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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서니 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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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앤서니 이든은 1897년 잉글랜드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1923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외무장관을 역임했으며, 1955년 윈스턴 처칠의 뒤를 이어 영국 총리가 되었다. 총리 재임 기간 중 수에즈 위기를 겪으며 국제적 비판을 받았고, 건강 악화로 1957년 사임했다. 그는 1961년 백작 작위를 받았으며, 197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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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서니 이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42년의 이든
이름로버트 앤서니 이든
작위명초대 에이본 백작
출생일1897년 6월 12일
출생지영국 더럼주, 러시포드
사망일1977년 1월 14일
사망지영국 윌트셔주, 알베디스턴
안장 장소알베디스턴 세인트 메리 교회 묘지
정당보수당
서명Edensig.svg
학력이튼 칼리지
모교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
배우자베아트리스 베켓 (1923년 ~ 1950년, 이혼)
클래리사 스펜서-처칠 (1952년 8월 14일 결혼)
자녀3명, 니컬러스 포함 (베켓과의 사이에서)
아버지윌리엄 이든 경, 제7대 준남작
군 복무
소속 군대영국 육군
복무 기간1915년–1919년
1920년–1923년
1939년 (영토군)
계급소령
부대킹스 로열 라이플 연대
더럼 경보병 연대
참전 전투제1차 세계 대전
솜 전투
메시네 전투
파스샹달 전투
미카엘 작전
백일 공세
훈장군사 십자 훈장
영국 총리
직책영국 총리
임기 시작1955년 4월 6일
임기 종료1957년 1월 9일
국왕엘리자베스 2세
전임 총리윈스턴 처칠
후임 총리해럴드 맥밀런
보수당 대표
직책보수당 대표
임기 시작1955년 4월 6일
임기 종료1957년 1월 10일
당 의장울턴 자작
풀 남작
전임 대표윈스턴 처칠
후임 대표해럴드 맥밀런
영국 부총리
직책영국 부총리
임기 시작1951년 10월 26일
임기 종료1955년 4월 6일
총리윈스턴 처칠
전임 부총리허버트 모리슨 (사실상)
후임 부총리랩 버틀러 (사실상)
영국 귀족원 의원
직책귀족원 의원
신분세속 귀족
작위세습 귀족
임기 시작1961년 7월 12일
임기 종료1977년 1월 14일
전임 의원'작위 창설'
후임 의원제2대 에이본 백작
영국 의회 의원
의회영국
선거구워릭과 리밍턴
임기 시작1923년 12월 6일
임기 종료1957년 1월 10일
전임 의원어니스트 폴록
후임 의원존 홉슨
장관 직책
직책외무장관
임기 시작1951년 10월 28일
임기 종료1955년 4월 6일
총리윈스턴 처칠
전임 장관허버트 모리슨
후임 장관해럴드 맥밀런
임기 시작1940년 12월 22일
임기 종료1945년 7월 26일
총리윈스턴 처칠
전임 장관핼리팩스 자작
후임 장관어니스트 베빈
임기 시작1935년 12월 22일
임기 종료1938년 2월 20일
총리스탠리 볼드윈
네빌 체임벌린
전임 장관새뮤얼 호어
후임 장관핼리팩스 자작
직책하원 원내총무
임기 시작1942년 11월 22일
임기 종료1945년 7월 26일
총리윈스턴 처칠
전임 원내총무스태퍼드 크립스
후임 원내총무허버트 모리슨
직책육군 장관
임기 시작1940년 5월 11일
임기 종료1940년 12월 22일
총리윈스턴 처칠
전임 장관올리버 스탠리
후임 장관데이비드 마게슨
직책자치령 담당 장관
임기 시작1939년 9월 3일
임기 종료1940년 5월 14일
총리네빌 체임벌린
윈스턴 처칠
전임 장관토머스 인스키프
후임 장관콜데코트 자작
직책왕새인장관
임기 시작1933년 12월 31일
임기 종료1935년 6월 7일
총리램지 맥도널드
전임 장관스탠리 볼드윈
후임 장관런던데리 후작
직책외무부 차관
임기 시작1931년 9월 3일
임기 종료1934년 1월 18일
총리램지 맥도널드
전임 차관휴 돌턴
후임 차관스탠호프 백작

