지프 새비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1893년 직장을 잃은 후, 새비지는 뉴사우스웨일스로 이주하여 나란데라에서 7년 동안 노동자와 관개용 수로 파는 일을 했다. 그곳에서 그는 일반 노동자 조합에 가입했고, 나중 그의 정치적 입장에 영향을 미친 미국인 헨리 조지와 에드워드 벨러미의 급진적 정치 이론에 익숙해졌다.[2]
새비지는 1900년 빅토리아로 돌아와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그는 빅토리아주 정치 노동 위원회에서 활동했고, 1907년에는 위원회의 후보로 왕가라타 선거구에 출마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당에서 보증금과 선거 운동 비용을 지원할 수 없게 되자 새비지는 출마를 철회해야 했고, 대신 존 토마스가 출마했다.[2][4][3] 그는 여전히 당의 적극적인 당원으로 남아 있었고, PLC 회원인 패디 웹과 가까운 친구가 되었으며, 이후로도 그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2]
2. 2. 뉴질랜드 이주
러더글렌 (빅토리아주)에서 작별 행사를 마친 후, 새비지는 1907년 뉴질랜드로 이민을 왔다.[4] 그는 1907년 10월 9일 노동절에 웰링턴에 도착했다. 그는 광부, 아마 절단공, 창고 관리원 등 다양한 직업을 거친 후 노동 조합 운동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웨스트 코스트에서 웹과 합류할 계획이었지만, 북쪽으로 이동하여 1908년 오클랜드에 도착했다.그는 곧 알프와 엘리자베스 프렌치 부부와 그들의 두 자녀와 함께 오클랜드에서 하숙을 하게 되었다. 알프는 1894년 ''와이라라파(SS Wairarapa)''호를 타고 뉴질랜드에 왔는데, 이 배는 그레이트 배리어 섬에서 난파되었고, 그는 한 소녀를 구조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결혼하지 않은 새비지는 1939년까지 프렌치 가족과 함께 살았고, 그 후 웰링턴 노스랜드 하버 뷰 로드 64-66번지에 있는 "힐 헤이븐"이라는 집으로 이사했다. 이 집은 나중에 그의 후임 총리인 피터 프레이저가 1949년까지 사용했다.[5] 오클랜드에 도착한 후 그는 한콕 앤드 컴퍼니 양조장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이 양조장은 유대인 가족이 소유했는데, 종교에 관계없이 고용하여 당시 오클랜드 전역에 만연했던 반 아일랜드계 가톨릭 정서를 극복하는 데 새비지를 도왔다. 일을 시작한 직후 그는 오클랜드 양조업자, 와인 및 주류 판매업자, 청량음료 종업원 노동조합에 가입하여 154명의 조합원으로 구성된 노동조합의 회장이 되었다. 그는 오클랜드 무역 평의회의 대표였으며, 1910년에는 무역 평의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3. 정치 경력
새비지는 사회주의 운동을 시작으로 정치 경력을 쌓았다. 초기에는 사회주의적 성향이 약하다는 이유로 뉴질랜드 노동당(1910년) 창당을 반대하고 뉴질랜드 노동연맹 의장을 맡기도 했다.[2] 그러나 이후 통합된 뉴질랜드 노동당 결성을 지지하며 정치 경력의 방향을 전환했다.
1919년 오클랜드 웨스트 선거구에서 노동당 의원으로 당선된 후, 1933년 해리 홀랜드가 사망하자 노동당 대표직을 승계받았다. 1935년 총선에서 노동당을 승리로 이끌며 뉴질랜드 총리 자리에 올랐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새비지는 1938년 사회 보장법 제정을 통해 세계 최초의 사회 보장 제도를 구축하는 등 다양한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영국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며 뉴질랜드를 전쟁으로 이끌었다.
3. 1.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당 창당

사비지는 처음에 사회주의 성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뉴질랜드 노동당(1910년) 창당에 반대했다. 대신 그는 "레드 페드(Red Feds)"로 알려진 뉴질랜드 노동연맹(1909년)의 의장이 되었다.[2] 그곳에서 그는 회의와 그룹 세션을 조직하는 것을 돕고 사회주의 신문인 ''마오릴랜드 워커(Maoriland Worker)''의 배포를 지원했다.