2. 어린 시절

앤서니 이든은 1897년 6월 12일 잉글랜드 더럼주 웨스트 오클랜드의 윈들스톤 홀(Windlestone Hall)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보수적인 지주 계급(landed gentry)이었다.[10] 아버지는 윌리엄 에든 경(Sir William Eden), 7대이자 5대 자작이었고, 어머니는 유명한 그레이 가문 출신의 시빌 프랜시스 그레이였다.[10]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이든은 참전하여 이프르 전투(Battle of Ypres)에 참전하기도 했다.[233] 훗날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적국의 수뇌부가 되는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와 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이든은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처치에서 동양어(아랍어페르시아어)를 전공하였다.[233] (1919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동양어학과 중퇴 이후 1932년 명예 학사 학위).

3. 정치 경력

1923년 총선에서 보수당 후보로 당선되었다. 1924년 1월부터 보수당 내각에서 내무장관의 의회 담당 비서관을 역임했고, 1931년 9월에는 외무차관에 취임했다. 1934년 왕실 인장 보관관에 임명되었으며, 1935년 6월 국제연맹 관련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35년 12월 외무장관이 되었으나 1938년 2월 네빌 체임벌린 총리의 나치 독일파시스트 이탈리아에 대한 유화 정책에 반대하며 장관직을 사임하였다.[229] 이후 윈스턴 처칠 등과 함께 독일·이탈리아 강경책을 주장하는 그룹을 형성하게 된다.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체임벌린 전시 내각의 자치령 장관으로 입각했다. 1940년 5월 10일 윈스턴 처칠이 총리가 되자 전쟁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12월 23일부터 1945년 7월까지 다시 외무장관을 지냈다. 외무장관으로서 여러 연합국 회담에 참석했다.

1943년 3월 워싱턴 D. C.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코델 헐 국무장관과 회담을 가졌으며, 이때 루스벨트는 한반도를 미국, 중국, 소련 3국의 신탁통치 후 독립시키는 방안을 제시했고, 이든은 호의적 반응을 보였다.[238]

1951년 처칠 내각에서 다시 외무장관이 되었다. 1954년 영국-이란 간 석유 분쟁, 이탈리아유고슬라비아트리에스테 분쟁을 해결하고, 인도차이나 전쟁 종식과 동남아시아 조약 기구 설립에 기여했다.

3. 1. 총리 재임 (1955년 4월 ~ 1957년 1월)

1955년 4월 6일 윈스턴 처칠의 뒤를 이어 총리에 취임한 이든은 다음 달인 5월 26일 조기 총선을 통해 보수당의 의석을 늘렸다. 1956년 4월에는 니키타 흐루쇼프니콜라이 불가닌인도유고슬라비아를 방문한 후 영국에서 이들을 만났다. 또한, 응오딘지엠이 이끄는 베트남 공화국을 승인하였다.

이든 총리는 재임 중 수에즈 위기를 겪으면서 정치 경력에서 가장 큰 시련을 맞았고, 이로 인해 그의 명성은 크게 손상되었다. 결국 이든은 1957년 1월 9일 건강 악화를 이유로 총리직과 하원 의원직을 사임하였다.

3. 1. 1. 수에즈 위기 (1956년)

1956년 6월 26일 영국 정부가 1875년 이래 주주로 지녀온 수에즈 운하 회사를 이집트의 지도자 가말 압델 나세르가 국유화하였다.[95] 10월 29일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침공하였고, 11월 5일 영국과 프랑스의 특수부대가 수에즈 운하에 투입되었다. (수에즈 위기)[95] 그러나 수에즈 운하에 경제적 이해가 크지 않으면서 동시에 아랍권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우려한 미국의 압력과, 소련의 반발로 12월 22일 영국·프랑스군은 수에즈 운하에서 철수했다.[95]

이든은 11월 8일에 있었던 재신임 투표에서 승리하였으나,[95] 수에즈 위기에서의 실패는 그의 지지를 손상시켰다.[95]

미국과의 동맹은 1956년 7월 가말 압델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이 아스완댐 건설 자금 지원 중단에 따라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면서 균열을 보였다.[95] 이든 총리는 나세르가 1954년 10월 19일 영국과 프랑스 정부와 체결한 영국-이집트 조약을 위반했다고 믿었다.[95] 이러한 견해는 노동당 당수 휴 게이츠켈과 자유당 당수 조 그림몬드도 공유했다.[133] 1956년 수에즈 운하는 연간 1만 5천 척의 선박이 통과하며 서유럽의 석유 공급량의 3분의 2 이상(연간 6천만 톤)을 운송하는 등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134] 이 중 3분의 1은 영국 선박이었고, 운하를 통과하는 모든 선박의 4분의 3은 나토 국가 소속이었다.[134] 당시 영국의 총 석유 매장량은 국유화 당시 6주분에 불과했다.[134] 소련은 유엔에서 나세르에 대한 제재를 확실히 거부할 것이었다.[95] 영국과 다른 국가들의 회의는 국유화 이후 런던에서 열려 외교적 수단을 통해 위기를 해결하려 했지만, 수에즈 운하 회사 이사회에 이집트 대표를 포함시키고 이익을 공유하자는 제안을 포함한 18개국 제안은 나세르에 의해 거부되었다.[135] 이든은 나세르가 유럽에 대한 석유 공급을 차단할 위협이 되는 아랍 동맹을 형성하려 한다고 우려하여 프랑스와 함께 그를 권좌에서 몰아내기로 결정했다.[136]

앤서니 너팅은 이든이 자신에게 "나세르를 고립시키거나 '무력화'하는 것에 대한 이런 헛소리는 뭐지? 난 그를 파괴하고 싶어, 이해가 안 가? 난 그를 죽이고 싶고, 당신과 외무부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내각에 와서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게 좋을 거야"라고 말했다고 회상했다.[138] 너팅이 나세르를 대체할 대안 정부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자, 이든은 "이집트에 무정부 상태와 혼란이 있어도 상관없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138] 1956년 10월 16일 다우닝가 10번지에서 열린 비밀 회의에서 이든은 이틀 전 프랑스가 제출한 계획을 여러 장관들에게 보여주었다.[139]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침공하고, 영국과 프랑스는 양측에게 중단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내고, 한 쪽이 거부하면 최후통첩을 집행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하고, 양측을 분리하며 운하를 점령하고 나세르를 제거하는 계획이었다.[139] 너팅이 미국과 상의해야 한다고 제안하자, 이든은 "나는 미국을 이 일에 끌어들이지 않을 것이다… 덜레스는 이미 충분한 피해를 입혔다. 이것은 미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우리와 프랑스가 무엇을 할지 결정해야 하고, 우리만 결정해야 한다"고 대답했다.[139] 이든은 위기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두 차례의 세계 대전에서의 경험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며,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우리 세대의 낙인이 찍혀 있다. 나의 세대는 사라예보 암살 사건과 그로부터 파생된 모든 것의 세대다. 지금 기록을 읽어보면 우리가 항상 한 발짝 뒤처져 있었다는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항상 한 발짝 뒤처져 있었고, 치명적인 한 발짝이었다"라고 썼다.[140]

이든은 나세르가 운하 장악으로 벗어나는 것을 보면 이집트와 다른 아랍 국가들이 소련에 더 가까워질 것이라고 믿었다.[95] 당시 중동은 서유럽 석유 공급량의 80~90%를 차지했다.[95] 다른 중동 국가들도 석유 산업을 국유화하도록 부추길 수도 있었다.[95] 그는 당시와 1967년 인터뷰에서 침공은 국제 협정의 신성함을 유지하고 미래의 일방적 조약 파기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95] 이든은 위기 동안 BBC를 포함한 언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나세르를 타도해야 한다는 자신의 견해를 지지하도록 여론을 선동했다.[143]