1911년과 1914년 총선에서 사비지는 오클랜드 중앙 선거구의 사회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뉴질랜드 자유당의 앨버트 글로버에게 두 번 모두 2위를 차지하며 낙선했다.[2] 이 기간 동안 사비지는 지역 노조 활동에도 참여하여 오클랜드 양조주, 와인 및 주류 판매업체 및 청량음료 직원 노동조합 회장, 오클랜드 무역 및 노동 협의회 회장, 뉴질랜드 사회민주당 오클랜드 조직자를 역임했으며, 와이히의 파업 광부들을 지원했다.[2]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징병에 반대하며 "인력 징병에 앞서 재산 징병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
사비지는 1916년 7월 통합된 뉴질랜드 노동당 결성을 공개적으로 지지했으며, 1918년에는 전국 부회장이 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최초의 상임 전국 사무총장이 되었다. 1919년에는 노동당 후보로 오클랜드 시의회와 오클랜드 병원 및 자선 구호 위원회에 당선되었다. 그는 1922년까지 자선 구호 위원회에서, 1923년까지 시의원으로 활동했지만, 1927년에 자선 구호 위원회에 재선되어 1935년까지 재임했다.[2]
3. 2. 국회의원 당선과 노동당 대표
세이비지는 1911년과 1914년 총선에서 오클랜드 중앙 선거구의 사회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뉴질랜드 자유당의 앨버트 글로버에게 두 번 모두 패배했다.[2] 이 기간 동안 그는 지역 노조 활동에 참여하여 오클랜드 양조주, 와인 및 주류 판매업체 및 청량음료 직원 노동조합 회장, 오클랜드 무역 및 노동 협의회 회장, 뉴질랜드 사회민주당 오클랜드 조직자를 역임했으며, 와이히의 파업 광부들을 지원했다.[2]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징병에 반대하며 "인력 징병에 앞서 재산 징병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세이비지는 1916년 7월 통합된 뉴질랜드 노동당 결성을 지지했으며, 1918년에는 전국 부회장이 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최초의 상임 전국 사무총장이 되었다. 1919년에는 노동당 후보로 오클랜드 시의회와 오클랜드 병원 및 자선 구호 위원회에 당선되었다. 그는 1922년까지 자선 구호 위원회에서, 1923년까지 시의원으로 활동했지만, 1927년에 자선 구호 위원회에 재선되어 1935년까지 재임했다.[2]

정당 | 선거구 | 임기 시작 | 임기 종료 | 국회 |
---|---|---|---|---|
뉴질랜드 노동당 | 오클랜드 웨스트 | 1919년 | 1922년 | 20대 |
뉴질랜드 노동당 | 오클랜드 웨스트 | 1922년 | 1925년 | 21대 |
뉴질랜드 노동당 | 오클랜드 웨스트 | 1925년 | 1928년 | 22대 |
뉴질랜드 노동당 | 오클랜드 웨스트 | 1928년 | 1931년 | 23대 |
뉴질랜드 노동당 | 오클랜드 웨스트 | 1931년 | 1935년 | 24대 |
뉴질랜드 노동당 | 오클랜드 웨스트 | 1935년 | 1938년 | 25대 |
뉴질랜드 노동당 | 오클랜드 웨스트 | 1938년 | 1940년 | 26대 |
1919년 총선에서 세이비지는 오클랜드 웨스트 선거구에서 노동당 의원으로 당선되어 국회에 입성했으며, 사망할 때까지 그 선거구를 대표했다. 그는 1922년 선거 후 공식적으로 당의 부대표가 되었다.[2] 업무량이 증가함에 따라 1920년 7월 노동당 사무총장과 오클랜드 노동당 대표 위원회 사무총장직에서 사임했다.
1920년대 대부분 동안 세이비지는 노동당의 지지 기반을 도시 노동자들을 넘어 농촌 지역으로 확대하려고 노력했고 농촌 지역을 자주 방문했다. 그는 연금 인상과 보편적 무료 의료 서비스의 주요 옹호자가 되었다.[6] 그는 1926년 가족 수당법 제정의 공로를 인정받았는데, 당시 집권당이었던 개혁당은 세이비지가 앞서 제출했던 세 건의 부결된 법안을 모델로 삼았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했다.[2] 1927년 세이비지와 다른 여러 사람들은 당에 토지 정책을 수정하고 자유 소유권을 인정할 것을 설득했는데, 이는 노동당에 대한 농촌 지역의 지지를 얻는 데 필수적이었다.[2] 1933년 10월 해리 홀랜드가 사망하자 세이비지는 그의 뒤를 이어 노동당 대표가 되었다.