이든[3]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의 재정적 의존성을 무시하고 미국이 가장 가까운 동맹국의 어떤 행동이든 자동적으로 승인할 것이라고 가정했다.[3]

이스라엘은 1956년 10월 말 시나이 반도를 침공했다.[95] 영국과 프랑스는 표면적으로는 양측을 분리하고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개입했지만, 실제로는 운하를 장악하고 나세르를 타도하기 위해 개입했다.[95] 미국은 즉각적이고 강력하게 침공에 반대했다.[95] 유엔은 침공을 비난했고, 소련은 호전적이었으며,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서독, 남아프리카 공화국만이 영국의 입장을 지지했다.[148][149]

이든은 미국 외교 및 재정적 압력과 국내 항의에 굴복하여 영국-프랑스군이 운하의 일부만 점령했을 때 휴전을 선언해야 했다.[95] 미국이 파운드화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철회할 것이라고 위협했고, 내각이 분열되었고, 재무장관 해럴드 맥밀런이 즉각적인 휴전이 선포되지 않으면 사임하겠다고 위협하면서 이든은 엄청난 압력을 받았다.[95] 11월 7일 자정에 휴전이 선포되었다.

1956년 9월, 이든 총리 재임 당시 영국 정부 내각 문서에는 프랑스 총리 기 모레(Guy Mollet)가 영국 정부에 접근하여 프랑스와 영국 간의 경제 및 정치 연합을 제안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162]

4. 이후의 세월

1954년 가터 훈장(KG)을 받았고, 1961년 에이번 백작(1st Earl of Avon)이 되었다. 회고록 3권을 출간했는데, 《완전히 1회전하여》(1960년), 《독재자들을 향하며》(1962년), 《청산》(1965년)이다.

1977년 1월 14일, 윌트셔주 솔즈베리에서 간세포암으로 사망했다.[197] 에든은 총리직에서 물러나면서 하원 의원직도 사퇴했다.[166] 에든은 솔즈베리 경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맥밀런이 총리로서 더 나은 선택이었다는 데 동의하면서도 맥밀런의 키프로스 정책에 대한 그의 사임에 공감했다.[167] 에든은 영국에서 여전히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고 의회 복귀를 고려했다. 여러 보수당 의원들이 그를 위해 자신의 의석을 내놓을 의향이 있었다고 알려졌지만, 당 지도부는 그다지 열의적이지 않았다. 그는 요크셔에서 힘든 연설 순회를 마친 후 1960년 말에 그러한 희망을 포기했다.[166] 맥밀런은 처음에 그에게 자작 작위를 추천하려고 했는데, 에든은 이를 계산된 모욕으로 여겼고, 맥밀런에게 여왕으로부터 이미 자작 작위를 제안받았었다고 상기시킨 후 백작 작위(당시 전직 총리에게 전통적으로 주어지는 작위)를 받았다.[167] 그는 1961년 에이번 백작으로서 상원에 입성했다.[168]

은퇴 후, 에이번 백작(그가 된 이름)은 윌트셔주 브로드 챌크의 에블 강변에 있는 '로즈 바워'에 거주했다. 1961년부터 그는 60마리의 헤리퍼드 소(그중 한 마리는 "처칠"이라는 이름이었다)를 사육했는데, 건강이 더 악화되어 1975년에 이들을 팔아야 했다.[169] 1968년에는 알베디스턴 매너를 사들여 사망할 때까지 거기에 살았다.[170]

1962년 7월, 에이번 백작은 "셀윈 로이드 씨는 끔찍하게 대우받았다"고 말하며 1면 뉴스를 장식했는데, 이는 "긴 칼의 밤"으로 알려진 개각에서 로이드가 재무장관직에서 해임되었을 때였다. 1962년 8월, 한 만찬에서 그는 나이절 버치와 "말다툼"을 벌였는데, 버치는 공군장관으로서 수에즈 사태 당시 전폭적으로 지지하지 않았었다.[171] 1963년, 에이번 백작은 처음에는 헤일셤을 보수당 지도자로 지지했지만, 그 후 타협 후보로 더글러스-홈을 지지했다.[172]

1945년부터 1973년까지 에이번 백작은 버밍햄 대학교의 총장을 역임했다. 1966년 한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그는 미국에 북베트남 폭격을 중단하고 "하노이가 받아들일 수도 있는" 평화 계획을 개발하는 데 집중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북베트남 폭격이 남베트남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반대로, 폭격은 고통을 겪어야 하는 어떤 나라에서도 다윗과 골리앗 같은 복합적인 문제를 만들어냅니다. 우리가 그랬고, 제 생각에는 독일도 지난 전쟁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라고 선언했다.[95] 에이번 백작은 1973년에 처음 방송된 템스 텔레비전 제작물인 ''세계 대전''에 대한 광범위한 인터뷰에 참여했다. 그는 또한 1969년 마르셀 오필의 다큐멘터리 ''슬픔과 연민''에 자주 출연하여 더 넓은 지정학적 맥락에서 프랑스 점령에 대해 논의했다. 그는 완벽한 프랑스어(사투리가 약간 섞이긴 했지만)를 구사했다.[173]

에이번의 가끔 있는 기사와 1970년대 초의 텔레비전 출연은 거의 완전한 은퇴에 대한 예외였다.[174] 그는 다른 전직 총리들(예를 들어, 시사 문제에 대해 자주 논평했던 제임스 캘러헌과 같은)과 달리 공개적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175] 그는 1975년 보수당 지도자가 된 마거릿 대처가 보수당 총리 명단에서 실수로 빠뜨리기도 했지만, 그녀는 나중에 에이번 백작, 그리고 나중에는 그의 미망인과의 관계를 맺기 위해 특별히 노력했다.[175] 은퇴 후 그는 수카르노인도네시아와 같이 이전 식민 지배자의 자산을 몰수한 정권을 매우 비판했으며, 1920년대에 주장했던 우익적 견해로 다소 회귀한 것으로 보인다.[176]

에이번 경은 셀윈 로이드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정보 공개 및 인터뷰에 응할 작가와 시기를 조율했다. 영국이 프랑스와 이스라엘과 공모했다는 소문은 1957년 초부터 왜곡된 형태로 돌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이르러 그들은 로이드가 에이번 경 사후에야 자신의 이야기를 밝히기로 합의했다.

에이번 경은 특히 아이젠하워가 처음에 영국과 프랑스군이 포트사이드 주변에 남아 있도록 허용한다는 뜻을 밝혔다가, 미국 대사 헨리 캐벗 로지 주니어가 유엔에서 즉각 철수를 압박하여 작전이 완전히 실패한 것에 대해 매우 분개했다. 에이번 경은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예상치 못한 반대가 1953년 이란 쿠데타와 1954년 과테말라 쿠데타를 고려할 때 위선적이라고 생각했다.

에이번 백작은 3권의 정치 회고록을 출판하여 프랑스와 이스라엘과의 공모는 없었다고 부인했다. 처칠과 마찬가지로 에이번 경은 젊은 연구원들의 고스트라이터에 크게 의존했는데, 그들의 초고를 때로는 자신의 서재 밖 화단에 화가 나서 집어던지기도 했다. 그중 한 명이 젊은 데이비드 딜크스였다.