세이비지는 Rātana 교회와의 연합을 조성하는 데 기여했는데, 이 교회는 1930년대에 많은 마오리 추종자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T. W. 라타나가 정계에 진출했을 때 그는 마오리 정책에 대해 추종자들과 상의했던 노동당과 연합했다. 이 협약은 1936년 라타나와 세이비지 간의 회의에서 공식화되었다.[7]
1935년 세이비지는 조지 5세 은혼 기념 메달을 받았다.[8]
3. 3. 뉴질랜드 총리 (1935-1940)
대공황 기간 동안 새비지는 전국을 순회하며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뛰어난 연설가였던 그는 뉴질랜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정치인이 되었고, 1935년 선거에서 노동당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총리직과 함께 외무장관과 원주민부 장관직을 자신에게 임명했다.[9] 1936년 ''위클리 뉴스''는 스펜서 디그비가 찍은 새비지의 전면 사진을 실었는데, 이 사진은 이후 수년간 많은 뉴질랜드 가정에서 액자에 담겨 전시되었다.[10] 선거 직후 정부는 실업자와 빈곤층에게 270000GBP의 "크리스마스 보너스"를 지급했다. 새비지 정부는 또한 임금 삭감을 원상 복구하고, 연금을 확대하고, 농민들의 가격을 보장하고, 통화 가치를 재평가했다.1936년 정부는 방송이 국가에 의해 운영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 결과, 정부의 방송 담당 장관이 임명되었고, 기존의 뉴질랜드 방송 위원회를 폐지하고 새로운 국가 방송 서비스를 설립하는 새로운 법률(1936년 방송법)이 통과되었다. 방송국장이 임명되었고, 장관에게 자문하기 위해 방송 자문위원회가 구성되었다.[11][12] 노동당은 언론을 불신했기에, 언론 보도에만 의존하기보다는 대중이 사건을 듣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라디오를 통해 의회 토론을 방송하려고 특별히 노력했다. 새비지는 초대 장관으로 자신을 임명했다.
1936년 정부는 노사 관계 법률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실시했다. 산업 조정 및 중재법은 법정 최저 임금을 설정하고, 40시간 근무제를 표준화하고, 노조 가입을 의무화했다. 또한 중재 재판소의 권한을 회복하고, 재판소가 일반 임금 명령을 내릴 때 근로자의 아내와 부양 자녀의 필요성을 고려하도록 요구했다.
실업률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었지만, 내각은 실업 구제를 위해 계속 지출했다. 정부는 실업 문제에 대한 보다 영구적인 해결책을 찾기 위해 2차 산업 개발을 추진했다. 마찬가지로 정부는 1936년 5월 3개년 공공 사업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이는 실업자를 위한 구제 노동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공공사업부의 원래 기능인 국가 개발 부문으로서의 역할을 재개했다. 또한 모든 구제 노동자들에게 주당 4GBP의 표준 임금이 지급되었다.