그의 견해로는, 그가 특히 싫어했던 미국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가 수에즈 사건의 불운에 책임이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기 불과 3주 전인 10월 기자 회견에서 덜레스는 수에즈 운하 문제를 식민주의와 결부시켰고, 그의 발언은 이든과 영국의 많은 사람들을 격분시켰다. 이든은 "나세르의 운하 장악을 둘러싼 분쟁은 물론 식민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국제적 권리와 관련된 문제였다"라고 썼다. 그는 "미국이 파나마 운하에서의 조약상 권리를 방어해야 한다면, 그러한 행동을 식민주의로 간주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그의 솔직하지 못한 태도는 그의 명성을 더욱 떨어뜨렸고, 말년의 주된 관심사는 수에즈 사건으로 심각하게 손상된 명성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었으며, 때로는 자신의 관점을 보호하기 위해 법적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에이번 경은 미국이 자신을 철수하도록 강요한 것에 대해 비난했지만, 이스라엘-이집트 국경 순찰에 대한 유엔의 행동에 대해서는 공을 세웠다고 생각했다. 이든은 침략에 대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평화는 전쟁을 막지 못했다. 우리는 전쟁 전 시대의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평화와 질서의 적들이 선의만 가지고 무장한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1967년 인터뷰에서 이 사건을 회상하며 에이번 경은 "나는 여전히 수에즈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1930년대와 유사한 점이 있다. 만약 사람들이 벌칙 없이 합의를 깨도록 허용한다면, 그러한 것들을 먹고 사는 욕심이 커진다. 내가 다른 무엇을 해야 했는지 모르겠다. 회피할 수는 없다. 회피하기보다는 행동하는 것이 어렵다"라고 선언했다. 그의 1967년 인터뷰(그는 사후에만 사용될 것이라고 명시했다)에서 에이번은 프랑스와의 비밀 거래와 이스라엘 공격에 대한 "암시"를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공동 기업과 그에 대한 준비는 그것[영불 침략]이 막고자 했던 잘못된 점들을 고려할 때 정당화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든은 "나는 사과할 것이 없다"라고 선언했다.

은퇴 당시 이든은 돈이 부족했지만, 회고록에 대한 선금으로 ''타임스''지로부터 100000GBP를 받았고, 그 이상의 이익은 자신과 신문사가 나누기로 했다. 1970년까지 그것은 그에게 185000GBP(2014년 가격으로 약 300만파운드)를 가져다주었고, 그의 생애 처음으로 그를 부유하게 만들었다. 말년에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개인적인 회고록인 ''Another World''(1976)를 출판했다.

앨베디스턴(Alvediston)의 세인트 메리 교회 묘지


1976년 12월, 에이번 경은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여행을 가서 에버렐과 파멜라 해리먼과 함께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보낼 만큼 건강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미국에 도착한 후 그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제임스 캘러헌 수상은 이미 미국에 있던 영국 공군(RAF) 비행기를 마이애미로 돌려 에이번 경을 본국으로 돌려보냈습니다.[196]

에이번 경은 1977년 1월 14일 79세의 나이로 윌트셔(Wiltshire)의 그의 집인 앨베디스턴 매너(Alvediston Manor)에서 뼈와 종격동 림프절로 전이된 전립선암으로 사망했습니다.[197] 그의 유언장은 3월 17일, 성 패트릭의 날에 공개되었고, 그의 재산은 92900GBP(1977년 기준)였습니다.[199]

그는 윌트셔(Wiltshire) 앨베디스턴(Alvediston)의 세인트 메리 교회 묘지에 묻혔는데, 로즈 바워(Rose Bower)에서 에블 강(River Ebble)의 발원지까지 약 4.83km 상류 지점에 있습니다. 에이번 경의 서류는 버밍햄 대학교 특별 소장품에 보관되어 있습니다.[200]

사망 당시 에이번 경은 처칠의 전시 내각의 마지막 생존자였습니다. 에이번 경의 생존 아들인 니콜라스 에든, 에이번 제2백작(1930~1985)은 1961년부터 1977년까지 에든 자작(Viscount Eden)으로 알려졌으며, 마거릿 대처 정부에서 장관직을 역임하다가 54세의 나이로 AIDS로 사망했습니다.[201]

5. 가족

Beatrice Beckett영어과 1923년 11월 5일에 결혼하여 세 아들을 두었으나, 1950년에 이혼했다.[180][233]

이름출생사망비고
사이먼 가스코인 (Simon Gascoyn영어)1924년 11월 13일1945년 6월 23일제2차 세계 대전 버마 전선에서 전사[233]
로버트1928년 10월1928년 10월 (출생 15분 후)출생 15분 후 사망[181]
니콜러스 (Nicholas영어)1930년 10월 3일1985년 8월 17일제2대 에이번 백작[181][233]



결혼 생활은 원만하지 못했으며, 양측 모두 혼외 정사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1930년대 중반부터 에든의 일기에는 비아트리스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다.[182] 1945년 아들 사이먼이 전사하면서, 이들의 결혼은 결국 파경을 맞았다.[183] 에든은 아들의 죽음을 "정치적 자본화" 시도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7월 26일 선거 결과 발표 후까지 이 소식을 공개하지 않으려 했다.[183]

1946년부터 1950년까지 아내와 별거하는 동안, 에든은 비티 백작 데이비드의 아내인 도로시 비티 백작 부인과 공공연한 관계를 맺었다.[184]

1952년 8월 14일, 윈스턴 처칠의 조카딸인 클라리사 스펜서-처칠(Clarissa Spencer-Churchill영어)과 재혼했다.[185][233] 명목상 로마 가톨릭 신자였던 그녀는 이혼남과의 결혼으로 가톨릭 작가 이브린 워에게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185] 클라리사와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6. 평가

이든은 예의 바르고 단정하며 잘생긴 외모로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일부 동시대인들은 그가 깊은 신념이 부족한 피상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오스왈드 모즐리 경은 이든의 능력이 해롤드 맥밀런과 올리버 스탠리보다 훨씬 열등하다고 느꼈다.[202] 1947년, 딕 크로스먼은 이든을 "신념 없는 이상주의자라는 특이하게 영국적인 유형"이라고 불렀다.[203]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이든을 영국 기득권층의 전형적인 매우 구식 아마추어 정치인으로 여겼다.[3] 반대로, 소련 지도자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수에즈 위기까지 이든이 "세계 최고 수준"에 있었다고 말했다.[204]

이든은 의회 입성 초기에는 스탠리 볼드윈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는 수사학과 당의 점수 매기기보다는 합리적인 논쟁과 합의 구축에 크게 의존하는 저조한 연설 스타일을 갈고닦았는데, 이는 하원에서 종종 매우 효과적이었다.[205] 그러나 그는 항상 효과적인 연설가는 아니었고, 네빌 체임벌린 정부에서 사임한 후와 같이 추종자들 중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키기도 했다. 윈스턴 처칠은 한때 이든의 연설 중 하나에 대해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를 제외한 모든 클리셰를 사용했다고 언급했다.[111] 이든은 종종 연설 초고에서 독창적인 구절을 삭제하고 클리셰로 대체했다.[206]

이든이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표현하지 못한 것은 종종 수줍음과 자신감 부족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는 내각 회의와 공개 연설보다 비서와 고문과의 회의에서 훨씬 더 직접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때때로 격분하여 "아이처럼" 행동하는 경향이 있었고,[207] 몇 분 안에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3] 그를 위해 일했던 많은 사람들은 그가 "두 인격"이라고 말했다. 하나는 매력적이고, 박식하며, 성실했고, 다른 하나는 사소하고 화를 잘 내는 경향이 있어서 부하들을 모욕했다.[208]

수상으로서 이든은 오전 6시부터 장관과 신문 편집자에게 전화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수에즈 위기 동안 이든의 전화 중독은 모든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209]

이든은 더 어더 클럽에 가입하지 않음으로써 처칠을 불쾌하게 했다. 그는 아테네움 명예 회원직도 거절했다.[182] 그러나 그는 야당 의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예를 들어, 조지 토마스는 그의 계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든으로부터 친절한 편지를 받았다.[210] 이든은 1935년부터 1949년까지 국립미술관의 이사였으며, 페르시아 시와 셰익스피어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211]

에이. 제이. 피. 테일러는 1970년대에 이든이 평화 조정자로서의 명성을 파괴하고 대영제국을 역사상 가장 큰 굴욕 중 하나로 이끌었다고 평가했다.[213] 전기 작가 D. R. 소프는 이든의 네 가지 목표는 운하 확보, 운하의 개방 유지 및 석유 수송 지속 확인, 나세르 축출, 소련의 영향력 확산 방지였다고 말한다. "이 위기의 직접적인 결과는 수에즈 운하가 봉쇄되고, 석유 공급이 중단되고, 나세르의 아랍 민족주의 지도자로서의 지위가 강화되었으며, 러시아가 중동에 개입할 길이 열렸습니다." [214][215]