에드워드 8세의 퇴위 문제에도 불구하고, 새비지는 1937년 조지 6세의 즉위식과 동시에 열린 영연방 총리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영국으로 항해했다. 런던에서 새비지는 다른 영연방 총리들과 달리 영국이 국제 연맹을 약화시킨 것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영토들이 외교 정책 및 국방 문제에 대해 제대로 협의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새비지 정부는 (영국과 달리) 독일의 재군비, 중국에 대한 일본의 팽창, 이탈리아의 아비시니아 정복을 신속하게 비난했다. 새비지는 회의에서 영국의 유화 정책을 비판하며 "당신의 정책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평화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앤서니 이든은 "아니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평화가 아닙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대가를 치르더라도 평화입니다."라고 답했고, 새비지는 "평화를 위해서라도 너무 높은 대가를 지불할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다.[13]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그리고 야당인 국민당은 새비지의 입장을 비판했다.[2]

1938년 4월 새비지와 그의 재무장관인 월터 내시는 1935년 선거 공약에 따라 노동당의 사회 보장 제안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W. H. A. 빅커리 목사이자 카이아포이 시장의 제안에 따라 새비지는 정부의 계획을 "실천적 기독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14] 정부가 제안한 사회 보장 법안은 16세 이상에게 지급되는 실업 수당, 일반의, 공공 병원 및 산후 관리까지 확대된 보편적 무료 의료 시스템, 소득에 따라 지급되는 60세 남녀에게 주당 30실링의 노령 연금, 65세부터 지급되는 보편적 연금을 자랑했다.[14]
사회 보장 계획은 국회의원과 공무원 위원회가 법률에 대한 세부 협상과 초안 작성을 수행한 협력적인 노력이었다. 그러나 새비지의 개인적인 참여는 중요했는데, 그가 기본 계획을 결정하고, 원칙과 세부 사항에 대한 노동당 의원단 내의 심각한 의견 차이를 해결하고, 많은 주요 공개 발표와 보장을 하고, 재무부, 뉴질랜드 영국 의사 협회 지부, 그리고 국민당의 반대에 현명하게 대응했기 때문이다.[2] 또한 새비지는 법률에 1939년 4월 1일까지 시행되지 않는다는 조항을 포함시켜 국민당이 1938년 총선에서 승리할 경우 폐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고 주장했다.[2] 제1차 노동당 정부는 인기가 많았고, 더 큰 대중적 지지로 선거에서 쉽게 승리했다. 사회 보장법은 결국 통과되어 서구 세계 최초의 사회 보장 시스템을 구축했다.[2]
1938년 선거 후 11월 3일 첫 노동당 의원단 회의에서 새비지의 비판자이자 내각에서 제외된 것에 대해 분노했던 노동당 차관 존 A. 리[2]는 의원단 반란을 시도했다. 그는 의원단이 기존 내각이나 새비지가 지명한 내각 중 하나를 승인하는 대신 새로운 내각을 선출할 것을 제안했다. 의원들 간의 격렬한 논쟁 끝에 이 제안은 26대 23으로 가결되었다. 그러나 새비지는 투표 결과를 무시하고 내각은 변함없이 유지될 것이라고 언론에 발표했다. 1938년 12월 악명 높은 "리 서한"이 등장했다. 이 서한에는 노동당 지도부의 재정적 정통성과 지나친 신중함에 대한 많은 비판이 담겨 있었다. 이는 널리 알려졌고, 대중들로 하여금 노동당의 일치성에 의문을 갖게 했다. 리는 결국 연례 회의에서 당에서 제명되었다.[2]
새비지는 뉴질랜드를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이끌었고, 영국보다 몇 시간 뒤인 1939년 9월 3일에 공식적으로 나치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15] 웨스트민스터 법령을 비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쟁을 선포할 의무를 느낀 오스트레일리아와 달리, 뉴질랜드는 영국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그리고 영국이 이전의 유화 정책을 버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의미로 그렇게 했다. 뉴질랜드는 이 정책에 반대했었다. 이로 인해 새비지 총리는 이틀 후(병상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16]
4. 사망과 유산
1938년 선거 당시 대장암을 앓고 있던 새비지는 선거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치료를 미뤘다.[2] 1940년 3월 27일 암으로 사망했지만, 3월 초까지 그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사실은 부인되었다.[17]
새비지는 정치에 거의 종교적인 열정을 쏟았으며, 재임 중 사망하여 좌파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복지 정책으로 칭송받은 그의 사진은 많은 노동당 지지자들의 집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18]
그의 국장에는 성심 대성당(힐 스트리트, 웰링턴)에서 거행된 레퀴엠 미사가 포함되었으며, 그 후 그의 시신은 일반 대중의 애도 속에 기차를 타고 오클랜드로 옮겨졌다. 기차는 여러 곳에 정차하여 지역 주민과 고위 인사들이 조문할 수 있도록 했으며, 이 여정은 라디오로 생중계되었다.[19]
그는 처음에는 임시로 개조된 항구 방어포 설치 장소에 매장되었다. 그 후 곧 오클랜드의 세인트 패트릭 대성당의 측면 예배당으로 옮겨졌고, 전국적인 공모전을 통해 베스천 포인트에 기념비적인 묘소와 기념 정원을 건설하는 디자인이 선정되어 그의 영구적인 안식처가 되었다.