마이클 풋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다르다넬스 해협 공격에 대한 의회 조사와 같은 특별 조사를 촉구했지만, 해롤드 윌슨은 그 문제를 곤란한 문제로 여겼다.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아랍 군대를 패배시킨 후 이든은 자신이 옳았다는 많은 편지를 받았으며, 특히 이스라엘과 미국에서 그의 명성은 급상승했다.[134][216] 1986년 이든의 공식 전기 작가 로버트 로즈 제임스는 수에즈에 대한 이든의 입장을 동정적으로 재평가했고[217]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후 제임스는 "이제 누가 이든이 틀렸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했다.[218]

이든의 개인 비서 중 한 명인 가이 밀라드는 이든이 나세르, 이집트, 운하, 심지어 중동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했다고 말했다.[141]

최근 전기들은 이든의 외교 정책 업적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으며, 그가 세계 평화와 안보에 대한 깊은 신념과 강한 사회적 양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인식한다.[7]

6. 1. 긍정적 평가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윈스턴 처칠의 측근으로 활약하며 연합국의 승리에 기여했다.[3] 전후 영국의 외교 정책을 주도하면서 국제연합 창설과 냉전 초기 서방 진영 결속에 공헌했다.[115] 특히 1954년 제네바 회담에서 인도차이나 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125]

이든은 예의 바르고 단정한 이미지로 대중적 지지를 얻었지만, 일부 동시대인들은 그가 깊이가 부족하고 실용주의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202] 딕 크로스먼은 그를 "신념 없는 이상주의자"라고 묘사했다.[203] 반면,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수에즈 위기 이전까지 이든을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평가했다.[204]

그는 합리적인 논쟁과 합의를 중시하는 연설 스타일을 발전시켰으며, 국립미술관 이사를 역임하는 등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다.[211] 그러나 때로는 수줍음과 자신감 부족으로 인해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표현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206]

최근 전기들은 이든의 외교적 업적을 재조명하며, 그가 세계 평화와 안보에 대한 깊은 신념과 강한 사회적 양심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평가한다.[7]

6. 2. 부정적 평가

수에즈 위기 당시 이스라엘, 프랑스와 비밀리에 이집트를 침공하여 국제적 비난을 초래했다.[232] 이 위기로 대영제국의 몰락을 가속화했다는 비판을 받는다.[232] 유화 정책에 대한 미온적 태도 역시 비판의 대상이었다.

가말 압델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에 대해, 이든 총리는 프랑스, 이스라엘과 협력하여 나세르 정권 타도와 수에즈 운하 지배권 유지를 위한 군사 개입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는 미국과 소련의 비난과 유엔의 제재를 초래했고, 결국 영국과 프랑스는 아무런 성과 없이 휴전에 합의해야 했다.[232] 이집트에 있던 영국과 프랑스의 자산들은 국유화되었고, 서유럽 국가들의 식민주의의 실질적인 종말을 알리는 사건이 되었다.[232]

이든의 수에즈 위기 대처 실패는 이권 상실과 막대한 전비 지출로 파운드화 가치 하락을 초래하여 경제력 저하를 불러오는 등, 대영제국 몰락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에이. 제이. 피. 테일러는 1970년대에 이든이 평화 조정자로서의 명성을 파괴하고 대영제국을 역사상 가장 큰 굴욕 중 하나로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든이 성급하고 충동적으로 행동했으며, 나세르를 두 번째 히틀러로 비난하며 국제연합을 무시했다고 비판했다.[213]

이든의 개인 비서였던 가이 밀라드는 이든이 나세르, 이집트, 운하, 심지어 중동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했다고 말했다.[141]

7. 추가 정보

앤서니 이든은 뛰어난 패션 감각으로 유명했으며, 특히 그가 즐겨 착용하던 험버그(homburg) 스타일의 모자는 '앤서니 이든 모자'라는 이름으로 유행하기도 했다.[93]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앤서니 이든을 공개적으로 "유럽에서 가장 잘 차려입은 바보"라고 조롱하기도 했다.[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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