새비지는 오클랜드 와이테마타 항 해안가 베스천 포인트에 있는 새비지 기념관에 묻혀 있다.[20] 높은 첨탑이 있는 절벽 위의 영묘로, 광대한 기념 정원과 반사 연못이 앞에 있다. 그의 시신은 석관 아래의 수직 갱도에 안치되어 있다.[21] 1941년 2월, 뉴질랜드 정부는 영묘 디자인 공모전을 열었고, 오클랜드 건축가인 티보르 도너와 앤서니 바틀렛이 우승했다. 1941년 6월에 기념관 건설이 시작되어 1942년 3월에 완공되었고, 1943년 3월에 공식 개장했다.[22]
마이클 조셉 새비지는 뉴질랜드 복지 국가의 설계자로 알려져 있다.[2] 그의 노동당 정부는 전후 합의의 기반을 마련했는데, 이는 완전 고용이 케인스 정책에 의해 유지될 것이며 사회 서비스 시스템이 크게 확대될 것이라는 가정에 기반을 두었다.
그는 학계와 역사가들에 의해 뉴질랜드에서 가장 위대하고 존경받는 총리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23][6] "모든 사람의 삼촌(Everybody's Uncle)"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그의 온화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성격과 웅변가로서의 능력은 그의 정부의 급진적인 정책에 대한 대중의 수용에 크게 기여했다. 새비지는 1999년 ''뉴질랜드 헤럴드(The New Zealand Herald)''에 의해 "세기의 뉴질랜드인(New Zealander of the Century)"으로 선정되었다.[27]
5.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
1911년 선거 | 하원의원 (오클랜드 웨스트 선거구) | 18대 | 뉴질랜드 사회당 | 23.58% | 1,800표 | 2위 | 낙선 |
1914년 선거 | 하원의원 (오클랜드 웨스트 선거구) | 19대 | 사회민주당 | 24.59% | 1,751표 | 2위 | 낙선 |
1919년 선거 | 오클랜드 지방의원 (오클랜드 병원 이사회 선거구) | - | 뉴질랜드 노동당 | 44.54% | 3,993표 | 4위 | |
1919년 선거 | 하원의원 (오클랜드 웨스트 선거구) | 20대 | 뉴질랜드 노동당 | 44.24% | 4,008표 | 1위 | ![]() |
1921년 선거 | 오클랜드 지방의원 (오클랜드 병원 이사회 선거구) | - | 뉴질랜드 노동당 | 42.42% | 6,291표 | 5위 | |
1922년 선거 | 하원의원 (오클랜드 웨스트 선거구) | 21대 | 뉴질랜드 노동당 | 55.42% | 5,649표 | 1위 | |
1925년 선거 | 하원의원 (오클랜드 웨스트 선거구) | 22대 | 뉴질랜드 노동당 | 52.19% | 5,677표 | 1위 | |
1927년 선거 | 오클랜드 지방의원 (오클랜드 병원 이사회 선거구) | - | 뉴질랜드 노동당 | 48.74% | 8,450표 | 3위 | |
1928년 선거 | 하원의원 (오클랜드 웨스트 선거구) | 23대 | 뉴질랜드 노동당 | 47.01% | 5,361표 | 1위 | |
1929년 선거 | 오클랜드 지방의원 (오클랜드 병원 이사회 선거구) | - | 뉴질랜드 노동당 | 54.74% | 10,614표 | 3위 | |
1931년 선거 | 오클랜드 지방의원 (오클랜드 병원 이사회 선거구) | - | 뉴질랜드 노동당 | 77.79% | 13,392표 | 3위 | |
1931년 선거 | 하원의원 (오클랜드 웨스트 선거구) | 24대 | 뉴질랜드 노동당 | 62.93% | 6,442표 | 1위 | |
1933년 선거 | 오클랜드 지방의원 (오클랜드 병원 이사회 선거구) | - | 뉴질랜드 노동당 | 69.14% | 12,852표 | 2위 | |
1935년 선거 | 하원의원 (오클랜드 웨스트 선거구) | 25대 | 뉴질랜드 노동당 | 72.93% | 8,567표 | 1위 | |
1938년 선거 | 하원의원 (오클랜드 웨스트 선거구) | 26대 | 뉴질랜드 노동당 | 75.88% | 11,591표 | 1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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